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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24의 게시물 표시

자작시: 자서전(自敍傳)

  자서전(自敍傳) 재미없는 인생이야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래 진실과 거짓의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무언가를 써야 하지 솔직하게 쓰자는 마음가짐은 무익해 그런데 쓰고 싶은 이야기가 딱히 없거든 글 쓰는 사람이 뭐 팔아먹을 이야깃거리 하나쯤 있어야 하는데 쇠고기의 양지머리처럼 뭉근히 우려내어서 국을 끓일 수도 없고 참으로 인생이란 우습고도 눈물이 나 찔끔 예정된 죽음의 시간 또박또박 내게로 걸어오지 꼬깃꼬깃 구겨진 마음 잊어버리자 되뇌지만 꼭 만나야 하는 너처럼 그 순간이 오고야 말 테지 문이 열린 차의 조수석 늙고 아픈 노인은 입을 벌리고 단잠에 빠져 있어 건너편의 놀이터에는 분홍색 옷을 입은 조그만 아이가 엄마를 향해 웃으며 달려가 봄의 마지막 날 포플러 나무의 휘어지는 손짓 자서전의 가운데 페이지를 가리킨다  

자작시: 꿈의 자객(刺客)

  꿈의 자객(刺客) 뱀눈의 남자는 암만 봐도 무서워 겁먹지 않은 것처럼 짐짓 태연한 척하지만 결국 눈을 떠버리지 하루 종일 꾸물거리는 흐린 날 하수구로 시어진 포도주 냄새가 올라와 나는 그걸 죽음의 냄새라고 생각해 이 집으로 이사 오고 그 이듬해, 윗층의 젊은 아가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아주 오래전 일이야 어떤 죽음은 기억의 둥지에 철끈을 매고 기다리지 할머니는 나쁜 꿈을 꾸면 액운을 내어 쫓는다며 새벽 마당 바닥에 날이 반듯하게 선 칼을 세게 내려치곤 했지 나에게는 잘 들지 않는 칼이 세 자루 있을 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뱀눈의 남자와 싸우는 수밖에 없겠어 사박사박 숫돌에 칼을 갈고 꿈으로 길을 떠나

자작시: 바람의 원(怨)

  바람의 원(怨) 하루종일 나무는 몸을 뒤틀며 앓았다 끅끅거리는 울음소리는 퍼렇게 날이 서 있다 무도(無道)한 세상의 비뚤어진 웃음 구겨진 너의 넋을 반듯하게 펼 수 없구나 원(怨)으로 채워진 커다란 바람이 작은 창문으로 미어지게 들어온다 가난하고 힘없는 작은 아이야 사뿐사뿐 가거라 가여운 눈물이 마르기 전에 얼른 바스러지는 봄의 바람을 타고  

자작시: 노을이 있는 부엌

  노을이 있는 부엌 저녁 7시 45분 어제 내린 빗물의 때 흐린 부엌 창문으로 흐르는 누추한 노을을 바라본다 노을이 붉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모르는 많은 것들이 흐트러지는 노을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네온사인 간판이 끔뻑거리며 생소한 눈인사를 건넨다 멀고 먼 저 간판의 가게는 무얼 하는 곳일까 나이트클럽일 리는 없다 쇠퇴하는 구도심의 한 켠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관광호텔은 이제 폭파를 앞두고 있다 경양식집 같은 게 남아 있을 리가 없지 넙데데한 노란 돈까스와 곱게 채 썰어진 양배추 그런 식당이 아니라면 병원일지도 모른다 24시간 문을 여는 정형외과는 장사가 잘된다고 들었다 밤의 혓바닥으로 삼켜지는 노을을 지켜보며 오도독 호두를 씹다가 탈각이 덜 된 껍질이 쿡, 찌르며 표독스럽게 말했다 이제 그만 창문을 닫으렴     

자작시: 밤의 고양이

  밤의 고양이 너에게로 가는 길은 멀고도 길다 지쳐버린 몸을 늦은 밤 낡은 소파가 가만히 삼킨다 새벽 2시 33분 아픈 눈이 떠진다 익숙하고 역겨운 밤의 고양이들 애타게 짝을 찾는 울음을 토해내며 나오너라 너는 어디에 있느냐 나 없이도 순전한 행복으로 웃음을 흘리는 너를 잊어야 하지만 울음소리를 삼키는 후덥지근한 초여름 밤 고양이들은 그렇게 짝을 찾아 떠났다

