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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21의 게시물 표시

스스로 날아오를 수 없는 한 여성의 비애, 먼 구름(遠い雲, The Tattered Wings, 1955)

    배우 타카미네 히데코는 자신의 영화 인생의 대부분을 나루세 미키오와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과 함께 했다. 거의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고 회고한 나루세 미키오 감독과는 달리,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과는 영화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서로 상반되는 연출 스타일의 감독들과 작업을 했던 셈이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1955년작 '먼 구름(遠い雲, The Tattered Wings)'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스물 네 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 1954)'를 찍은 이듬해에 다시 타카미네 히데코와 함께 한 작품이다. 영화는 일본 중부에 자리한 기후현의 다카야마시에서 촬영되었다. 당시 촬영 현장을 찍은 주민의 사진을 보니, 촬영 현장은 배우들을 구경하러 몰린 마을 주민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사진 속에는 촬영장에서 담소하는 배우들, 연출 지도를 열심히 하는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모습도 있었다. 이 감독이 만드는 촬영장의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조금은 엿본 느낌이 들었다.   '먼 구름'은 구시대적 인습에 갇혀 고통받는 여성의 초상화를 그려낸다.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오른 한국 영화는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였다. 타카미네 히데코가 연기한 주인공 후유코 역시 딸 하나를 둔 과부이다. 후유코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부모의 바램에 따라 부잣집으로 시집을 간다. 그러나 이 남편이란 작자는 바람둥이에 손찌검까지 하는 무도한 인간이었다. 5년의 결혼 생활 동안 고통받던 후유코는 남편이 죽은 후 딸을 키우며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다. 그런데, 옛사랑 케이조가 먼 곳으로 전근가기 전에 고향에 잠시 들르면서 후유코의 일상은 흔들린다. 케이조는 후유코에게 새출발을 하자며 인생의 행복을 찾아주겠다고 말한다. 한편 후유코의 죽은 남편의 동생 슌스케는 형수를 마음에 두고 있다. 과연 후유코는 어떤 선택을 할까?   형사취수(兄死娶嫂)

모두가 웃을 수 없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 뉴욕의 연인들(They All Laughed, 1981)

    영화의 제목이 좀 특이하다. 우리말 제목은 '뉴욕의 연인들'이라고 꽤 멋지게 지었다. 원제는 'They All Laughed', 영화 속 인물들이 모두 다 사랑에 빠지고 각자의 사랑을 쟁취한다. 그런데 이 영화 속 실제 배우들의 이야기와 영화의 운명은 결코 행복한 웃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피터 보그다노비치(Peter Bogdanovich) 감독의 1981년작 '뉴욕의 연인들(They All Laughed)'은 영화가 만들어진 지 1년이 지나서야 겨우 개봉되었다. 영화의 완성도는 기대에 못미치는 것이었고, 난무하는 혹평 속에서 흥행은 실패했다. 'The Last Picture Show(1971)', 'Paper Moon(1973)'으로 1970년대 미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떠올랐던 그의 경력은 곤두박질친다. 그는 이 영화 이후 4년 후인 1985년에야 복귀할 수 있었지만, 다시는 이전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져갔다.   오딧세이 탐정 사무소의 탐정 존(벤 가자라 분)과 찰스(존 리터 분)는 각자 고객의 의뢰에 따라 미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존은 뉴욕을 방문한 부유한 사업가의 아내 안젤라(오드리 햅번 분)를, 찰스는 남편의 의심을 받고 있는 유부녀 돌로레스(도로시 스트래튼)의 뒤를 밟는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자신들이 미행하는 여자들과 사랑에 빠진다. 컨트리 가수인 존의 애인 크리스티는 존의 변심에 찰스에게 접근하지만, 찰스가 돌로레스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크리스티는 결국 돌로레스의 애인 후안과 맺어진다. 안젤라와 존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남편과 함께 안젤라는 유럽으로 돌아간다. 찰스는 돌로레스와 연인이 되어서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게 전부다. 2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1시간은 존과 찰스의 미행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분명히 로맨틱 코미디라면 즐겁고 행복한 사랑의 기운이 느

에드워드 드미트릭의 독특한 필름 느와르, 스나이퍼(The Sniper, 1952)

  *이 글에는 영화 '스나이퍼(The Sniper, 1952)'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드워드 드미트릭(Edward Dmytryk) 감독은 영화를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배운 사람이었다. 영화사에 들어가 잔심부름부터 시작해서 감독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는 타고난 재능과 성실성으로 자신의 경력을 쌓아나갔다. 스튜디오가 요구하는 B급 영화들을 잘 만들어내어서 마침내 자신만의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의 인생에 매카시즘이라는 시대의 광풍이 불어닥친다. 공산주의자로 찍힌 그는 동료에 대한 고발과 증언을 강요받았다. 영국으로 잠시 피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하려면 미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감옥에서 보낸 짧은 시간 이후, 드미트릭은 결국 동료들을 고발하고 다시 영화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스나이퍼(The Sniper, 1952)는 그가 의회 증언 이후 처음으로 찍은 복귀작이다. '변절자'라는 오명이 드미트릭을 힘들게 했지만, 그는 이 영화로 자신의 역량을 입증해 보인다. 정신적 결함을 가진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이 필름 느와르 영화에는 당시 드미트릭 감독이 처한 심리적 압박감도 느껴진다.   영화는 미국에서 한 해에 발생하는 성범죄 사건들의 통계를 언급하는 자막에서부터 시작한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여성들로, 그런 강력범죄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주지시킨다. 그리고 이어지는 첫 장면에서 총은 든 남자가 창가에서 누군가를 겨누고 있다. 이제 막 연인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여자를 겨누던 남자는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총을 내려놓는다. 남자의 이름은 에디(아서 프란츠 분), 그는 왜 여자를 죽이려는 것일까? 남자는 들끓는 살인의 욕망을 견딜 수가 없다. 그것을 억누르기 위해 그는 자신의 손을 전기 스토브에 대고 스스로 화상을 입힌다. 그러나 유예된 살인은 얼마 안가 실행된다. 그의 총에 의해 연달아 나오는 희생자들로 도시는 패닉에 빠진다. 경찰들은 수사에 필사적인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낸 국외자 아이누의 초상, 내 마음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 1959)

