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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21의 게시물 표시

저 멀리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리고, 24 Frames(2017)

    '동숭 시네마텍', 참 그리운 이름이다. 1995년에 그 영화관이 문 열었을 때, 마치 새로운 영화 세계가 열린 것 같았다. 동숭 시네마텍의 구조가 관객 친화적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비좁은 외벽 계단을 오르내리는 불편을 감수하고 그곳에 갔던 이유는 단 하나, 좋은 영화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도 거기에서 본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1988)'을 잊지 못한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내가 머릿속에 담고 갈 영화일 것이다. 그리고 아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도 그곳에서 만났다. 그때 상영관 좌석은 거의 매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면, 주인공 꼬마 아마드가 달려가는 갈지자( 之) 모양의 산길,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공책에 살포시 꽂혀있는 작은 풀꽃. 진짜 그 두 장면이 다였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떴을 때, 굉장히 허탈하고 사기 당한 기분이 들었다. 뭐 저딴 영화가 다 있냐, 하면서 영화관을 나섰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키아로스타미는 그 후로도 불호 감독이었다. 이 양반은 예술 영화를 표방하면서 아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기술이 있었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와 '체리 향기(1997)'를 챙겨서 보기는 했으나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장면 장면들이 가끔씩 생각나곤 했다. 나는 그 영화가 가진 소박함과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쩌면 그 영화는 '세월의 힘'이 필요한 텍스트인지도 모른다. 젊은 나이에는 그런 느린, 매우 심심한 영화를 밀쳐두기 마련이다. 아마도 그의 유작이 된 '24 Frames(2017)'도 나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영화일 것이다.   영화는 피터 브뤼겔(

Ken Burns의 PBS Jazz 미니 시리즈(2001) 1, 2, 5, 6편

      몇 년 동안 시사 주간 잡지를 구독한 적이 있었다. 그 잡지들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영화는 중간부터 보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잡지는 그것이 가능하다. 이런 미니시리즈도 뭔가 처음부터 보는 것이 답답해서 전번에 3, 4편을 먼저 봤다. 그리고 이번에 1편과 2편, 5편과 6편을 몰아서 봤다. 각각의 제목은 이렇다. 1편 'Gumbo(To 1917)', 2편 The Gift(1917-1924) , 5편 Swing: Pure Pleasure(1935-1937), 6편 Swing: The Velocity of Celebration(1937-1939). 1편과 2편은 재즈의 기원과 초창기의 이야기, 5편과 6편은 스윙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   뉴올리언스(New Orleans), 재즈의 시작과 그 전설적인 도시를 떼어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870년대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인 노예들이 향유하던 음악이 있었다. 이른바 '슬레이브 뮤직(Slave Music)'. 그 음악은 재즈의 기원을 이루는 하나의 물줄기이다. 거기에 여러 다른 물줄기들이 합쳐진다. 캐리비안 출신의 크리올(Creole)들의 음악, 흑인 영가, 노동요가 섞인다. 1편의 제목 'Gumbo'는 미국 남부 지방에서 먹는 온갖 종류의 식재료를 넣은 잡탕 수프를 의미한다. 그것처럼 재즈는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섞인 곳에서 시작되었다. 재즈 초창기에 크리올 음악가들의 역할은 매우 컸다. 크리올은 흑백 혼혈로 옅은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고, 꽤 높은 생활 수준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 흑인들 보다는 우월하다고 느꼈던 그들의 정체성은 남북 전쟁(Civil War)을 거치면서 변화가 생긴다. 백인들에게 크리올들은 흑인과 같은 열등한 이들이었다. 그렇게 크리올 음악가들이 재즈 음악계에 편입되면서 재즈는 원시적이고 단순한 가락에서 음악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재즈는 시간이 갈수록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다

Ken Burns의 PBS Jazz 미니 시리즈(2001) 3, 4편

  Ken Burns가 2001년에 만든 PBS TV 다큐 시리즈 'Jazz'는 모두 1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1917년부터 2001년에 이르는 재즈의 역사를 아우른다. 내가 이번에 본 것은 3편 'Our Language(1924-1928)'과 4편 ' The True Welcome( 1929–1935)'이다. 그 두 편을 보면서 느낀 것은 그렇다. 무엇보다 감독 Ken Burns가 얼마나 재즈를 마음 깊이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냥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잘 전달하기 위해 서사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애썼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음악 다큐에 아무리 좋은 음악이 내내 흐른다고 해도, 거기에 매혹적인 이야기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Ken Burns가 생각한 방식은 재즈 뮤지션들의 인생 이야기를 옷감을 짜듯 씨실과 날실로 엮어가는 것이다.   "야, 너 그따위로 연주할래? 한 번만 더 그런 거지 같은 연주하면 패버린다."   이렇게 험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은 누굴까? 1920년대와 30년대에 활동했던 블루스의 여왕 베시 스미스( Bessie Smith)다. 타고난 재능으로 9살때부터 길거리 공연을 했던 베시 스미스는 처음엔 가스펠 공연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블루스로 전향했는데, 베시는 술 문제와 더러운 성격으로 유명했다. 반주를 맡은 연주자가 시원찮은 연주를 하면 걸걸한 입담을 보여주었다.   3편은 재즈가 어떻게 흑인들의 영혼과 정서를 대변하는 음악이 되어갔는지 그 기원을 살펴본다. 'Our Language'는 재즈 음악에 깃들인 흑인들의 정체성을 가리킨다. 그 중심에는 가장 중요한 두 명의 뮤지션이 있었다.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과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이 그들이다. 그 두 명이 흑인으로서 재즈 초창기의 독창성을 확립해 나갔다면, 또 다른 한 편에는 백인 재즈 뮤지션들이 있었다. 베니 굿맨(Be

