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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22의 게시물 표시

나루세 미키오의 특이한 영화적 일탈, 오누이(あにいもうと, Older Brother, Younger Sister, 1953)

      오빠는 여동생의 뺨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친다. 여동생도 지지 않는다. 물건을 내던지며 자신을 때리는 오빠에게 달려든다. 그렇지만 남자의 손아귀 힘을 당해내기는 힘들다. 마당으로 밀쳐진 여동생은 그래도 흙바닥에 쓰러지지는 않는다. 급기야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마룻바닥에 드러눕는다. '그래, 차라리 날 죽여. 죽여보라구!' 두 사람을 말리던 노모와 여동생은 허탈함에 눈물만 훔칠 뿐이다.   이토록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는 가족극이라니. 다른 감독이라면 몰라도 이 영화가 나루세 미키오의 필모그래피에 들어있다는 사실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의 1953년작 영화 '오누이(Older Brother, Younger Sister)' 는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작가 무로 사이세이(室生犀星) 의 단편 소설을 영화화했다. 나루세 미키오의 '안즈코(杏っ子, Anzukko, 1958)' 도 무로 사이세이의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 '오누이'의 이야기는 패전 이후, 일본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백발이 성성한 비쩍 마른 가장 아카자와 만난다. 그는 한때 직원을 70명이나 둘 정도로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 전쟁 시기 하천 준설로 큰돈을 벌었으나, 이제는 무기력한 백수 가장이 되어버렸다. 늙은 아내는 강가의 낚시터 근처에서 구멍가게로 생계를 꾸려간다. 이들 부부에게는 삼남매가 있다. 첫째 아들 이노키치(모리 마사유키 분), 둘째 딸 몬(쿄 마치코 분), 막내딸 산(쿠가 요시코 분)이 그들이다. 도쿄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산은 오랜만에 부모를 만나러 온다. 집에는 남자와 사귀다 임신한 언니 몬이 와있다. 불같은 성미를 지닌 사고뭉치 큰오빠가 그런 여동생을 곱게 볼 리가 없다. 이 영화의 일본어 제목 '오누이'는 바로 이노키치와 몬을 가리킨다.   오누이의 치고박는 육탄전 못지않게 이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장면은 또 있다. 몬이 슬립 차림으로 나오는 장면이다.

다큐와 영화, 그리고 접혀진 현실의 이야기: All Winners, All Losers(2018), A Hero(2021)

  1. 여정의 시작   여학생은 유명한 감독의 다큐멘터리 제작 워크숍에 참여했다. 그는 자국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명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감독은 하나의 주제를 제시했다. 타인의 귀중품을 습득한 후에 댓가없이 돌려준 선행자에 대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감독이 제시한 뉴스 매체 기사를 보고 그것을 참조했다. 하지만 여학생은 자신의 고향에 내려가서 직접 그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친구가 그 지역에서 화제가 된 어떤 죄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Shokri라는 이름의 죄수가 휴가를 나왔다가 돈가방을 발견해서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고 했다. 여학생은 그 이야기를 다큐로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렵게 교도소에서 촬영 허가를 받고, 미담의 주인공 Shokri를 인터뷰했다.   어렵사리 완성된 44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나중에 수업시간에 제출했다. 2년 뒤에 여학생은 감독이 제작하고 있다는 영화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놀랍게도 자신의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이야기에 살이 붙여진 극영화였다. 감독이 만든 그 영화는 2021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여학생은 감독을 상대로 표절 소송을 냈다. 감독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여학생을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테헤란 법원에 접수된 이 재판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일단 하급심은 감독이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을 기각했다(기사 출처: hollywoodreporter.com).   여학생의 이름은 Azadeh Masihzadeh , 그의 다큐는 'All Winners, All Losers(2018)' 이다. 이란 감독 아쉬가르 파르하디(Asghar Farhadi) 는 자신의 영화 'A Hero(2021)' 에서 표절작의 오명을 떨쳐내기 위해 분투중이다. 파르하디는 이미 세상에 보도된 기사에서 아이디어를 취했을 뿐이라며, 표절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기사 출처: deadline.com). 과연 누구의 말이 맞

