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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22의 게시물 표시

죽음의 골짜기에서 보낸 1년, Restrepo(2010)

    20분. 오래전 읽은 시나리오 작법 책 첫부분에 나온 조언은 '20분 안에 관객을 사로잡지 못하는 영화는 망한 영화'라고 쓰여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 이후로 나는 어떤 영화를 보든 20분을 한계 시간으로 정해놓고, 그 영화를 볼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대개 괜찮은 영화들은 그 기준선 안으로 여유있게 들어온다. 다만, 가끔 그 20분을 넘겨서 인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대가( 大 家 )'라고 내가 생각한 영화 감독들이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이 그러했다. 그의 영화 '희생(1986)'은 나에게 대단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영화였다. 세 번을 보았는데, 안타깝게도 그 세 번 모두 보다가 졸았다. 나중에 눈을 떠보면 집이 불타고 있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세바스찬 융거와 팀 헤더링턴이 만든 다큐 'Restrepo(2010)'는 시작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미군 장갑차 내부를 보여주는 화면은 갑작스런 폭발음과 함께 관객을 놀라게 만든다. 2분 45초쯤이다. 내 머릿속의 20분 기준선은 이미 날아가 버렸다. 탈레반이 설치한 IED(Improvised Explosive Device)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터졌고, 다큐의 초반부는 폭발음에 놀란 미군 병사들이 전투에 돌입하는 그 짧은 순간을 긴박하게 담아낸다. 촬영을 맡은 팀 헤더링턴은 총 대신에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전투 현장을 찍는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촬영이다. 그는 무려 1년여의 시간을 장병들과 같이 지냈다.   미국 잡지 'Vanity Fair'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다큐는 2007년 5월부터 15개월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격전지라고 알려진 코렌갈 계곡(Korangal Valley)을 사수하는 미 육군 부대 장병들의 모습을 담았다.   "거긴 죽음의 땅이지. 엿같은(holy shit) 곳이라구!"   그곳에 배치되었다고 하자, 장병들에

자아의 각성과 성장, The Heiress(1949)

  헨리 제임스(Henry James)문학의 영화적 변용 3부: The Heiress(1949), William Wyler 감독  "넌 잘난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아, 한가지 예외가 있기는 하지. 자수 하나는 잘 놓더군."   딸은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보기에 사윗감이라며 딸이 선보인 남자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무래도 딸이 나중에 상속으로 받게 될 재산을 보고 들이댄 놈팽이가 분명하다. 남자가 노리는 것이 '돈'이라고 말하지만, 딸은 믿지 않는다. 아버지는 결국 뼈아픈 독설을 퍼붓는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1949년작 'The Heiress'는 Augustus Goetz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희곡의 원작은 헨리 제임스의 소설 '워싱턴 스퀘어(Washington Square, 1880)'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부유한 저택의 한 아가씨 캐서린을 보게 된다. 그런데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 것 같은 아가씨가 생선 장수에게서 생선을 사들고 온다. 들어오는 길에 아버지와 마주친 캐서린은 아버지를 위해 요리할 싱싱한 생선을 샀다고 말한다. 그런 딸을 대하는 아버지는 다소 거리감이 있고 냉담하게 느껴진다. 아버지 슬로퍼 박사는 그런 건 직접 할 게 아니라 배달을 시키고, 제발 밖에 나가서 사람 좀 만나라고 말한다. 원작 소설에는 없는 이 장면은 캐서린이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적이고, 그 애정을 갈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영화에서 캐서린 역을 맡은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Olivia de Havilland)는 헐리우드 고전기를 대표하는 미녀 배우였다. 그런데 영화 속 캐서린은 큰 이모네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다.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예의상 춤 신청을 했던 남자는 곧 캐서린을 내버려 두고 다른 아가씨와 춤을 춘다. 뭔가 좀 이상하다. 아니, 저 미녀 아가씨를 왜 외면하는 거지

일상 속에 내재된 중산층의 공포, 새장 속의 여인(Lady in a Cage, 1964)

