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아카풀코 해변에 있던 남자는 경찰에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여동생 엘리스는 그를 만나고 가는 길에 갱단의 습격을
받고 죽었다. 그는 여동생의 죽음과 관련된 혐의를 받고 있다. 교도소 샤워장에서 남자는 거대한 돼지가 바닥에 드러누운 것을 본다.
그의 변호사는 곧 그를 교도소에서 빼내어 준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현지에서 사귄 젊은 애인과 재회한다. 여자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피범벅이 된 돼지 사체가 현관 입구에서 그를 맞이한다. 그걸 본 남자는 놀란 나머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다.
교도소 샤워장의 살아있는 돼지라니, 뭔가 초현실주의적인 설정같다. 그런데 그건 그 남자 닐에게만 보인 환시였다. 닐에게 돼지가
전혀 뜬금없는 대상은 아니다. 그는 대형 육가공업체를 소유한 사업가이다. 애인의 집에서 본 죽은 돼지는 그에게 닥칠 불운을
암시한다. 병원의 의사는 닐의 머리에 종양이 있다고 알려준다. 그에게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멕시코 감독 미셸 프랑코(Michel Franco)의 'Sundown(2021)'은 관객에게 매우 불친절한 영화이다. 러닝타임 83분, 그리 길지 않은 이 영화는 제대로 된 대사도 없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야 관객은 닐의 삶에 대한 아주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아카풀코의 특급 호텔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중년의 남녀와 두 명의 젊은이가 등장한다. 닐과 엘리스는 남매,
젊은 남녀는 엘리스의 자녀이다. 여동생 가족이 휴양지에서의 여유를 만끽하는 것과는 달리 닐은 무료해 보인다. 그런데 엘리스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평화로운 휴가는 끝이 난다. 엘리스는 모친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일행은 공항에서 급하게 귀국 비행기편을
알아보는데, 닐은 여권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카풀코로 돌아온 그는 싸구려 모텔에 짐을 풀고 무작정 해변에서 시간을
보낸다. 귀국을 독촉하는 엘리스의 전화도 차단해 버린다.
닐은 현지 여인 베레니스와 연애도 시작한다. 둘은 따뜻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맥주를 들이킨다. 가끔 고개를 들어 한낮의 태양을
바라본다. 휴양지 해변의 평화가 마냥 이어지지는 않는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갱단은 순식간에 사람을 죽이고 사라진다. 닐은 그것을
보고도 그다지 동요하지 않는다. 죽은 이의 피는 바닷물에 물감처럼 퍼진다. 그 장면의 불길한 기운은 닐의 피부 반점을 극도로
확대해서 보여주는 기이한 쇼트에서도 감지된다.
미셸 프랑코는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에 대한 정보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닐이 보여주는 극도의 무관심과 냉정함이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관객은 그저 추측할 뿐이다. 그가 매우 부유한 사람이며, 생에 대한 그 어떤 열망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닐이 쌓은 부는 무수한 가축의 핏빛 죽음에서 나왔다. 닐과 엘리스, 두 명의 조카 콜린과 알렉사. 휴양지에서 그들의 모습은 그곳
대다수 가난한 주민들의 삶과 대비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인종과 계층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도시의 삶과 사업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가? 마침내 닐을 찾아낸 엘리스는 분을 터뜨린다. 어머니 장례식에도 오지 않고, 닐은
내내 여자와 노닥거리고 있었다. 이 영화를 본 이들이 닐의 패륜적 행태에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도대체 왜?', 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관객이 혼란스러워할 무렵에 닐에게 급박한 시한부 질병이 통고된다. 이제 이 불행한 남자의
마지막을 따라가야만 한다. 영화의 마지막, 테라스의 비어있는 의자에 그의 옷과 소지품만이 덩그라니 남아있다.
"아니, 이게 정말 다인가?" 그렇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누군가 나에게 그래서 이 영화가 좋은 영화냐고 묻는다면, 나는
잠시 주저할 것이다.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분명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Sundown'은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것들을 오랫동안 곱씹게 만든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내러티브의 간극을 메꾸는 일등공신은
주연 배우 팀 로스(Tim Roth)이다. 그가 연기한 닐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생에 대한 깊은 절망과 허무가
감지된다. 그 삶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며, 우리는 언젠가 불현듯 찾아올 죽음의 순간을 떠올린다. 미셸 프랑코의 이 소품같은
영화에는 서늘한 매혹이 존재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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