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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21의 게시물 표시

그 거리의 끝에서, 데드 엔드(Dead End, 1937)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눈길을 끄는 이름이 등장한다. 각본을 릴리언 헬만이 맡았다. 원작은 시드니 킹슬리의 브로드웨이 연극(1935)이다. 짜임새 있고 극적인 서사를 잘 써내려가는 헬만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매카시즘에 맞서서 의회 증언을 거부한 공산주의자답게(헬만은 그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다) 영화는 좌파주의적 시각으로 도배되어 있다. 사실 제작사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걱정했던 것은 그런 부분이 아니라 헤이스 코드(Hays code)에 따른 검열이었다. 영화는 등장인물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킨다. 험프리 보가트가 연기한 'Baby Face' 마틴은 악명높은 갱스터이지만 영화 내내 직접적으로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틴이 오랜만에 다시 만난 예전 여자 친구 프랜은 '매춘부'인데, 거기에 대한 언급도 검열에 걸리기 때문에 분위기로만 제시된다. 이렇듯 이 영화는 수수께끼 풀어가듯 막연한 암시들을 하나하나 짜맞추면서 보아야 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검열에 통과했음'이라고 자랑스럽게 자막이 나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촬영을 누가 했는가 하면 그레그 톨랜드가 했다. 그렇다.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의 그 위대한 촬영 감독이다. 톨랜드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촬영은 그야말로 눈을 정화시키는 느낌이다. 빛과 어둠을 명징하게 조화시키는 톨랜드의 촬영은 예술로서의 영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처음과 마지막 장면이 일종의 수미쌍관을 이룬다. 뉴욕의 화려한 고층 건물에서부터 수직으로 하강하는 크레인 쇼트는 East River의 빈민가에서 멈춘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 반대로 빈민가에서 화려한 빌딩이 보이는 공중으로 상승하는 쇼트이다. 톨랜드는 이 영화에서 크레인 쇼트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이런 쇼트들은 부자와 빈자, 고층 고급 주택과 더러운 슬럼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뉴욕의 퀸즈보로 다리 근처의 빈민

EIDF 2021 상영작 리뷰 3, 단평들 모음

  1. 표류하는 마을(Floating Village Asylum, 2020)   태국과 미얀마 국경 사이에 위치한 수상 가옥촌에는 미얀마 난민들이 산다. 오랜 군부 독재와 여러 종족들 사이의 분쟁을 피해 태국으로 피신한 미얀마인들은 물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 보다 시급한 것이 있다. 모두 무국적자 신분인 그들은 아이들만이라도 나은 미래를 찾기를 바란다. 프리차 스리수완 감독은 4년의 시간을 두고 수상 가옥촌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물에 떠있는 난민들의 집처럼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금어기에도 생계를 위해 몰래 물고기를 잡다가 단속에 걸리는 일도 부지기수, 또한 남획으로 고갈되는 어족 자원은 소득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이들은 공교육의 혜택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국적을 얻지 못하면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 남자들은 태국인이 하지 않는 저임금의 고된 농장일을 하며 생존을 위해 애를 쓴다.   "고생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진짜 고생이 뭔지 모르지."   그들이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자식들 때문이다. 철모르고 마구 뛰어놀던 아이들은 다큐가 끝날 무렵에는 훌쩍 자라나 있다. 아이들은 마침내 태국 국적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희망의 시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딸에게 13살이 되면 큰 도시에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하는 부모의 모습은 먹고 살아야 하는 삶의 냉엄한 명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미얀마인이 아닌 태국인으로, 태국 사회의 하부 구조를 이루는 구성원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큰 미래 세대 아이들의 모습은 디아스포라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준다. *눈길을 끄는 특이한 장면 하나: 아이가 '뇌전증(간질)'으로 의심되는 발작을 일으키는 장면이 있는데, 할머니가 아이에게 하는 주술 의식이 눈길을 끈다. 길다란 칼로 아이의 몸을 여러 번 쓸어내린다. 우리나라의 무속에서도 치병이나 잡귀를 내쫓을 때 그와 비슷한 방법을 쓴다. 동아시아

EIDF 2021 상영작 리뷰 2, 마야(Maya, 2020)

    마슈하드 동물원의 호랑이 '마야'는 출산 직후 3마리의 새끼 가운데 2마리를 죽였다. 부상을 입은 한 마리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마야를 새끼 때부터 사육해왔던 조련사 모센은 왜 마야가 새끼들을 죽였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 세상이 새끼들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죠."   마야를 촬영하던 감독의 말이었다. 잠시드 모자데디와 앤슨 하트포드의 다큐 '마야(Maya, 2020)'는 동물원 호랑이 마야를 통해 인간과 야생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란 북부 지방에 서식하던 카스피 호랑이들은 서식지 파괴와 사냥으로 멸종되었다. 동물원은 멸종된 카스피 호랑이들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사육사 모센은 자신의 말을 잘 따르는 호랑이 마야와의 특별한 관계로 이란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맹수임에도 사람에 의해 길들여진 마야를 보기 위해 이란 전역에서 관람객들이 몰려들었고, 마야는 그야말로 마슈하드 동물원의 스타였다.   모센만을 따르던 마야는 영화 촬영을 위해 카스피 연안 지역으로 이동한다. 그곳에는 소련이 점령 당시 지어놓은 야생 사육장이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이란 왕실은 독일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영국과 소련 연합군은 그것에 불만을 품고 이란을 침공한다. 영국은 이란 남부를, 소련은 이란 북부에 주둔한다. 다큐에서 마야가 머물게 된 사육장은 바로 그 소련군이 지어놓은 곳이었다. 다큐는 카스피해 호랑이 멸종의 비극적 역사를 들려준다. 감독이 인터뷰한 그곳의 노인은 소련군들이 호랑이를 많이 잡아갔고, 주민들도 호랑이를 많이 사냥했다고 말한다.   마야가 처음으로 동물원을 떠나 진짜 자연과 마주하게 되면서 모센과 마야의 관계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비좁은 동물원의 우리에 있다가 드넓은 대지에 지어진 사육장에서 마야는 야생의 본성에 눈을 뜬다. 인근 마을의 말과 소떼를 쫓아가기도 하고, 숲속을 헤매기도 한다. 마침내 영화 촬영이 끝나고

비 오는 날에는 소련 코미디 영화를, 차 조심!(Берегись автомобиля, Beware of the Car, 1966)