    이 영화는 오프닝부터 눈길을 끈다. 히치콕의 '사이코(Psycho, 1960)'를 본 이들이라면 검정 바탕에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멋지게 배열되는 오프닝 타이틀을 기억할 것이다. '새장 속의 여인(Lady in a Cage, 1964)'의 오프닝 타이틀도 그에 못지않게 강렬하다. 마치 관객들에게 앞으로 볼 이 영화에 대한 선명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본 이들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폭력성과 잔혹성에 놀라게 된다. 1960년대에 이렇게 대담하고 노골적으로 폭력과 광기에 대해 다루었던 영화가 있었던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아도 이 영화는 기괴한 불안함과 두려움을 안겨준다.   부유한 힐야드 부인(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분)은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골절상을 입은 후로 집에서 이동하기 쉽게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그런데 아들이 주말 휴가를 떠난 사이, 전기에 문제가 생겨서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힐야드는 그대로 갇혀 버린다. 엘리베이터에 있는 비상벨을 누르면 집밖에서 경보음으로 들리게 되어있는데, 독립기념일 행사로 시끄러운 거리에서 그 소리를 듣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노숙자 술꾼 조지는 힐야드의 집을 기웃거리다 침입하게 되고, 힐야드가 갇힌 것을 보고는 크게 도둑질을 할 기회로 여긴다. 조지는 매춘부 세이디를 불러서 같이 집을 털기로 한다. 그런 그들을 불량배 3인방이 몰래 뒤따라 온다. 랜들(제임스 칸 분), 일레인, 에시는 조지와 세이디를 제압하고 힐야드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힐야드는 필사적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가려고 애를 쓰지만, 공중에 매달린 새장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나갈 방법이 없다. 자신들의 얼굴을 보았다는 이유로 조지와 세이디, 힐야드를 모두 죽이겠다고 선언한 랜들. 과연 힐야드 부인은 이 엄청난 재앙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을까?   영화 '대부(1972)'에서 콜레오네 가문의 장남 소니로 나왔던 제임스 칸은 이 영화가 실질적인 데뷔작이다.

욕망의 집착과 상실, The Lost Moment(1947)

  헨리 제임스(Henry James)문학의 영화적 변용 2부   The Lost Moment(1947), Martin Gabel 감독 *이 글에는 영화 'The Lost Moment(1947)'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레베카(Rebecca, 1940)'. 가난하고 별 볼 일 없었던 젊은 아가씨는 부자와 결혼하는 행운을 잡는다. 그리고 남편의 대저택에 입성하는데, 그곳에서 위압적인 여집사 댄버스 부인과 마주한다. 영화 'The Lost Moment(1947)'의 주인공 출판업자 루이스 베너블은 줄리아나 보데로의 집에서 줄리아나의 조카 티나와 마주한다. 수잔 헤이워드가 연기한 티나는 마치 그 댄버스 부인을 연상케 한다. 뻣뻣하고 오만한 태도로 티나가 요구하는 저택의 하숙비는 터무니없이 높지만, 루이스는 기꺼이 지불하기로 한다. 물론 그에게는 나름의 속셈이 있다. 그곳에서 루이스는 유명 작가 제프리 애스펀의 숨겨진 연애 편지를 찾으려 한다. 애스펀의 편지를 받았던 주인공 줄리아나는 이제 백발의 노파가 되어 있다.   영화 'The Lost Moment'는 헨리 제임스의 '애스펀의 러브레터(The Aspern Papers, 1888)'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Leonardo Bercovici가 맡은 각색은 제임스 소설의 기이한 변용을 보여준다. 백발의 노파 줄리아나 역을 맡은 아그네스 무어헤드(Agnes Moorehead)는 5시간이 넘는 특수분장을 한 후에 연기를 했다. 거의 살아있는 해골에 가깝게 늙어버린 줄리아나는 마치 사악한 마귀 할멈처럼 비춰진다. 줄리아나의 대저택은 고딕 소설의 음산한 건축물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곳에 편지를 찾기 위해 잠입한 용사 루이스는 곧 자신이 구해야할 대상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느 날 밤, 루이스는 저택의 버려진 방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티나를 발견한다. 루이스를 반갑게 맞이하는 티나는 스스로를 젊은 날의 이모

