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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 영화의 전성기를 열다, 밥(めし, Repast, 1951)

    "밥 아직 안된 거야?" 신문에 고개를 파묻은 남자는 아내를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묻는다. 여자의 속마음이 독백으로 흘러나온다. '매일 밥을 짓고, 미소된장국을 끓여서 낸다. 365일이 항상 똑같은 일상이다.' 하츠노스케(우에하라 켄 분)와 미치요(하라 세츠코 분) 부부는 권태기에 들어섰다. 집에서 남편의 관심사는 '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내는 하루의 대부분을 식사 준비와 집안일로 동동거리면서 보낸다. 꼬리가 뭉툭한 길고양이 '유리'를 보살피는 것이 미치요의 유일한 낙이다. 아내 미치요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단지 남편의 무관심뿐만이 아니다. 증권 중개인으로 일하는 남편의 월급은 미치요를 돈에 쪼들리게 만든다. 전당포에 물건을 맡기는 일도 익숙하다. 건너편 집에는 술집 마담이 살고 있고, 좀도둑들이 출몰해서 살림살이를 훔쳐가기도 한다. 미치요는 지루한 결혼 생활과 하층민으로 전락해가는 자신의 삶에 염증을 느낀다.   나루세 미키오의 1951년작 영화 '밥(Meshi, Repast)' 은 하야시 후미코(林 芙美子) 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작가는 영화가 개봉된 그 해에 세상을 떴다. 나루세 미키오는 이후 하야시 후미코의 소설을 여러 편 영화로 만들었다. 여성과 하층민의 가난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이 작가의 소설은 나루세 미키오를 만나 깊이있는 울림을 낸다. 영화 '밥'의 주인공 미치요는 목까지 차오르는 불만과 권태에 질식 직전이다. 그 때, 도쿄에서 남편의 조카 사토코가 온다. 사토코는 결혼을 재촉하는 고루한 아버지에게서 이제 막 도망나온 참이다. 그런데 이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는 미치요의 인내력을 시험한다. 집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남편에게 너무 스스럼없이 행동한다. 군식구가 하나 느니까 쌀독도 금새 바닥이 난다. 남편이란 작자는 아내의 고민 따위는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멋진 새 구두를 사고, 조...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적 마침표, 흐트러진 구름(乱れ雲, Scattered Clouds, 1967)

  여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행복한 순간에 서있다. 정부 관료인 남편은 미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함께 떠날 예정인 부부에게는 반가운 아기 소식도 있다. 그런데 그 여자 유미코의 행복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남편은 불운한 자동차 사고로 숨을 거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자는 아기도 잃는다. 남편을 죽게 만든 사고의 가해자는 평범한 회사원 미시마. 자동차의 타이어가 터지면서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고였다. 남자는 무죄를 선고받는다. 비록 법적인 책임은 면했지만, 남자는 속죄의 의미로 매달 일정한 금액을 미망인에게 송금한다. 어떻게 보면 철천지원수 사이의 남녀. 그들은 예기치 못한 사랑의 감정에 빠진다.   영화 '흐트러진 구름(乱れ雲, Scattered Clouds, 1967)' 은 나루세 미키오의 유작이다. 이 영화를 만들기 전 해에 그가 만든 2편의 영화는 특이하게도 스릴러 영화였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 경력을 마무리하면서, 그가 가장 잘 하는 멜로 영화로 다시 돌아왔다. 영화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감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떠올린 영화는 그의 대표작 '부운(浮雲, Floating Clouds, 1955)' 이었다.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하고 원했지만 여자는 결국 영락한 신세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뜬구름같은 사랑의 부질없음과 아픔을 그려낸 '부운'의 흔적은 '흐트러진 구름'에서도 감지된다.   '부운'의 남녀 주인공 토미오카와 유키코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장소는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밀림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이국의 숲을 몽롱한 꿈속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 그곳에서 유부남인 남자는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여자는 불확실한 사랑의 미래에 자신을 던진다. '흐트러진 구름'에서도 그와 비슷한 장소가 나온다. 사별 후,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하며 경제적 어려움과 남자들의 추근거림에 시달린 유미코...