Ken Burns의 PBS Jazz 미니 시리즈(2001) 7편과 8편

Jazz 7  'Dedicated to Chaos(1940-1945)' 1시간 53분          Jazz 8  'Risk(1945-1956) 1시간 58분   'Jazz 7편'은 2차 세계 대전 시기를 통과하는 재즈 음악계의 변화를 담는다. 1930년대를 휩쓸었던 스윙의 열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듀크 엘링턴, 루이 암스트롱은 그 중심에서 여전히 건재했다. 그런 가운데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등장은 재즈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한다. 1940년, 미국은 대공황의 종식과 함께 활기를 되찾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럽에서 시작된 전쟁의 기운이 미국을 감싼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미국은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다. 많은 재즈 음악가들도 군인으로 복무했다. 듀크 엘링턴과 루이 암스트롱은 군대에 가기에는 나이가 많았기에 그들은 대신 군 위문 공연을 다니며 시민의 의무를 다했다. 군 부대에서 재즈 밴드가 결성되는 일도 있었다.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은 그렇게 재즈를 시작했다.   Home front로서 미국 본토는 전쟁 지원에 총력을 다했다. 군대에 간 30개의 재즈 밴드들을 비롯해 심지어 전시 물자에 쓰느라 악기 제조까지 중단되기도 했다. 전쟁과 재즈, 무언가 안어울릴 것 같은 이 조합은 새로운 파장을 만들어 냈다. 군대 음악으로서 재즈는 대중성을 더욱더 확장해 나갔다. 특히 유럽에서 재즈는 나치 독일에 대항하는 자유와 통합, 젊음의 이미지를 획득한다. 나치는 재즈 음악이 가진 그러한 상징성 때문에 탄압하기도 했다. 토마스 카터 감독의 1993년작 'Swing Kids'는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재즈는 더 많은 향유 계층과 음악적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이전부터 존재했던 미국 사회 내부의 고질적인 문제가 서서히 임계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인종 문제였다. 전시와 군대에서도 인종 차별은 노골적

피터 왓킨스 평생의 역작, La Commune(Paris, 1871)

    1871년은 프랑스 근대사에서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해이다. 보불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가 굴욕적인 협상으로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에게 뺏긴 것이 2월이었다. 나폴레옹 3세가 쫓겨나고 새롭게 수립된 공화정 정부의 수반은 아돌프 티에르로 매우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전후 수습과 함께 빠른 권력 장악을 위해 국민군의 해산을 명령했다. 프로이센의 파리 포위 기간 동안 목숨을 걸고 도시를 지켰던 민병대 조직인 국민군은 반발했다.   시작은 티에르가 시민들의 기금으로 만든 국민군의 대포 징발을 위해 정부군을 보낸 것에서부터였다. 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빈곤과 기아에 시달렸던 파리 시민들의 분노가 터져나왔다. 정부군의 장군 2명이 시위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이에 놀란 티에르 정부는 베르사이유로 퇴각했다. 이후 70일 동안 파리에서는 코뮌(Paris Commune)이라는 자치 정부가 세워진다. 영국 출신의 다큐멘터리 제작자 피터 왓킨스(Peter Watkins)는 바로 그 파리 코뮌을 다룬 5시간 45분짜리 극영화를 만들었다. 2000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La Commune'이라는 제목에 'Paris, 1871'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파리 교외의 거대한 실내 세트장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무려 220명에 달하는 배우들이 출연한다. 그들 대부분은 비전문 배우로 일반 파리 시민을 비롯해 이민자들 가운데 선발된 이들이었다. '파리 코뮌'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던 이들을 위해 피터 왓킨스는 토론과 학습으로 이루어진 제작 워크숍을 진행했다. 그 시간들을 거치면서 배우들은 자신들의 배역을 충실히 숙고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피터 왓킨스는 'La Commune'을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것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왓킨스에게 이 작업을 의뢰한 프랑스-독일의 합작 방송사 ARTE는 최종 결과물을 보고 심한 불쾌감을 표시했으며, 작품의