서늘한 사랑의 초상, 비둘기의 날개(The Wings of the Dove, 1997)

  헨리 제임스(Henry James)문학의 영화적 변용 1부: The Wings of the Dove(1997), Iain Softley 감독     "밀리는 죽어가고 있어.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간절히 원하지."   여자는 남자에게 비밀스럽게 속삭인다. 케이트와 머튼은 연인 사이이다. 현실적인 이유로 결혼을 미룬 둘은 비밀리에 약혼을 하고 주변을 속인다(영화에서는 약혼 사실이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은 돈 때문이다. 가난한 케이트는 부유한 이모 집에서 기거하고 있는데, 이모는 케이트를 부자 귀족과 맺어주려고 한다. 머튼은 가진 것 없는 글쟁이 기자라서 이모 눈에는 들지도 않는다. 그런 케이트 앞에 미국인 상속녀 밀리가 나타난다. 피붙이 하나 없는 밀리는 죽을 병에 걸려 있다. 그런데 밀리는 케이트의 연인 머튼에게 마음을 뺏긴다. 밀리와 친구가 된 케이트는 속내가 복잡해진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밀리와 머튼을 결혼시키고 유산을 받게 하면 어떨까? 그리고 나서 자신이 머튼과 결혼하면 되지 않은가?   과연 케이트는 악녀인가? 케이트를 사랑하는 머튼은 정직한 인물로 거짓말을 혐오한다. 그런 그에게 연인 케이트는 다른 여자에 대한 '거짓 사랑'을 강요한다. 그것도 죽어가는 여자를 상대로 유산을 얻어내라고 말이다. 밀리가 원하는 사랑을 주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 않냐고 남자를 구슬린다. 남자는 연인에 대한 집착과 환멸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모자가 된다.   헨리 제임스(1843-1916)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가였다. 미국인으로 태어났으나 유럽을 동경했고, 결국 영국으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살아생전에 소설과 희곡을 비롯해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동시대에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창작 활동을 해나갈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이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에 이르러서 였다. 그즈음 미국 출판계에서 선집 형태로 나

자본주의에 대한 매혹적인 영상 서사시, Ascension(登楼叹, 2021)

    38살이 넘은 사람은 지원할 수 없다. 몸에 문신이 있는 사람도 안된다. 회사에서 3분 이내의 거리에 있는 기숙사가 제공된다. 방 하나에 4명, 최대 8명이 같이 쓴다. 구인 담당자들은 버스 터미널 앞에서 자신들이 요구하는 조건을 외친다. 캐리어를 끌고 이제 막 상경한 것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들은 그 조건들을 유심히 듣는다. 마침내 마음을 결정한 이들은 대형 관광 버스에 몸을 싣는다. Jessica Kingdon의 2021년작 다큐멘터리 'Ascension(登楼叹)'의 도입부는 대형 제조사들의 현장 구인 장면을 담는다. 다큐는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의 산업 현장과 노동자들, 그리고 다양한 사치 산업과 소비 행태를 통해 오늘날 중국 자본주의의 현실을 조망한다.         내레이션이 배제된 이 다큐는 이미지와 소리, 음악으로만 내러티브를 구성해 나간다. Dan Deacon이 맡은 음악은 군데군데 전자음과 공장의 기계음을 합성했다. 때론 빠르게, 느리게 흘러가면서 음악은 다큐에 운율을 부여한다. 쉴 새 없이 기계에서 쏟아지는 플라스틱 부품들, 그것을 반복적으로 조립하는 공장 노동자들, 그들은 가끔씩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동료에게 왜 공장장에게 밥을 사지 않느냐며 말하는 이는 그에게 잘 보여야 일거리를 계속 줄 거라며 설득한다. 노닥거리지 말고 잡담도 하지 말라며 경고하는 관리자. 아마도 관리자의 자녀라고 생각되는 아이는 공장을 비추는 여러 대의 CC TV 화면이 보이는 책상 앞에서 간식을 먹고 있다. 이렇게 이 다큐에는 다층적 의미를 지닌 메시지들이 흥미롭게 숨겨져 있다.   관객들의 시선을 단번에 붙잡는 장면은 성인용 특수 인형(Sex Doll) 제작 현장일 것이다. 실리콘으로 제작되는 인형을 만드는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그들은 섭씨 400도가 넘는 고온의 성형 도구를 다룬다. 거기에 가려움증을 유발하는 유해한 염료와 가루와도 씨름해야 한다. 주문 고객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최