자작시: 이상한 화분(花盆)

  이상한 화분(花盆) 해마다 여름이면 집 앞 공터에 나타나는 화분 하나가 있다 연갈색 토기의 길다란 이 화분에는 이름 모를 풀때기가 자란다 방울토마토도 오이도 가지도 아닌 비쩍 마른 녹색의 식물은 가을이 되면 시들어 버린다 그리고 화분은 사라진다 무익함과 볼품없음 열매를 남기지 못하는 모든 것들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내 생각엔 그래 인생이란 말이야 자기 씨앗 하나 남기는 거야 늙은 소설가 선생님은 인생의 의미를 그렇게 말해주었다 평생 가정에 안주하지 못하고 떠돌았던 그는 자식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했다 그가 쓴 소설과 시가 뙤약볕에 외롭게 누워있다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이상한 화분의 삶    

자작시: 흑백(黑白)의 세계

  흑백(黑白)의 세계 남자는 제법 날렵한 체격으로 경쾌한 걸음걸이 중세의 궁수처럼 등 뒤에는 배드민턴 라켓 두 개가 삐죽 탈모가 진행되는 머리 중년의 나이에는 생기라는 것이 없다 그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여자는 자신의 나이를 패션으로 감추지 않는다 재킷의 벨트는 충만한 뱃살과 함께 춤춘다 화단의 회양목 잎사귀들을 좌르르 훑으며 걷는다 어리고 푸른 것들에게는 젊음의 가시가 있고 돋아나는 향기가 있다 갈라지는 풍경 흑백의 세계 미친듯이 뿜어져 나오는 나의 흰머리와 자꾸만 가려운 왼쪽 눈가에 가만히 잠든 검버섯을 만져보았다

영화 '시크릿 네임(La Place d'une autre, 2021)'의 숨겨진 이야기

  *이 글에는 영화 '비밀과 거짓말: 시크릿 네임(2021)'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1. 밑바닥 인생 넬리의 선택   케이블 방송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채널은 국회방송(NATV)입니다. 외국의 다양한 다큐는 물론 괜찮은 영화도 방영합니다. 특히 '다양성 영화관'이라는 프로그램이 눈길을 끕니다. 주로 제 3세계 영화들, 아시아권을 비롯해 유럽 변방 국가의 영화들을 선정해서 틀어주거든요. 그 영화들의 작품성이 균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일반 시청자들이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특색있는 영화들을 틀어준다는 데에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 국회방송에서 방영한 프랑스 영화 '시크릿 네임(La Place d'une autre, 2021)' 도 흥미로웠습니다.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좀 길어요. '비밀과 거짓말: 시크릿 네임'이 한국어 제목이고, 영어 제목은 'Secret Name'이죠. 프랑스어 제목 'La Place d'une autre'은 번역을 해보면 '타인의 장소'가 되더군요. 제목부터 번잡스럽고 뭔가 의문을 품게 만드는군요.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다른 사람 행세를 하거든요. 영화의 초반부만 보면, 약간의 스릴러 느낌도 있구요. 자, 그럼 영화 '시크릿 네임'의 주인공은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죠.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10년대, 여자 주인공 넬리는 고아입니다. 하녀 생활을 하던 넬리는 주인집 남자의 추근거림을 견디지 못하고 나옵니다. 하층민 고아 여성의 삶은 고단할 수 밖에 없지요. 별다른 일자리를 얻지 못한 넬리는 길바닥에서 구걸하는 신세가 됩니다. 그런 넬리에게 적십자사의 여성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요. 넬리는 간호사의 일을 배우고, 전장에 파견됩니다. 1차 세계 대전이 터졌거든요.   전쟁터는 매우 참혹한 곳이지요. 그렇...