부부(夫婦)라는 이름의 무게: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The Separation of Nader from Simin, 2011)'

  *이 글은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결말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씨민과 나데르 부부의 이혼 법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내 씨민은 딸 테르메의 교육을 위해 다른 나라로 떠나 살고 싶은데, 남편 나데르는 오랫동안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를 떠나 살 수 없다며 거부한다. 결국 씨민은 집을 나와 친정으로 가고, 나데르는 낮 동안 아버지를 보살펴 줄 간병인 라지에를 고용한다. 라지에는 임신을 한 무거운 몸으로 어린 딸 소마예를 데리고 힘든 간병일을 하는데, 그만큼 절박한 이유가 있다. 남편 호얏이 실직자인 데다가,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있다.   일을 시작한 지 겨우 며칠, 라지에가 일하는 도중 잠깐 외출한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 나데르가 딸 테르메와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침상에서 떨어진 채 의식이 없다. 겨우 응급 처치를 해서 아버지의 의식은 돌아왔지만, 나데르의 라지에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한다. 마침 돌아온 라지에에게 아버지를 묶어 놓고 어디 갔느냐며 추궁하고, 안방에서 없어진 돈까지 언급하며 닥달한다. 일당을 달라는 라지에와 못준다는 나데르가 실랑이를 하는 와중에 라지에는 현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이 일로 유산하게 된다. 라지에의 남편은 나데르를 살인죄로 고발한다.   이후 이어지는 재판 장면들에서는 그곳에 소환된 주변 사람들의 증언, 어떻게든 자신의 윤리적 우위를 입증하기 위해 때론 거짓을 말하는 인물들의 모습들이 담긴다. 이 과정에서 선명하게 부각되는 것은 두 부부의 모습이다. 씨민과 나데르 부부, 라지에와 호얏 부부는 그들이 속한 계층, 가치관, 삶의 방식, 그 모든 것에서 이질적이다. 학교 선생인 씨민과 은행원인 나데르 부부, 전형적인 하층민으로 독실한 이슬람 신앙을 고수하는 라지에와 전직 구두 수선공 호얏 부부. 이 두 부부는 자신들의 삶에 닥친 예기치 못한 사건의 해결을 위해 고민하고 갈등한다. 그들은 분명 서로 다른 편으로 나뉘어 있지만, 부부 사이에서도 균열과 상처가

집을 잃은 사람들, 구름에 가린 별(Meghe Dhaka Tara, The Cloud-Capped Star, 1960)

    1947년 이후의 벵골 분할 시기, 캘커타의 난민촌에 사는 니타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니타의 아버지는 난민촌 학교의 선생이지만 그일은 결코 돈이 되지 않는다. 니타의 큰오빠 샹카르는 엄격한 스승 밑에서 Raga를 익히는 중이다. 여동생 기타와 남동생 만투는 아직 학생이다. 대학원생인 니타는 학생들의 과외수업을 하며 번 돈을 모두 집안 살림에 보탠다. 가족들은 니타만 보면 돈 이야기를 한다. 큰오빠는 이발비를, 여동생은 새옷을, 남동생은 축구화를 사달라고 보챈다. 니타는 너그럽게 형제들의 요구를 들어주지만, 엄마는 쓸데없이 돈을 쓴다며 니타를 닥달한다. 정작 니타는 낡은 샌들을 신고 다니다 끈이 끊어져 맨발로 걸어 집에 들어온다.   리트윅 가탁(Ritwik Ghatak) 감독의 영화 '구름에 가린 별(The Cloud-Capped Star, 1960)' 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영화에서 니타 가족은 벵골 분할 이후 동파키스탄에서 캘커타로 이주해온 힌두교 난민 가족이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 벵골 지역은 반영 운동의 중심지였다. 영국은 벵골 지역의 분열을 획책하기 위해 1905년에 이른바 벵골 분할령(Partition of Bengal) 을 내놓았다. 벵골인들의 극렬한 반대에 분할은 철회되었지만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것은 1919년의 암리차르 학살(Amritsar massacre) 로 이어진다. 영국은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1947년, 마침내 인도는 독립한다. 그러나 그동안 억눌려 있었던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사이의 갈등이 터져나온다.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파키스탄의 독립에 이어, 동벵골 지역에 파키스탄의 자치주 동파키스탄(나중에 방글라데시로 독립)이 세워졌다. 그렇게 되자, 동벵골 지역의 힌두교도들은 한순간에 고향을 잃고 인도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 난민들이 가장 많이 정착한 곳이 캘커타였다. 말이 독립국 인도의 국민이었지