세 편의 애니메이션 영화로 바라본 사람과 세상: On-Gaku: Our Sound(2019), The Summit of the Gods(2021), Flee(2021)

  On-Gaku: Our Sound(2019), Kenji Iwaisawa The Summit of the Gods(2021), Patrick Imbert Flee(2021), Jonas Poher Rasmussen 1. 일본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바람, On-Gaku: Our Sound   하고 싶은 일이 없어도 괜찮은 걸까? 고등학생 켄지와 오타, 아사쿠라는 학교 동아리방에서 비디오 게임이나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다. 한주먹하는 켄지에게는 싸움을 걸고 싶어하는 오바와 그 패거리들이 골칫거리다. 그러나 켄지는 '짱'이 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켄지에게 누군가 잠깐 일렉 기타를 맡긴다. 그때부터였다. 켄지가 음악을 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민머리, 각진 눈, 뚱뚱한 외모를 지닌 아웃사이더 3총사는 그렇게 밴드를 결성한다. 이 밴드, 과연 연주는 할 수나 있을까?          이와이사와 켄지는 2019년에 독특한 애니메이션 영화를 내놓았다. '음악(音楽)'이란 제목의 'On-Gaku: Our Sound'는 제작에 7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모든 작화를 직접 손으로 그린 71분의 이 작품을 만드는 동안 그의 나이는 마흔을 넘겼다. 아마도 이와이사와 켄지에게 이 애니메이션은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중요한, 의미있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On-Gaku'는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지점에 자리한다. 단순하고 간결한 작화, 건조한 유머, 실험적 음악,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서 꽤 괜찮은 울림을 만들어 낸다.   켄지는 자신들의 밴드에 '고무술(古武術, Kobujutsu)'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저 단음으로 베이스 기타를 치고, 드럼으로 두들겨 대는 음악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록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연주는 학교 음악 동아리 리더 모리타를 감동시킨다. 두 밴드는 합심해서 곧 열릴 록 페스티발에 참가하기로 한다. 삼총사 밴드가 연주하는

전후 미국 사회의 병적 징후, 십자포화(Crossfire, 1947)

    B movie. 흔히 우리가 수준 낮은 영화를 언급할 때 'B급 영화'라는 표현을 쓴다. 그 B급 영화를 헐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는 1930년대에서 195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그야말로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쏟아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아주 간명하다.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B movie는 단기간에 적은 제작비로 만드는 영화였다. 주로 70분 안팎의 분량으로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극장의 상영 회전율을 높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1930년대와 40년대의 B movie는 서부극이 주류를 이루었다. 거기에 새로운 장르가 더해졌다. 필름 느와르(Film noir)였다. 제작사 RKO는 필름 느와르의 산실이었다. '삐 삐 삐비삑'하는 소리와 함께 라디오 송신탑이 나오는 인트로 화면. 아마도 오늘날 필름 느와르 영화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제작사 로고일 것이다.   고전기 헐리우드의 많은 감독들에게 B movie 연출은 일종의 수련기에 해당했다. 에드워드 드미트릭(Edward Dmytryk) 감독은 영화사의 메신저 보이(하급 사환)에서부터 경력을 시작한, 말 그대로 밑바닥에서부터 구르면서 영화를 배웠다. 그도 수많은 B movie를 찍으면서 경험을 쌓아갔다. RKO와의 계약은 경력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A급 영화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그런 그에게 '십자포화(Crossfire, 1947)'는 명성과 상업적 성공을 안겨다준 영화였다. 그런데 이 영화를 만든 직후에 그의 경력은 급전직하했다. RKO에서는 해고 통보를 받았고, 미국을 떠나야만 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영화의 원작은 리처드 브룩스(Richard Brooks, 작가 겸 감독)가 1945년에 발표한 소설 'The Brick Foxhole'이다. John Paxton이 각색 작업을 맡았는데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원작의 상당 부분을 바꾸어야 했기 때문이다. 2차 대전에 해병대원으로 참전한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정밀한 풍속화, 잔인한 로맨스(Жестокий романс, A Cruel Romance, 1984)

