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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22의 게시물 표시

다리들 아래로(Unter den Brücken, Under the Bridges, 1946), 우리들의 시대에(In jenen Tagen, In Those Days, 1947)

그곳에 사람과 영화가 있었다: 헬무트 코이트너( Helmut Käutner) 의 전후 독일 영화 두 편   1. 전쟁의 심연 속에서 탈주를 꿈꾸다, 다리들 아래로(Unter den Brücken, Under the Bridges, 1946)   나치 치하에서는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까? 영화가 가진 선전 선동의 힘을 잘 알았던 나치는 Ufa 를 설립해서 영화 산업을 국가적으로 통제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기의 영화들이 모두 프로파간다(Propaganda) 였던 것은 아니다. 물론 나치는 영화 제작에 집요한 간섭과 검열을 강제했지만, 그에 맞서는 창작자들도 여럿 있었다. 헬무트 코이트너(Helmut Käutner) 도 그런 감독들 가운데 하나였다. 코이트너가 1944년에 만든 '다리들 아래로(Unter den Brücken, Under the Bridges, 1946)' 는 매우 서정적인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헨드릭과 빌리는 자신들의 바지선으로 운하와 강을 오가며 화물을 운송한다. 절친한 친구 사이인 그들은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아가씨 안나와 동시에 사랑에 빠진다. 두 친구는 안나의 마음을 얻는 사람이 바지선을 포기하고 떠나기로 서로 약속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육지에 정착하고 싶다는 소망과 오래도록 이어온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헨드릭과 빌리. 영화는 삼각 관계라는 진부한 틀의 사랑 이야기를 아름다운 풍광 속에 잔잔하게 풀어놓는다. 나치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4년 여름에 촬영된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저 영화를 찍은 곳이 독일이 맞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헨드릭과 빌리의 바지선은 운하 근처의 대도시를 마치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담아낸다. 거리의 사람들은 활기가 넘치고, 끊임없이 배들이 오가는 강의 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폭격으로 일부 손상된 건물의 모습이 보이기는 해도, 이 영화에서 전쟁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런 종류의 로맨스 영화는 나치 치하의 독일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전시 상황에

핏빛 전설에 담긴 전쟁의 광기, 사투의 전설(死闘の伝説, A Legend or Was It?, 1963)

    평화로운 홋카이도의 어느 농촌 마을. 밭일을 하던 농부들은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마을 어귀에서는 바퀴가 빠진 트럭을 보고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도우러 나섰다. 그런데 이렇게 인정과 활기가 넘치는 이 마을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화면 위로 흐르는 남성 내레이터의 목소리는 마을의 과거로 떠나는 신호탄이 된다.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 의 '사투의 전설(死闘の伝説, A Legend or Was It?, 1963)' 은 종전 직전에 벌어진 농촌 마을의 비극을 보여준다. 가톨릭의 미사 전례곡 첫 부분인 '주여,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소서(慈悲頌, Kyrie)'가 비감하게 흐르는 도입부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이 영화는 음악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영화 전편에 걸쳐 불길하고 음울하게 들리는 배경 음악은 '무쿠리(ムックリ, Mukkuri, 아이누족의 전통 악기)' 가 쓰였다. 그 음악과 함께 영화는 컬러 화면의 현재에서 흑백의 과거로 곧바로 진입한다.   일본의 침략 전쟁이 막바지에 달했을 무렵, 홋카이도의 산골 마을에 젊은 군인이 귀향한다. 4년만에 전장에서 돌아오는 군인의 이름은 히데유키. 그는 소노베 집안의 장남이다. 히데유키는 마을 입구에서 말을 탄 상이군인과 마주친다. 전쟁에서 왼손을 잃은 그 남자 코이치는 히데유키의 여동생 키에코에게 청혼을 한 터였다. 히데유키는 코이치를 한눈에 알아본다. 코이치는 중국에서 복무했던 히데유키의 부대 상관이었다. 히데유키는 코이치가 아녀자를 강간하고 살해했던 만행을 떠올린다. 그런 잔학한 남자와 여동생을 결혼시킬 수는 없다. 코이치가 싫은 것은 키에코도 마찬가지. 하지만 소노베 가족에게 그 청혼의 거절은 생존과도 직결된다. 도쿄의 공습을 피해 홋카이도로 온 소노베 일가는 이장 타카모리의 도움을 받았다. 코이치는 바로 그 타카모리의 아들이다. 이제 자존감에 상처받은 코이치는 비열한 복수극을 시작한다.   동시대의 오즈 야