    소련 시절 제작된 영화들 가운데 대중에게 가장 인기 있고 환영받는 영화 장르는 코미디였다. 국가가 영화 산업을 총괄하는 소련 당국의 입장에서도 코미디는 수익률이 높은 장르였기 때문에 제작과 검열에서도 비교적 관대했다. 엘다 라쟈노프(Eldar Ryazanov) 감독은 코미디 영화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었다. 'Unbelievable Adventures of Italians in Russia(1973)', 'Office Romance(1977)'는 그의 대표작으로 소련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라쟈노프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도 대부분 자신이 했다. 1966년작인 '차 조심!(Beware of the Car)'도 그가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영화의 첫 부분, 어두운 밤, 서류 가방에 모자, 트렌치 코트를 입은 남자가 복잡한 계단을 오르내리며 조심스럽게 차고에 접근한다. 소련 느와르인가 싶은 생각이 들 무렵, 남자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전지적 시점의 이 해설자는 사건의 국면마다 설명을 덧붙이며 영화에 독특한 색채를 덧입힌다.   겸손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지닌 자동자 보험 설계사 유리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그는 고객들 가운데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의 차를 훔친다. 수사관 막심은 연이은 차량 도난 사건의 범인 때문에 골머리를 썩인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만난다. 연극을 좋아하는 유리와 막심은 지역 극장의 배우로도 활약하는데, 그들은 새로 상연될 '햄릿'을 함께 준비하고 있다. 차량 절도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들을 조사하던 막심은 유리가 범인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연극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로서 막심은 유리를 체포하는 일을 주저한다. 범인과 경찰, 이 두 사람의 브로맨스는 어떻게 끝날까...   사실 소련 코미디 영화가 빵빵 터지는 웃음을 주는 일은 별로 없다. 이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 느와르로 시작했던 영화

EIDF 2021 상영작 리뷰, 옴 진리교: 지하철 사린 사건과 나(Me and the Cult Leader, 2020)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데뷔작 '로저와 나(Roger and Me, 1989)'는 여러모로 흥미있는 작품이다.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하다 백수로 고향에 돌아온 무어는 GM(제너럴 모터스)의 공장 폐쇄와 인력 감축으로 고향 플린트가 경제적으로 몰락한 것을 보게 된다. 그는 GM의 최고 경영자 로저 스미스를 만나서 이야기라도 들어보자, 하고 카메라 하나 들고 길을 나선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 다큐는 이후 다큐멘터리 제작에 있어서 축복이자 동시에 저주처럼 작용했다. 이전까지 대상과의 객관적 거리를 중시했던 다큐멘터리 제작 경향은 무어가 보여준 참여적이고 적극적인 인터뷰, 영화적 재구성과 같은 방법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른바 경멸적 의미로 'Moore Kids'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대의 다큐 제작자들이 비슷한 다큐들을 쏟아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작품을 꼽는다면 모건 스펄록의 '슈퍼 사이즈 미(Super Size Me, 2004)'일 것이다.   2021년 EIDF 상영작인 사카하라 아츠시 감독의 '옴 진리교: 지하철 사린 사건과 나(Me and the Cult Leader, 2020)'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듯한 기시감이었다. 영문 제목도 '나와 사이비 교주'이며, 사카하라 감독은 마이클 무어가 '로저와 나'에서 썼던 야구 모자 비슷한 모자를 쓰고 나온다. 1995년, 일본 도쿄에서 옴 진리교의 지하철 독가스 테러 사건으로 13명이 사망하고 60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감독 사카하라 아츠시는 당시 그 지하철을 타고 있다가 사린 가스에 노출되어 회복할 수 없는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알레프(Aleph)로 이름을 바꾸고 여전히 활동 중인 옴 진리교의 실체에 접근해 보기로 결심한다. 2015년, 1년여의 노력 끝에 알레프의 중요 인사인 홍보 담당자 아라키와의 만남이 성사된다. 감독은 아라키와

마이애미 마약왕들의 범죄 서사시, 코카인 카우보이: 마이애미의 제왕들(Cocaine Cowboys: The Kings of Miami, 2021)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N사의 등장은 영상물의 유통과 소비에 있어서 여러모로 혁신을 일으켰다. 특히 다큐멘터리의 경우, 늘 배급 문제로 고민하는 제작자들에게 좋은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빌리 코번 감독의 2021년작 '코카인 카우보이: 마이애미의 제왕들(Cocaine Cowboys: The Kings of Miami)'은 N사의 6부작 다큐로 편성되어서 방영되었다. 코번 감독은 2006년에 'Cocaine Cowboys'로 마이애미의 두 마약 거물들에 대한 고발 다큐를 내놓았는데, 올해 나온 6부작 다큐는 그 후속편으로 다큐의 완성판이라고 보면 된다. 다큐는 Sal Magluta와 Willy Falcon이 1970년대부터 마이애미에 구축한 마약 왕국의 흥망성쇠를 다룬다. 1부 윌리와 살, 2부 코카인 75톤, 3부 산더미 같은 증거, 4부 마이애미가 아니라면, 5부 팜므 파탈, 6부 무차초스여 안녕, 이렇게 6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당 50여분 가량으로 만들어진 이 다큐의 흡인력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이 다큐를 보려는 이들은 가급적 주말 저녁에 보는 것이 낫다. 한번 보기 시작하면 다 보느라 밤을 샐지도 모른다. 다큐는 액션, 스릴러, 법정 드라마, 로맨스, 마치 온갖 종류의 장르 영화들을 절묘하게 합쳐놓은 것 같다. '코카인 카우보이'는 두 명의 마약왕의 일대기인 동시에 1970년대에서 80년대, 90년대까지 아우르며 미국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마약 거물들의 가족과 지인들, 그들의 조직원들, 사건을 취재한 칼럼니스트, 그들을 기소한 연방 검사와 FBI 요원들, 마약왕들을 옹호한 변호사들, 그 모든 이들의 생생한 증언과 함께 자료 화면으로 제시되는 사진과 녹음 테이프들은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쿠바 이민자들이 많이 정착한 마이애미에서 윌과 살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만났다. 197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살은 어떻게 하면 천

흔들리며 걷는 청춘의 시간들,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桐島, 部活やめるってよ, The Kirishima Thing, 2012)

    "이담에 내가 감독 되면, 저것들 안써. 그때도 지금처럼 웃음이 나오나 봐라."   뭔가 학교에서 쩌리들만 모인 것처럼 보이는 영화 동아리의 부원은 자신을 비웃는 여학생들을 두고 그렇게 뇌까린다.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The Kirishima Thing, 2012)'는 2009년에 나온 아사이 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금요일, 학교의 최고 인기남인 키리시마가 갑자기 배구부를 그만 두고 종적을 감춘다. 주말 시합을 앞둔 배구부, 키리시마를 중심으로 뭉치며 다녔던 친구들은 모두 혼란에 빠진다. 모두들 키리시마를 애타게 찾는 가운데, 학교의 아웃사이더들 모임인 영화 동아리의 좀비 영화 촬영이 시작된다. 갑작스런 키리시마의 부재는 아이들의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며, 마에다가 리더로 있는 영화 동아리의 촬영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영화는 처음에 키리시마의 소식이 전해진 금요일의 풍경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3번에 나누어 보여준다. 마에다와 영화 동아리 부원들, 키리시마의 여친 리사와 친구들, 키리시마의 절친 히로키를 좋아하는 밴드부 주장 사와지마, 이들은 마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羅生門, 1950)'처럼 키리시마의 소식을 다른 입장에서 접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 첫날의 묘사를 통해 관객들은 등장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게 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키리시마'의 존재는 그들에게 있어 절대적이다. 감독 요시다 다이하치는 '영화 속 키리시마는 말하자면 일본의 천황과 같은 존재'라고 언급했다.   배구부의 주장 키리시마의 부재로 토요일 시합에서 배구부는 패한다. 아무 말도 없이 연락을 끊고 잠수한 키리시마 때문에 여친 리사는 분노하며 허탈해 한다. 키리시마와 늘 어울렸던 히로키와 친구들은 도대체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고민한다. 키리시마의 카리스마에 기대어 매일의 일상을 보냈던 그들은