    영화는 화려한 결혼식 피로연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오구달로바 부인은 이제 막 첫째 딸 올가를 결혼시켰다. 부유한 귀족 사위를 맞았다는 기쁨도 잠시, 몬테카를로에서 살고 있는 둘째 딸로부터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받는다. 남편이 도박으로 재산을 날려 버렸다는 것. 어쩔 수 없이 집을 저당잡힌다. 몰락한 귀족 미망인은 집안을 일으키는 길이 세 딸들의 성공적 결혼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막내딸 라리사만 남았는데, 가난한 집안 형편에 딸의 지참금을 마련할 길은 요원하다. 19세기 러시아에서는 계층을 막론하고 여성이 지참금(dowry)을 가지고 결혼하는 것이 관례였다. 많은 지참금을 지닌 신부는 좋은 신랑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라리사에게는 그 지참금이 없다.   엘다 라자노프(Eldar Ryazanov) 감독의 1984년작 영화 '잔인한 로맨스(Жестокий романс, A Cruel Romance)'는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19세기의 러시아 극작가 알렉산더 오스트로프스키(Alexander Ostrovsky)가 1878년에 발표한 희곡 '결혼 지참금(Бесприданница, Without a Dowry)'이 그것이다. 라자노프 감독은 준비 중이던 영화가 미뤄지던 시기에 아내의 권유에 따라 오스트로프스키의 작품을 읽게 되었다. 주로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코미디 영화를 만들던 그는 생각지 않게 러시아 고전 희곡을 영화화하기로 마음 먹었다. 지참금 없이 결혼하려는 가난한 귀족 여성 라리사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알렉산더 오스트로프스키는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극작가이다. 그는 특히 당시 러시아에서 새롭게 부상한 상인 계층을 등장 인물로 내세워 러시아 사회의 변화를 그려냈다. 영화의 원작이 된 희곡 '결혼 지참금'은 물질적 욕망과 뒤엉킨 결혼 제도를 통렬하게 묘사한다. 작가는 당시 그가 들었던 실제 사건을 가지고 희곡을 썼다. 지참금 때문에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어느 남자의

소리와 타자, 낯선 땅의 기억: Memoria(2021)

    스코틀랜드인 제시카는 낯선 나라 콜롬비아에 잠시 머물고 있다. 여자의 여동생은 원인 모를 병으로 현지 병원에 입원했다. 여자는 한밤중에 이상한 소리에 깬다. '쿵, 쿵'하며 건물을 뒤흔드는 기분 나쁜 소리. 하지만 여자는 그 소리가 자신에게만 들린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제시카는 사운드 디자이너를 만나본다. 낯선 도시의 일상, 소리의 근원을 찾아나선 제시카의 여정은 어느 산속 시골 마을에 이른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주민은 제시카가 들었던 소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데...   'Memoria'는 태국 출신의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의 2021년작이다. 그는 이전의 자신의 영화에 대한 태국 정부의 검열에 항의하며 태국에서의 영화 제작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동성애자인 감독은 영화를 '자식'으로 표현하며, 자신의 아이를 건드리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런 그가 해외에서 만든 첫 영화가 'Memoria'이다. 콜롬비아에서 촬영되었고, 주연은 틸다 스윈튼이 맡았다.   영화를 보다가 살짝 졸았다. 러닝 타임 136분. 자신을 괴롭히는 소리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제시카의 여정은 느리고 명상적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보다가 관객이 잠드는 건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Memoria'는 관객을 끊임없이 각성시키고 긴장시키는 영화가 아니다. 매우 천천히 흘러가면서 관객을 제시카가 머무는 낯선 나라 콜롬비아의 풍광, 사람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소리'들 한가운데로 이끈다. 제시카를 잠들지 못하게 만든 기괴한 소리부터, 사운드 디자이너가 제시카의 이야기를 듣고 재현해내는 소리, 우연히 만나서 듣게 되는 재즈 연주 악단의 소리, 깊은 삼림의 소리... 이방인으로서 제시카는 소리로 '콜롬비아'라는 낯선 나라의 시간과 공간, 역사