  *이 글에는 영화 '내 마음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 1959)'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타카가 평생 그런 부당한 대우를 참으면서 사느니,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나아요."   누나 마사는 동급생에게 얻어맞아 다리가 부러진 동생을 보며 흐느낀다. 중학교에 다니는 동생 유타카는 자신을 괴롭히고 모욕하는 동급생과 싸우다 다친다. 더러운 피를 가졌다느니, 개(いぬ 이누로 발음, 아이누인들에 대한 욕설)와 닮았다는 수군거림을 듣는 유타카는 아이누(Ainu)이다. 일본의 북쪽 지방에 거주하는 선주민(先住民) 아이누.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1959년작 '내 마음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 Whistling in Kotan, 1959)'은 훗카이도의 코탄 마을을 배경으로 아이누족 남매의 시련과 고통을 그려낸다. 주로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와 그 내면을 다루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작품들 중에서 아이들, 그것도 차별받는 아이누족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거기에다 컬러와 시네마스코프를 채택한 화면은 늘 보던 이 감독의 흑백, 실내 촬영 위주의 영화와도 다르다. 훗카이도의 맑은 호수로 유명한 시코츠호(支笏湖)의 풍경과 그 일대의 모습, 단편적이지만 아이누족들과 그들의 공연 장면이 영화 속에 들어있다. 영화는 동화작가이며 교육자인 이시모리 노부오(石森延男)가 1957년에 발표한 소설 '코탄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을 충실하게 재현한다.   내가 알기로 아이누족에 대해 다룬 일본 영화는 거의 없다. 재일교포의 이야기는 일찍부터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둘째 오빠(にあんちゃ, 1959)'는 탄광촌을 배경으로 차별받는 재일교포의 아픔을 그려낸다. 재일교포 소녀 야스모토 스에코가 쓴 일기를 원작으로 하는데, 이것을 같은 해 유현목 감독은 '구름은 흘러도(1959)'로 만들었다. 국외자들을 다루는 일본 영화가 드문

박제된 F1 영웅의 서사, 세나(Senna, 2010)

    어제 저녁에 클래식 FM 실황 음악회에서는 올해 조르주 에네스쿠 콩쿨 수상자 특집을 방송해주었다. 요새 떠오르는 젊은 연주자들은 모두 다 뛰어난 기량을 지녔지만, 내게 그렇게 깊은 인상을 준 이들은 없었다. 다들 잘 하네, 하고 듣다가 바이올린 부문 연주에서 깜짝 놀랐다. 무슨 예전 거장의 음반을 틀어놓은 줄 알았다. 3위를 차지한 독일 출신의 타실로 프로브스트란 이름의 연주자는 이제 19살이 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재능, 그것도 아주 순전한 재능을 가진 연주자였다. 저런 연주자가 노력과 성실성을 겸비한다면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 아시프 카파디아(Asif Kapadia) 감독의 2010년도 다큐 '세나(Senna)'에도 카레이싱에 놀라운 재능을 가진 이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아일톤(Ayrton), 세나는 그의 어머니가 결혼하기 이전의 성에서 따왔다. 그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포뮬러 원(Formula One)을 지배했던 카레이서였다. 다큐는 그의 초기 경력, 영광의 순간, 라이벌과의 암투,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생애를 다룬다.   다큐의 구성은 지극히 단순하다. 106분의 러닝타임 가운데 포뮬러 원의 경기 장면이 40분에 이른다. 나머지 장면은 세나의 가족이 소유한 개인 비디오 화면과 뉴스를 비롯한 자료 화면이 채운다. 내레이션도 없고, 가족과 주변 지인들과의 인터뷰도 대부분 목소리로만 나오는 아주 절제된 구성이다. 자동차 경주에 별다른 관심도 없고, 세나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이 다큐는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다. 감독 아시프 카파디아도 다큐를 만들기 전까지 세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세나'라는 인물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는 대신, 이 인물의 삶을 3막 구조의 서사 영화로 구성하는 데에 촛점을 두었다(2011년 wired.com과의 인터뷰 참조). 그가 보기에 이 인물의 생애는 영화만큼이나 극적이다. 우승을 다투

라지 카푸르가 개척해낸 영화적 길, Shree 420(Mr. 420, 1955)

    러닝 타임 2시간 50분, 노래와 춤이 나오는 인도 영화는 극장 상영시 중간 휴식 시간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게 긴 영화들이 많다. 라지 카푸르(Raj Kapoor) 감독의 1955년작 'Shree 420'은 7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도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영화는 엄청난 흥행 성적을 거두었고, 그가 만든 영화들은 신생 독립국 인도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감독 자신이 주연을 맡아서 노래와 연기를 소화해내는데, 이 다재다능한 영화인은 찰리 채플린을 모방한 연기로 인도의 채플린으로 불렸다. 채플린의 고유한 연기 스타일인 떠돌이, 부랑자의 이미지를 차용한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독창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보여줄 것이 아주 많음을 이 영화로 입증한다.   고향 알라하바드를 떠나 봄베이로 온 시골 청년 라지는 곧 도시의 삶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학 졸업장을 가지고도 그가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세탁소 일 뿐이다. 착하고 아름다운 비드야를 만나 미래를 꿈꾸던 라지는 클럽 댄서 마야의 유혹으로 사기꾼의 세계에 발을 디딘다. 비드야는 라지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지만, 돈의 위력에 사로잡힌 라지는 부도덕한 사업가 소나찬드의 수하가 되어 도박과 사기 사업에 손을 댄다. 큰 돈을 만지게 되었지만 불행하다고 느낀 라지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소나찬드는 라지의 이름을 팔아 봄베이 빈민들을 상대로 커다란 사기극을 꾸민다. 라지는 사기꾼 생활을 청산하고 비드야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영화의 제목 'Shree'는 힌디어로 호칭 '~씨'에 해당한다. 숫자 '420'은 인도 형법에서 사기와 절도에 해당하는 죄목의 번호를 뜻한다. 인도에서 'Mr. 420'이란 말은 사기꾼을 뜻하는 말로, 경멸의 의미를 포함한다. 정직함으로 메달까지 받았던 라지는 돈이 떨어져 전당포에 그 메달을 맡긴다. 먹을 것도, 잘 곳