냉전 시대 과학자의 초상, 1년의 9일(Девять дней одного года, Nine Days in One Year, 1962)

    '수포자(수학 포기자)'라는 말이 있다. 미하일 롬(Mikhail Romm) 감독의 1962년작 '1년의 9일(Nine Days in One Year)'은 수포자가 아니라 '물포자(물리 포기자)'가 보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들이 참으로 많이 나온다. 영화의 주인공은 핵물리학자로 그의 주변 인물들도 물리학자들이다. 그들은 결혼식 연회장에서도 중수소의 양과 우주 여행을 주제로 냅킨에 계산까지 해가며 불꽃 튀기는 논쟁을 벌인다. 영화는 과학 연구에 자신의 삶을 내던진 젊은 과학자 구제프의 1년, 그 가운데 9일 보여준다. 그것은 연속적으로 이어진 기간이 아니라, 구제프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날들만을 뽑은 것이다. 미하일 롬은 냉전 시대를 살아가는 핵물리학자의 눈을 통해 과학과 인간의 관계, 과학적 발견과 윤리의 문제를 다룬다.   핵 융합 연구소 연구원인 구제프는 스승 신초프와 함께 실험을 하다 방사능에 피폭되는 사고를 겪는다(1일). 치사량의 방사능에 피폭된 스승은 사망하고, 구제프도 더이상의 피폭은 위험하다는 의사의 경고를 듣는다(2일). 그럼에도 그는 연구에의 열정을 멈출 수가 없다. 구제프와 친구 쿨리코프 사이에서 갈등하던 롤리야는 구제프와 결혼한다(3일). 그러나 일상의 모든 것을 연구에만 쏟는 구제프의 모습에 롤리야는 소외감을 느낀다(4일). 연구에 매진하던 구제프는 마침내 중성자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지만(5일), 그것이 제대로 입증되지 않아서 연구는 답보 상태에 빠진다(6일). 구제프는 아내와 함께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아 아버지를 만난다(7일). 실험 과정에서 또 다시 피폭을 겪은 그는 병이 심해지며(8일),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한 그는 골수 이식 수술을 기다린다(9일).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나는데, 그렇게 구제프의 인생에서 힘겨웠던 1년의 시간을 돌아본다.   1960년대 소련이 이룬 과학적 발전은 눈부셨다. 1961년, 유리 가가린은 최초의 우주인으로

비비안 리베르토의 복원된 삶, My Darling Vivian(2020)

    "모든 이혼이 다 나쁜 건 아니에요. 난 우리 부모님이 이혼한다고 했을 때 비로소 마음이 놓였어요."   부부의 첫째 딸은 부모의 이혼을 그렇게 회고했다. 매트 리들후버 감독의 2020년작 다큐 'My Darling Vivian'은 미국 컨트리 음악의 전설 조니 캐시(John R. Cash)의 숨겨진 가족사를 이야기한다. 조니 캐시와 두 번째 부인 준 카터와의 러브스토리는 영화 '앙코르(Walk the Line, 2005)'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첫 번째 부인, 비비안 리베르토가 바로 이 다큐의 주인공이다. 그들 부부의 4명의 딸들은 부모의 순탄치 않았던 결혼 생활과 어머니의 인간적 모습에 대해서 증언한다.   유명인과 그 가족들의 실제 삶은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 다큐가 들려주는 비비안의 삶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의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17살의 비비안은 잘 생긴 공군의 구애를 받는다. 짧은 연애 기간 후, 독일로 파병된 남자는 3년 동안 엄청난 러브레터를 보낸다. 그리고 그가 귀환했을 때, 비비안은 그와 결혼한다. 세일즈맨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가던 여자의 남편은 노래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가수가 된다.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이 신인 가수는 곧 스타덤에 오른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이 활약했고, 영화도 찍었으며, 꽉 짜인 공연 스케줄로 집에 들어오는 날은 거의 드물었다. 그 사이 여자는 4명의 딸들 엄마로 바쁘고, 외롭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예기치 않은 삶의 변화. 숲 속에 지은 대저택에는 수시로 방울뱀과 야생동물이 출몰했다. 여자는 산탄총을 들고 방울뱀을 쏘아 죽이기도 했다. 극성 팬들은 집 주소를 알고 찾아와 밤낮으로 문을 두들겨 댔다. 내성적인 성격의 비비안에게 그러한 변화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거기에다 그 시대 유명인들이 거쳐가는 안좋은 인생 행로를 남편은 걸어가고 있었다. 약물 중독이었다. 각성제를 비롯한 여러 약물에

삶의 불안정성에 대한 얄팍한 우화, 노매드랜드(Nomadland, 2020)

    "엄마가 선생님이 노숙자라고 하던데, 정말 그래요?"   "아니, 난 노숙자(homeless)가 아냐. 그냥 집이 없는 것(houseless) 뿐이야."   한때 학교 보조 교사로 일했던 여자는 오랜만에 만난 학생에게 그렇게 대답한다. 중국계 미국인 감독 클로이 자오의 2020년작 '노매드랜드(Nomadland)'는 집을 떠나 길 위의 삶을 택한 중년 여성 펀(Fern)의 이야기를 담는다. 원작은 2017년에 출판된 제시카 브루더의 동명 논픽션으로, 클로이 자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각색을 했다.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연기한 '펀'이라는 캐릭터와 이야기는 자오의 창작물인 셈이다.   펀이 오랫동안 살던 석고 광산 도시 엠파이어는 광산의 폐쇄와 함께 도시로서의 운명도 끝난다. 암에 걸린 남편의 죽음을 겪으며 펀은 밴 한 대에 자신의 삶을 담아 길을 떠난다. 영화는 온갖 일용직을 전전하며 노매드(nomad)의 삶을 고수하는 펀의 여정을 보여준다. 무려 1시간 50여분에 이르는 이 영화는 줄거리라고 할 것이 없다. 펀이 하는 다양한 일들, 아마존의 물류창고 일, 드러그 스토어 점원, 캠핑장 청소일, 햄버거 음식점 주방일 등이 마치 씨실처럼 직조된다. 날실은 길에서 만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펀이 가는 곳마다 펼쳐지는 광대한 미국 자연의 풍경도 정말 멋진 배경이다. 그리고 또 뭐가 있나? 맞다. 이 영화는 음악이 꽤 좋다. 나중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보니 현대 음악 작곡가로 잘 나가는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이름이 뜬다. 그가 들려주는 음악은 명상적인 울림을 준다. 정말 그 뿐이다.   '노매드랜드'는 작년 한 해 동안 아카데미를 비롯해 여러 영화제를 휩쓴 영화이다. 나는 도대체 이 영화의 어디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찾아낼 수 없었다. 경제적 기반의 붕괴와 남편의 죽음. 여자는 그렇게 길을 떠났고, 길 위의 삶에도 잘 적응했다. 영화는 펀이 만나