여자 안의 타인(女の中にいる他人, The Stranger Within a Woman, 1966), 어두워지기 전에(Juste avant la nuit, Just Before Nightfall, 1971)

  하나의 소설, 두 개의 다른 영화: 여자 안의 타인(女の中にいる他人, The Stranger Within a Woman, 1966), 나루세 미키오 어두워지기 전에(Juste avant la nuit, Just Before Nightfall, 1971), 클로드 샤브롤 원작 소설: Edward Atiyah, The Thin Line(1951)    1966년은 나루세 미키오에게 '스릴러의 해'였다. '여자 안의 타인(The Stranger Within a Woman, 1966)' 과 '뺑소니(Hit and Run, 1966)' 는 이전까지의 나루세 미키오와는 전혀 다른 영화적 궤적을 보여준다. '뺑소니'는 스릴러의 틀 안에서 여성의 삶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다. 이와는 달리 '여자 안의 타인'에서는 주인공이 남성이다. 치정 살인 사건에 연루된 남자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음울한 결말까지 더해져 영화는 무겁기 짝이 없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레바논 출신의 작가 Edward Atiyah 의 'The Thin Line(1951)' 을 각색한 것으로, 이 소설을 가지고 Claude Chabrol 도 영화를 만들었다. '어두워지기 전에(Juste avant la nuit, 1971)' 가 그것이다. 전자책으로는 원작 소설이 나온 것이 없어서, 대신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를 보고 원작의 세부적 내용을 추측해 볼 수 밖에 없었다. 두 영화에는 서로 다른 감독의 스타일이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간극이 존재한다.   클로드 샤브롤은 남자 주인공 샤를이 불륜 관계에 있는 여자를 죽이게 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변태적 욕망에 휩싸인 남자는 실수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가 죽인 여자는 친구 프랑수아의 아내이다. 클로드 샤브롤과는 달리 나루세 미키오는 살인 장면을 나중에 플래시백으로 제시한다. '여자 안의 타인'의 도입부 쇼트...

아내로 살아간다는 것, 아내의 마음(妻の心, A Wife's Heart, 1956)

    남자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무언가를 결심한듯 마침내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키요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찻집에는 그들 말고 다른 손님은 없다. 그때, 주인이 카운터로 나온다. 주인을 보더니 그 남자 켄키치(미후네 토시로 분)는 다시 침묵을 지킨다. 무더운 여름날, 두 사람은 잠시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그곳에 들어왔다. 그들은 서로의 감정을 잘 알고 있지만, 이제까지 그것을 입 밖으로 내어본 적은 없었다. 곧 비가 그치고 그들은 찻집을 나선다. 영화 '아내의 마음(妻の心, A Wife's Heart, 1956)' 에서 인물들의 감정은 매우 절제되어 있다. 그 남자 켄키치의 감정을 보여주는 것은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인물의 감정을 자연 현상과 결합시킨다. '야성의 여인(あらくれ, Untamed, 1957)' 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다. 욕망에 끌린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갈 때,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나루세 미키오는 그들 사이에 일어난 격한 감정의 떨림을 나뭇가지에 쌓인 두터운 눈이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것으로 대신한다.   키요코와 신지는 결혼한지 5년이 되었다. 부부는 작은 잡화상을 하고 있지만 가게는 잘 되지 않는다. 궁리 끝에 가게 옆의 공터에 음식점을 내기로 한다. 키요코의 시어머니는 괜한 일을 벌인다며 못마땅해 한다. 어떻게든 삶의 활로를 찾아보려는 부부. 키요코의 친구 유미코에게는 은행원 오빠 켄키치가 있다. 켄키치의 도움을 받아 대출을 받은 키요코는 가게를 낼 꿈에 부푼다. 그즈음, 키요코의 큰동서가 어린 딸을 데리고 온다. 곧이어 실직한 시아주버니까지 집에 들어앉는다. 시아주버니는 자신도 가게를 내겠다며 키요코에게 대출을 받아달라고 부탁한다. 시어머니와 큰동서는 은근히 키요코를 압박한다. 키요코는 곤란한 지경에 처했는데, 남편이란 작자는 게이샤와 온천 여행을 갔다온다. 아내는 열불이 난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