바실리 슉신이 보여주는 러시아의 영혼, 붉은 가막살 나무(Калина красная, The Red Snowball Tree, 1973)

  *이 글에는 '붉은 가막살 나무(Калина красная, 197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교도소에서 합창 공연을 펼치는 재소자들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한다. 절도죄로 형기를 마치고 나온 예고르(바실리 슉신 분)는 펜팔로 알게된 여자 친구 류바를 찾아간다. 평화롭고 한적한 농촌 마을에서 류바는 노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류바와의 미래를 꿈꾸는 예고르. 그러나 그는 전과자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냉대와 편견과 마주하고 실망하게 된다. 과연 예고르는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평범한 일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바실리 슉신( Vasily Shukshin) 감독의 1973년작 '붉은 가막살 나무(Калина красная)'는 구 소련 영화들 가운데 경이적인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개봉 첫해의 관객은 6250만명에 달했다. 소련은 국가가 영화사를 설립하고 운영했으며, 영화의 상영 및 배급도 국가의 관리하에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로 인한 수익은 모두 국고로 귀속되었는데, 소련 영화의 수익률은 대략 900%정도 였다. 당시 소련 관객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렸던 장르는 '코미디'였다. 코미디 영화의 감독들은 높은 수익을 내는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대우도 남달랐다. 그런 현실 속에서 슉신의 영화가 이룬 성취는 특별해 보인다. 출소한 재소자의 귀향이야기를 담은 영화에 왜 소련의 관객들은 그토록 호응했던 것일까? 사실 러시아인이 아닌 외국인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해석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예고르는 류바의 마을에 와서 붉은 가막살 나무 숲속을 거닐며 새들에게 말을 건넨다. 그는 그 나무를 무척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붉은 가막살 나무는 자작나무처럼 흰색의 목질부를 갖고 있으며 작고 붉은 열매들이 열린다. 러시아어로 '칼리나 크라스나야(Kalina krasnaya, 영화의 제목이기도 함)'라고 불리는 이 나무는 러시아 민속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에릭 로메르의 영화적 청사진, 사자 자리(Le Signe Du Lion, The Sign Of Leo, 1962)

     'mooch'라는 영어 단어가 있다. 속어로 쓰이는 이 단어는 남에게 무언가를 뜯어낸다는 뜻으로 쓰인다. 예를 들면 담배 한 개피 얻는 것, 빈대를 붙는 행위 같은 것들을 총칭한다. 그다지 좋지 않은 어감의 단어인데, 에릭 로메르의 '사자 자리(Le Signe Du Lion, 1959)'를 보는 내내 그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주인공 피에르는 가진 돈이 다 떨어져서 어떻게든 자신의 친구와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파리 시내를 헤매고 다닌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뜨거운 한여름의 파리에 그가 빌붙을 친구들은 모두 어디론가 떠났다. 해외 출장을 가거나, 더위를 피해 휴가지로 가버렸다. 명색이 작곡가로 파리 문화계에 나름의 인맥을 갖고 있는 피에르는 노숙자로 전락한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에릭 로메르의 장편 데뷔작 '사자 자리'는 별자리의 운명을 믿는 남자 피에르의 천국과 지옥을 그린다.   피에르(제스 한 분)의 천국은 한 장의 전보에서부터 시작된다. 후사가 없는 부자 친척 아주머니의 부고는 피에르에게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도 같다. 조카인 자신에게 상속이 될 거라 믿는 피에르는 친구들을 죄다 불러 모아 흥청망청 파티를 연다. 그저 그런 작곡가로 파리 생활을 겨우 겨우 버티던 이 독일계 미국인은 자신의 별자리인 사자 자리가 이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고 믿는다. 술, 음악, 여자 친구, 거기다 객기 넘치는 한 밤의 총질까지 피에르의 자축 파티는 날이 새도록 이어진다. 그런데 별자리의 운명이 피에르를 배반한 것일까? 유언장에 적힌 상속자는 피에르가 아닌 다른 사촌이었던 것. 피에르는 그렇게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한다. 가진 책들을 팔아 끼니를 해결하고, 나중에는 숙박비를 내지 못해 허름한 호텔에서도 쫓겨난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파리의 지인들을 수소문하며 다니는 피에르. 거는 전화마다 어디론가 떠나서 없다는 대답만 듣는다. 단벌 양복 바지에는 청어 통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월러스의 지평과 앙드레의 지평이 만났을 때,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My Dinner with Andre, 1981)

  "예전의 내 머릿속에는 예술과 음악으로 가득찼었는데, 내 나이 서른 여섯, 이젠 오로지 돈 생각만 할 뿐이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궁핍한 극작가 월러스는 약간은 어색하고 불편한 저녁 식사 약속을 앞두고 있다. 연극계에서 잘 나가던 연출가 앙드레는 처자식을 내버려두고 어느날 갑자기 잠적했다. 월러스는 그가 티벳이며 세계 이곳저곳을 떠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가, 최근에 지인으로부터 앙드레를 봤다는 소식을 듣는다. 자신의 희곡을 무대에 올려준 예전의 인연도 있고,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도 궁금해진 월러스는 앙드레와 저녁을 같이 하기로 한다. 1시간 5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그 두 사람이 저녁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진다. 영화 속 등장인물 월러스와 앙드레는 실제 연극계 종사자로 실명으로 등장한다. 월러스는 친구 앙드레와 나눈 대화를 희곡으로 써서 연극으로 올릴 생각이었으나 영화가 더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소식을 들은 루이 말은 감독을 자청했고, 그렇게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가 만들어졌다.        월러스는 딱히 할 말도 없고, 질문을 계속 던짐으로써 앙드레가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유도한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앙드레의 말문이 터진다. 영화는 거의 앙드레의 1인극처럼 보일 정도다. 월러스는 중간 중간 추임새를 넣다가, 식사가 끝날 무렵에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그런데 앙드레, 이 양반이 들려주는 방랑기가 정말 골때린다. 앙드레는 자신의 절친 그로토프스키의 연극 세미나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일반인 40명과 숲속에서 진행된 기이하기 짝이 없는 그 연극 캠프는 하루종일 노래를 부르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일종의 실험적 연극 캠프였다. 앙드레는 계속해서 그로토프스키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런데 어째 그 이름이 낯설지가 않다. 예전에 연극 수업에서 들었던 이름이다. 그렇다.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는