자연과 동물을 다룬 다큐멘터리 세 편; Aquarela(2018), Gunda(2020), Stray(2020)

  1. 빅토르 코사코프스키의 다큐들, Aquarela(2018)와 Gunda(2020)   오래전, 러시아 영화사 수업 시간에 미하일 칼라토조프의 '나는 쿠바다(Soy Cuba, 1964)'를 보았을 때의 일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인파를 찍은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롱쇼트는 마치 카메라가 공중을 유영하듯이 특이하게 찍은 장면이었다. 정말이지 기이하고 놀라운 쇼트여서 수강생들끼리 저거 어떻게 찍었을까,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러시아에서 영화를 전공한 선생님이 당시 촬영 스탭으로 참여했던 이에게 물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대답을 안해줬다고... 선생님은 아마도 건물들 사이에 밧줄을 걸고 카메라를 미끄러지게 해서 찍은 것 같다고 추측했다. 빅토르 코사코프스키(Viktor Kossakovsky)의 2018년작 다큐 'Aquarela'의 마지막 부분은 탄성과 함께 '나는 쿠바다'를 보며 던졌던 질문을 하게 만든다. 대체 어떻게 찍었을까? 코사코프스키는 'indiwire.com'과의 인터뷰에서 '영업 비밀'이라 알려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랬다. 목숨 걸고 찍은 필름의 비밀을 알기란 쉽지 않다.   '수채화'란 뜻의 'Aquarela'라는 제목의 다큐는 말 그대로 물과 얼음의 향연이 펼쳐지는 자연 다큐이다. 1시간 30분에 이르는 러닝타임 동안 관객은 우리가 사는 지구를 채운 물의 다양한 형태, 그 힘과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된다. 다큐의 시작은 바이칼의 얼음 호수에 빠진 자동차를 끌어내는 장면에서부터이다. 러시아 태생의 코사코프스키 감독의 여정은 기후변화로 거대한 빙하가 무너져 내리는 그린란드, 광포한 폭풍우가 들이치는 바다, 기록적인 피해를 기록한 허리케인 Irma가 지나가는 마이애미의 한복판, 그리고 마지막 여정인 베네수엘라의 앙헬 폭포에 이른다. 깎아지른듯한 수직 절벽의 위와 아래에서 찍은 앙헬 폭포의 장관은 지

스탈린의 장례식; Great Farewell(1953), State Funeral(2019)

1. Lullaby(1937), 58분 2. Great Farewell(1953), 1시간 5분 3. State Funeral(2019), 2시간 15분 (1번과 2번 작품은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자막은 제공되지 않는다)   1937년, 러시아 혁명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는 '자장가(Lullaby)'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러닝타임 58분의 이 다큐멘터리는 품에 안은 아기를 어르는 젊은 엄마를 비춰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다큐는 러시아 혁명의 위업을 이어받는 새로운 세대의 희망을 노래한다. 러시아 전역을 아우르는 다양한 인종의 여성들과 아이들이 산업과 교육, 예술 분야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이 다큐는 '러시아'라는 국가가 지닌 생명력, 모성에 대한 찬양을 드러내고자 베르토프 특유의 몽타주 기법으로 정교하게 편집되어 있다.   정치적 선전물인 프로파간다(propaganda) 영화로서 '자장가'에는 당시 국가 원수였던 스탈린이 부수적인 이미지로 삽입된다. '부수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다큐에서 스탈린이 등장하는(초상화 장면까지 포함해) 부분이 10여 분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다큐에서 스탈린은 권위적인 국가 지도자가 아닌 '자애로운 아버지'의 이미지로 강조된다. 생명과 희망을 대변하는 위대한 모성으로서의 러시아와 짝을 이루는 개념으로 아버지 스탈린이 자리한다. 베르토프의 필모그래피 끝자락에 위치한 이 다큐는 발표 직후 5일만에 영화사 선반에 얹히는 신세가 되었다. 아마도 이 작품에 대한 스탈린의 비호감이 주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후 베르토프는 경력의 내리막길에 접어들며 쓸쓸히 영화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우크라이나의 세르게이 로즈니차(Sergei Loznitsa) 감독의 2019년작 다큐 'State Funeral'을 보고 있노라면, 스탈린이 소련 인민들에게 차지