나루세 미키오의 독특한 스릴러물, 뺑소니(ひき逃げ, Hit and Run, 1966)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무섭다. 영화 '뺑소니(ひき逃げ, 1966)' 의 주인공 쿠니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하나뿐인 어린 아들을 잃었다. 그 비극은 남편이 불운하게 세상을 뜬지 얼마되지 않아 일어났다. 쿠니코의 아들은 뺑소니 사고로 죽었다. 사고를 낸 사람은 부잣집 운전기사로 재판에서 약소한 벌금형을 받았다. 쿠니코는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다. 그런 쿠니코에게 사건을 목격한 동네 주민이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이 본 뺑소니 운전자는 줄무늬 스카프를 두른 '여자'였다는 것. 쿠니코는 경찰에 재수사를 요청하지만, 경찰은 이미 끝난 사건이라는 말만을 할 뿐이다. 쿠니코는 이대로 물러설 수가 없다.   이 영화에는 서로 다른 계층적 배경을 지닌 두 명의 엄마가 등장한다.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쿠니코는 전형적인 하층 계급의 여성이다.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쿠니코의 과거는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매춘부였던 쿠니코는 착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했다. 그 결혼 생활은 불행했던 이 여자의 인생에서 선물처럼 주어진 행운이었다. 비록 일찍 과부가 되었지만 쿠니코에게 아들은 삶의 버팀목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었다. 그것도 아주 억울하게. 자식잃은 어미의 가슴은 복수심에 불탄다.   쿠니코의 아들을 사고로 죽게 만든 키누코는 부잣집 사모님이다. 남편 카키누마는 자동차 회사의 중역으로 키누코와는 정략 결혼으로 맺어졌다. 애정없는 결혼 생활, 키누코는 바람을 피운다. 여자가 아이를 치고도 그대로 달아난 것은 동석한 애인의 존재를 들킬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남편의 운전기사가 죄를 뒤집어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키누코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키누코의 삶. 하지만 키누코의 집에 가정부로 취직한 쿠니코는 곧 그 집안에 흐르는 냉기와 불행의 기운을 감지한다. '이상한(変な, 영어의 strange에...

나루세 미키오의 특이한 영화적 일탈, 오누이(あにいもうと, Older Brother, Younger Sister, 1953)

      오빠는 여동생의 뺨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친다. 여동생도 지지 않는다. 물건을 내던지며 자신을 때리는 오빠에게 달려든다. 그렇지만 남자의 손아귀 힘을 당해내기는 힘들다. 마당으로 밀쳐진 여동생은 그래도 흙바닥에 쓰러지지는 않는다. 급기야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마룻바닥에 드러눕는다. '그래, 차라리 날 죽여. 죽여보라구!' 두 사람을 말리던 노모와 여동생은 허탈함에 눈물만 훔칠 뿐이다.   이토록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는 가족극이라니. 다른 감독이라면 몰라도 이 영화가 나루세 미키오의 필모그래피에 들어있다는 사실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의 1953년작 영화 '오누이(Older Brother, Younger Sister)' 는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작가 무로 사이세이(室生犀星) 의 단편 소설을 영화화했다. 나루세 미키오의 '안즈코(杏っ子, Anzukko, 1958)' 도 무로 사이세이의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 '오누이'의 이야기는 패전 이후, 일본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백발이 성성한 비쩍 마른 가장 아카자와 만난다. 그는 한때 직원을 70명이나 둘 정도로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 전쟁 시기 하천 준설로 큰돈을 벌었으나, 이제는 무기력한 백수 가장이 되어버렸다. 늙은 아내는 강가의 낚시터 근처에서 구멍가게로 생계를 꾸려간다. 이들 부부에게는 삼남매가 있다. 첫째 아들 이노키치(모리 마사유키 분), 둘째 딸 몬(쿄 마치코 분), 막내딸 산(쿠가 요시코 분)이 그들이다. 도쿄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산은 오랜만에 부모를 만나러 온다. 집에는 남자와 사귀다 임신한 언니 몬이 와있다. 불같은 성미를 지닌 사고뭉치 큰오빠가 그런 여동생을 곱게 볼 리가 없다. 이 영화의 일본어 제목 '오누이'는 바로 이노키치와 몬을 가리킨다.   오누이의 치고박는 육탄전 못지않게 이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장면은 또 있다. 몬이 슬립 차림으로 나오는 장면이다....