홍상수가 아직 말하지 않은 이야기들, 소설가의 영화(The Novelist's Film, 2022)

    준희(이혜영 분)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소설가이다. 예전에는 열정적으로 써내던 소설을 이제는 좀처럼 쓰지 못하고 있다. 오래전에 알고 지냈던 후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우연히 여배우 길수(김민희 분)와 마주친다. 여배우의 소탈한 면모에 호감을 갖게 된 작가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꿈을 털어놓는다. "길수 씨와 영화를 찍고 싶어요." 마침 여배우의 조카와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영화 전공생이다. 금상첨화. 과연 소설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캐릭터에서 홍상수의 영화적 자아를 찾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사실 그것이 전혀 터무니 없는 나만의 허황된 공상도 아니다. 홍상수는 자신을 비롯해 영화쪽 관계자들, 주변인들의 일상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세상과 관객을 향한 메시지 박스 같다. 그렇다면 '소설가의 영화(The Novelist's Film, 2022)' 에서 홍상수의 본심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누구일까? 이전까지는 '감독'으로 나왔던 캐릭터들이 그러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소설가 준희'가 그 역할을 떠맡는다. 관객은 준희가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에서 홍의 본심을 엿본다.   준희는 도시의 전망대에서 예전에 알았던 감독 부부와 마주친다. 감독 효진(권해효 분)은 준희의 소설을 영화로 찍으려다가 그만 둔 적이 있다. 효진과 그 아내(조윤희 분)와의 대화에서 준희는 그때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 효진은 그 영화가 엎어진 이유가 투자자들 때문이었다고 둘러댄다. 하지만 준희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준희는 효진이 돈을 밝히는 감독이라서 돈 안되는 영화를 접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효진의 아내를 향해서는 '돈에 악착스러워 보인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과연 준희의 소설을 좋아하고, 그 영화를 정말로 찍고 싶었다는 효진의 말은 진심일까? '그렇다면 어떻게든

시대의 인습에 굴복하지 않은 여자, 야성의 여인(あらくれ, Untamed, 1957)

    배우 타카미네 히데코(高峰秀子) 가 TV 대담에서 나루세 미키오 감독을 회고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나루세 미키오는 거의 말이 없었고 배우들에게 별다른 연출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나루세 미키오는 당대 최고의 배우들과 작업하면서, 그들의 연기를 무척 신뢰했던 모양이다. 아역 배우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던 연기 천재 타카미네 히데코였지만, 이 배우에게도 버겁게 느껴진 작품이 있었다. 영화 '야성의 여인(Untamed, Arakure, 1957)' 이었다. 고민 끝에 타카미네 히데코는 나루세 미키오에게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요?'하고 물었다. 감독의 대답은 이러했다. "아, 그거? 어렵지 않아. 금방 끝날 거야."   영화 '야성의 여인'은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일본의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토쿠다 슈세이(徳田秋声) 가 1915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あらくれ) 이 그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오시마(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나루세 미키오 영화의 여느 여성 캐릭터들과 확실히 다르다. 이 여성은 매우 강단있고 주체성이 강한 인물이다. 오시마는 자신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남자들에게 과감히 맞선다. 작가 토쿠다 슈세이가 살았던 시대 뿐만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진 1950년대에도 이런 여성은 보기 드물었다. 그 시대의 여성은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갇혀있는 삶을 살았다. 그러니 '오시마'라는 여성의 존재는 더욱 유별나고 특이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었다. 타카미네 히데코가 오시마를 연기하면서 느꼈던 어려움도 거기에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가게의 창문을 열심히 닦는 여자가 보인다. 오시마는 부유한 상인 츠루(우에하라 켄 분)의 후처로 들어왔다. 츠루는 전처를 병으로 잃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새 아내를 바라보는 눈빛은 영 마뜩잖다. 인색하기 짝이 없는 그는 낡은 기모노를 입고 있는 아내에게 옷도 사주지 않는다. 술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데다 바람까지 피운다. 오시