O Pai Tirano(The Tyrant Father, 1941), La diosa arrodillada(The Kneeling Goddess, 1947), Hamilton (musical, 2020) , 42nd Street (musical, 2019), A Cop Movie(2021),

  갈무리 해둔 영화들 특집 O Pai Tirano(The Tyrant Father, 1941): António Lopes Ribeiro La diosa arrodillada(The Kneeling Goddess, 1947): Roberto Gavaldón 42nd Street(musical, 2019): Bonnie Langford, Tom Lister, Clare Halse 출연 Hamilton(musical, 2020): Richard Rodgers Theater, 오리지널 캐스트, 2016년 공연 A Cop Movie(2021): Alonso Ruizpalacios 1. 포르투갈의 고전 코미디 영화: O Pai Tirano(The Tyrant Father, 1941)   'O Pai Tirano'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폭군 아버지'쯤 되겠다. 영화의 제목은 영화 속 주인공이 연습하고 있는 연극의 제목과 같다. 포르투갈에서 1941년에 만들어진 영화다. 리스본 백화점 직원 치코는 동료 직원 타탕을 좋아한다. 하지만 타탕은 가진 것 없는 치코를 무시한다. 아마추어 극단 배우인 치코는 집에서 틈만 나면 상연할 연극 연습을 한다. 연극 속 그의 배역은 귀족의 아들이다. 같은 하숙집에 머무는 타탕은 치코의 방에서 연극 연습을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치코를 진짜 귀족으로 착각한 타탕. 극단 배우들은 현실에서 연극 속 배역을 맡아 치코의 사랑을 엮어주려고 노력하는데...   영화가 생각보다 꽤 재미있다. 슬랩스틱적인 요소도 있고, 무엇보다 현실과 연극이 뒤섞이면서 끊임없이 웃음을 만들어 낸다. 외국인의 시선에서는 가벼운 코미디 영화처럼 보이지만, 포르투갈 영화사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언급된다. 영화 곳곳에는 귀족과 평민, 부르주아와 하층민의 계급/계층 갈등에 대한 풍자가 깔려있다. 주인공 치코가 일하는 백화점을 방문하는 고객들은 부유한 이들이다. 역시 그곳에서 일하는 타탕은 화려한 부유층의 삶을 선망한다. 그런 타탕에게

어느 금광 도시의 영화적 연대기, Dawson City: Frozen Time(2016)

    1978년, 캐나다 유콘에 위치한 소도시 Dawson City에서는 오래된 건물의 해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도시의 체육관으로 쓰였던 건물의 지하 동토층에서는 무더기로 매몰된 필름들이 발견된다. 무려 533개에 달하는 무성 영화 필름 릴들이 물과 시간의 힘을 견뎌내고 세상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도대체 왜 그 필름들은 버려졌을까? 다큐멘터리 제작자 Bill Morrison은 필름이 잠들어 있던 도슨 시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Gold Rush는 1850년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일어났다 사그라 들었다. 하지만 미국민들의 일확천금에 대한 열망은 결코 잠들지 않았다. 1896년, 알래스카에 걸쳐 있는 유콘 강(Yukon River)에서 또 한 번의 거대한 금 열풍이 불었다. 'Klondike Gold Rush'였다. 미 전역에서 금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그야말로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잭 런던 또한 금을 찾아 나선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금을 찾는 행운은 소수의 사람들의 것이었고, 잭 런던은 몸만 상하고 빈손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는 그때의 경험을 소설로 써냈다. '야성의 부름(The Call of the Wild, 1903)', '화이트 팽(White Fang, 1906)'은 그 시절의 산물이었다. 앤소니 만 감독의 1954년작 영화 'The Far Country'도 바로 '클론다이크 골드 러시'를 배경으로 한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확장된 서부의 공간 속에 부패한 사법 권력과 개인의 대결, 공동체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도슨 시티는 그 열풍의 중심지에 세워진 도시였다. 다큐는 간결한 자막과 공문서, 뉴스 릴, 도슨 시티의 무성 영화들에서 발췌한 장면들로 도시의 연대기를 구성해 나간다.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버린 영화들 특집: Leave No Trace(2018), Bait(2019), Isabella(2020), The Father(2020), Attica(2021)