시대의 인습에 굴복하지 않은 여자, 야성의 여인(あらくれ, Untamed, 1957)

    배우 타카미네 히데코(高峰秀子) 가 TV 대담에서 나루세 미키오 감독을 회고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나루세 미키오는 거의 말이 없었고 배우들에게 별다른 연출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나루세 미키오는 당대 최고의 배우들과 작업하면서, 그들의 연기를 무척 신뢰했던 모양이다. 아역 배우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던 연기 천재 타카미네 히데코였지만, 이 배우에게도 버겁게 느껴진 작품이 있었다. 영화 '야성의 여인(Untamed, Arakure, 1957)' 이었다. 고민 끝에 타카미네 히데코는 나루세 미키오에게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요?'하고 물었다. 감독의 대답은 이러했다. "아, 그거? 어렵지 않아. 금방 끝날 거야."   영화 '야성의 여인'은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일본의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토쿠다 슈세이(徳田秋声) 가 1915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あらくれ) 이 그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오시마(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나루세 미키오 영화의 여느 여성 캐릭터들과 확실히 다르다. 이 여성은 매우 강단있고 주체성이 강한 인물이다. 오시마는 자신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남자들에게 과감히 맞선다. 작가 토쿠다 슈세이가 살았던 시대 뿐만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진 1950년대에도 이런 여성은 보기 드물었다. 그 시대의 여성은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갇혀있는 삶을 살았다. 그러니 '오시마'라는 여성의 존재는 더욱 유별나고 특이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었다. 타카미네 히데코가 오시마를 연기하면서 느꼈던 어려움도 거기에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가게의 창문을 열심히 닦는 여자가 보인다. 오시마는 부유한 상인 츠루(우에하라 켄 분)의 후처로 들어왔다. 츠루는 전처를 병으로 잃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새 아내를 바라보는 눈빛은 영 마뜩잖다. 인색하기 짝이 없는 그는 낡은 기모노를 입고 있는 아내에게 옷도 사주지 않는다. 술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데다 바람까지 피운다. 오시...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낸 전후 농촌의 풍경, 권적운(鰯雲, Summer Clouds, 1958)

    나루세 미키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은 좋지만, 거기엔 남자들이 없어요." 미조구치 겐지에게 나루세 미키오는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만 주구장창 찍은 감독으로 각인된 모양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영화 '권적운(鰯雲, Iwashigumo, 1958)' 은 나루세 미키오의 필모그래피에서 특이한 작품이다. 농촌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일본의 사회 변화와 세대 갈등을 중심 주제로 다룬다. 물론 나루세 미키오의 주된 관심사인 '여성의 삶'은 여기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전쟁 미망인인 야에는 농사를 지으며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신문기자 오카와는 농촌 기사를 쓰기 위해 야에를 인터뷰한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진다. 야에는 인색한 시어머니와 고된 농사일에 지쳐있다. 모처럼의 연애 감정은 야에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야에에게는 같은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오빠 와스케가 있다. 와스케는 자신의 세 아들이 대를 이어 농사를 짓길 바란다. 하지만 자식들은 그 삶을 거부한다. 오빠네 집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운데, 야에에게도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다. 오카와는 도쿄로 발령을 받아 떠나기로 되어 있다. 야에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 '권적운'에서 이야기의 중심축은 야에가 아니라, 오빠 와스케의 집안에 있다. 이 영화에서 농촌의 현실은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오카와가 야에와 만나게 된 계기는 농지개혁법 취재 때문이었다. 종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는 강도 높은 개혁으로 일본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농지개혁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952년 에 농지법 이 통과된다. 비로소 일본 농촌은 봉건적 농지 소유 제도가 철폐되고 자작농 중심의 체제로 재편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기존의 대지주들은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정부에 의해 강제로 헐값에 토지를 넘겨야 했기 때...