줄스 다신이 보여주는 1940년대 뉴욕의 풍경, The Naked City(1948)

    영화는 도입부부터 특이하다. 항공 촬영으로 뉴욕 도시를 조망하는 장면과 함께 남성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 영화의 제작자 마크 헬린저(Mark Hellinger). 그는 관객에게 앞으로 보게 될 영화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를 한다. 영화의 제목과 감독, 시나리오 작가와 배우 소개 등등... 그러고 나서 이어지는 설명과 함께 뉴욕의 무더운 여름날, 새벽 1시에 일어나는 살인 사건 현장으로 관객을 끌고 들어간다. 젊은 여자는 두 명의 남자에 둘러싸여 죽임을 당한다. 한 명의 얼굴은 보이지만, 다른 한 명은 등을 보이고 서있다. 다음날, 여자의 집으로 출근한 가정부는 시신을 발견한다. 사건이 신고되고, 그때부터 형사들의 범인찾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죽은 여성은 진 덱스터란 이름의 모델. 과연 누가, 왜 이 여자를 살해했을까?   오늘날의 관객에게 70년 전의 범죄 수사 과정을 보는 것은 나름대로 흥미롭다. 사건 현장에 출동한 형사 반장 멀둔은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물인 남자 잠옷을 아무렇게 않게 들어서 살펴 본다. 당시의 과학 수사라는 것이 기껏해야 검시와 지문 채취라는 전통적 방법이 전부라는 사실은 형사들의 어려움을 짐작하게 만든다. 살인범을 잡으려는 형사들은 뉴욕 바닥에서 바늘 찾는 형국으로 탐문 수사와 미행에 시간과 노력을 쏟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범인을 검거하기까지의 과정은 일반적인 필름 느와르 영화와 비교해 그다지 특출난 점이 없다. 그러나 '네이키드 시티'에는 제목에 들어 있는 '시티', 즉 뉴욕의 사람들과 그곳의 다채로운 풍광들이 담겨져 있다는 점에서 여느 범죄 추리물과 차별점을 갖는다. 마차에 실려 배달되는 우유, 아침에 미어터지는 뉴욕의 지하철, 범죄 소식을 알리는 신문 매체의 유통 과정, 사람들이 식사하는 카페와 번잡한 시장,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노는 여름의 노상 도로... 영화는 1948년의 뉴욕이란 도시를 다큐멘터리처럼 담아낸다. 특히 일반 시민들의

해외 합작이 소련 영화에 남긴 유종의 미, 어느 이태리인들의 러시아 대모험(Невероятные приключения итальянцев в России, Unbelievable Adventures of Italians in Russia, 1974)

  노부인은 임종을 앞두고 있다. 러시아 혁명의 불길을 피해 이태리에 정착한 이 할머니에게는 손녀딸이 있다. 할머니는 손녀딸에게 그야말로 엄청난 유언을 남긴다. 고국을 떠나기 전,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자상 밑에다 수십억에 달하는 보석들을 감추어 두었다는 것. 병실에서 그 유언을 들은 사람은 손녀딸 올가를 비롯해 주치의, 다리 깁스를 한 환자, 남자 간호사 안토니오와 주제페, 마피아 로사리오까지 모두 여섯 명. 이들은 곧 러시아행 비행기에 올라 보물을 찾을 생각에 들뜬다. 마피아 로사리오는 의사의 여권을 몰래 버리고, 깁스 환자는 밀수범이라고 세관에 신고해서 두 명을 떼놓는다. 나머지 세 명과 보물을 나눠가질 생각이 없는 올가는 그들을 피해 달아난다. 마피아는 나머지 경쟁자를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안토니오와 주제페는 러시아 여행 가이드 안드레이와 함께 올가를 찾으려 애를 쓴다. 우여곡절 끝에 레닌그라드에 도착한 그들은 그곳에 너무나도 많은 사자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자상마다 파헤쳐 보는 보물 탐사대, 과연 보물 찾기는 성공할 것인가...   엘다 라쟈노프(Eldar Ryazanov)감독의 1973년작 '어느 이태리인들의 러시아 대모험(Unbelievable Adventures of Italians in Russia)'은 소련 국영 영화사 모스 필름(Mosfilm)과 이태리 영화사와의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이태리 영화사가 모스 필름에 진 빚을 갚기 위한 대안이었다. 1970년,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감독의 '워털루(Waterloo)'가 이태리와 합작으로 만들어져 개봉되었다. 소련은 그 영화를 위해 막대한 제작비와 물량을 쏟아부었지만, 해외 흥행 실적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스탠리 큐브릭은 '워털루'가 망하는 것을 보고 나폴레옹에 대한 시대극을 만들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이태리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지만, 소련 영화 당국과 모스 필름

달에 매혹된 이들, 달의 연인들(Les Favoris de la lune, Favorites of the Moon, 1984)