정소동이 만들어낸 비감한 무협의 세계, 생사결(生死決, Duel to the Death, 1983)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산 태종대는 해안 절벽의 비경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태종대에서 극적인 결투 장면을 찍은 홍콩 무협 영화가 있다. 우리에게는 영화 '천녀유혼(倩女幽魂, 1987)' 으로 잘 알려진 정소동(程小東) 감독의 데뷔작 '생사결(生死決, Duel to the Death, 1983)' 이 그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소림사 서고에 침입하는 일단의 닌자 무리가 보인다. 그들은 무술 비서를 찾아내어 재빠르게 사라진다. 홍콩 무협 영화에 일본의 닌자들이라니, 뭔가 시작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때는 명나라 말기, 무림은 10년마다 열리는 중국과 일본 무사의 결투를 앞두고 있다. 중국에서는 소림사의 보청운이, 일본에서는 신음파(新阴派) 무사 미야모토가 낙점된다. 소림사 문파는 무술 종주국의 위엄을 보이고 싶어한다. 한편 일본 신음파도 자신들의 무공이 중국에 뒤지지 않음을 입증할 계획이다. 각자 자신의 나라와 문파의 명예를 짊어진 청운과 미야모토, 과연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   영화는 시작부터 닌자와 소림사 승려들의 화끈한 대결을 보여준다. 쇼브라더스(Shaw Brothers) 의 무협 영화에서 무술 지도를 담당했던 정소동은 자질구레한 부연설명 따위는 하지 않는다. 검은 옷의 닌자들은 칼싸움에서 밀리자 폭약으로 자폭 공격을 감행한다. 그런 다음에 뜨는 오프닝 크레딧에 감독 정소동의 이름과 함께 '생사결(生死決)' 의 타이틀이 박힌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결투. 소림사의 보청운 은 이 결투에 나가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다. 청운에게 무술이란 자기 수련의 방식이지, 승부로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청운의 주변인들은 그런 그에게 결투의 의지를 불어넣으려 애쓴다. 숲에서 사는 청운의 스승은 별다른 욕심도 없어보이는 걸인의 행색이다. 그런 그조차 청운에게 반드시 이기라고 말한다.   한편 일본의 무사 미야모토 도 대결을 앞두고 결의를 다진다. 그의 스승은

전후 영국 사회의 불안과 공허, 관리인(The Caretaker, 1963)

    스모킹 재킷(Smoking Jacket) 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담배 피울 때 입는 옷이다. 서구 영화 속에서 대저택의 주인이 서재에서 입는 편안한 실내복을 생각하면 된다. 벨벳과 실크 소재로 만든 이 옷은 매우 고급스럽다. 해롤드 핀터(Harold Pinter, 1930-2008) 의 희곡 '관리인(The Caretaker)' 에서 노숙자 데이비스는 공짜로 스모킹 재킷을 얻는다. 거리에서 떠돌던 노숙자가 상류 계층이 입는 스모킹 재킷을 걸친 모양새는 영 어색하기만 하다. 데이비스에게 그 재킷을 가져다준 사람은 애스턴이다. 그는 건달에게 흠씬 얻어맞을 뻔한 데이비스를 구해주었다. 애스턴은 오갈 데 없는 데이비스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기까지 한다. 재워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호의인데, 데이비스는 신발이 닳았으니 괜찮은 구두 하나 내놓으란다. 끊임없이 욕설과 상스런 말을 내뱉는 데이비스. 그런 노숙자에게 관대함을 보여주는 애스턴. 그리고 애스턴의 동생 믹. 해롤드 핀터는 비좁은 방에서 이 세 명의 인물이 나누는 이야기로 3막의 희곡을 만들어 냈다.   클라이브 도너(Clive Donner) 감독 의 '관리인(The Caretaker, 1963)' 은 해롤드 핀터의 동명 희곡 'The Caretaker(1960) ' 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러닝타임 1시간 45분. 좁은 방에서 도대체 세 명의 남자들이 나누는 대화로 어떻게 시간을 채워가나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천재적인 극작가 핀터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 애스턴의 호의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데이비스의 행태는 뻔뻔함 그 자체이다. 애스턴이 구해온 신발에 끈이 없다며 불평하고, 끈을 찾아서 주니까 색깔이 마음에 안든다고 말한다. 애스턴이 데이비스의 잠꼬대 때문에 잠을 못잤다고 하자, 옆방에 사는 외국인들이 내는 소리라며 억지를 쓴다.   왜 애스턴은 무례한 노숙자 데이비스를 인내하는가? 아마도 그 단서는 애스턴의 방에서 찾아볼 수