전쟁의 상처를 감내하는 어머니의 초상, 엄마(おかあさん, Mother, 1952)

  박복(薄福)하다. 복이 없거나 팔자가 사나움을 일컫는 말이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엄마(Mother, 1952)' 를 보고 있노라면, 주인공인 엄마의 삶에 저절로 그 말이 떠오른다. 패전 직후의 일본, 세 아이의 엄마 마사코는 장남을 병으로 잃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도 세상을 뜬다. 이 엄마는 이제 18살이 된 큰딸 토시코와 어린 딸 히사코, 그리고 여동생의 아들 테츠를 보살펴야 한다. 모두가 어렵고 가난한 시절, 가족은 집 한 켠을 개조해서 세탁소를 꾸려가고 있다. 하지만 일을 도와주는 남편의 친구 키무라도 언제까지 있을 형편이 아니다. 엄마는 입이라도 덜기 위해 작은딸을 큰숙부 내외에게 보내려는 참이다.   분명 전쟁은 끝났다. 그럼에도 이 영화 곳곳에는 전쟁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전쟁 이전에 남편 로사쿠가 운영하던 세탁소는 아주 잘되었고, 그것으로 가족은 안온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는 동안 가족의 삶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돈을 벌기 위해 공장에 취직했던 아들은 열악한 노동 여건 속에서 병을 얻는다. 남편은 어떻게든 세탁소를 다시 열어보려고 애쓰다가 과로로 쓰러진다. 엄마의 여동생 노리코는 만주에서 남편을 잃었다. 세탁소 일을 돕는 키무라는 전쟁 포로로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어렵게 생환했다.   남편의 장례식에 모인 마을 여자들은 전쟁통에 남편과 아들을 잃은 이야기를 한다. 마사코가 작은딸을 맡기려는 큰숙부 내외는 징병으로 끌려나간 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 큰숙모는 아들의 사진을 놓고 거미를 실에 묶어 길게 내려뜨려 본다. 거미가 움직이자 아들이 살아있는 것이라며 내심 희망을 가져본다. 군부와 지배 계급의 침략적 제국주의에 일본 국민의 삶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다. 영화 '엄마'의 주인공 마사코는 그 전쟁의 여파를 자신의 삶에서 견뎌내는 중이다. 마사코는 아픈 남편을 병원에 데려가고 싶지만, 그러려면 집안 살림을 다 팔아야할 지경이다. 그걸 ...

가족주의와 여성의 삶, '딸, 아내, 어머니(娘・妻・母, Daughters, Wives and a Mother, 1960)

     이제 환갑을 앞둔 아키 여사는 5남매를 두었다. 모처럼 가족이 모인 자리,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집 이야기가 나온다. 시세가 얼마인지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막내딸 하루코가 계산기를 찾으면서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다. 하루코는 대략의 감정가를 바탕으로 가족 구성원들 각자가 받게될 돈을 계산한다. 하루코의 셈법을 듣다 보면, 당시 일본 민법에서 여성 배우자의 상속분은 3/1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루세 미키오의 1960년작 '딸, 아내, 어머니(Daughters, Wives and a Mother)' 를 관통하는 주제는 역시 '돈'과 긴밀히 얽혀 있다. 어머니 앞에서 태연히 유산 상속분을 이야기하는 자식들. 어머니 아키 여사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자식들을 바라볼 뿐이다.   영화 '딸, 아내, 어머니'의 가족 구성원들은 돈과 관련된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장남은 아내의 삼촌이 하는 공장에 투자하면서 형제들 모르게 집을 저당잡혔다. 둘째 딸 카오루는 홀시어머니의 시집살이에서 벗어나 분가를 하고 싶다. 그런데 돈이 없다. 큰며느리 카즈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툭하면 사업 자금 빌려달라고 찾아오는 삼촌 때문에 괴롭다. 이 가족에게 큰딸 사나에(하라 세츠코 분)가 가진 백만 엔의 돈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갑작스런 사고로 남편을 잃은 사나에는 남편의 보험금을 받는다. 큰오빠는 투자 좀 하겠다고, 여동생은 아파트 얻을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러닝 타임 2시간 3분, 컬러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로 제작된 이 영화는 나루세 미키오의 완성판 가족극 같다. 영화 속 아키 여사의 자녀들은 큰딸 사나에를 제외하고 매우 계산적이고 냉정하다. 유이치로는 처삼촌의 부도 때문에 집이 은행에 넘어가게 될 거라고 동생들에게 알린다. 그러자 동생들은 자신들의 상속분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유이치로가 폭탄 선언을 한다. "그럼 난 어머니 모실 수 없다. 의무도 ...