말 그대로, 영화를 보고 글을 쓰려다가 쓸 말이 별로 없어서 그냥 버려둔 영화들 특집이다.  1. Leave No Trace(2018)   데브라 그래닉(Debra Granik)의 2018년작 영화. 이라크전 참전 군인 윌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다. 그는 국립 공원 깊은 산속에서 13살 딸과 함께 살아간다. 평화로운 일상의 어느 날, 공원 관계자들은 무단 점거를 이유로 부녀를 내쫓는다. 윌과 톰은 정부 지원으로 주거지를 지원 받아 사회 적응을 시작한다. 마음의 병 때문에 다시 산으로 떠나려는 윌, 그러나 딸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택한다.   "아빠에게 나쁜 것이 나에게도 그런 건 아냐."   사람들과 사회를 두려워 하는 아빠에게 딸은 그렇게 말한다. 잔잔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영화. 산으로 올라가는 아버지와 딸이 작별하는 영화의 마지막은 찡하다. 그 장면은 시드니 루멧 감독의 '허공에의 질주(Running On Empty, 1988)' 결말을 떠올리게 하기도. '언젠가 우린 다시 만날 거야', 폭파 수배범인 부모와 피아니스트의 길을 걸으려는 아들은 그렇게 헤어진다. 'Leave No Trace'는 인물의 감정선을 잘 짚어낸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딸을 연기한 토마신 맥켄지의 연기가 참 좋다. 2. Bait(2019)   영국 출신의 감독 Mark Jenkin이 구식 필름 카메라 Bolex 16mm로 찍은 1시간 29분의 장편 극영화.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는 어촌 마을. 마을은 관광객들과 외지인들에 의해 잠식되어가는 중이다. 영화는 외지인과 내지인의 경제적인 갈등,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다. 마크 젠킨은 이야기 중심의 내러티브가 아닌, 실험적인 방식으로 쇼트들을 분할하고 접합시킨다.   IMDb에서 이 영화에 대한 리뷰는 우호적인 것과 혹평으로 양분되어 있다. 1970년대 영화과 학생들의 실험 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외국 리뷰어의 혹평

야마다 요지(山田洋次, Yamada Yoji) 감독의 영화 속 목소리들(Voices)

고향(同胞, The Village, 1975) 학교(学校, Gakko, 1993) 어머니(母べえ, Kabei: Our Mother, 2008) 작은집(小さいおうち, The Little House, 2014) 1. 1970년대 농촌 청년의 목소리: 고향(同胞, The Village, 1975)     내가 가지고 있는 글쓰기 책에는 소설을 잘 쓰기 위한 여러가지 비법들이 적혀 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누군가에게 들려주 듯이 쓰라는 것도 있다. 사람의 온기를 지닌 목소리. 영화에서는 그것이 작중 화자의 내레이션이 된다. 뛰어난 이야기꾼이며 역사적 통찰력을 가진 일본의 감독 야마다 요지는 그 '목소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1975년작 영화 '고향(同胞, The Village)'은 이와테현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에서 관객들에게 내레이션을 들려주는 주인공은 마을 청년회 회장 타카시이다. 그는 고단한 농촌의 삶에 지쳐있다. 그런 그에게 도쿄 극단의 히데코가 찾아온다. 히데코는 마을 주민들에게 단합의 기회가 될 거라며 뮤지컬 공연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히데코의 제안은 좋지만, 공연비 65만엔을 티켓 판매로 마련해야 하는 상황은 청년회에 부담으로 다가온다. 과연 이 시골 마을에서 극단의 공연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내성적이고 소심한 타카시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가씨에게 고백도 못하고 있다. 그에게는 부인과 사별한 후 두 딸을 키우는 형과 어머니가 있다. 농사와 목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농촌의 삶은 버겁고 힘들다. 마을 젊은이들에게 도쿄는 꿈의 도시이다. 농사에 마음에 없는 그에게 형은 닥달을 하고, 좋아하는 여자는 도쿄에서 살겠다며 떠나버린다. 1970년대 일본은 고도 성장으로 이룬 경제적 발전과 함께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비대해진 도시의 기능과 생산 인력의 충원을 담당한 것은 농촌과 도시 근교 지방의 젊은이들이었다. 영화 속 타카시와 마을 청년들은 생계 때문에 몸은 농촌에