우르술라 마이어(Ursula Meier)의 영화들: Home(2008), Sister(2012) 2부

  2. 휴양지 뒷편의 숨겨진 삶, Sister(2012)   영화는 시작부터 30분 동안 어린 시몽의 스키장 절도 행각을 건조하게 보여준다. 마치 로베르 브레송의 'Pickpocket(1959)'에서 능수능란한 소매치기 기술이 이어지는 쇼트들처럼 시몽은 관객들에게 자신의 비행(非行) 공연을 펼친다. 물 만난 고기처럼 스키장을 유유히 누비며 값비싼 스키 장비를 비롯해 휴가객들의 옷과 소지품, 싸온 음식까지 훔치는 이 아이는 고작 열두 살이다. 스키장 아래에 자리한 마을 아파트에서 누나 루이즈와 살고 있는 아이는 훔친 물건을 처분한 돈으로 누나를 '부양'한다.   자신의 첫 장편 영화 'Home(2008)'에 출연했던 아역 배우 케이시 모테트 클라인의 재능에 주목한 우르술라 마이어는 영화 'Sister'를 구상한다. 마이어는 스위스의 스키장 근처에서 방을 얻어 잠시 지냈던 시절의 일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멋진 휴양지의 외관 뒷편에는 그곳이 잘 돌아가게끔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마이어는 그때의 관찰기를 'Sister'에 녹여낸다. '생업' 때문에 비싼 스키장 시즌권을 사서 목에 걸고 있기는 하지만, 시몽은 스키를 탈 줄 모른다. 스키 장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우유와 밀가루, 집세를 얻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시몽이 훔쳐온 외투를 입어보며 걱정을 내비치는 누나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들, 없어진 옷에는 신경도 안써. 새로 사고 말지."   제대로 된 직업도 없이 그저 남자나 만나고 다니는 누나 뒤치다꺼리를 기꺼이 하는 시몽. 루이즈는 동생이 무슨 짓을 해서 돈을 가져오는지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둔다. 스키장에서 우연히 알게 된 관광객 크리스틴과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몽의 눈빛에는 부러움이 섞여있다. 시몽에게는 엄마의 자리, 가족의 자리가 없다. 가난한, 결손 가정의 비행

우르술라 마이어(Ursula Meier)의 영화들: Home(2008), Sister(2012) 1부

  1. 공간에 대한 심리적 탐구, Home(2008)   완공되지 않은 고속도로의 끝에 집 한 채가 보인다. 그들은 그곳에서 10년을 살았다. 부부는 세 명의 아이들과 허허벌판을 정원으로 삼고 안온한 삶을 이어가던 터였다. 그런데 어느 날, 도로 공사가 재개된다. 하루에도 수만 대의 차량이 지나가면서 소음과 분진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전의 평온한 삶은 박살이 난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지나가는 차량들 때문에 길을 건너려면 한참을 걸어가 냄새나는 하수구를 기어가야만 한다. 과연 이 가족은 고속 도로변 'home'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우르술라 마이어(Ursula Meier) 감독의 2008년작 'Home'은 집이라는 공간이 갖는 심리적 의미에 대해 탐구한다.   마르트(이자벨 위페르 분)에게 집은 가족의 완벽한 보금자리였다. 도로가 끝나는 곳에는 막내 아들의 미니 풀장과 큰딸의 선탠용 의자가 있다. 마르트는 다양한 식재료로 쓸 채소도 직접 가꾼다. 저녁에는 끊어진 도로 위에서 가족의 하키 시합이 열린다. 이제 성인이 된 큰딸 주디스가 매사에 엄마를 무시하는 행동을 보이기는 하지만 이 가족은 사랑으로 뭉쳐있다. 착실한 남편 미셸, 영민한 둘째 딸 마리온, 개구쟁이 막내 줄리앙,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까지 마르트에게 고속도로 끝의 집은 평화와 행복을 선사한다. 10년 동안 멈춰졌던 도로 공사가 재개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영화는 그들이 어쩌다 끊어진 고속도로 옆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그것이 '돈' 때문이라는 사실은 고속도로가 완공되고나서도 그들이 집을 떠나지 못한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엄청난 소음과 진동을 견뎌낼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귀마개는 무용지물이며, 지나가는 차량 운전자들이 집안을 들여다보는 통에 가족에게는 사생활도 없어진다. 가족들의 심신은 시간이 갈수록 피폐해진다. 그러나 'The Shining(1980)'의 폐쇄된 호텔에서 지