무대 뒤의 쓰라린 인생, The Dresser(1983)

    "저 기차를 당장 세워라!    (Stop that train!)"   풍채 좋은 중년의 배우는 기차역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친다. 때는 2차 대전 시기의 영국. 순회 극단의 단장 Sir(Albert Finney 분) 는 배우들과 함께 다른 도시로 이동중이다. 그런데 그들은 기차 시간에 늦었고, 기차는 이제 막 출발하려는 참이다. Sir의 말 한마디에 기차가 멈춘다. 의상 담당 노먼(Tom Courtenay 분) 이 역장 붙잡고 아무리 애원해도 안되던 것을 배우는 단번에 해낸다.   피터 예이츠(Peter Yates) 감독의 'The Dresser(1983)' 는 영국 극작가 Ronald Harwood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한때 작가는 영국 연극계의 전설적 배우였던 Sir Donald Wolfit의 의상 담당을 했던 적이 있다. 할우드는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The Dresser'를 썼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대배우와 무대 뒤 사람들의 삶을 엿볼 기회를 얻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연극 오셀로의 막이 내리고 배우들은 커튼콜을 하고 있다. 그 커튼 뒤, Sir는 배우들을 향해 불호령을 쏟아낸다. 그는 자신이 연기할 때 방해되는 모든 요소들을 지적하면서, 배우들에게 인격적인 모욕을 주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경'으로 불리는 이 남자의 오만불손함과 자기 중심주의는 하늘을 찌른다. 극단의 재능있는 중견 배우 옥센비는 그를 '폭군'으로 부르기까지 한다. 노먼은 그 폭군 Sir의 충실한 의상담당이다. 말이 의상담당이지, 실제로 그는 Sir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는 하인이나 다름없다. 그의 주인은 주체하기 힘든 변덕에다 폭언과 모욕 또한 일상적이다. 그런데도 노먼은 그 모든 것을 감내한다. 그것도 진심으로, 애정을 가지고 마치 어린 아이를 보살피듯 한다.   노먼이 매혹된 것이 Sir이라는 인물과 그 재능인지, 아니면 연극이라는 예술 세계에 대한 동경인지 명