자작시: 유령거미의 죽음

  유령거미의 죽음 너를 죽이려던 건 아니었는데 침침한 부엌 전등 아래 나는 네가 밥찌끄러기인 줄 알았더랬지 그런데 움직이더라 순간 딱, 하고 널 때려버렸지 뭐야 해녀들은 물질하기 전에 거미를 보면 살려준다더군 어쩌면 나에게는 널 살릴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 같아 목숨 걸고 들어갈 바다도 없고 가려운 눈 부어터지게 울을 옛사랑도 없고 세상에 남길 다이너마이트 같은 글도 없으니 다만, 이 오롯한 밤 너 유령거미의 죽음을 시로 써 남긴다 *물질: 주로 해녀들이 바닷속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따는 일  

자작시: 로부스타(Robusta)의 맛

  로부스타(Robusta)의 맛 싸구려 커피에서는 베트남 로부스타(Robusta)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강하고 날카로운 쇠맛의 커피 1퍼센트에 해당하는 아주 비싼 커피의 맛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앞으로도 모르고 살아갈 것 같다 연봉 6억의 전문직 친구와 시를 쓰는 무명 글쟁이의 차이가 단지 걔는 나보다 수학을 조금 더 잘했을 뿐이었다, 고 생각하면 참으로, 너무나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엥겔 계수 90퍼센트는 극빈층의 삶에 해당하지만 예술가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지 기후 변화로 올해 베트남 커피 농사가 흉작이라는 소식을 들으니 머리가 무거워지는군 거친 쇳기의 커피 로부스타 인생을 음미하도록 하자  

클레어의 카메라(Claire's Camera, 2018): 홍상수의 진심, 혹은 내밀한 일기

    만희(김민희 분)는 영화사 직원입니다. 만희는 지금 칸(Cannes)에 머물고 있어요. 영화사의 일 때문에 출장을 온 거죠. 한창 바쁘게 일하던 만희는 상사인 양혜의 호출을 받습니다. 카페에서 만희와 마주앉은 양혜는 만희의 해고를 통보합니다. 양혜는 만희가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함께 일할 수 없다고 말하지요. 만희는 자신의 어떤 점이 정직하지 않은 것이냐고 묻지만, 양혜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만희는 상사의 말대로 정말 정직하지 못한 사람일까요? 도대체 상사 양혜는 무슨 이유로 5년 동안 함께 일해온 부하 직원 만희를 해고한 것일까요?   홍상수의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Claire's Camera, 2018)'는 낯선 타국의 휴양지에서 그렇게 해고 통보를 받은 만희의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만희의 이야기라고 하기도 그렇군요. 만희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라고 해두죠.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클레어(이자벨 위페르 분)의 카메라를 통해 전달됩니다. 클레어는 칸에 온 관광객인데 우연히 만희와 만나게 됩니다. 클레어의 우연한 만남은 만희의 상사 양혜, 영화감독 소완수와도 이어지고요. 홍상수의 영화에서 '우연'이 이야기에 색을 입히고, 그 얼개를 짜임새 있게 만드는 건 하나의 공식 같아요. '클레어의 카메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과연 만희가 해고당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양혜가 만희를 해고한 다음의 시퀀스에 그 답이 들어있습니다. 양혜와 영화감독 소완수는 칸의 해변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죠. 양혜는 만희가 소완수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소완수는 양혜가 영화사 대표로서 후원하는 감독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두 사람은 연인 사이입니다. 소완수는 양혜에게 만희와의 일이 술에 취해서 저지른 실수라고 말해요. 그는 앞으로 그런 실수는 없을 거라는 다짐도 합니다.  클레어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것이 취미입니다. 곧 ...

자작시: 다정한 사막

  다정한 사막 그곳에 갔었지 한 발짝 디딜 때마다 모래가 눈동자를 먹어버리는 곳 사이드와인더(sidewinder)의 삼각뿔 눈썹이 저 멀리에서 아주 선명하게도 보이더군 맹독의 독사는 아주 조심해야지 물리는 건 한순간이지만 죽으면 영원으로 갈 수 있으니 눈을 감으면 너의 희고 고운 손이 떠올라 모래가 사부작거리며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지 달구어진 모래에 발이 타들어 가 개미귀신이 파놓은 깔때기가 한없이 아래로 꺼지고 있었지 줄줄이 사탕처럼 개미들이 그 입속으로 그렇게 안녕, 너에게 하고 싶은 말도 함께 신기루인가 멀리서 여우가 나타났어 사막에 여우가 살고 있었어 뾰족한 입에는 전갈을 물고 커다랗고 하얀 귀는 쉴 새 없이 펄럭였지 가만, 여우의 입매가 너의 입술을 닮은 것도 같아 아무리 달음질을 해도 여기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해 부정맥에 걸린 모래 언덕은 그리운 비탄을 불규칙하게 삼키고 또 토해내지 너무나 다정한 너의 사막

