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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와 영화, 그리고 접혀진 현실의 이야기: All Winners, All Losers(2018), A Hero(2021)

  1. 여정의 시작   여학생은 유명한 감독의 다큐멘터리 제작 워크숍에 참여했다. 그는 자국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명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감독은 하나의 주제를 제시했다. 타인의 귀중품을 습득한 후에 댓가없이 돌려준 선행자에 대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감독이 제시한 뉴스 매체 기사를 보고 그것을 참조했다. 하지만 여학생은 자신의 고향에 내려가서 직접 그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친구가 그 지역에서 화제가 된 어떤 죄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Shokri라는 이름의 죄수가 휴가를 나왔다가 돈가방을 발견해서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고 했다. 여학생은 그 이야기를 다큐로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렵게 교도소에서 촬영 허가를 받고, 미담의 주인공 Shokri를 인터뷰했다.   어렵사리 완성된 44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나중에 수업시간에 제출했다. 2년 뒤에 여학생은 감독이 제작하고 있다는 영화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놀랍게도 자신의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이야기에 살이 붙여진 극영화였다. 감독이 만든 그 영화는 2021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여학생은 감독을 상대로 표절 소송을 냈다. 감독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여학생을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테헤란 법원에 접수된 이 재판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일단 하급심은 감독이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을 기각했다(기사 출처: hollywoodreporter.com).   여학생의 이름은 Azadeh Masihzadeh , 그의 다큐는 'All Winners, All Losers(2018)' 이다. 이란 감독 아쉬가르 파르하디(Asghar Farhadi) 는 자신의 영화 'A Hero(2021)' 에서 표절작의 오명을 떨쳐내기 위해 분투중이다. 파르하디는 이미 세상에 보도된 기사에서 아이디어를 취했을 뿐이라며, 표절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기사 출처: deadline.com). 과연 누구의 말...

부부(夫婦)라는 이름의 무게: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The Separation of Nader from Simin, 2011)'

  *이 글은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결말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씨민과 나데르 부부의 이혼 법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내 씨민은 딸 테르메의 교육을 위해 다른 나라로 떠나 살고 싶은데, 남편 나데르는 오랫동안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를 떠나 살 수 없다며 거부한다. 결국 씨민은 집을 나와 친정으로 가고, 나데르는 낮 동안 아버지를 보살펴 줄 간병인 라지에를 고용한다. 라지에는 임신을 한 무거운 몸으로 어린 딸 소마예를 데리고 힘든 간병일을 하는데, 그만큼 절박한 이유가 있다. 남편 호얏이 실직자인 데다가,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있다.   일을 시작한 지 겨우 며칠, 라지에가 일하는 도중 잠깐 외출한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 나데르가 딸 테르메와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침상에서 떨어진 채 의식이 없다. 겨우 응급 처치를 해서 아버지의 의식은 돌아왔지만, 나데르의 라지에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한다. 마침 돌아온 라지에에게 아버지를 묶어 놓고 어디 갔느냐며 추궁하고, 안방에서 없어진 돈까지 언급하며 닥달한다. 일당을 달라는 라지에와 못준다는 나데르가 실랑이를 하는 와중에 라지에는 현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이 일로 유산하게 된다. 라지에의 남편은 나데르를 살인죄로 고발한다.   이후 이어지는 재판 장면들에서는 그곳에 소환된 주변 사람들의 증언, 어떻게든 자신의 윤리적 우위를 입증하기 위해 때론 거짓을 말하는 인물들의 모습들이 담긴다. 이 과정에서 선명하게 부각되는 것은 두 부부의 모습이다. 씨민과 나데르 부부, 라지에와 호얏 부부는 그들이 속한 계층, 가치관, 삶의 방식, 그 모든 것에서 이질적이다. 학교 선생인 씨민과 은행원인 나데르 부부, 전형적인 하층민으로 독실한 이슬람 신앙을 고수하는 라지에와 전직 구두 수선공 호얏 부부. 이 두 부부는 자신들의 삶에 닥친 예기치 못한 사건의 해결을 위해 고민하고 갈등한다. 그들은 분명 서로 다른 편으로 나뉘어 있지만, ...