RKO 영화사 시절의 로버트 미첨(Robert Mitchum)의 초상 2부

1. Rachel and the Stranger(1948), 노만 포스터 감독 2. Where Danger Lives(1950), 존 패로 감독 3. His Kind of Woman(1951), 존 패로 감독 4. Angel Face(1953), 오토 프레밍거 감독 5. The Lusty Men(1953), 니콜라스 레이 감독 3. 가장 미첨다운 것, The Lusty Men(1953)   니콜라스 레이 감독과 함께 한 'The Lusty Men(1953)'은 로버트 미첨이란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선사한다. 웨스턴 장르는 전쟁물과 함께 미첨의 주요한 필모그래피를 장식한다. 니콜라스 레이 감독은 관객들을 미국 로데오 경기장 한복판으로 초대한다. 이름난 로데오 선수로 살아온 제프(로버트 미첨 분)는 부상으로 은퇴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집을 장만하기 위해 애쓰는 가난한 웨스 부부와 알게 된다. 웨스(아서 케네디 분)는 제프에게서 로데오 기술을 배워 돈을 벌 궁리를 하지만, 아내 루이즈(수잔 헤이워드 분)는 위험한 일이라며 내켜하지 않는다. 하지만 로데오 경기에서 얻는 돈은 이 부부를 로데오의 세계로 자석처럼 끌어들인다. 제프의 도움으로 로데오 경기의 실력자로 부상한 웨스는 점차 거만해지고 아내에게도 소홀해진다. 급기야 수입을 나누는 동업자 제프에게 모욕을 주기에 이르고 제프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로데오 경기에 참가하는데...   '러스티 맨'을 보다 보면 니콜라스 레이가 '이유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 1955)'에서 보여준 자동차 경주 장면의 역동성을 떠올리게 된다. 레이는 로데오 경기장의 흥분과 열기를 현장감 있게 담아낸다. 이 감독에게는 움직이는 것을 포착하는 동물적인 감각이 있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거친 남자들의 세계, 미첨은 그 누구보다 이 영화에 잘 어울린다. 한때는 로데오의 지배자였지만, 이제는 은퇴한 제프의 내면에는 로데오에 대한 열

RKO 영화사 시절의 로버트 미첨(Robert Mitchum)의 초상 1부

1. Rachel and the Stranger(1948), 노만 포스터 감독 2. Where Danger Lives(1950), 존 패로 감독 3. His Kind of Woman(1951), 존 패로 감독 4. Angel Face(1953), 오토 프레밍거 감독 5. The Lusty Men(1953), 니콜라스 레이 감독 1. 하워드 휴즈가 로버트 미첨에게 안긴 곤혹스러움, 'His Kind of Woman(1951)'과 'Where Danger Lives(1950)'   1948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이른바 '파라마운트 판결'이라고 하는 역사적 재판의 결정을 내린다. 헐리우드 제작사들의 제작, 배급과 관련해 수직계열화를 독과점으로 규정하고 이를 분리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자사 제작 영화를 자체 소유 극장을 통해 배급하면서 얻은 막대한 이득은 더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 영화사들은 매각되거나 지분이 쪼개지는 경우도 생겼다. RKO는 유명한 재벌 하워드 휴즈의 손에 넘어갔다. 다양한 필름 느와르를 비롯해 B Movie의 보고와도 같았던 이 영화사가 휴즈와 같은 기인에게 넘어간 것은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정서적인 문제가 있었던 휴즈는 1946년의 비행기 사고 후유증으로 더욱 괴팍스러워졌다. RKO를 소유하게 되면서, 제작되는 영화들에 대한 그의 간섭과 집착은 거의 병적인 수준이었다. 배우 선정에서부터 완성된 영화에 대한 수정 요구까지 모든 면에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들었다. 'His Kind of Woman(1951)'같은 영화는 그 폐해를 그대로 보여준다. 존 패로 감독(배우 미아 패로는 그의 딸이다)이 찍은 이 영화에는 로버트 미첨과 제인 러셀(휴즈의 연인으로 유명한), 빈센트 프라이스가 나온다. 그런데 휴즈는 빈센트 프라이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를 부각시키기 위해 영화 전체를 뜯어고쳐 다시 찍을 것을 감독에게 요구했다.

Pixote(1981), Mayor(2020), 200 Meters(2020)

  1. 리얼리즘 영화인가 착취 영화인가, Pixote(1981)   브라질의 헥토르 바벤코( Héctor Babenco ) 감독의 '피쇼테(Pixote)'는 2018년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월드 시네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복원된 작품이다. 복원된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에는 조지 루카스가 자신의 재단을 통해 기금을 지원했다는 자막이 뜬다. 복원판은 원래 영화에 프롤로그로 들어가는 바벤코 감독의 내레이션 부분이 없다. 그 부분은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볼 수 있다. 약 2분 가량의 영상에서 감독은 빈민촌(Favela로 불리는)을 뒷배경으로 브라질의 심각한 빈곤과 그로 인한 아동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그 도입부 장면에서 주인공 '피쇼테'를 연기한 실제 파벨라 출신의 페르난도 라모스 다 실바의 모습도 보인다.   영화 '피쇼테'는 꽤 착잡하고 괴로운 영화 보기의 경험을 선사한다. 고아 피쇼테가 거리의 아이로 소년원에 수감되면서 겪는 일은 영화가 아니라 진짜 현실처럼 느껴진다. 강간, 폭행, 학대, 협잡과 은폐가 횡행하는 복마전 같은 소년원에서 아이는 친구들과 탈출한다. 그러나 피쇼테를 기다리는 것은 더 깊은 범죄의 수렁이다. 소매치기를 시작으로 마약 밀매, 포주 노릇과 협박, 결국에는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이 고통스런 피쇼테의 범죄 인생 수업기는 영화적 표현으로서의 리얼리즘과 아동 연기자에 대한 착취(exploitation)의 경계선을 넘나든다.   아동이 강간과 성행위를 목격하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가 브라질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였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다큐멘터리적인 미학을 성취하기 위해 최하층 빈민가 출신의 아동 배우를 그런 식으로 소모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피쇼테'를 보는 내내 그런 질문을 머릿속에서 떨칠 수가 없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공허한 눈빛을 가진 주인공 피쇼테. 자신의 삶을 연기하는 것 같았던 페르난도 라모스 다 실바는