영화 '팔도강산(Paldogangsan)' 연작: 개발독재(開發獨裁) 시대의 프로파간다(propaganda) 영화

  팔도강산(Paldogangsan, 1967) 속 팔도강산(The Land of Korea, 1968) 내일의 팔도강산(Tomorrow's Scenery of Korea, 1971) 1.   유선방송의 'KTV 국민방송'은 국정홍보 채널입니다. 그 채널의 대부분을 채우는 프로그램은 '우리 정부는 아주 잘 해내고 있다'를 선전하고 있죠. 그렇다고 정권 홍보물만 만들어 방영하는 건 아닙니다. 흘러간 옛날 드라마나 한국 영화도 틀어줍니다. 얼마 전에 KTV에서 한국 영화 '팔도강산' 시리즈 를 방영하더군요. 영화 '팔도강산' 연작은 박정희 정권의 국정 홍보 영화로 시작되었는데, 의외로 흥행에 성공하면서 시리즈물로 나오게 되었죠. 이후에 '팔도'라는 제목이 들어간 한국 영화 제작 붐을 일으킬 정도였으니까요. 자, 그렇다면 그 원조 격인 영화 '팔도강산' 초창기 3부작에 어떤 재미가 있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팔도강산' 3부작의 주인공은 김희갑, 황정순 부부와 그 자녀들입니다 . 노부부의 자식들은 모두 결혼해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어요. 부부는 자식들이 사는 모습을 살피려 여행을 떠납니다. 1편에 해당하는 1967년의 '팔도강산'은 부부의 국내 유람 편을 담고 있구요. 부부의 자식들은 각자 다양한 일에 종사하는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는 모습은 모두 한국의 산업화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요. 말하자면 그들은 경제발전에 일조하는 충실한 산업 역군인 셈입니다. 그 모습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도 맞물려 있죠. 이 영화의 제작사가 '국립영화제작소'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팔도강산(1967)'은 나름 유쾌한 프로파간다 영화입니다 . 그것이 그 이듬해에 제작된 '속 팔도강산(The Land of Korea, 1968)' 에 이르러...

성혜의 나라(The Land of Seonghye, 2020): MZ세대의 좌절감과 불편한 진실

  *이 글에는 '성혜의 나라(2020)'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9살, 아직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성혜의 삶은 무척 고달픕니다. 신문 배달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죠. 성혜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 중이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합니다. 얼마 안 되는 수입에서 부모님께 용돈도 보내드리는 착한 딸이 성혜입니다. 성혜에게는 오래 사귄 남자 친구 승환도 있습니다. 승환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죠. 남자 친구가 좀 의지할만한 사람이면 좋겠는데, 승환이 가난한 부모 탓이나 하는 말을 들으면 좀 철딱서니가 없어요. 자, 어떤가요? 이 두 연인의 앞날이 그려지나요? 정형석 감독의 '성혜의 나라(The Land of Seonghye, 2020)'는 소위 가진 것 없는 흙수저 MZ세대의 우울한 초상을 보여줍니다.   흑백 화면으로 펼쳐지는 성혜의 일상은 숨돌릴 틈도 없이 팍팍합니다. 신문 배달을 하러 나가서는, 원치 않는 신문을 넣었다고 주민의 항의를 받습니다. 신문 보급소에서 준 스쿠터는 고장 나기 일쑤죠. 편의점에서는 어떤가요? 매번 라면 먹고 그릇을 치우지도 않고 나가는 고등학생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합니다. 그런 성혜의 끼니는 삼각김밥입니다. 편의점에서 폐기해야 하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이죠. 성혜는 남자친구와 모텔에 가서도, 무료로 제공되는 세면도구를 알뜰하게 챙겨서 남자친구에게 줍니다. 그런 성혜에게 유일한 위로가 있다면 가끔 지나치는 애견 가게의 진열장에서 귀여운 강아지를 보는 것입니다. 성혜는 휴대전화로 강아지가 노는 것을 찍습니다.   성혜의 삶이 이렇게 고달파진 건 과거의 그 사건에서부터였습니다. 성혜는 틈틈이 입사 원서를 넣으며 취직하려고 애를 쓰죠. 그런데 전의 직장에서 인턴을 하다 그만 둔 이력이 발목을 붙잡습니다. 면접관은 성혜에게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죠. 성혜는 인턴 때 회식 자리에서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그 일을 고발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자작시: 자개장