생의 마지막 순간, Sundown(2021)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아카풀코 해변에 있던 남자는 경찰에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여동생 엘리스는 그를 만나고 가는 길에 갱단의 습격을 받고 죽었다. 그는 여동생의 죽음과 관련된 혐의를 받고 있다. 교도소 샤워장에서 남자는 거대한 돼지가 바닥에 드러누운 것을 본다. 그의 변호사는 곧 그를 교도소에서 빼내어 준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현지에서 사귄 젊은 애인과 재회한다. 여자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피범벅이 된 돼지 사체가 현관 입구에서 그를 맞이한다. 그걸 본 남자는 놀란 나머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다.   교도소 샤워장의 살아있는 돼지라니, 뭔가 초현실주의적인 설정같다. 그런데 그건 그 남자 닐에게만 보인 환시였다. 닐에게 돼지가 전혀 뜬금없는 대상은 아니다. 그는 대형 육가공업체를 소유한 사업가이다. 애인의 집에서 본 죽은 돼지는 그에게 닥칠 불운을 암시한다. 병원의 의사는 닐의 머리에 종양이 있다고 알려준다. 그에게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멕시코 감독 미셸 프랑코(Michel Franco) 의 'Sundown(2021)' 은 관객에게 매우 불친절한 영화이다. 러닝타임 83분, 그리 길지 않은 이 영화는 제대로 된 대사도 없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야 관객은 닐의 삶에 대한 아주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아카풀코의 특급 호텔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중년의 남녀와 두 명의 젊은이가 등장한다. 닐과 엘리스는 남매, 젊은 남녀는 엘리스의 자녀이다. 여동생 가족이 휴양지에서의 여유를 만끽하는 것과는 달리 닐은 무료해 보인다. 그런데 엘리스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평화로운 휴가는 끝이 난다. 엘리스는 모친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일행은 공항에서 급하게 귀국 비행기편을 알아보는데, 닐은 여권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카풀코로 돌아온 그는 싸구려 모텔에 짐을 풀고 무작정 해변에서 시간을 보낸다. 귀국을 독촉하는 엘리스의 전화도 차단해 버린다.

기념비적 공포 영화에 구현된 미국의 인종 문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 1968)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흑인 남자 배우는 백인 여자 배우의 뺨을 때리라는 감독의 연출 지시에 무척 당황했다. 그는 감독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그 장면을 넣은 영화가 개봉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말 모르는 겁니까?"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 1968)' 에 출연했던 여배우 Judith O’Dea 는 당시의 일을 그렇게 회고했다(출처: atlantamagazine.com과의 인터뷰). 감독 조지 로메로(George A. Romero) 는 자신의 첫 장편 영화에 신인 흑인 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배우의 이름은 Duane Jones . 그는 영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로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전에 잠시 연기 생활을 했다(후에 그는 영문학과 교수가 된다). 로메로가 존스를 캐스팅한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존스는 오디션했던 배우들 가운데 연기력이 가장 좋았다. 그렇게 듀웨인 존스는 기념비적인 공포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영화에는 처음부터 정해진 대본도 없었다. 영화는 최소한의 예산으로 매우 경제적으로 제작되었다. 감독의 지인들이 스태프로, 촬영 장소 지역 주민들이 엑스트라로 참여했다. 비싼 컬러 필름 대신에 흑백으로 찍은 것도 다행이었다. 허술한 분장과 현장 세트의 결점을 무난하게 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인 감독의 패기 넘치는 첫 장편은 좀비 영화(zombie movie) 의 기원이 되었다. 잔혹하고 폭력적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제작비의 무려 250배에 달하는 엄청난 수익을 냈다.   부모의 묘를 참배하러 왔다가 좀비에게 오빠를 잃은 바바라(주디스 오디아 분)는 인근 농가로 황급히 숨어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좀비를 피해 벤(듀웨인 존스 분)이 집으로 들어온다. 벤은 매우 차분하고 침착하게 좀비 무리와 맞설 준비를 한다. 그런데 그 집에는 벤과 바바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낸 전후 농촌의 풍경, 권적운(鰯雲, Summer Clouds, 1958)