나루세 미키오 여성 영화의 원형, 긴자 화장(銀座化粧, Ginza Cosmetics, 1951)

      "여자 나이 마흔이 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버린다구. 그러니 얼른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해야 해."   유키코(타나카 키누요 분)는 마흔 문턱에 접어들었다. 동생처럼 아끼는 쿄코(카가와 쿄코 분)에게 유키코는 그렇게 충고한다. 미혼모로 어린 아들 하루오를 키우고 있는 유키코는 쿄코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 바란다. 유키코는 술집 마담으로 일하며 빠듯한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비슷한 처지였던 친구 시즈에는 돈 많은 남자의 첩으로 들어앉았다. 어디 괜찮은 남자라도 있으면 마담일 그만 두고 의탁이라도 하련만, 주변에 꼬이는 이들은 죄다 글렀다. 후원자였던 후지무라는 사업이 망한 후 가끔 용돈을 얻기 위해 유키코를 찾아온다. 젊은 건달과 중년의 느물거리는 사업가는 유키코를 욕망의 대상으로 볼 뿐이다. 그런 유키코에게 친구 시즈에가 소개해준 부유한 지주의 아들 이시카와가 나타난다. 여자 나이 마흔, 유키코의 인생에 기회가 온 것일까?   1951년이면 일본은 패전 후 이제 6년이 지났을 뿐이다. 나루세 미키오의 '긴자 화장(Ginza Cosmetics, 1951)' 을 보고 있노라면, 적어도 도쿄의 거리에서 전후의 상흔을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의 도입부, 하루오는 혼자 보내는 낮시간을 도심의 이곳저곳을 쏘다닌다. 하루오가 지나는 거리에는 활기가 넘친다. 유키코가 이시카와에게 안내하는 도쿄 시내는 빌딩이 공사 중이며, 번화한 상점가는 인파로 붐빈다. 유키코가 일하는 술집 '벨 아미(Bel Ami)'의 손님들은 음주와 여흥을 즐긴다. 거기에는 여종업원들과의 '외박'이라는 매춘도 슬쩍 끼워져 있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속 여성들은 대개가 불운한 처지에 놓여 있다. '긴자 화장'에서 유키코는 미혼모라는 열악한 사회적 지위에 자리한다. 쿄코는 가난한 집안 살림에 어쩔 수 없이 화류계로 흘러 들었다. '돈'은 언제나 문제가 된다...

패전의 그늘 속에 움트는 희망과 사랑, 이시나카 선생 행장기(石中先生行状記, Conduct Report on Professor Ishinaka, 1950)