  자개장 며칠 전부터 그 자개장은 쏟아지는 햇빛을 하릴없이 맞고 있었다 언제 적 자개장 이냐 엄마가 시집올 때 해왔던 자개장을 버린 게 언제더라 그 자개장하고 비슷하게 생긴 자개장 이제 그렇게 품이 많이 드는 자개장을 만드는 사람도 없다는데 아니, 자개장을 찾는 사람들이 먼 시간 속으로 가버려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은색과 연보라색 회색이 섞인 자개 무늬 공작이 애처롭게 눈웃음을 짓지만 나는 공작새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서 그저 가만히 새의 깃털을 어루만져 주고 뒤돌아섰다

자작시: 비의 향수(香水)

  비의 향수(香水) 인도의 어느 지방에서는 비가 온 뒤의 흙으로 향수(香水)를 추출한다 비가 온 뒤에 걸쭉해진 땅의 진흙을 수백 개의 항아리에 담아서 끓이고 끓이고 또 끓이고 흙을 버리고 증류수만 남긴다 그 증류수가 비 온 뒤 흙의 향수가 된다 그 향수는 너무 비싸서 보통 사람들이 살 수 없다 전 세계의 갑부들이나 쓰는 향수라고 그걸 만드는 사람이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주 오랫동안 비의 향수가 어떤 것인지 늘 마음으로만 상상했다 5월의 누런 비는 눅진거리며 하수구를 졸졸 내려간다 송홧가루는 안녕히 너의 후세(後世)는 없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땅에 스며든 비의 향수로 누군가의 뇌수를 타고 흐르며 쓰라린 노래를 만들어 낼 지도 **비의 향수(Mitti Attar)는 인도의 Uttar Pradesh주에서 극소량이 생산된다.   

자작시: 먼지의 기원

  먼지의 기원 진공청소기의 먼지통을 들여다볼 때마다 경이롭다 매일 청소를 하는 데도 어디서 그 먼지들이 나오는지 나는 결코 알 수 없다 흰 머리카락과 회색의 솜뭉치들이 몽글몽글 며칠 전에 깎은 손톱도 하나 모래알이 자잘자잘 오리털 이불에서 나온 깃털도 있군 그 모든 것은 아주 먼 우주의 처음에서부터 혈관을 타고 흐르는 핏속의 철이 그렇게 내게 왔듯이 언젠가 그곳으로 돌아갈 부드러운 살과 눈물과 노래를 생각한다 한 처음에 있었던 어떤 손짓에 대해서도    

자작시: 꿈의 누수(漏水)

  꿈의 누수(漏水) 원대한 꿈을 가진 이는 좌절하기 쉽다 그는 자신의 몰락을 쉽게 예감하지 못한다 미리 알지 못하는 자의 비극은 그 꿈의 크기만큼 버려야 할 것들에 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봄조차 누렇게 뜬 영양실조의 얼굴로 다가온다 누수는 소리 없이 이어지고 마침내 꿈의 물탱크에서는 텅텅 하는 소리만이 들린다 기괴한 메아리는 이명이 되어 쉴 새 없이 괴롭히며 현실의 비감함은 배고픔과 기나긴 침묵을 낳는다 두려움과 분노는 끼익끽 거리는 미닫이문 뒤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는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앞에서 오랫동안 서있었다

자작시: 이상한 날의 시인

  이상한 날의 시인 의류 수거함에 비어지게 나온 구겨진 와이셔츠 그것들은 영영 입을 수 없는가 길 건너편 공사판 바닥에는 흐린 솜뭉치 날리는 와이셔츠의 미래 주단으로 펼쳐져 있어 버려져 누워있는 먼 훗날 나의 관짝 같은 장롱 남은 날들을 헤아려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상한 날이다 어쩌다 읽은 시들은 모두 죽은 이들 젊은 나이에 불운하게