영화 잡담; The Dig(2021), Laura(1944), The Narrow Margin(1952)

  영화 잡담; The Dig(2021), Laura(1944), The Narrow Margin(1952)   'The Dig(2021)'는 러닝타임이 2시간 가까이 된다. 영화를 보기 시작한 지 20분쯤 되었을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덤 파는 이야기로 어떻게 나머지 1시간 반을 채울 것인가... 초반부에 이미 주인공들이 발굴하려는 무덤의 역사적 가치가 명백해진 상태였다. 이 영화의 촬영은 말 그대로 '때깔'좋게 나왔다. 문제는 내러티브의 때깔도 그러하냐는 것이다. 실망스럽게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병든 여자와 늙은 남자의 로맨스는 그다지 효용성이 없으므로, 다른 수를 써야만 했다. 아무래도 실존했던 인물들을 다루는 것은 까다롭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허구의 젊은 남녀를 투입했다. 이 맥아리 없는 영화는 무언가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썩어 없어질 지상의 모든 것과 대비되는 영속성을 가진 유적, 그리고 그것을 위해 투신하는 부유한 상류층 여성과 발굴 탐험가. 이 영화에서 어떤 매력을 찾는 것은 굉장히 힘든 작업이다. 한가지 특색이 있다면 사운드 편집을 들 수 있겠다. 인물들이 아무 말 없이 있는 장면에서 뒤따르는 다른 장면의 대화들이 겹쳐지는 것이 그러하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실망스런 영화를 보고나서 내가 언제나 찾는 영화는 헐리우드 클래식이다.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1944년작 '로라(Laura)'는 매력적인 여배우 진 티어니가 나온다. 영화는 형사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로라는 총에 맞아 살해당했다. 형사 맥퍼슨은 로라의 살인범을 찾으려고 수사 중이다. 그는 로라의 집 거실에 걸린 로라의 아름다운 초상화에 매혹된다. 여배우 대신에 초상화가 영화의 전반부를 지배한다. 어쩌면 맥퍼슨만 로라의 초상화에 반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매력적인 여인 로라의 모습에 관객들도 함께 빠져들

니키타 미할코프의 완성된 영화 세계, 기계식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소품(Неоконченная пьеса для механического пианино, 1977)

  기계식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소품(Неоконченная пьеса для механического пианино, An Unfinished Piece for Mechanical Piano, 1977)   1923년, 러시아에서 희곡 대본 하나가 발견된다. 러시아의 위대한 극작가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것으로 이전까지 출판되지 않은 미발표 희곡이었다. 체호프가 18세 때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 희곡은 니키타 미할코프(Nikita Mikhalkov)를 매료시켰다. 그는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기로 하고, 원작 희곡을 새롭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작했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체호프의 향기를 느끼면서도 그와는 전혀 다른 감성이 뒤섞여 있음을 알게 된다. 대개는 '플라토노프(Platonov)'로 공연되는, 또는 '아버지 없는(Fatherlessness)'이란 제목을 가진 4막의 희곡은 '기계식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소품'이란 영화로 재탄생했다. 체호프의 세계와 미할코프의 영화적 감수성이 하이브리드된 이 독특한 영화는 미할코프의 대표작이 되었다.   미할코프는 원작의 등장 인물들을 대폭 축소하고, 결말도 바꾸어 버렸다. 또한 원작에는 없는 기계식 피아노(저장된 악보에 따라 자동으로 연주되는 피아노)를 중요한 소품으로 배치시킨다. 19세기 러시아의 어느 교외 시골 별장에서 펼쳐지는 몰락 귀족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에는 인생의 부조리와 우울, 통렬한 시대 비판이 들어 있다. 장군의 미망인 안나는 자신의 교외 별장에 지인들을 초대한다. 안나의 의붓 아들 세르게이는 소피아와 이제 막 결혼했다. 안나의 별장을 소유하고 있는 채권자 페트린, 이웃의 사업가 포르피리, 마을의 유일한 의사 니콜라이, 니콜라이의 여동생 샤샤와 남편 플라토노프, 니콜라이와 샤샤의 아버지 파벨, 이웃 셰르부크와 그의 두 딸과 조카가 별장의 손님들이다.     원작 희곡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야기의 주인공은