     오타르 이오셀리아니(Otar Iosseliani)의 영화를 처음으로 본 것은 러시아 영화사 시간이었다. '노래하는 검은 새가 있었네(Once Upon a Time There Was a Singing Blackbird, 1970)'를 수업 시간에 보았었는데, 영화가 참 독특했다. 소련에서 저런 영화도 만들 수 있다니 놀랍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오셀리아니 감독의 작품들을 찾아서 본 기억이 난다. 그의 작품들은 모두 개성이 넘쳤고, 생각할 거리들이 많았다. 그렇게 좋아했던 감독을 잊고 있다가, 오늘 '달의 연인들(Les Favoris de la lune, Favorites of the Moon)'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프랑스 영화다. 그는 소련에서 찍었던 자신의 작품들이 연이은 검열로 냉대를 받자, 1982년에 프랑스로 건너갔다. '달의 연인들'은 그가 파리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만든 영화로, 어느 정도는 낯선 나라에 대한 관찰자적 시점이 들어가 있다.   영화는 시작부터 복잡하다. 시대가 왔다 갔다 하고, 컬러와 흑백이 교차된다. 서로 연관이 없는 인물들이 번갈아 보여진다. 이런 영화들을 만나면 제대로 봐야지 싶은 마음에 긴장하게 된다. 대개의 영화들은 2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윤곽이 파악이 되는데, 이 영화는 그때까지도 내러티브의 조각들을 툭툭 던지기만 한다. 1) 첫 장면에서 도자기 접시가 깨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도자기 공방의 모습이 비춰진다. 장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세브르(유명한 도자기 산지였다) 도자기 세트는 단단한 나무 상자에 포장되어 어느 저택에 배송된다. 시대적 배경은 18세기이다. 2) 그 다음에는 19세기 화가의 공방이 나온다. 화가는 여인의 상반신 누드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3)다음 장면의 시대적 배경은 현대, 현악 4중주단이 연습하고 있다. 다시 과거로 돌아온 영화는 흑백 화면에 귀족의 일상 생활을 비춰준다.

스러지는 것들이 남기는 애수, 흐르다(流れる, Flowing, 1956)

  *이 글에는 영화 '흐르다(流れる, Flowing, 1956)'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다리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강물은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비춰진다. 일본의 작가 코다 아야(幸田文)가 1955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 영화의 원작이다. 영화 속에서 게이샤 츠타의 집에서 일하게 되는 가정부 오하루는 어떤 면에서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오하루는 게이샤 집에서 일하며 그네들의 삶의 속내를 들여다 보게 된다. 극중에서 오하루는 남편과 아들이 죽은, 혈혈단신의 40대 후반의 과부로 나온다. 작가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이혼하고 홀로 자식을 키워야 했던 어려운 형편 때문에 46살에 게이샤 집 가정부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는데, 그 소설이 '흐르다'이다. 실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은 꽤 인기를 끌었고, 코다 아야에게 작가로서 살아갈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리카는 직업 소개소의 추천서를 들고 츠타노야(츠타의 집이란 뜻)를 찾는다. 리카는 집주인 츠타와 그 딸 가츠요, 조카 요나고와 그 어린 딸 후지코, 오십 줄에 들어선 게이샤 소메카, 제멋대로 행동하는 젊은 게이샤 나나코, 그리고 수시로 집에 드나드는 츠타의 큰언니를 만나게 된다. 리카라는 이름 대신 오하루로 불리우게 된 가정부는 성실하고 따뜻한 마음씀으로 곧 이 집안 사람들의 호감을 산다. 그러나 오하루는 이 집안이 빚 때문에 몰락해가고 있으며, 여러가지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츠타는 남자에게 속아 집이 저당잡혀 있고, 큰언니에게 진 빚도 갚아야 한다. 돈 떼먹고 달아난 게이샤의 삼촌은 조카 데리고 번 돈을 내놓으라며 툭하면 와서 행패를 부린다. 사람좋고 유약한 성품의 이 집주인은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가 벅차다. 큰언니는 돈 많은 철강회사 임원을 소개해줄 테니 만나보라고 떠밀지만, 마음에도 없는 자리에 나가고 싶지는 않다. 선배 게이샤

로맨틱 코미디에 구현된 소련의 국가적 이상, 아가씨들(Девчата, The Girls, 1961)

    유리 출류킨(Yuri Chulyukin) 감독의 1961년 영화 '아가씨들(Девчата, The Girls)'의 주인공 토샤를 보고 있으면, 영화 '애니(Annie, 1982)'의 귀엽고 당찬 꼬마 애니가 떠오른다. 토샤가 애니 보다 나이가 더 많기는 하지만, 작은 키에 하는 행동은 순진무구한 아이 같다. 토샤와 애니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고아원 출신이라는 것. 요리 학교를 졸업한 18살의 토샤는 우랄의 목재 회사에 조리사로 일하기 위해 왔다. 토샤의 기숙사 룸메이트들은 모두 연애 중이다. 그곳은 무슨 사랑이 꽃피는 목재회사 같다. 젊은 남녀 직원들은 수시로 열리는 댄스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즐긴다. 과연 천진난만한 장난꾸러기 같은 토샤에게도 남자 친구가 생길까? 영화 '아가씨들'은 빛나는 젊음의 에너지와 청춘의 사랑이 흘러 넘친다.   원작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만들어진 이 영화는 주인공 토샤를 두고 여배우들의 치열한 물밑 경쟁이 있었다. 출류킨 감독은 배우인 아내에게 그 역할을 주려고 애썼지만, 결국 그 역할은 나데즈다 루미안체바(Nadezhda Rumyantseva)에게 돌아갔다. 당시 루미안체바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이 서른 살 여배우는 나이 따위는 잊어버린 것처럼 18살 소녀 토샤 그 자체를 보여준다. 슬랩스틱에 가까운 연기 동작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며, 울고 웃는 모습은 천상 아이 같다. 영화는 외국 영화제에도 출품되어서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루미안체바를 두고 '여자 찰리 채플린', '소련의 줄리에타 마시나'라는 호칭이 붙었다. 정말이지 '아가씨들'은 루미안체바를 위한 영화처럼 보일 정도이다.   영화는 주인공 토샤와 연인 일리야의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소련의 국가 기간 산업에 종사하는 목재 노동자들의 모습 또한 비중있게 담는다. 일리야와 한 팀을 이루는 3명의 동료들은 틈만 나면 나무를 가장 효율적으로 벌채할 수 있

가족극 속에 펼쳐지는 여자의 삶, 여자의 자리(女の座, A Woman's Place, 1962)