미후네 토시로 주연의 정격 시대극, 신선조(新選組, Shinsengumi, 1969)

  '추신구라(忠臣蔵)'는 억울하게 죽은 주군을 대신해 복수를 하는 47명의 가신(家臣) 사무라이들의 이야기이다. 일본 영화와 드라마를 좀 챙겨보는 이들이라면 익숙한 이야기인데, 이걸 극화한 것이 무척 많다. 그만큼 일본인들에게 '추신구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체성을 상징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와 쌍벽을 이루는 '신선조(新選組)'이야기 또한 문학과 영화에서 자주 다루어졌다. 특히 2004년에 방영된 NHK 대하드라마 '신센구미!'는 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 신선조를 새롭게 각인시켰다. 사와시마 타다시 감독의 '신선조(Shinsengumi, 1969)'는 막부 말기 쇼군의 친위 부대였던 신선조의 결성과 몰락의 과정을 그린다. 신선조를 이끌었던 콘도 이사미 역은 당시 일본 영화의 간판 스타였던 미후네 토시로가 맡았다. 그는 제작자로도 참여했으므로 영화는 사실상 미후네 토시로가 지배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충실하게 재현해 낸다. '신선조'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잘 정리된 자료들이 많으므로 참조하면 영화 감상에 도움이 된다. 막부 말기, 교토는 천황을 옹립해 새로운 일본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파와 쇼군을 지켜야 한다는 막부파가 대립하는 혼란스런 격전지였다. 신선조는 쇼군을 호위하기 위한 하급 무사들의 집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던 것이 무사들 뿐만 아니라 농민을 비롯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다. 콘도 이사미 또한 농민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농 집안 출신으로 일반 농민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신선조를 이끌었던 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막부의 시각에서 봤을 때, 신선조의 존재는 적당히 써먹고 버려도 좋은 '사냥개' 정도의 의미였을 것이다. 진짜로 신선조가 했던 일은 그러했다. 존왕양이파를 주도했던 초슈 번과 그 일당들에 대한 가차없는 암살과 처단으로 신선조는 자신들의 존재

세계적 줄타기꾼의 영화 같은 인생, Man on Wire(2008)

    해외의 다큐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마치 패키지로 보이는 다큐들이 있다. 산악 다큐인 'Free Solo(2018)', 'Meru(2015)', 그리고 'Man on Wire(2008)'.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암벽산 엘 캐피탄(El Capitan)을 맨손으로 등반한 알렉스 호놀드의 이야기를 담은 'Free Solo'는 정말이지 나름의 충격 같은 것이 있었다. 목숨을 걸고 하는 도전의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 호놀드가 엘 캐피탄 등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도전하다 사망한 동료 산악인들 소식을 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정말로 그가 하는 일이 목숨을 걸고 할 만한 일일까? 호놀드와 비슷하게 목숨을 걸고 도전을 했던 이가 있었다. James Marsh의 2008년작 다큐 'Man on Wire'는 1974년에 뉴욕 세계 무역 센터의 쌍둥이 빌딩에서 외줄타기 도전을 시도한 필립 프티트(Philippe Petit)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큐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프티트와 당시에 프티트의 도전을 도왔던 이들의 증언, 기록 영상과 사진, 재연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티트가 어느 날 갑자기 미국으로 건너가 최고층 빌딩에서 외줄타기를 선보인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는 17살 때 세계 무역 센터의 착공 소식을 읽은 후 당시 세계 최고 높이의 건물로 기록될 그 곳에 매료되었다. 저글링과 줄타기 같은 거리 공연을 하며 자신만의 외줄타기(high-wire walk) 기술을 연마해 나갔다.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 호주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선보인 외줄타기 공연의 성공으로 그는 고무되어 있었다. 물론 그런 시도 자체는 모두 허가받지 않은 것이었고, 매번 체포되어 일시적인 구금을 겪어야 했다. 마침내, 프티트는 자신이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꿈에 도전한다.   영웅 신화에서 영웅이 조력자 없이 위업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결같은 정서적 지지를 보낸 여자 친구 애니

훌리오 메뎀이 보여주는 스페인 근현대사의 예리한 절단면, Vacas(Cows, 1991)

    외신에서 아주 가끔씩 스페인의 바스크 분리 독립 운동과 관련된 소식을 들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스페인의 오랜 지역적 정서와 결합된 일부 극렬 정치집단인가 보다 생각했었다. 아마도 스페인 근현대사에서 '스페인 내전'에 대해서 약간만 알고 있는 정도의 외국인의 시각에서 본다면 대부분 그렇게 여길 것이다. 훌리오 메뎀 감독의 1991년작 'Vacas(Cows, 1991)'은 바스크 지방의 두 집안의 가족사를 통해 스페인 근현대사를 성찰한다. 영화는 4개의 챕터로 나누어 전개된다. 1. 1875년 3차 칼리스트 전쟁(The Third Carlist War), 2. 도끼(1905년), 3. 불타는 구덩이(1차 세계 대전), 4. 숲속의 전쟁(스페인 내전). 주인공 마누엘 역은 배우 까르멜로 고메즈가 맡았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의 3대에 걸친 역을 소화해 낸다.   이 영화를 이해하려면 스페인 근대사의 칼리스트(카를로스파)들에 대한 개관적 지식이 필요하다. 1883년 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가 사망하자 3살된 딸 이세벨 2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이들이 왕실의 후손인 카를로스 백작을 왕위에 올리려고 전쟁을 일으켰다. 무려 3차례에 걸친 칼리스트 전쟁은 스페인의 복잡한 정치적 지형을 만들어 냈다. 결국 칼리스트들은 패배했지만, 바스크 지방의 칼리스트들은 바스크 자치주의를  주장하는 쪽으로 분화했다. 왕당파에서 반 공화주의, 극우 보수주의로 변화한 칼리스트은 스페인 내전에서는 프랑코 편에 선다. 프랑코가 그들이 원하는 자치권을 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칼리스트들을 경계하던 프랑코는 그들을 철저히 이용해먹고 탄압했다.   영화 'Vacas'의 첫 장면은 도끼로 나무를 패는 남자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한다. 날이 바짝 선 도끼로 무지막지하게 나무를 찍어내리는 이 긴장감은 영화 내내 유지된다. 첫 번째 챕터는 3차 칼리스트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마누엘은 이웃 카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유효한 반전(反戰)의 외침, Hair(1979)