망가진 삶을 재건하는 용기, To Leslie(2022)

  영화가 시작되면 오래된 뉴스 화면이 보인다. 싱글맘 레슬리는 이제 막 복권에 당첨되었다. 상금 액수가 무려 19만 달러. 기쁨과 흥분에 휩싸인 레슬리는 당첨금으로 집을 사고 13살 아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겠다고 외친다. 그로부터 6년 후, 레슬리는 장기 투숙 중인 모텔의 숙박비를 내지 못해 쫓겨난다. 잡동사니 짐들과 함께 길바닥에 나앉은 이 여자의 몰골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퀭한 눈빛, 비쩍 말라버린 몸, 너저분한 옷차림. 레슬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그곳은 죽기보다 더 가기 싫은 곳이다. 고향 사람들이 알콜 중독자가 되어버린 자신을 경멸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영화 'To Leslie(2022)' 는 알콜 중독자 여성의 지난한 재활의 여정을 그린다. 영화에서 재미를 추구하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는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다. 밑바닥으로 전락한 하층 계급 여성의 삶이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러닝타임이 2시간에 가까운 이 영화를 보는 일은 어떤 면에서는 지루하며 내내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어떻게 해서 레슬리가 복권 당첨금을 날려 버렸는지, 어린 아들은 어떻게 자랐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제 19살이 된 아들 제임스는 막노동을 하며 살고 있다. 그래도 엄마에 대한 연민을 지닌 아들은 엄마를 내치지는 못한다. 제임스는 자신의 집에서는 술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엄마에게 일러둔다. 하지만 그것이 레슬리에게 불가능한 일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난다. 레슬리는 아들의 집에서도 쫓겨난다. 유일한 짐인 작고 지저분한 분홍색 여행 가방과 함께.   중독의 나락에 떨어진 이 여성이 범죄와 착취의 그물에 얽히는 건 시간 문제다. 굶주리고 잘 곳도 없으며 술을 갈망하는 레슬리에게 불순한 의도를 지닌 남자들이 다가온다. 술 한 잔, 햄버거 하나, 레슬리에게는 그 모든 것이 절실하다. 추행 당할 위기에서 용케 벗어난 레슬리가 다다른 곳은 허름한 모텔. 그곳 주인 스위니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사람 좋은 이 남

이루지 못한 스타의 꿈, Rat Fink(1965)