숨겨진 보석, 잉그리드 버그만의 초기 출연작 4편

숨겨진 보석, 잉그리드 버그만의 초기 출연작 4편 1. 발푸르기스의 밤(Walpurgis Night, 1935), Gustaf Edgren 감독 2. 여자의 얼굴(A Woman’s Face, 1938), Gustaf Molander 감독 3. 간주곡(Intermezzo, 1939), Gregory Ratoff 감독 4. 6월의 밤(June Night, 1940), Per Lindberg 감독   시작은 '발푸르기스의 밤(1935)'이었다. 'Foxtrot(2017)'과 'First Reformed(2017)'를 보고 무척 심드렁한 기분이 되었다. 'Foxtrot'은 작위적이었고, 'First Reformed'는 평범했다. 'First Reformed'는 폴 슈레이더가 이젠 영화를 그만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한가지 새롭게 발견한 것은 있었다. 에단 호크가 꽤 좋은 배우라는 사실. 명료한 발성과 세밀한 감정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1989)'에서 그 맑고 앳된 얼굴의 배우는 이제 이마에 주름 선명한 중년이 되었다. 같이 나이먹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더 주의깊게 보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매혹되지 않은 영화를 보고 리뷰를 쓰는 일은 이제 하고 싶지가 않다. 그냥 머리나 식히자며 본 것이 잉그리드 버그만의 스웨덴 시절 작품 '발푸르기스의 밤(1935)'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버그만이 나오는 영화를 연달아 세 편을 보았다.   '발푸르기스의 밤'을 찍을 때 버그만의 나이가 스물이었다. 무성 영화 시절을 연상케 하는 다른 배우들의 정형화된 연기들 속에서 버그만은 홀로 생동감을 내뿜는다. 마치 흑백 영화 속에 유일하게 칼라로 찍힌 배우처럼 보인다. 비서로 일하는 레나(잉그리드 버그만 분)는 자신의 상사 요한을 사랑하게 된다. 유부남인 요한은 아이 갖기를 거부하는 아내에게 상심한 상태다. 요

The Grandmother(1970), Tribute: A Rockumentary(2001), Well Done, Now Sod Off(2000)

의식의 흐름에 따라 본 오늘의 영화들   The Grandmother(1970), 33분 Tribute: A Rockumentary(2001), 79분, 유튜브 검색 가능, 영어 자막. Well Done, Now Sod Off(2000), 68분, 유튜브 검색 가능, 자막 없음. 1. 관성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The Grandmother(1970)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자신이 편하게 생각하고 좋아하는 것에 안주한다. 관성에 따르는 삶. 내가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장르의 영화들을 주로 파고 보는 것도 그러하다. 문득 오늘은 좀 불편하게 생각되는 것을 봐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영화는 데이비드 린치가 1970년에 만든 단편 'The Grandmother'. 33분 정도의 이 영화에는 린치 영감님의 각인이 쾅쾅 박혀있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이 단편에 나오는 그림은 린치가 직접 그린 것이다. 미술을 전공한 린치가 이미지를 다루는 재능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초기 단편은 매우 흥미롭다.   영화는 시작부터 범상치가 않다. 남자와 여자로 상징되는 두 개의 줄기가 뻗어나가면서 하나로 엉킨다. 그리고 숲속에서 기괴한 한쌍의 남녀가 나온다. 흰색의 분칠을 한 그들은 동물같은 소리를 낸다. 남자는 조커처럼 찢어진 입 모양을 하고 있다. 진짜 도입부부터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거기에다 음악도 으스스하다. 신경을 긁는듯한 음악은 영화 내내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한 아이가 등장한다. 남자는 아이를 때리고 학대한다.   아이는 아버지의 학대를 피할 방법이 없다. 엄마조차도 아이에게 관심이 없고, 남편이 가하는 학대에도 무감각하다. 어느 날 아이는 씨앗 자루를 발견한다. 침대에 흙을 뿌려 씨앗을 심고 열심히 가꾼다. 기이한 형상으로 자라난 덩어리에서 마침내 무언가가 나온다. 영화 '에이리언(Alien, 1979)'에서 에이리언 새끼가 나오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그로테스크한 식물의 출산(?) 장면이

Chilly Scenes of Winter(1979), Happy Hour(2015)