  *이 글에는 영화 '여자의 자리'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카미네 히데코가 나오는 대담 프로그램을 보는데, 나루세 미키오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와 19편이나 되는 영화를 함께 찍었는데, 거의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루세 미키오는 늘 촬영장 어딘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고, '자, 액션'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냥 자신은 연기를 했다고. 나중에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따로 인사를 하고 집에 간 적은 없었고, '모두 수고하셨습니다'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회상했다. 이 여배우에게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엄청 어렵고 무서웠던 존재였던 것 같다. 아니, 그럼 함께 찍은 영화 가운데 나루세 미키오의 연기 지도라는 것은 없었던 것일까? '야성의 여인(Untamed Woman, 1957)'을 찍을 때는 어려운 영화여서 어떻게 연기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아, 그거 금방이면 끝날 거야'하고 대답해서 당황했다고 한다. 아역 배우 때부터 출중한 재능을 보여줬던 연기 천재인 타카미네 히데코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까? 아무튼 그 인터뷰를 본 이후로, 타카미네 히데코가 나오는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아무 말 없이 착착 돌아가는 그의 영화 촬영 현장을 떠올리게 된다. 그의 1962년작 '여자의 자리(女の座, A Woman's Place)'는 1962년 신년 특집으로 개봉한 가족 영화로 당시 활동했던 쟁쟁한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저런 배우들을 어떻게 다 데리고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영화를 찍을 수 있었는지,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오는 영화이다.   도쿄에 자리잡은 이시카와 집안의 가장(류 치수 분)의 갑작스런 병환을 계기로 그의 자녀들이 집에 모인다. 그는 첫 부인에게서 아들 켄타로와 지로, 딸 마츠와 우메코를, 재혼한 아내 아키에게서는 미치코와 나츠코, 유키코를 두었다. 장남 켄타로가 전사하고 며느리 요시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소년 테렌스를 만나다, The Long Day Closes(1992)

      영화를 보다보면 가끔은 감독 자신에 대한 사실을 추론 내지는 직감으로 알게 되는 때가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의 '오늘 또 오늘(今日もまたかくてありなん, 1959)'을 보는데, 유부녀인 여자 주인공이 알게 되는 퇴역 군인과의 관계가 영 부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은 동네 주민으로서 서로 예의를 깍듯하게 차리는, 전혀 이상한 사이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성적인 긴장감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튼 뭔가 어색하고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감독에 대한 자료를 읽다가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의 관계에서 내가 느꼈던 그 이질감은 감독의 성 정체성에서 나온 것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테렌스 데이비스의 1992년작 'The Long Day Closes'의 경우에도 그런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1950년대의 영국 리버풀을 배경으로 12살 소년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영화에서 감독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암시하는 주요한 장면들이 있다.   말수가 없고 내성적인 소년 버드는 주로 집안에 머물면서 창밖으로 사람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느 때처럼 밖을 내다 보던 버드는 집 건너편의 공사 현장에서 젊은 인부와 눈이 마주친다. 청년은 버드에게 윙크를 하고, 소년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창문 안쪽 벽으로 얼른 돌아선다.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꾸준히 영화 속 소재로 다루었던 테렌스 데이비스의 작품들을 본 이들에게 그 장면은 명백한 암시일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 감독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도 없고, 처음으로 보는 그의 영화에서 나의 눈길을 끌었던 장면은 버드가 목욕하는 형의 등을 닦아주는 부분이었다. 소년은 씻고 있는 형의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형이 부탁하자 작은 수건으로 등을 닦는다. 고요하고 매혹적으로 포착된 그 장면에서 그것이 감독의 성 정체성과 관련이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면도날 위의 삶, 지방 극단 배우(Aktorzy prowincjonalni, Provincial Actors, 1979)

    남자는 잠을 자다 말고 옷을 입고 나갈 채비를 한다. 새벽 2시에 어딜 나가냐고 물으니, 공원에 간다고 말한다. 그는 달밤에 체조하러 가는 대신, 연기 연습을 하러 나간다. 서른 한 살의 지방 극단 배우 크지슈토프는 새로 시작하는 연극 '해방(Liberation)'의 주인공을 맡았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주인공 콘라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지역 연극제 출품작으로 공연될 이 작품을 위해 바르샤바의 유명 연출가가 내려왔다. 중앙 부처와 언론을 비롯해 다른 극단 관계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 크지슈토프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가진 재능을 보여줘서 이 시시하고 지겨운 지방 극단 배우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 남자, 제대로 콘라트 역을 해내어서 지방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까?   아그니에슈카 홀란드(Agnieszka Holland)의 장편 영화 데뷔작 '지방 극단 배우(Provincial Actors, 1979)'는 예술적 이상을 가진 연극 배우의 현실적 고민과 좌절을 그린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범상치 않다. 주인공 크지슈토프는 사냥용 장총을 벽에다 걸어놓고 천으로 덮는다. 언젠가 사용될 것 같은 총이 주는 불안한 느낌은 영화 내내 흐른다. 이 영화에 사용되는 음악도 무슨 공포영화에 나올 법한 것으로 시종일관 음울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지방 극단의 그리 크지 않은 무대와 낡은 내부 시설, 크지슈토프와 아내 안카가 사는 비좁은 아파트, 그렇게 대부분 협소한 공간에서 촬영된 영화는 숨막힐 것 같은 답답함을 뿜어낸다. 영화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내적인 우울과 불안, 강박적 공포는 그 모든 것과 절묘하게 감응한다.   크지슈토프가 연극에 집중하고 매달릴수록, 아내 안카와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진다. 연기를 공부한 안카는 인형극단 단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자신이 가진 재능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불만족스러운 현실과 이상에 대한 괴리는 안카를 정서불안과 우울에 시

사티야지트 레이가 보여주는 도시와 여성 그리고 자본주의, 대도시(Mahanagar, The Big City, 1963)