저 멀리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리고, 24 Frames(2017)

    '동숭 시네마텍', 참 그리운 이름이다. 1995년에 그 영화관이 문 열었을 때, 마치 새로운 영화 세계가 열린 것 같았다. 동숭 시네마텍의 구조가 관객 친화적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비좁은 외벽 계단을 오르내리는 불편을 감수하고 그곳에 갔던 이유는 단 하나, 좋은 영화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도 거기에서 본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1988)'을 잊지 못한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내가 머릿속에 담고 갈 영화일 것이다. 그리고 아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도 그곳에서 만났다. 그때 상영관 좌석은 거의 매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면, 주인공 꼬마 아마드가 달려가는 갈지자( 之) 모양의 산길,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공책에 살포시 꽂혀있는 작은 풀꽃. 진짜 그 두 장면이 다였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떴을 때, 굉장히 허탈하고 사기 당한 기분이 들었다. 뭐 저딴 영화가 다 있냐, 하면서 영화관을 나섰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키아로스타미는 그 후로도 불호 감독이었다. 이 양반은 예술 영화를 표방하면서 아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기술이 있었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와 '체리 향기(1997)'를 챙겨서 보기는 했으나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장면 장면들이 가끔씩 생각나곤 했다. 나는 그 영화가 가진 소박함과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쩌면 그 영화는 '세월의 힘'이 필요한 텍스트인지도 모른다. 젊은 나이에는 그런 느린, 매우 심심한 영화를 밀쳐두기 마련이다. 아마도 그의 유작이 된 '24 Frames(2017)'도 나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영화일 것이다.   영화는 피터 브뤼겔(...

이야기꾼으로서의 감독, 아름다운 도시(Shahr-e Ziba, The Beautiful City, 2004)

    소년원에 수감중인 악바르는 이제 18살 생일을 맞았다. 친구 알리는 깜짝 생일 파티를 열어주지만, 악바르는 그런 알리에게 오히려 주먹을 날린다. 16살에 여자친구를 죽인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알리에게 18살은 바로 그 형이 집행되는 나이를 뜻하기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악바르의 상황을 알게된 알리. 사형을 앞둔 살인자라도 피해자 가족의 탄원이 있으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알리는 방법을 찾는다. 가깝게 지내는 교도관에게 부탁을 해서 잠깐의 휴가를 얻어 나온 알리는 악바르의 누나 피루제와 함께 그 집을 찾아간다. 지난 3년 동안 피루제가 온갖 노력을 해도 소용없었던 그 일을 알리는 해낼 수 있을까?   이란의 감독 아쉬가르 파라디의 2004년작 '아름다운 도시(Shahr-e Ziba, The Beautiful City)'는 관객들을 낯선 이란의 현실로 안내한다. 종교가 모든 일상을 지배하는 이 나라에는 외부자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무척 많다.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The Separation of Nader from Simin, 2011)'를 한번 보자. 늙은 환자를 돌보기 위해 고용된 가정부는 여자인 자신이 남자 환자의 몸을 씻기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지 이맘에게 전화를 걸어서 묻는다.   이 영화 '아름다운 도시'에서는 그 종교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살인자가 무슬림 남성인 경우 피해자 가족이 용서를 하면 사형을 면할 수 있다. 단, 피해자 가족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금전적 댓가(Blood Money)를 치루어야 한다. 말하자면 남자에게는 목숨을 건질 방도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무슬림 여성이 살인자일 때에는 그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 여성은 어떤 경우에도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 그런 기준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널리 통용되는 Qisas, 코란을 바탕으로 성립된 관습적 처벌법에 명시되어 있다. ...

소에 미친 남자를 통해 바라본 이란 사회, 소(Gaav, The Cow, 1969)

    남자는 소를 그 무엇보다 애지중지했다. 소를 씻기는 일이며, 소가 여물 먹는 것을 보는 일, 소와 함께 하는 그의 일상은 무척 행복했다. 남자가 키우는 암소는 새끼까지 가져서 살림밑천도 늘어날 예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하루 바깥 일을 보고 돌아왔더니, 소가 없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남자의 소가 도망갔다고 했다. 남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상심이 너무도 큰 나머지, 남자는 소 우리에 머물며 식음을 전폐한다. 그러다 소 울음 소리를 내면서 여물까지 먹기 시작한다. 걱정이 되어서 찾아온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은 '하산'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소'라고 말한다... 이거 어디서 본 이야기 같다. 카프카의 '변신' 이야기 아닌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어느 날 벌레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리우스 메흐르지(Dariush Mehrjui) 감독의 1969년작 '소(The Cow)'는 아끼던 소를 잃고 미쳐버려서 자신이 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문명 세계와 단절된 외딴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의 시작은 마을의 바보를 마구 때리고 놀리는 장면에서부터이다. 바보라는 이유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온갖 비웃음과 학대의 대상이 되는데, 마을 사람들 가운데 동정과 연민을 보이는 이는 별로 없다. 이런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불한당들이 있는데, 그들은 마을을 수시로 침입해서 가축들을 훔쳐가는 도적질을 한다. 하산은 자신의 소가 도망갔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에 소가 있다고 믿으며, 그 소를 훔치려는 도적놈들을 막으려고 지붕에 올라가서 지낸다. 그러나 사실 소는 하산이 집을 비운 사이에 갑자기 피를 토하고 죽었고, 마을 사람들은 충격을 받을 하산을 염려해서 우물가에 묻어버렸다. 시간이 지나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하산은 미쳐버린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골람 후세인 사에디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