  1. 어느 쓸쓸한 사랑의 풍경, Chilly Scenes of Winter(1979)   영화는 한 남자가 눈오는 겨울 날, 퇴근 하는 차 안에서 1년 전을 회상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이 남자의 사랑 이야기는 2개의 결말을 가진 사연있는 영화가 되었다. Joan Micklin Silver 감독의 1979년작 'Chilly Scenes of Winter'는 Ann Beattie가 쓴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가 처음 개봉되었을 때의 제목은 'Head over Heels'였고, 원작에 따른 해피 엔딩이었다. 그러나 제작사 United Artists가 1982년에 재개봉하면서 제목은 원작의 것으로 하면서, 정작 중요한 결말을 바꾸었다. 왜 그랬을까? 재개봉 될 당시는 레이건의 시대였다. 레이건이 집권한 1980년대는 우드스탁을 경험한 히피 세대들에게는 암울한 시절이었다. 소설가 스티븐 킹은 그 시절을 견디는 것이 '매우 수치스러웠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어쨌든 제작사가 입맛대로 재단한 쓸쓸한 결말은 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효과를 낳았다.   솔트레이크 시티의 주정부 공무원인 찰스는 자료 보관 부서의 로라에게 첫눈에 반한다. 남편과 별거 중인 로라는 의붓딸에 대한 애정 때문에 결혼 생활을 끝내길 주저한다. 찰스는 로라를 운명의 사랑이라 믿고 열렬히 구애한다. 둘은 연인으로 좋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로라는 자신에 대한 지나친 기대, 거기에다 일상의 모든 것을 함께 해야한다고 믿는 찰스의 집착에 점점 거리감을 느낀다. 로라가 남편에게 돌아가자,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찰스는 괴로워 한다. 우연히 로라가 결국 남편과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찰스는 마지막으로 로라를 찾아가 청혼한다.   조앤 미클린 실버는 헐리우드에서 여성 영화 감독으로 생존하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한 바 있다. 'Chilly Scenes of Winter'는 로맨틱 코미디에 대

세 편의 영화 리뷰: Husbands(1970), 'Melancholia(2011)', National Gallery(2014)

  1. 난파선 같은 영화, Husbands(1970)   '우연과 상상(Wheel of Fortune and Fantasy, 2021)'의 하마구치 류스케의 인터뷰를 읽다가 그가 좋다고 생각하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존 카사베츠의 'Husbands(1970)'였다. 사실 그 영화는 전에 보려고 하다가 그다지 평이 좋지 않아서 미뤄둔 영화였다. 도대체 영화의 어떤 점을 하마구치 류스케는 좋게 평가한 것일까 궁금해졌다. 그렇게 해서 본 'Husbands'는 정말이지 영화 보기의 '극한 체험'이 무엇인지를 실감하게 해주었다.   거스(존 카사베츠 분), 해리(벤 가자라 분), 아치(피터 포크 분)는 절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장례식에 모인다. 뉴욕 교외에 살고 있으며,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유한 중년의 세 남자는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들의 현재를 돌아본다. 술집에서의 폭음, 길거리의 치기어린 달리기 경주, 그리고 체육관의 농구 연습. 그렇게 같이 시간을 보내던 그들은 즉흥적으로 런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여자들과 짧은 유흥을 즐긴다. 거스와 아치는 뉴욕으로 돌아오지만 해리는 런던에 남는다.     러닝 타임 2시간 22분 동안 이 영화는 끊임없이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한다. 장례식이 끝난 후, 세 친구는 술집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다. 그들은 술자리에 있던 중년 여인을 집요하게 희롱하고 모욕을 준다. 엄청나게 퍼마신 이들은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고 거기에서 지리한 대화를 나눈다. 그 화장실 장면이 무려 20여분에 달한다. 도대체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중년 남자의 공허한 내면과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파괴적인 몸부림에 대한 묘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 당시 폴린 카엘과 같은 당대의 평론가에게 혹평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카사베츠는 관객들을 중년 남자의 내면에 자리한 지하 하수구로 질질 끌고 간다. 그것

2021 베를린 영화제 수상작 2편 리뷰: Bad Luck Banging or Loony Porn(2021), Wheel of Fortune and Fantasy(2021)

2021 베를린 영화제 수상작 2편 리뷰: Bad Luck Banging or Loony Porn(2021): 황금곰상(최우수 작품상), 루마니아의 라두 주드 감독 Wheel of Fortune and Fantasy(2021): 은곰상(심사위원 대상), 일본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올해 3월에 열린 베를린 영화제는 COVID-19 전염병으로 인해 비대면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최우수 작품상은 루마니아의 라두 주드 감독의 'Bad Luck Banging or Loony Porn'이 차지했다. 라두 주드 감독은 2015년에 'Aferim!'으로 은곰상을 수상한 적이 있다(이 영화 리뷰글은 블로그에서 검색이 가능함). 역사극의 틀을 빌어 'Aferim!'에서 계급 갈등과 인종 차별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던 감독은 발빠르게 전염병 시대의 이야기를 영화로 담아냈다.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나온다. 'Bad Luck Banging or Loony Porn'(이하 배드 럭으로 칭함)'은 전염병이 사람들의 일상과 삶에 미친 영향, 그리고 루마니아 사회에 대한 치열한 비판을 담고 있다. 관객에 따라서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수 있는 논쟁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심사위원 대상에 해당하는 은곰상은 최근 세계 영화계의 유망주로 떠오른 하마구치 류스케가 가져갔다. '우연과 상상(Wheel of Fortune and Fantasy)'은 3개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영화로 탄탄한 대본과 밀도있는 연출이 돋보인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홍상수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처음엔 홍상수 영화의 짝퉁 아닌가, 하는 냉소적인 시선으로 보았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홍상수의 세계를 통과해서 자신만의 구부러진 길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작품성에 비해서 지나치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아사코(Asako 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