  *이 글에는 영화 '대도시(Mahanagar, The Big city, 196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 그렇게 공부해봤자, 새언니처럼 부엌에나 있게 될 걸."   퇴근하고 돌아온 오빠는 책상에 앉아있는 여동생에게 그렇게 빈정거린다. 그러나 부엌에만 있을 것 같았던 부인 아라티는 얼마 후 자신의 직업을 갖고 일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은 다 '돈' 때문이었다. 옆집에서 하루종일 틀어놓는 라디오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비좁고 낡은 주택, 은행원인 남편의 봉급만으로는 유지가 안되는 살림살이, 그도 그럴 것이 아라티는 연로한 시부모 봉양과 학교에 다니는 시누이의 학비까지 챙겨야 한다. 남편의 친구 부부가 맞벌이를 하고 있다는 말에, 아라티도 생활비에 보탬이 될까 싶어 일을 찾아 본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일은 편물기 판매 영업. 말 그대로 아라티는 세일즈 우먼이 된다. 그러나 살림만 하던 며느리가 밖에 나가 일하는 것을 시어머니는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시아버지는 아예 입을 닫고 반대의 뜻을 표명한다. 남편 수브라타도 조금씩 변해가는 아내의 모습이 영 낯설게 느껴진다. 급기야 남편은 자신이 부업을 할 테니 일을 그만두라고 아내에게 말한다. 이제 일에 재미를 붙인 아라티는 남편의 뜻에 따를까?   사티야지트 레이(Satyajit Ray) 감독의 1963년작 '대도시(The Big City)'는 중산층 가정 주부가 직업을 갖게 되면서 겪는 갈등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원작은 Narendranath Mitra의 단편 'Abataranika'로 감독 자신이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기혼 여성이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것을 두고 남편과 시부모가 보이는 반응은 지금의 관객들에게는 케케묵은 구시대적 모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50여년 전의 이 영화가 보여주는 자본주의와 대도시의 삶,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가족간의 갈등은 전혀 낡은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나루세 미키오의 숨겨진 역작, 여자의 역사(女の歴史, A Woman's Life, 1963)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1963년작 '여자의 역사(女の歴史, A Woman's Life)'는 그의 작품들 가운데 뭔가 찬밥 취급을 받는 듯하다. 1962년에 만든 비슷한 제목의 '여자의 자리(女の座)'가 좀 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두 작품 모두 다카미네 히데코가 주연을 맡았다. '여자의 역사'는 프랑스 소설가 기 드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을 바탕으로 카사하라 료죠가 시나리오를 썼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신상옥 감독이 1968년에 만든 '여자의 일생'도 있다. 최근작으로는 프랑스에서 2016년에 만든 영화가 있다. 이런 걸 보면 정말로 모파상의 그 소설이 시대를 뛰어넘어 대단한 흡인력을 가졌구나 싶기도 하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이 좀 넘는데, 보다보면 영화를 오밀조밀하게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결코 나루세 미키오의 그저그런 범작으로 여길만한 작품은 아니라는 뜻이다. 시나리오도 원작 소설의 기본 뼈대만을 취했을 뿐, 그 내용은 일본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한 여인의 일생으로 소설과는 차별성이 있다. 무엇보다 주연을 맡은 다카미네 히데코의 열연은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 다카미네 히데코의 나이는 39살이었는데, 20대의 아가씨부터 중년에 이르는 나이까지 자연스럽게 소화해낸다. 내가 놀란 것은 이 여배우는 단지 분장만으로 '늙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걸음걸이와 행동으로 나이든 사람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점이었다. 중년의 여인을 보여주기 위해 약간은 구부정하고 느리게 걷는 걸음걸이며, 목소리도 고음 대신 중저음을 사용한다. 배우로 타고난 사람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자신의 미용실을 갖고 있는 노부코는 연로한 시어머니, 장성한 아들 코헤이과 함께 살고 있다. 코헤이는 결혼할 여자가 생겼다며 노부코에게 알리지만, 노부코는 며느릿감이 카바레 종업원이라는 점을 들어

님로드 안탈이 그려낸 기이한 지하 세계, Kontroll(2003)

    "어떻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면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   남자의 직업은 지하철 검표원. 그의 일상은 지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업무가 끝나고도 집에 가지 않고 지하철 승강장에서 잔다. 마음에 드는 처자가 커피 한 잔 산다며 카페에 가자고 해도 선뜻 가지 못한다. 카페는 지상에 있기 때문이다. 지하를 벗어나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걸까? 그의 전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의 동료와 우연히 만나서 하는 대화를 들어보니, 자신의 분야에서 아주 잘 나갔던 사람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안정된 직장도 그만두고 이렇게 지하 인간이 되어버렸을까? 무언가 비밀을 가진 듯한 남자의 이름은 볼츄. 지하에 자신을 유폐시키는 삶이 싫어진 그가 친한 선배에게 묻는다. 미국 태생의 헝가리 감독 님로드 안탈(Nimród Antal, 헝가리식 이름 표기는 성을 먼저 쓰므로 '안탈 님로드'로 표기함)의 2003년작 'Kontroll'은 부다페스트 지하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독특한 심리 스릴러물이다.   볼츄의 주 업무는 승객들의 지하철 표를 검사하는 것(Kontroll)이다. 그는 하루종일 천차만별(이라고 쓰고 실상은 골때리는)의 승객들과 티켓 실랑이를 벌인다. 무임승차 승객들에게 얻어맞고 골탕먹는 것은 별 것 아닌 일상. 볼츄가 일하는 지하 공간에서는 그보다 더한 일도 일어난다. 승객들의 투신 자살은 낯설지 않다. 어쩌면 볼츄와 그 동료들이 보여주는 또라이 같은 행동은 지하 생활자로서 생존하기 위해 터득한 특성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볼츄는 동료를 놀려먹고 달아난 젊은 승객을 뒤쫓는다. 그런데 갑자기 검은 두건을 쓴 남자가 젊은 승객을 지하철이 들어오는 철로로 밀쳐서 죽게 만드는 장면을 목격한다. 두려움 때문에 두건 남자를 잡지 않은 볼츄는 졸지에 승객 살인범으로 몰린다. 얼마 후, 새벽에 몰래 열리는 지하철 파티에서 볼츄는 두건 살인범과

그렇게 사랑했던 이의 삶은 이어진다, 두 사람(ふたり, Chizuko's Younger Sister, 1991)