필름 느와르, 전후 미국 사회의 불안한 초상: Somewhere in the Night(1946), D.O.A.(1950), No Way Out(1950)

1. 전후 새로운 젠더 규범의 정의, Somewhere in the Night(1946)   영화는 병실에서 이제 막 의식을 찾은 남자의 시점 쇼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얼굴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그 때문에 붕대로 칭칭 감겨있다. 목숨은 겨우 건졌지만, 관객은 이 남자에게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퇴원 후, '조지 테일러'란 이름으로 제대한 그는 물품 보관소에서 찾은 가방에서 '래리 크라바트'가 남긴 쪽지를 발견한다. 자신은 조지 테일러가 맞을까? 래리 크라바트는 또 누구인가? 래리 크라바트를 찾아가는 남자의 여정에 수상한 이들이 계속해서 들러붙는다.   조셉 멘케비츠 감독의 'Somewhere in the Night(1946)'에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퇴역 군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영화 내내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에 제작된 이 필름 느와르 영화는 전쟁이 미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분명히 미국은 압도적인 승전국이었으나, 그것이 아무런 상처가 없는 영광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영화 속 주인공 조지 테일러는 기억을 잃어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전쟁은 모두에게 혹독한 것이었으며 특히 남자들, 참전 군인에게 큰 상흔을 남겼다. 영화 속에서 기억상실증으로 고통받는 조지 테일러의 모습은 그 한 단면이다. 그는 입대 직전에 자신이 머무른 것으로 되어 있는 호텔에 가서 기억을 되살리려 한다. 그를 응대하는 프런트의 나이든 직원은 호텔 벨보이들이 전쟁으로 모두 입대해 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이 제대 후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덧붙인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모든 군인들의 사회 적응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전쟁으로 단절된 경력의 남성들은 당연히 이전의 사회적 위치를 회복하는 데에 어려

현실과 환상의 경계: City of Pirates(1983), After Hours(1985), Stranger than Fiction(2006)

  1. 망명자 감독이 써내려간 초현실주의적 'Vanitas', City of Pirates(1983)   정신분석학 입문 강의의 첫 번째 과제물은 '자유 연상(Free association)'에 따라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내는 것이었다. 자유 연상, 말 그대로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그 어떤 통제나 검열없이 털어놓게 함으로써 무의식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한 정신분석학적 도구를 발빠르게 수용한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었다. 프랑스의 작가로 초현실주의를 주창한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은 무의식의 표현을 위한 '자동 기술법(automatic writing)'을 착안해냈다. 비현실적 환상으로 채워진 영화 세계를 보여주는 칠레 출신의 감독 라울 루이즈(Raúl Ruiz)의 '해적들의 도시(City of Pirates. 1983)' 시나리오도 그런 방식으로 쓰여졌다. 라울 루이즈는 자신에게 떠오르는 무의식적 사고들을 종이 위에 무작정 써내려갔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영화를 찍었다.   영화는 '해외의 땅, 종전 1주일 전'이라는 의문의 자막으로 시작된다. 이시도르(Isidore)라는 이름의 젊은 여자는 어느 섬에서 어머니, 의붓아버지와 살고 있다. 이시도르는 불안과 우울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의붓아버지의 성추행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괴로워하는 이시도르는 방에 숨어든 어린 소년 말로를 만나게 된다. 가족들이 모두 살해당했다는 말로는 이시도르에게 약혼을 제안한다. 어린 약혼자 말로, 버려진 성에 사는 또 다른 추방자 토비, 이시도르는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기이한 여정에 나서는데...   자동기술법에 따라 쓰여진 시나리오를 관객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영화는 라울 루이즈의 머릿속에서 일어났던 생각의 파편들을 이어붙인 것이다. 10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든 이 다작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