    나루세 미키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은 좋지만, 거기엔 남자들이 없어요." 미조구치 겐지에게 나루세 미키오는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만 주구장창 찍은 감독으로 각인된 모양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영화 '권적운(鰯雲, Iwashigumo, 1958)' 은 나루세 미키오의 필모그래피에서 특이한 작품이다. 농촌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일본의 사회 변화와 세대 갈등을 중심 주제로 다룬다. 물론 나루세 미키오의 주된 관심사인 '여성의 삶'은 여기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전쟁 미망인인 야에는 농사를 지으며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신문기자 오카와는 농촌 기사를 쓰기 위해 야에를 인터뷰한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진다. 야에는 인색한 시어머니와 고된 농사일에 지쳐있다. 모처럼의 연애 감정은 야에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야에에게는 같은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오빠 와스케가 있다. 와스케는 자신의 세 아들이 대를 이어 농사를 짓길 바란다. 하지만 자식들은 그 삶을 거부한다. 오빠네 집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운데, 야에에게도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다. 오카와는 도쿄로 발령을 받아 떠나기로 되어 있다. 야에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 '권적운'에서 이야기의 중심축은 야에가 아니라, 오빠 와스케의 집안에 있다. 이 영화에서 농촌의 현실은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오카와가 야에와 만나게 된 계기는 농지개혁법 취재 때문이었다. 종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는 강도 높은 개혁으로 일본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농지개혁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952년 에 농지법 이 통과된다. 비로소 일본 농촌은 봉건적 농지 소유 제도가 철폐되고 자작농 중심의 체제로 재편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기존의 대지주들은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정부에 의해 강제로 헐값에 토지를 넘겨야 했기 때

리노 브로카의 거침없는 사회 고발,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Manila in the Claws of Light, 1975)

    필리핀 감독 리노 브로카(Lino Brocka) 의 영화 '카인과 아벨(Cain and Abel, 1982)' 은 구약 성서에서 영감을 받았다. 형 카인은 시기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창세기의 끔찍한 형제 살해는 필리핀의 시골 마을에서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다. 가모장(家母長)이며 대지주인 돈나 피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장남 로렌조와 차남 엘리스. 돈나 피나는 엘리스만을 지독히 편애한다. 실질적으로 농장을 관리하는 로렌조는 어머니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지만 소용이 없다. 엘리스가 형이 받기로 한 땅을 달라고 하면서 이 집안의 비극이 시작된다. 사소한 다툼은 가족 구성원의 죽음을 부르고, 폭력 조직들 사이의 총격전으로 확장된다.   결국 형제 모두 죽음에 이르는 이 막장 가족극은 빈곤한 내러티브와 극단적인 폭력이 기이하게 엉켜있다. 이 영화의 독특한 점은 통속적인 가족 멜로 드라마가 끊임없이 필리핀 사회의 실상을 소환한다는 데에 있다. 권위적이며 독단적인 돈나 피나는 중세 시대 영주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의 장남 로렌조는 지역의 범죄 조직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평화로워 보이는 시골 마을은 돈과 권력, 폭력과 범죄가 뒤얽힌 거대한 복마전과도 같다. '카인과 아벨'에서 리노 브로카는 필리핀 사회에 스며든 증오와 폭력의 그림자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대표작인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Manila in the Claws of Light, 1975)' 는 이 감독의 관심사를 명확히 보여준다. 영화는 흑백의 화면 속 중국인 거리를 비춰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거리의 한 구석에서 노숙자 같은 행색의 청년이 서서히 발걸음을 옮긴다. 화면은 이제 컬러로 변한다. 그는 중국어 간판이 걸린 2층 건물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리고 화면은 곧바로 거친 건설 현장으로 바뀐다. 청년의 이름은 훌리오.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훌리오는 이제 막노동을 하려고 한다. 일을 시작

봉인된 순수와 아름다움, 곤돌라(ゴンドラ, Gondola, 1987)