      미카는 늘 언니인 '치즈코의 동생'으로 불린다. 언니는 못하는 것이 없다. 공부는 물론이고, 피아노와 연기, 달리기까지 다 잘한다. 그런 언니와는 달리 미카는 모든 것이 서툴러 보인다. 무언가를 잘 빼먹고, 덤벙대는 미카를 보며 주변 사람들이 언니 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완벽한 언니 치즈코가 어느 날,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뜬다. 치즈코의 동생 미카는 그렇게 언니를 잃었다. 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 감독의 1991년작 '두 사람(ふたり, Chizuko's Younger Sister)'은 언니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 중학생 소녀의 내적인 여정을 그린다.    영화는 온갖 물건들이 제멋대로 놓인 미카의 방을 비춰주면서 시작한다.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미카의 방은 미카의 내면과도 닮아있다. 미카는 언니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미카의 상태만 불안한 것이 아니다. 미카의 엄마 또한 영 기운이 없어 보이고, 아파 보이기까지 한다. 그나마 집안의 가장인 아빠는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회사 업무 때문에 자주 출장을 가야하는 아빠. 아빠는 미카에게 엄마를 잘 보살펴야한다는 당부를 하지만, 자신을 추스리기도 힘든 미카가 그걸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런데 미카에게는 수호천사가 있다. 미카의 눈에만 보이는 언니의 혼령이 미카를 돕는다. 언니는 미카가 밤길에 치한을 만났을 때 처음으로 나타나서 도움을 준다. 그렇게 미카의 곁에 머물게 된 언니는 미카의 일상을 함께 한다. 피아노 연주회에서는 긴장을 풀어주고, 운동회에서는 느리게 뛰는 미카를 격려해서 1등으로 들어오게 한다. 연극의 주연을 맡았지만, 언니만큼 잘 해낼 수 없어 상심한 미카를 위로하기도 한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아직은 동생을 떠날 수 없는 언니 덕분에 미카는 서서히 충격과 상처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영화의 러닝 타임은 무려 2시간 반이나 된다. 1989

검열 권력에 맞선 작가적 의지, 테마(Тема, The Theme, 1979)

  *이 글에는 영화 '테마(The Theme, 1979)'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 소련 영화들과 관련된 자료를 검색하다 보면 자주 보게 되는 문구가 있다. 'stack on the shelf', 우리말로 번역하면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정도쯤 될까? 대개는 검열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당국의 최종 시사에서 상영 불가 판정을 받은 영화들이다. 소련의 예술 창작 원리인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에 맞지 않는 영화들의 운명은 버려지고 잊혀지는 것이었다. 글렙 판필로프(Gleb Panfilov) 감독의 1979년작 '테마(Тема)'의 경우도 그러했다. 영화는 심한 검열로 누더기처럼 되었고, 결국은 상영이 금지되었다. 당국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테마'는 그렇게 창고에서 잠자고 있다가, 고르바초프 집권기인 1987년이 되어서야 소련 관객들은 이 영화를 만날 수 있었다.   저명한 극작가인 킴 예세닌(미하일 울리야노프 분)은 자신의 애인, 동료 극작가와 함께 볼가강변의 수즈달을 찾는다. 새로 집필할 역사극의 자료를 찾기 위해서이다. 예세닌 일행은 한적한 소도시 수즈달에서 은퇴한 여교사 마리아의 환대를 받는다. 거리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들어간 지역 박물관에서 가이드 샤샤를 보게 된 예세닌은 호기심을 느낀다. 마리아의 집 만찬에서 예세닌은 샤샤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샤샤는 마리아의 제자로 어릴적부터 예세닌의 작품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정작 저녁 식사 자리에서 샤샤는 예세닌의 최근 작품들은 별로이며 형편없는 것이라고 혹평한다.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글이 아닌, 정부 당국이 원하는 이야기만을 적당히 타협하면서 써온 예세닌은 샤샤의 그런 말에 자괴감을 느낀다. 그 일로 샤샤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진 예세닌은 밤늦게 샤샤의 아파트로 찾아가는데...   예세닌은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새로운 폴란드를 예견한 영화, 묵주알(Paciorki jednego różańca, The Beads of One Rosary, 1979)

  *이 글은 영화 '묵주알(The Beads of One Rosary, 1979)'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쓰레기 집에서 난 더이상 못살아!"   여자는 이사를 못가겠다는 남편을 향해 쏘아붙인다. '쓰레기 집'이라는 말은 용납할 수 없다며 남편은 화를 낸다. 그들에게는 이사 갈 새집도 있고, 그저 짐 떠싣고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남편은 이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내세우는 이유는 이렇다. 함께 살고 있는 집의 주인인 아버지가 이사를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상, 자신은 아버지의 뜻에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치 묵주알이 서로 이어진 것처럼, 이 효자 아들은 아버지와 뜻을 같이 하겠다고 아내에게 공언한다. 그들이 사는 집은 새롭게 지어질 주택단지 때문에 철거가 예정되어 있다. 지방 정부와 건축 회사는 거주자들에게 새집을 주어서 이주를 진행시키는데, 오직 이 집의 주인 하브리카만이 이사를 거부하고 있다. 그에게 이 집은 50년 넘게 살아온 삶의 일부분으로 절대로 쉽게 떠날 수 없다. 효자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따른다. 며느리로서는 속이 터질 노릇이다.   '묵주알'은 폴란드의 감독 카지미에시 쿠츠(Kazimierz Kutz)의 1979년도 작품이다. 그는 사회참여적인 작품들을 주로 만들었는데, 이 영화는 철거 예정 단지에서 자신의 집을 지키려는 은퇴 광부의 외로운 투쟁을 그린다. 영화는 실제로 철거되는 광부 주택 단지에서 촬영되었다. 카지미에시 쿠츠는 새롭게 지어지는 아파트 건설 현장과 철거되는 주택 단지의 모습을 다큐처럼 담아낸다. 영화는 사는 집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노인의 의지를 따라가면서, 변화하는 폴란드 사회의 모습을 펼쳐놓는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내세우며 이사를 거부하는 하브리카와 그를 설득하려는 건축 회사 책임자는 설전을 벌인다. 오랫동안 새 아파트 입주를 기다리는 이들을 생각하지 않는 하브리카가 공공의 이익을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