    *이 글은 영화 'Hair(1979)'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밀로스 포먼 감독의 1979년작 뮤지컬 영화 '헤어(Hair)'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Hair'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뮤지컬이 처음 상연된 것은 1968년, 영화 제작 당시 이미 1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원작 뮤지컬은 영화로 바뀌면서 주인공과 이야기 설정이 상당 부분 바뀌었다. 노래들도 편곡을 달리했고, 영화 버전에 새로 작곡된 곡을 넣기도 했다. 나중에 영화를 본 뮤지컬 제작자들은 상당한 불만을 표시했다. 심지어 뮤지컬 '헤어'의 진정한 영화는 만들어진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확실히 영화의 인물 설정이나 이야기는 군데 군데 엉성한 부분이 보인다. 밀로스 포먼은 히피 문화에 중점을 두었던 뮤지컬과는 달리, 계급 문제와 반전 메시지에 좀 더 집중했다.   원작 뮤지컬에서는 다 같은 히피 그룹 일원이었던 클로드와 쉴라가 영화에서는 떨어져 나온다. 클로드는 징집 영장을 받은 오클라호마 시골 청년, 쉴라는 상류층 여대생으로, 히피 그룹을 이끄는 리더는 버거가 된다. 클로드는 군사 훈련을 받기 전에 뉴욕 탐방에 나선다. 공원에서 말을 탄 쉴라를 보고 반한 클로드. 마침 그곳을 지나던 히피 무리는 클로드에게 함께 지낼 것을 권유한다. 리더 버거는 쉴라와 클로드를 이어주려고 쉴라의 무도회 데뷔 파티에 클로드를 데려간다. 환영받지 못하는 히피들은 파티를 헤집어 놓고, 그들은 즉결 심판에 넘겨진다. 겨우 벌금을 내고 풀려난 클로드는 네바다의 훈련소로 향한다. 계절은 여름에서 겨울로 변한다. 쉴라는 클로드가 보낸 편지를 버거에게 보여주고, 그들은 클로드를 만나기 위해 함께 네바다로 떠나는데...   뮤지컬 영화 답게 대사가 좀 나온다 싶으면 노래가 이어진다. 영화의 첫 뮤지컬 넘버인 'Aquarius(물병자리)'부터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노래하는 흑인 여가수를 보여주는 트래킹 쇼트는 지금의 시

오즈 야스지로가 포착한 1937년 일본의 풍경, 숙녀는 무엇을 잊었는가(淑女は何を忘れたか, What Did the Lady Forget?, 1937)

      1930년대 일본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뭔가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식민지 조선은 일제의 수탈로 고통받는 시기인데, 영화 속 일본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또한 메이지 유신으로 일찍부터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 사회의 모습이 꽤 서구적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1937년작 '숙녀는 무엇을 잊었는가(淑女は何を忘れたか, What Did the Lady Forget?)'에서도 당시 일본이 구가한 물질적 풍요의 단면을 보게 된다. 영화는 대학 교수 미야와 아내 토키코, 그리고 부부의 자유분방한 조카 세츠코가 만들어내는 집안의 소동을 코믹한 터치로 담아낸다.   학교에서는 근엄한 교수이지만, 집에서는 깐깐한 아내에게 눌려 지내는 미야에게 오사카의 조카 세츠코가 찾아온다. 이 조카는 담배도 피우고 운전도 할 줄 알며, 술도 잘 마신다. 숙모 토키코는 세츠코가 아직 성년의 나이가 되지 않았다며, 그런 조카를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도쿄에 온 김에 실컷 놀고 싶은 세츠코는 골프 여행을 간다던 삼촌을 꼬드겨 게이샤들이 있는 술집에서 진창 퍼마신다. 술에 취해 돌아온 세츠코를 토키코는 나무라지만, 세츠코는 무시해 버린다. 한편 미야는 제자 오카다의 집에서 뭉개면서 아내의 간섭 없는 주말을 보내지만, 그의 거짓말은 곧 들통이 난다. 제멋대로인 조카와 남편의 거짓말에 화가 난 토키코는 남편을 몰아붙인다. 세츠코는 삼촌에게 남자의 강한 모습을 보이라며 충동질하고, 마침내 미야는 아내에게 반기를 드는데...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세대 간의 갈등이다. 오즈가 그려내는 신세대 여성은 세츠코가 대표한다. 멋진 양장을 한 세츠코는 모든 것에 솔직하고 거리낌이 없다. 세츠코는 삼촌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운다. 게이샤들의 공연을 관람하며 술을 마시는 세츠코의 모습은 젊은 남성처럼 보일 정도다. 자신의 물건을 게이샤들에게 선물로 주고, 술을 더 따르라며 호기를 부린다. 집에 온 삼촌의 제자 오카다에게

도시 그 욕망의 도가니, 밤과 도시(Night and the City, 1950)

    남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크게 터질 한 건을 기다리며 산다. 여자 친구에게 대단한 거물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는 이 남자의 이름은 해리 파비안. 그러나 현실은 도시의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고 있다. 뒷골목 큰 술집 실버 폭스 클럽에 손님 물어다 주는 것으로 푼돈이나 버는 파비안에게 인생 역전의 기회는 찾아올 기미가 없다. 돈 떨어지면 클럽 가수 여자 친구의 지갑이나 뒤적거리는 일상. 그러던 어느 날, 레슬링 경기장에서 엿들은 대화가 파비안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네이키드 시티(The Naked City, 1948)'에서 뉴욕을 배경으로 느와르를 찍었던 줄스 다신은 1950년, 런던을 배경으로 도시에 얽힌 욕망의 변주곡을 들려준다. '밤과 도시(Night and the City)'는 그의 헐리우드 경력을 마감하는 작품이었다. 매카시즘은 이 재능있는 감독을 미국 밖으로 내몰았다. '밤과 도시'는 시대의 광풍이 이후 미국 영화에 끼친 크나큰 손실을 헤아려 보게 만든다.   해리 파비안은 허풍쟁이 사기꾼이다. 멀끔한 외모에 대단한 화술을 지닌 그는 맘만 먹으면 누구든 속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도시의 뒷골목 세계에서 파비안은 하수(下手)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주변 상황 그 어느 것도 통제할 수 없다. 클럽 소유주 필은 파비안을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신세라며 조롱한다. 아내 헬렌이 자신을 떠나 파비안과 함께 할 거라는 것을 알고 필은 파비안을 파멸시키기로 결심한다. 필은 파비안의 레슬링 사업에 돈을 댄다. 파비안은 전설적 레슬러 그레고리우스가 프로모터 아들 크리스토와 불화한 틈을 파고든다. 파비안은 그레고리우스를 내세워 레슬링 프로모터로 나서려고 한다. 사업 자금을 회수하겠다는 필의 압박에 파비안은 크리스토의 레슬러 스트랭글러(Strangler)를 도발해서 그레고리우스의 제자 니콜라스와 싸우게 만든다. 그러나 경기도 하기 전에 스트랭글러는 니콜라스의 손목을

니키타 미할코프의 독특한 소련 웨스턴, 황금을 찾아라(Свой среди чужих, чужой среди своих, 1974)