  *이 글에는 영화 'Rat Fink'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4살 청년 Schuyler Hayden 은 영화에 출연해서 유명한 스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생초짜 배우에게 주연을 맡길 영화사는 없었다. 그래서 헤이든은 자신이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있는 대로 돈을 그러모았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 'Rat Fink(1965)' 의 주인공 로니가 될 수 있었다. 스카일러 헤이든이 연기한 로니는 스타가 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청년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기타를 가지고 화물 열차에 무임승차한 젊은 남자가 보인다. 잠시 정차한 역에서 단속반에 들킨 그는 달아나다가 기타마저 잃어버린다. 이제 그가 가진 것은 말 그대로 맨몸뚱이 뿐이다. 과연 이 무일푼의 무모한 가수지망생은 스타가 될 수 있을까?   중년 여자를 유혹해서 훔친 돈으로 로니는 멋진 양복을 사입는다. 그리고 잘 나가는 클럽에 간다. 거기에는 이제 막 뜨고 있는 록가수가 공연을 하고 있다. 로니는 질투와 선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가수를 쳐다본다. 공연을 끝낸 가수가 마침내 차에 탔을 때, 로니는 차 안으로 담뱃불을 던진다. 미리 휘발유가 부어진 차는 폭발한다. 끔찍한 화상을 입은 가수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로니에게서 정신병적인 징후가 감지된다. 이 사이코패스 가수 지망생은 그렇게 유력한 경쟁자를 제거했다.   로니는 그 가수의 소속사 사장 폴을 찾아간다. 데모 음반 작업으로 로니의 재능을 확인한 폴은 기꺼이 계약한다. 돈과 명성이 로니를 따라오지만, 비뚤어진 내면을 지닌 록스타의 행로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로니는 무분별한 연애와 향락에 몸을 던진다. 팬으로 만난 어린 여학생 베티를 농락하고 차버린다.   흑백 필름 속의 스카일러 헤이든은 눈부시게 빛난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반드시 스타가 되겠다는 24살 헤이든의 꿈이 허황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어떤 면에서 영화 속 로니는 헤

결혼 반지(婚約指環, Wedding Ring, 1950), 우리들의 결혼(私たちの結婚, Our Marriage, 1962)

  1. 사랑에 드리운 군국주의의 그림자, 결혼 반지(婚約指環, Wedding Ring, 1950)   데이비드 린(David Lean) 의 '밀회(Brief Encounter, 1945)' 는 우연히 만난 중년 남녀의 짧은 사랑을 그린 영화이다. 각자 가정이 있는 두 사람은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지만, 일탈 대신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한다.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恵介) 감독의 '결혼 반지(婚約指環, Wedding Ring, 1950)' 에도 영화 '밀회'의 남녀 주인공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이 등장한다. 도쿄에서 보석상을 운영하는 노리코(타나카 키누요 분)에게는 아픈 남편 미치요가 있다. 남편은 병 때문에 도쿄 근교 바닷가에서 요양중이다. 어느 날, 미치요의 새 주치의 에마(미후네 토시로 분)가 집을 찾는다. 처음엔 단순한 호감이었던 노리코의 감정은 점차 사랑으로 변해간다. 미치요는 그런 아내의 변화를 재빨리 알아챈다. 갑작스런 사랑의 감정에 흔들리는 것은 에마도 마찬가지. 세 사람의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타기는 마침내 결단의 순간에 다다른다.   얼핏 보기에 통속적인 이 삼각 관계에는 어두운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늘 누워서 지내는 미치요의 병은 전쟁터에서 얻은 것이다. 결혼 직후에 징집으로 끌려간 그는 전쟁이 끝나고 2년 뒤에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아내 노리코는 주중에는 도쿄의 가게를 지키고, 주말에는 아픈 남편을 보살피러 본가로 돌아온다. 남편에 대한 노리코의 애정이 손가락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만큼 단단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노리코는 에마가 지닌 생의 활력과 건강함에 순식간에 매혹된다. 병석에 누워있는 남편이 가지지 못한 것을 젊고 매력적인 의사는 가지고 있다.   노리코가 결혼한 여성이고, 그 남편이 자신의 환자라는 사실은 에마를 윤리적인 딜레마에 빠뜨린다. 그는 미치요를 낫게 해야한다는 직업적 의무감과 노리코에 대한 감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들 사이에 끼

쑨위(孫瑜, 1900-1990) 감독의 중국 무성 영화 두 편: 대로(大路, The Big Road, 1935), 체육 황후(体育皇后, Sports Queen, 1934)