자작시: 타인의 행복

  타인의 행복 야쿠르트 여자에게는 중학생 아들이 하나 있다 커다란 덩치에 해맑게 웃는 착한 아이는 학교 끝나고 언제나 엄마를 찾는다 그 엄마에게는 손님이 참 많다 매일 출근 도장 찍듯 아파트 사람들이 야쿠르트를 사 먹으러 간다 늘 후줄근한 추리닝 차림의 젊은 애 엄마는 편하게 자신의 일상을 늘어놓고 오른쪽이 마비된 아픈 여자는 길바닥에서 꺼끌거리는 목소리로 괴로운 속내를 토로한다 야쿠르트 여자는 별말 없이 잘 들어주고 가끔 미소를 짓는다 여자의 아이는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 아이가 웃을 때 여자는 함께 웃는다 오늘은 여자의 남편이 아들과 함께 온 것을 보았다 그들은 아주 행복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감자칩 한 봉지를 뜯고 제로 콜라를 마시며 시를 쓴다 타인의 행복 이라는 제목의 시를

자작시: 모독(冒瀆)

  모독(冒瀆) 작은 포트메리온 잔에 반쯤 남은 멀건 아메리카노 미지근한 생강차를 섞는다 진중하면서도 우스운 맛 한국 땅에서 백 년의 시간이 지나면 가장 많이 나올 흔한 그릇 포트메리온 쉽게 잊혀질 그런 시 참새처럼 쪼아먹고 마시면 좋은 글을 쓸 수가 없지 그건 시에 대한 모독이야 대붕(大鵬)의 날개를 갖고 있어도 날갯짓을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거야 날아야지 날아 봐야지 흙바닥에 고꾸라지더라도

자작시: 상영회(上映會)

  상영회(上映會) 졸업 작품 상영회에 갔었지 변두리 허름한 극장 5층 솔기가 살짝 닳아버린 연녹색의 의자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었고 관객들은 반쯤 졸았던 것 같아 진짜로 그랬어 나도 졸 것 같았거든 겨우 고작 저런 걸 찍으려고 4년을 그 고생을 해가며 아, 비탄의 하품에 눈물이 고이며 웃음이 터졌지 단편 영화들의 배경은 하나같이 여름이야 졸업작품은 여름에 찍거든 아르바이트로 하는 것 같은 어설픈 배우 지망생들의 연기 진정성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찾지 못했지 이제는 세상에 없는 너의 졸업작품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어 그걸 대신 쓸 수도 없고 다만 가끔, 이렇게 맑은 5월의 아침에 그저 그런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시며 너와 네가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생각하곤 해  

자작시: 내일은 비

  내일은 비 내일은 비 예보가 있다 아침 햇살은 넉넉하니 서둘러 빨래를 한다 엄마가 오래전 수술 자국이 아프다고 말하면 다음날 꼭 비가 왔다 내 오른쪽 귀가 따끔, 거리면 비가 온다 다음날, 아니 그 다음날에도 비가 몇 방울이라도 온다 오후 늦게 이불 빨래를 걷는다 다가오는 비의 기운이 찔끔 거리며 돋는 노랑 차렵이불에는 조금 있으면 누런 송화 가루가 묻어날 것이며 누리끼리한 장마의 손거스러미가 떨어질 것이다 빨래 건조기에는 이러한 노글노글한 낭만이 없다 따끔, 다시 한번 오른쪽 귀의 신경이 신호를 보낸다 그렇게 아팠던 모든 것들은 자신의 눌렸던 슬픔을 토해낸다     

자작시: 공원(公園)

  공원(公園) 가끔 인생이 B급 영화 같다고 생각해 공장에서 찍어낸 인디언 인형 같지 특색이 없어 다 비슷해 넌 좀 다르다고 느꼈지 처음부터 그래, 그랬어 너를 만나러 가는 길에 공원을 지나야만 했어 가슴이 뛰며 웃음이 터져 나왔지 눈부신 흰색 개가 아마도 시베리아허스키겠지 하품을 하며 쳐다봤어 이제, 잘려진 나무를 흔들던 바람은 너에게 닿을 수가 없어 공원은 폐가처럼 잠들어 있고 털이 빠진 크고 흰 개는 어디 길바닥을 헤매고 있겠지 마른 혀에 침을 겨우 적시며 아프게    

자작시: 지도(地圖)

  지도(地圖) 서걱거리는 지도를 씹으며 부러뜨린 손가락 너의 푸르스름한 입매 번득이는 면도날이 될 수 있다면 길을 잃었어 왔던 길을 더듬어 처음으로 가야 하겠지 그 절벽에는 동굴이 너무 많아 하지만 너의 발자국이 있는 단 하나의 동굴 질기고 가느다란 실 한 가닥 입에서 뱉어내었어 읽을 수 없는 잃어버린 지도의 붉은 선이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