  *이 글에는 영화 '황금을 찾아라(1974)'의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구 소련 시절 국영 영화사였던 Mosfilm은 인터넷 홈페이지와 유튜브 전용 채널에서 소장 영화들을 무료로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고 있다. 러시아 영화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정말 좋은 일이지만, 문제는 제목 검색이 오직 러시아어로만 된다는 점이다. 거기에다 영어 자막이 제공되는 영화들은 한정되어 있다. 나름의 기준이 있다면, 영어 자막이 있고 모스필름에서 복원 작업을 한 영화들은 볼만하다고 할 수 있다. 복원 작업에는 많은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작품성과 역사성이 있는 영화들이 엄격하게 선정되기 때문이다. 니키타 미할코프(Nikita Mikhalkov)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 '황금을 찾아라(At Home Among Strangers, 1974)'도 모스필름의 복원작이다. 소련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웨스턴 형식을 갖춘 이 영화는 미할코프의 감독으로서의 패기와 포부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정도가 좀 지나쳤던 것 같다. 영화는 여러 인물들의 등장과 함께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산만하게 얽혀서 진행된다. 관객들은 1시간 반 가량의 러닝타임 동안 영화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썩는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는 내전에 휩싸인다. '백군'이라 불리는 반 볼셰비키 세력들과 러시아 혁명 세력간의 치열하고 처절한 싸움이 이어졌다. 영화는 그 적백 내전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내전으로 러시아 경제는 붕괴 상황에 직면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식량 수급'이었다. 영화 초반부, 비밀 정보국 체카(Cheka, KGB의 전신)는 해외의 식량을 구입하기 위한 금괴를 모스크바로 수송하려고 한다. 수뇌부에서는 실로프를 주축으로 금괴 수송 작전을 지시한다. 그런데 실로프의 형제는 백군에 가담했다 처형당했기 때문에, 실로프는 정보국 내부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열

약쟁이 작가의 소설이 영화와 만났을 때, 네이키드 런치(Naked Lunch, 1991)

  *이 글은 영화 '네이키드 런치(1991)'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네가 아내를 죽였다고 들었는데."   "죽이다뇨? 그건 죽인 게(murder) 아니라 사고(accident)였단 말입니다."   남자는 정색을 하며 대답한다. 정말로 남자는 피치 못할 사고로 아내를 잃은 것일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1991년작 '네이키드 런치(Naked Lunch)'는 미국의 비트 문학(Beat literature)의 대표 작가 윌리엄 S. 버로우즈(William S. Burroughs)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크로넨버그는 소설의 주요 내용과 함께 버로우즈의 인생사를 결합시켜서 자신만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써냈다. 영화 초반부에 주인공 윌리엄 리(피터 웰러 분)는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총으로 아내를 죽이게 된다. 이른바 '윌리엄 텔' 묘기를 하려다 그렇게 된 것이다. 아들의 머리에 사과를 올려놓고 활을 쏘아야만 했던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 속 주인공 빌헬름 텔. 실제로 윌리엄 버로우즈는 1951년, 영화의 그 장면처럼 아내를 총기 사고로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소설 '네이키드 런치'는 버로우즈에게 작가로서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해준 작품이다. 약물 중독자인 주인공의 기괴한 모험담을 그린 이 책은 외설적인 표현과 난해한 이야기 구성 때문에 출간 이후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조부의 발명품 특허로 불어난 집안의 재산은 버로우즈에게 크나큰 자유를 선물했다. 하버드 대학까지 나온 남자는 결국 온갖 약물에 찌든 '약쟁이'가 된다. 그의 아내도 약물의 영향 아래에 함께 놓였다. 아내의 죽음은 버로우즈를 인생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다. 살인죄로 기소되었지만, 부유한 집안의 도움 덕분에 감옥행은 피한다. 그런 그가 주목한 곳은 모로코의 '탕헤르(Tangier)'였다. 1949년에 나온 폴 보울스(Paul Vo

사기꾼인가 예술가인가, Author: The JT LeRoy Story(2016)

      1999년, 미국에서 '사라(Sarah)'라는 제목의 소설책이 나온다. 작가의 이름은 Terminator.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가명으로 출판된 이 책은 파격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으로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매춘부 엄마를 둔 어린 소년의 학대와 상처 가득한 성장기를 그린 소설이었다. 역시 그 해에 출판된 단편 소설 모음집 '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도 호평을 받으면서, '터미네이터'란 이름의 작가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이듬해인 2000년 5월, 익명의 작가는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의 이름은 'JT LeRoy', 제레마이어 터미네이터를 줄인 'JT'로 불리는 17세의 소년은 단번에 천재 소설가로 떠오른다. 염색한 긴 머리, 선글라스, 독특한 옷차림으로 나타난 JT는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 마약 중독,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예민하고 불안한 예술가로 대중에게 비춰졌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학계 뿐만 아니라 패션, 영화, 음악계의 유명인들과 교류하는 셀럽이 된다. 영화 감독 구스 반 산트는 JT가 쓴 '사라'를 영화로 만들려고 했다. 이탈리아의 유명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의 딸인 아시아 아르젠토는 JT의 또 다른 책을 바탕으로 영화를 찍는다. 커트니 러브, U2, 위노나 라이더 같은 이들도 JT와 알고 지냈다. 그런데 이 잘 나가는 젊은 작가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제프 퓨어차이그(Jeff Feuerzeig) 감독의 2016년작 다큐 'Author: The JT LeRoy Story(2016)'는 작가 JT 르로이를 둘러싼 거대한 사기극의 전모를 보여준다.   다큐는 로라 알버트란 이름의 여성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여자는 어린 시절에 이혼한 부모로 인한 불행한 성장기, 위탁 가정에서의 생활, 폰섹스 전화 상담원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이십대 초반을 회

중년 여성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만국(晩菊, Late Chrysanthemums, 1954)

  *이 글에는 영화 '만국(晩菊)'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자는 빌려준 돈을 받아내려고 지인이 일하는 여관으로 찾아간다. 그러나 결근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여자가 나가자, 여관에서 일하는 청소부는 여자가 걸어가는 방향 쪽으로 냅다 물을 뿌린다. 마치 '재수없는 여편네, 얼른 꺼져라' 하는 것 같다. 여자의 이름은 킨, 일숫돈 받아내느라 여념이 없는 그 여자는 어딜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다. 또 다른 채무자의 가게에 가서는 정문이 아니라 뒷문으로 들어간다. 전번에 자신을 보고 도망쳤기 때문에, 미리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늘 집에 돈을 둔 여자는 대낮에도 도둑이 들까봐, 하녀가 잠깐 두부 사러 나간 새에도 문단속을 철저히 한다.      나루세 미키오의 '만국(晩菊, Late Chrysanthemums, 1954)'은 '흐르다(流れる, 1956)'의 스핀오프(spin-off)처럼 느껴진다. '흐르다'에서 궁기 흐르는 늙은 게이샤 소메카로 나왔던 스기무라 하루코가 '만국'에서는 있는 것이라고는 돈 뿐인 은퇴 게이샤 킨으로 나온다. 영화는 킨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세 명의 은퇴 게이샤들의 사연이 어우러진다. '흐르다'에서 쇠락해가는 게이샤 집안의 이야기를 다룬 나루세 미키오는 은퇴 게이샤들의 삶을 들여다 본다. 역시 '돈' 문제는 나루세 미키오의 주요한 관심사이다. '만국'의 주인공들은 어떤 형태로든 돈에 얽매여 일그러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 아이들이 뛰노는 주택가 골목을 비추던 카메라는 킨의 안방으로 들어간다. 마치 경건한 의식이라도 치루는 것처럼 킨은 돈 세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킨의 관심사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땅을 사들이는 것과 일숫돈을 받아내는 일이다. 괜찮은 집에서 청각 장애인 하녀를 두고 윤택한 중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킨과는 달리 동료 게이샤들은 그저 하루하루