  지금은 고층 아파트의 이사에 거대 사다리차가 사용되지만, 아주 예전에는 아파트 옥상의 곤돌라(gondola)가 쓰였다. 거기에 이삿짐을 싣고 몇 번을 오르내리면 이사가 끝났다. 이토 치쇼(伊藤智生) 감독의 영화 '곤돌라(Gondola, 1987)' 에서 남자 주인공은 곤돌라에 타서 빌딩의 외벽을 청소한다. 영화의 도입부는 아찔한 부감 쇼트로 청소부 료가 곤돌라에서 고층 빌딩 아래를 내려다보는 장면이다. 뜨거운 여름 날, 고공에서 빌딩 창문을 닦아내고 있는 료는 창문 너머 사무실 풍경을 들여다 보게 된다. 잘 정돈된 사무실에서 직원들은 저마다 바삐 일하고 있다. 부러움인지 자괴감인지 모를 감정을 느낀 료는 곤돌라에서 발밑의 도시 풍경을 응시한다. 료의 눈에 비친 마천루의 협곡에는 푸른 바닷물이 일렁인다.   도시의 최하층 노동자로서 료는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 고급 레스토랑의 외벽 창문을 청소할 때, 료를 보게 된 외국인 손님은 웨이터를 불러 항의한다. 료는 그의 눈앞에서 당장 치워져야 할 물건과 같은 존재가 된다. 웨이터는 블라인드를 내리는 것으로 간단히 문제를 해결한다. 료가 청소하는 고층 빌딩과 고급 주거지와는 달리, 그의 단칸 자취방은 누추하기 짝이 없다. 료가 고향에서 보내온 택배 상자를 열어 어머니의 음식을 맛볼 때, 화면은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뀐다. 플래시백으로 제시된 료의 과거는 바닷가 어촌 마을의 청년이다. 그렇다. 료가 빌딩숲에서 바다를 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홀로 생계를 꾸리는 어머니, 알콜 중독자 아버지, 가난한 살림. 료는 그곳을 떠나 도시의 빌딩 청소부가 되었다.   삶이 외롭고 힘든 것으로 치자면,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소녀 카가리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는 불화로 헤어졌고, 함께 살고 있는 엄마는 카가리에게 무관심하다. 카가리의 집 곳곳은 블라인드가 설치되어 있다. 엄마는 자신의 침실에서 보이는 카가리의 방을 블라인드로 가려버린다. 이 아이가 유일하게 마음을 주는 대상은 흰색 카나리

중년의 위기를 견디는 여자, 다가오는 것들(L'Avenir, Things to Come, 2016)

    "그 여자한테 정원이나 잘 가꾸라고 해.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을 내버려두는 건 죄악이니까."   남편은 여자가 생겼다고 고백한다. 이 부부는 결별을 앞두고 있다. 나탈리는 해마다 여름이면 남편의 별장이 있는 해안가 마을을 찾았다. 별장의 정원은 나탈리의 애정과 노력이 깃든 곳이다. 이제 나탈리가 그곳을 찾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별장에서의 마지막 휴가, 그렇게 25년의 결혼 생활은 끝을 향해 간다. 미아 한센-뢰베(Mia Hansen-Løve) 의 영화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 2016)' 은 중년의 위기를 마주한 철학 교사 나탈리의 힘겨운 여정을 담는다.   적어도 남편의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나탈리의 삶은 괜찮았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나탈리에게 가장 큰 근심거리이다. 이제 생의 마지막에 접어든 나탈리의 모친은 수시로 전화를 걸어 병고와 외로움을 호소한다. 한밤중에, 학교에서 수업을 하다가, 나탈리는 엄마의 호출을 받는다. 몸이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구급대를 부르는 것은 일상이다. 구급대원은 나탈리에게 모친을 챙기라며 한소리를 한다. 그 누구보다 딸의 관심과 애정을 원하는 늙은 엄마. 나탈리는 엄마를 돌보는 일에 점점 지쳐간다.   그런 나탈리에게 남편은 만나는 여자가 있으며, 자신은 곧 집을 나갈 생각이라고 알려준다. 남편은 나탈리와 같은 철학 교사로서 두 사람은 삶과 지성의 공동체를 나름대로 잘 꾸려왔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무너져 내릴 기세이다. 엄마와 남편, 의지하고 믿었던 가족은 인정사정없이 나탈리를 마구 흔든다. 거기에다 평생을 두고 해온 일도 난관에 부딪혔다. 나탈리의 철학책을 펴낸 출판사에서는 젊은 세대의 가벼운 취향에 맞추라며 은연중에 압박을 가한다. 철학을 진지하고 엄격하게 받아들이는 나탈리는 그런 출판사의 요구가 못마땅하다. 학교에서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한창이다. 시위 학생들은 나탈리를 꼰대 기성 세대로 치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