  대로(大路, The Big Road, 1935), 104분 체육 황후(体育皇后, Sports Queen, 1934), 89분 1. 애국 영화 속 전복된 젠더 이미지, 대로(大路, The Big Road, 1935)   그의 부친 김필순은 의사로 독립운동가였다. 조선에서의 독립운동이 힘들게 되자 김필순은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북동부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져감에 따라 김필순에 대한 일제의 압박도 커져갔다. 결국 김필순은 일제에 의해 독살당한다. 가장을 잃은 가족의 삶은 무척 어려웠다. 힘들게 정규 교육 과정을 마친 그는 영화계로 흘러들게 된다. 준수한 외모의 그에게 운이 따른다. 그가 출연한 무성 영화가 연이어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조선인 김염(金焰) 은 그렇게 1930년대 중국 무성 영화계의 스타가 되었다. 쑨위(孫瑜) 감독의 1935년작 영화 '대로(The Big Road)' 는 김염의 대표작이다.   영화는 기근을 피해 길을 떠나는 한 가족을 비춰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린 아이를 두고 어머니가 죽고, 10년 후에는 아이의 아버지도 길에서 죽는다. 세월이 흘러 1930년대, 부모를 잃은 아이 진(김염 분)은 이제 20대 청년이 되었다. 진은 도로 건설 현장에서 만난 동료들과 형제처럼 지낸다. 건설 현장 인근의 식당에는 유쾌하고 발랄한 두 아가씨 딩샹과 자스민(리 리리 분)이 있다. 진과 동료들은 두 아가씨들과 친분을 쌓으며 즐겁게 보낸다. 하지만 좋은 시간도 잠시, 일본군의 침략이 임박함에 따라 도로 건설 현장에서 긴장이 고조된다. 그들이 짓는 도로는 중국군의 진군을 위한 것이다. 일본군과 내통한 지역의 유지 후는 도로 건설을 중단시키려고 한다. 진과 동료들이 그 뜻에 따르지 않자 후는 그들을 자신의 지하 감옥에 가둔다.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과 일본군을 동시에 상대해야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었다. 장제스는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는 일본

악인의 영혼에 사무라이의 시대를 비추어 보다, 대보살 고개(大菩薩峠, The Sword of Doom, 1966)

    노인은 손녀딸과 함께 대보살 고개에 다다른다. 손녀딸이 잠시 물을 뜨러 간 사이, 노인은 작은 석탑 앞에서 기도를 올린다. 손녀딸 더는 고생시키지 않게 얼른 이 늙은 몸을 데려가 달라고 되뇌인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난다. 방랑승의 복장을 한 남자는 일순간에 칼을 휘둘러 노인의 목숨을 빼앗는다. 손녀딸 오마츠는 할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하고 오열한다. 아무 이유 없이 노인을 죽인 살인자의 이름은 류노스케(나카다이 타츠야 분). 사무라이인 그는 뛰어난 검술을 지녔으나, 그 영혼은 사악함으로 물들어 있다.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 의 영화 '대보살 고개(大菩薩峠, The Sword of Doom, 1966)' 는 막부 말기, 어지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 피와 광기에 사로잡힌 검귀(劍鬼) 류노스케 의 행적을 따라간다.   영화가 시작되면 '1860년 봄, 사쿠라다몬 사건(桜田門外の変, The Sakuradamon Incident) 직후' 라는 자막이 뜬다. 그 사건은 막부 대신 이이 나오스케가 존황양이파 사무라이들에 의해 암살당한 일을 가리킨다. 사쿠라다몬 사건은 막부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후 막부파와 천황파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막부 시대의 종말을 재촉하는 계기가 된다.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의 영화 '사무라이(侍, Samurai Assassin, 1965)' 는 바로 그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시대극이다. '대보살 고개'는 '사무라이(1965)'에서 이어지는 막부 말기 시대극 연작같은 느낌도 준다. 천황파의 공세 속에서 막부파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1863년, 막부를 옹위하기 위해 '신선조(新選組)' 가 결성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면 영화 이해에 도움이 된다.   죄없는 순례자 노인을 죽인 일은 류노스케의 내면이 심각하게 어그러져 있음을 입증한다. 류노스케는 검술 문파 사이의 평가전에서 상대방을 가차없이 죽인다. 대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