Anna May Wong이 가장 사랑한 영화, Java Head(1934)

    LA의 가난한 중국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소녀는 영화를 보면서 배우에 대한 꿈을 키운다. 영화 촬영의 중심지였던 도시에서 14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엑스트라를 맡는다. 독특한 마스크와 연기력으로 주목을 받았고, 17살에 드디어 첫 주연을 따낸다. 오페라 나비 부인의 각색된 영화 버전인 'Toll of Sea(1922)'에서 였다. 안나 메이 웡(Anna May Wong)은 헐리우드 최초의 중국계 여배우로 미국을 비롯해 유럽에서 자신의 영화 경력을 쌓았다. 헐리우드 경력 초창기, 안나는 동양에 대한 이국적이고 차별적인 선입견에 기반한 역할들이 주어지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했다. 이 여배우는 주로 사악한 악녀로 주인공을 괴롭히거나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역할을 맡았다. 다양한 연기 경력에 대한 열망은 안나를 유럽으로 향하게 했다. 영국을 비롯해 독일에 머물면서 영화를 찍었다. 영화 'Java Head(1934)'는 안나가 영국에서 찍은 5편의 영화 가운데 한 편으로 배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의 원작은 미국 작가 조셉 헤르게스하이머(Joseph Hergesheimer)가 쓴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Java Head'는 1923년에 헐리우드에서 무성 영화로 제작되었지만, 유실되었다. 1934년에 영국의 소롤드 디킨슨 감독은 같은 제목의 유성 영화를 찍었고, 안나는 백인 남편과 결혼한 만주족 공주 역을 맡았다. 매사추세츠가 배경인 원작은 시나리오로 각색되면서 항구 도시 브리스톨로 바뀌었다. 영화의 제목 'Java Head'는 부유한 선주 제레미 아미돈이 자신의 저택에 붙인 이름이다. 인도양의 험한 해협 지형 자바 헤드는 제레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둘째 게릿은 집안의 앙숙인 던삭 가문의 딸 네티를 사랑하고 있다. 네티의 할아버지는 게릿과의 교제를 반대하고, 게릿은 실망하며 1년 동안 바다를 떠돈다. 마침내 게릿이

한 시대를 풍미한 축구 스타의 빛과 어둠, Diego Maradona(2019)

    "축구는 속임수(feinting)의 기술이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 영국과 아르헨티나 전에서 그가 넣은 두 개의 골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유명한 '신의 손'에 의한 것이었다. 마라도나는 한 손과 머리를 사용해서 골을 넣었는데, 그 순간을 놓친 주심은 골로 인정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비열한 속임수도 마다하지 않는 그에게 오명과도 같은 별명이 붙게 된 이유였다. 아시프 카파디아는 '세나(Senna, 2010)', '에이미(Amy, 2015)'에 이어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 2019)'를 내놓으면서 그의 유명인 3부작에 마침표를 찍었다. 다큐는 현대 축구사의 상징적인 아이콘인 마라도나의 축구인생을 돌아본다. 카파디아는 수백 시간의 자료 화면을 추리고 추려서 마라도나의 흥망성쇠를 극적으로 재구성해서 보여준다. 이 다큐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마라도나의 첫 에이전트의 놀라운 안목 덕분이었다. 그는 두 명의 카메라맨을 고용해서 마라도나를 따라다니며 찍게 했다. 그렇게 남은 필름들과 마라도나의 아내 클라우디아의 개인 비디오 소장 자료가 더해지면서 다큐의 사실성은 세밀하고 풍성해졌다.   다큐의 첫 도입부는 강렬한 비트의 음악과 함께 정신없이 내달리는 스포츠카의 내부 장면에서부터이다. 마라도나가 타고 있는 차는 이제 막 어딘가에 도착한다. 나폴리, 그가 FC 바르셀로나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빈 손으로 오게 된 도시였다. 1984년 7월, 마라도나가 왔을 당시 SSC 나폴리는 리그 순위 밑바닥을 전전하는 약체 팀이었다. 거기에다 지역적으로도 낙후된 나폴리는 이탈리아에서 마치 불가촉천민과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다른 도시 사람들은 나폴리를 이탈리아의 하수구, 시궁쥐로 부르며 조롱하고 모욕했다. 그런 그곳에 마라도나는 세리에 A리그 우승을 2번이나 안겨준다. 그는 나폴리에서 신과 같은 존재였다. 나폴리에서의 활약과 함께

전후 소시민의 내면을 그리다, 위험은 가까이에(風前の灯, Danger Stalks Near, 1957)

    "네가 나를 어묵으로 죽이려 드는구나!"   심통 가득한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점심에 내놓은 어묵 반찬을 타박한다. 속이 불편한 자신에게 소화가 어려운 어묵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정작 아침에 이 시어머니는 자식들 먹이느라 좋은 어묵은 못먹어봤다는 과거를 늘어놓았다. 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사실 좀 많이 이상하다. 시어머니는 자신이 낸 신문대며, 두부 사온 것을 가지고 칼같이 며느리에게 돈을 받아낸다. 심지어 시어머니는 방에 따로 자신이 먹을 것을 쟁여둔다. 며느리 유리코는 어린 아들이 달걀말이를 먹고 싶다고 말하자 계란이 없다고 하는데, 아들은 할머니방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시어머니 찬장에서 계란 하나를 꺼내오면서 계란값을 넣어둔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1957년작 '위험은 가까이에(風前の灯, Danger Stalks Near, 1957)'는 코미디와 스릴러가 결합된 독특한 서민극이다. 영화는 두 명의 불량배와 그들의 협박에 못이겨 따라나선 가난한 고학생이 교외 주택에 강도짓을 모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알부자로 소문난 시어머니 테츠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 유리코(타카미네 히데코 분). 유리코의 시어머니는 남편의 계모로 그 고약한 성질과 인색함 때문에 유리코도 남편도 무척 싫어한다. 그러나 구두 상점에서 일하면서 빠듯한 월급으로 겨우 살아가는 그들 부부에게 시어머니와의 동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들이 사는 집은 시어머니 소유이다. 강도들은 카네시게가 출근한 뒤에 고부와 아이가 있는 틈을 타 강도짓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진다. 집에는 세입자 아가씨가 태워먹은 다다미 짜맞추느라 점원들이 드나들고, 우편배달부, 유리코의 여동생들, 남편의 조카를 비롯해 새로운 세입자의 방문으로 북적인다. 강도들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된다. 이 어설픈 강도단은 멀리 보이는 언덕배기에서 시간만 죽이고 있을 뿐이다. 한편, 그들이 노리는 집 안에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돈 이야기를

