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보태는 것을 보면
'돈'이 미네코의 주된 관심사인 것도 같다. 2층 세입자로 백수 남편 데리고 살던 술집 여종업원 에이코가 나가버리자, 미네코는 그
방을 에이코가 소개해준 동료에게 세를 준다. 새로 온 여자는 돈 많은 유부남을 꼬셔서 집에 드나들도록 만드는데, 미네코는 여자가
지불하는 높은 월세 때문에 그런 부도덕한 광경를 감수한다. 어쩌면 아이가 없고, 남편의 애정도 얻지 못한 미네코가 돈을 든든한
미래의 대비책으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아내에게서 나카가와는 매일 '직장'으로 도피하고 있다. 그곳에는 마음이 통하는 여직원 사가라가 있다. 사가라가 사무실을
그만두고 오사카로 떠나자, 나카가와는 출장길에 사가라와 재회한다. 그는 사가라의 어린 아들과 함께 여관에 하룻밤 머물면서
지내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와 놀아주는 그에게 사가라는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해 묻는다. 그때 아이와 장난감 자동차로 놀아주던
나카가와는 장난감을 세게 밀다가 마루 밑으로 떨어뜨린다. 그냥 이 순간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만 말하는 나카가와에게 그 관계는
툇마루에서 굴러 떨어지는 자동차의 탈선 같은 것이다. 분명히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졌고, 결혼 생활에 대한 의지도 없지만 그는
결정을 미룬다.
자, 그렇다면 남편의 바람을 확실히 알아챈 미네코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미네코는 남편의 배신을 용납할 수 없고, 그 상황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이혼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사가라에게 편지를 써서 헤어지라고 종용하고, 나중에는 찾아가서 자신의 뜻을
밝힌다. 머리끄댕이 잡는 혈투는 벌어지지 않는다. 남편을 계속 만나면 약먹고 죽어버리겠다고 말하는 미네코를 사가라는
'구식'이라며 비웃는다. 사가라의 비웃음은 아주 희미하게 보이기 때문에 나는 화면을 되돌려서 다시 확인해야만 했다. 사가라는
나카가와에게 이별을 통보하면서,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스스로 살아가겠다고 말한다. 두 여성의 모습은 전후 일본 사회의 과도기적
변화를 보여준다. 구시대적 관습에 속한 미네코는 혼자서 꾸려가야할 생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결혼이라는 내면의 감옥과 2층 주택의
한정된 공간에 자신을 유폐시킨다. 아버지에게서 재정적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친구와 함께 옷가게를 개업한 사가라는 미네코와는 달리
독립적인 여성의 삶을 살고 있다. 경제력을 가진 여성은 더이상 자신의 삶을 남자와 결혼이라는 틀에 끼워맞추지 않는다. 미네코의
세입자 에이코는 취업할 생각이 없는 백수 남편을 내쳐버린다. 전쟁이라는 변혁의 시기를 거치면서 전후 일본의 여성은 그렇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해 나갔다.
영화의 마지막은 첫부분에 나왔던 부부의 독백이 비슷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마치 수미쌍관을 이루는 그 구성은 그들 부부의
불모(不毛)의 비극적인 미래를 보여준다. 서로에 대한 그 어떤 감정의 교류도 없이 그저 꾸역꾸역 매일의 삶을 이어가는 것. 남자는
매일 아침 직장으로 도피했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와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잠든다. 아내는 남편이 늘 하는 '피곤하다'는 말을
들으며, 맛없는 식사를 준비하고 집안일을 할 것이다. 나루세 미키오가 보여주는 이 결혼의 풍경은 너무나도 냉혹하고 끔찍하다.
화해도 결별도 아닌, 비극의 연장인 '아내'의 결말은 결혼이란 제도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며 관객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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