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우르술라 마이어(Ursula Meier)의 영화들: Home(2008), Sister(2012) 1부

 

1. 공간에 대한 심리적 탐구, Home(2008)

  완공되지 않은 고속도로의 끝에 집 한 채가 보인다. 그들은 그곳에서 10년을 살았다. 부부는 세 명의 아이들과 허허벌판을 정원으로 삼고 안온한 삶을 이어가던 터였다. 그런데 어느 날, 도로 공사가 재개된다. 하루에도 수만 대의 차량이 지나가면서 소음과 분진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전의 평온한 삶은 박살이 난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지나가는 차량들 때문에 길을 건너려면 한참을 걸어가 냄새나는 하수구를 기어가야만 한다. 과연 이 가족은 고속 도로변 'home'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우르술라 마이어(Ursula Meier) 감독의 2008년작 'Home'은 집이라는 공간이 갖는 심리적 의미에 대해 탐구한다.

  마르트(이자벨 위페르 분)에게 집은 가족의 완벽한 보금자리였다. 도로가 끝나는 곳에는 막내 아들의 미니 풀장과 큰딸의 선탠용 의자가 있다. 마르트는 다양한 식재료로 쓸 채소도 직접 가꾼다. 저녁에는 끊어진 도로 위에서 가족의 하키 시합이 열린다. 이제 성인이 된 큰딸 주디스가 매사에 엄마를 무시하는 행동을 보이기는 하지만 이 가족은 사랑으로 뭉쳐있다. 착실한 남편 미셸, 영민한 둘째 딸 마리온, 개구쟁이 막내 줄리앙,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까지 마르트에게 고속도로 끝의 집은 평화와 행복을 선사한다. 10년 동안 멈춰졌던 도로 공사가 재개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영화는 그들이 어쩌다 끊어진 고속도로 옆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그것이 '돈' 때문이라는 사실은 고속도로가 완공되고나서도 그들이 집을 떠나지 못한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엄청난 소음과 진동을 견뎌낼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귀마개는 무용지물이며, 지나가는 차량 운전자들이 집안을 들여다보는 통에 가족에게는 사생활도 없어진다. 가족들의 심신은 시간이 갈수록 피폐해진다. 그러나 'The Shining(1980)'의 폐쇄된 호텔에서 지내다 미쳐버린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고 따라다니는 비극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러기 전에 가장 미셸은 무작정 짐 싸서 떠나자고 하지만, 마르트는 한사코 머물겠다며 버틴다. 그곳만이 자신의 '집'이며, 다시 새로운 곳에서 처음부터 시작할 수는 없다면서...

  시멘트 벽돌로 집을 철갑처럼 두르는 이 가족의 재건축기를 보며 관객은 가족이 처한 경제적 압박의 실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고속도로에서 정체된 바캉스 차량의 사람들에게 집에서 휴가를 보내는 이 가족은 구경거리가 된다. 그들은 더이상 '집'이 될 수 없는 그곳에서 떠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통풍을 위한 최소한의 틈마저도 봉인한 그 감옥같은 곳에서 남아 있는 것을 택한다. 가족과의 유대감이 적었고, 그 집을 부끄럽게 생각했던 큰 딸 주디스는 진작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우르술라 마이어는 '집'이라는 공간이 사람의 내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세밀하게 그려낸다. 잘 짜여진 내러티브에는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이 여성감독은 세트와 배우들을 완벽하게 통제한다.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의 이사는 경제적 자유를 가졌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은 하층민들에게 집은 족쇄같은 고통과 불안의 근원이 된다. 이 영화의 어디에서도 자본주의와 계급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은 없지만, 관객들은 'Home'의 가족에게 닥친 불행의 이면에 그것이 명백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본다. 시멘트 벽돌로 세상과 단절된 그곳은 더이상 집이 아니다.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자 집은 쓰레기장처럼 변하고, 가장 미셸은 아이들에게 수면제를 먹고 자게 한다. 어떻게든 살고자 했던 '집'이 '무덤'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이자벨 위페르를 비롯해 배우들 사이의 연기 앙상블이 매우 뛰어나다. 그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이는 막내 줄리앙 역의 케이시 모테트 클라인이다. 'Home'을 찍을 당시에 8살이었던 이 아역 배우의 직관적인 연기는 천부적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감독 우르술라 마이어는 이 꼬마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배우로서 가진 역량을 더 끌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클라인을 위해 쓴 시나리오를 가지고 'Sister(2012)'를 만들게 된다(cineuropa.org와의 인터뷰 참조). 


2부에서 계속...


*사진 출처: filmaffinity.com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Shirley Clarke의 실패한 타자성 탐구, Portrait of Jason(1967)

  1. 이상한 나라의 Jason Holliday   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한다. 자신의 이름이 Jason Holliday라고 말한 그는 본명이 Aaron Payne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유명한 재즈 연주자)와도 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가진 직업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가 말한 직업들 중에는 남창(whore)도 있다. 손에 술잔을 든 그는 심부름꾼(houseboy)으로 시작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늘어놓는다. 미국의 독립 영화 제작자 Shirley Clarke는 1966년 12월 3일, 자신이 머물던 첼시 호텔(Hotel Chelsea) 펜트 하우스에서 제이슨 할러데이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다큐를 찍었다. 저녁 9시에 시작된 촬영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Portrait of Jason(1967)'이다.   제이슨은 술에 취해 기분이 아주 좋아보인다. 화면 밖에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셜리 클라크는 제이슨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인형극의 조종하는 사람(puppeteer)처럼 클라크는 제이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 같다. 흑인이며 동성애자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미리 준비해놓은 소품으로 작은 공연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소품 가방에서 꺼낸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는 제이슨은 여성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킬킬거린다. 제이슨이 원하는대로 술과 담배가 계속해서 제공된다. 시간이 갈수록 술에 취한 제이슨의 말소리는 알아듣기 어렵게 뭉그러진다.   러닝 타임 1시간 45분의 이 다큐 'Portrait of Jason(1967)'은 보면 볼수록 기이하다. 관객은 'Jason Holliday'라는 인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도록 초대받지만, 다큐가 끝나고 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제이슨이 가진 뛰어난 공연자(performer)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