부유하는 도시 청춘들의 비애, 마작(麻將, Mahjong, 1996)

    언젠가 아주 흥미로운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가출팸(가출 후 함께 생활하는 무리를 지칭)을 이끄는 한 남자에 관한 것이었다. 삼십 초반의 이 남자는 차량 절도의 달인이었다. 어떤 차라도 그의 손기술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는 값비싼 차들을 절도해서 자신의 가출팸 구성원들을 먹여살렸다. 일반적으로 가출팸이 성매매와 연계된 다양한 범죄의 온상인 것과는 달리, 그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청소년 아이들을 그저 부양할 뿐이었다. 아이들은 경찰에게 그가 자신들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으며, 아빠처럼 항상 보살펴주었노라고 진술했다. 아마도 그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가족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양(楊德昌) 감독의 1996년작 '마작(麻將, Mahjong)'에도 그런 가출팸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가출팸에는 의리도 인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거짓말, 사기, 매춘, 폭력으로 점철된 4인조 가출팸의 절망적인 타이페이 생존기를 그린다.   레드 피시(紅魚), 룬룬, 치약, 홍콩으로 이루어진 가출팸의 리더 레드 피시는 영국인 애인 마커스를 찾아 프랑스에서 온 마르트를 유인해 콜걸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 룬룬은 그런 마르트에게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레드 피시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돈을 뜯어낸 꽃뱀 안젤라에게 복수하려고 한다. 여자 후리는 재주를 지닌 홍콩을 내세워 안젤라를 유혹하고, 치약은 영적 능력을 지닌 승려로 변장시켜 안젤라의 신뢰를 얻어내려고 한다. 레드 피시의 아버지는 거액의 부도를 내고 잠적했는데, 조폭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 레드 피시를 납치하려고 한다. 그러나 룬룬을 레드 피시로 오인한 조폭들은 룬룬과 마르트를 인질로 삼게 된다. 한편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에 대한 극도의 증오에 사로잡힌 레드 피시는 아버지를 찾아내 분노를 터뜨린다. 이 가출팸은 계획한 사기극을 성공시켜서 그럴듯한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타이페이의 4인조 가출팸에게는 가족이 없다. 레드 피시의 아버지는 10년 넘

헤어초크의 어설프고 기이한 사형제 다큐, Into the Abyss(2011)

    "그건 마치... 내 어깨에 얹힌 커다란 짐짝을 치운 것 같은 기분이었죠."   시종일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던 여자는 그 말을 할 때는 차분하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여자는 동네의 십대 살인범들에 의해 어머니와 남동생을 잃었다. 두 명의 살인범들은 각각 종신형과 사형을 선고받았다. 약물주사형으로 사형을 받은 마이클 페리의 마지막을 참관한 심정을 여자는 그렇게 대답했다.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2011년작 다큐 'Into the Abyss'는 실제 살인 사건의 관련자들을 인터뷰하며 사형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공포 영화를 잘 못보는 사람이라면 밤에 이 다큐를 보는 것은 피해야 한다. 살인 사건 직후 경찰이 촬영한 현장 화면은 꽤나 강렬한 정서적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헤어초크는 십대 살인범들이 저지른 참혹한 범죄를 직접적으로 설명하거나 언급하는 대신, 수사 담당 경찰관의 증언과 경찰측에서 촬영한 현장 화면으로 제시한다. 사실은 때론 영화적으로 가공된 그 어떤 무시무시한 장면 보다 공포스럽다.   다큐는 사형 집행이 임박한 마이클 페리를 헤어초크가 인터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십대 사형수는 해맑은 표정으로 천국으로 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무고한 세 명의 사람을 죽인 살인범이다. 그런데 천국으로 갈 날을 꿈꾼다고? 페리는 도대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 수 없다고, 마치 살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말을 이어간다. 억울한 누명을 쓰기라고 했단 말인가? 그런데 그의 공범 제이슨 버켓도 같은 말을 한다. 자신은 전적으로 죄가 없으며, 누군가와 술을 진창 마셨는데 일어나 보니 살인범이 되어있었다며 인터뷰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관객들은 에롤 모리스의 '가늘고 푸른 선(The Thin Blue Line, 1988)'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살인 사건의 증거는 너무나도 명백하며, 페리는 검거되어서 자신의 범죄에 대해 인정하고 자백했다. 다큐의 시작부터 헤어초크는

체코 현대사에 드리워진 소련 지배의 기억, Witchhammer(Kladivo na čarodějnice, 1970)

    '마녀 망치(Witchhammer)'란 용어는 중세 시대 마녀 사냥의 교본이 되었던 '말레우스 말레피카룸(MALLEUS MALEFICARUM)'에서 나왔다.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란 뜻의 그 책은 마녀와 이단의 색출과 고문에 대한 자세한 방법이 실려있는 책이다. 극단적이고 교조주의적인 신념에 의거해서 기술된 그 책은 중세 마녀 사냥 광풍의 중심에 자리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감독 오타카르 바브라(Otakar Vávra)의 1970년작 'Witchhammer(Kladivo na čarodějnice)'는 1670년대 모라비아 지방에서 있었던 마녀 사냥을 다룬다. 영화의 원작은 1963년에 출판된 Václav Kaplický의 동명의 소설로, 감독 자신이 시나리오 작업을 맡았다. 바브라 감독은 원작 소설과 함께 남아있는 실제 재판 기록도 참조했다.   사건은 거지 노파의 성체(聖體, 사제에 의해 축성된 빵) 은닉 시도가 들통나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거지 여인은 산파가 아픈 소의 우유가 잘 나오게 소에게 먹일 성체를 갖다 달라고 했다며 실토한다. 그러나 소식을 들은 여영주 백작 부인은 다른 신성모독 사건이 있는지 종교재판을 열어 알아보라며 지시한다. 백작 부인의 참모는 종교 재판관 보블리그를 초빙할 것을 권유한다. 여관이나 운영하면서 은거하고 있었던 보블리그는 백작 부인의 승인하에 마녀재판을 시작한다. 보블리그는 가혹한 고문으로 얻은 자백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화형대에 올린다. 처음에는 가난하고 늙은 여자들이 마녀로 몰렸지만, 나중에는 영지의 돈 있는 상공업자와 유력 인사들이 마녀로 고발당한다. 교구 사제 라우트너는 보블리그의 무자비하고 부당한 마녀 사냥을 우려하며 주교와 관리들에게 재판의 중단을 요구한다. 그러나 라우트너의 요청은 거절당하고, 보블리그는 그런 라우트너를 마녀들의 수괴로 몰아간다.   중세 시대 마녀 사냥은 단지 신앙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