    분명히 패전은 일본 국민들에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이시나카 선생 행장기(石中先生行状記, 1950)'를 보고 있노라면, 그 즈음의 일본이 서서히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작가 이시자카 요지로(石坂洋次郎)는 1948년부터 1954년까지 발표한 단편 소설 40편을 묶어서 4권의 책으로 펴냈다. 소설에는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시골 마을의 선생 이시나카가 나온다. 주인공 이시나카 선생은 아오모리현( 青森県)의 농촌 마을에 살면서 자신이 듣고 경험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설은 꽤 인기가 있어서 1950년에 신도호(新東宝)에서 영화로 제작이 되었다. 영화에는 세 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첫 번째 이야기의 배경은 마을의 과수원이다. 마을 청년은 패전이 임박한 시기에 자신이 과수원 땅에 군부대의 석유 드럼통을 묻어놓았노라고 말한다. 석유값이 올라 귀하게 취급되는 시기에 그것을 발견한다면 복권 당첨이나 다름없다. 이시나카 선생, 마을의 램프 가게 주인이 청년과 함께 과수원에서 드럼통 발굴에 나선다. 그러나 청년의 기억은 불확실하고, 그 넓은 과수원을 다 헤집어 놓는 것도 어렵다. 곧 이시나카 선생은 청년의 속셈이 다른 데에 있음을 알게 된다. 과수원 주인의 딸에게 반한 청년이 어떻게든 만날 구실을 찾아보려고 나름의 꾀를 낸 것.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과수원집 처녀와 마을 청년은 결혼을 약속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돋보이는 것은 농촌 마을의 자연과 그곳 사람들의 순박한 삶이다. 피폐해진 전후의 경제 상황에서도 농부들은 땅에 의지해서 삶을 재건해 나갈 수 있었다. 일종의 향토 문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원작자 이시자카 요지로의 소설이 당시의 일본인들에게 호소력을 가진 것도 그 지점이다. 일본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웃음이 필요했다. 모든 물자가 부족하고 힘든 시절이지만 영화 속 농촌 마을 사람들은 ...

결혼의 풍경, 안즈코(杏っ子, Little Peach, 1958)

    "탁자 위에 놓인 귤 하나, 그 작은 것으로부터 상상하지 못했던 생활을 꾸려가는 거야."   결혼을 앞둔 딸에게 아버지는 너무 경제적인 조건에 얽매이지 말고 소박한 것에서 출발하라고 그렇게 충고한다.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어린 시절 '안즈(살구 )'라는 애칭으로 불리웠던 안즈코(가가와 교코 분)는 유명한 소설가 아버지(야마무라 소 분)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안즈코에게 아버지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현명한 인생의 상담자이기도 하다. 여러 구혼자들을 만나 보다가, 결국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같이 자란 료키치(기무라 이사오 분)와 결혼하게 된 안즈코. 그러나 결혼 생활은 생각보다 어렵고 마음의 갈등은 커져 간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안즈코(Little Peach, 1958)'에는 결혼의 풍경, 그것도 꽤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내면의 풍경이 펼쳐진다. 마치 접힌 부채가 펼쳐지면서 보이는 그림처럼, 접혔을 때는 알 수 없었던 결혼의 실체가 안즈코에게 다가온다. 자신의 부모처럼 서로를 아껴주고 존중하며 사랑으로 살아가는 결혼 생활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남편 료키치는 소설가로 성공하기를 꿈꾸며 글을 쓰지만, 가진 재능은 턱없이 부족하고 오직 자존심만이 하늘을 찌른다. 장인의 명성에 대한 질투는 아내에 대한 온갖 짜증과 트집잡기로 이어진다. 이 남자의 행동은 그야말로 찌질함의 극치를 이룬다. 그럼에도 안즈코는 어떻게든 결혼 생활을 이어가려고 애를 쓴다. 여성 관객들에게 '안즈코'는 고구마 백 개쯤 먹은 답답함과 울분을 선사하고도 남음이 있다.    안즈코와 장인에게 돼먹지 못한 언사와 행동으로 일관하는 남편 료키치. 그의 찌질함과 무례함은 영화 내내 스크린을 뚫고 나올 기세이지만, 속 깊은 이 부녀( 父 女 )는 묵묵히 감내할 뿐이다. 도대체 왜, 안즈코는 결혼 생활을 쉽사리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일까? 그토록 곱게 키운 딸의 시련과 고생을 보면서도 ...

어느 정념(情念)의 여로, 산의 소리(山の音, 1954)

    "내가 말이지, 아버지의 일생을 한번 생각해 봤어. 결국 부모로서의 성공은 자식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사느냐로 판가름 나는 것이지. 우리 아버지는 어떤지 모르겠네."   아들 슈이치(우에하라 겐 분)는 아버지(야마무라 소 분) 앞에서 태연하게 그런 말을 늘어놓는다. 그 말을 듣는 아버지의 속이 편할 리 없다. 아들 슈이치는 며느리 키쿠코(하라 세츠코 분)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고, 시집간 딸은 남편과 불화가 심해서 툭하면 보따리 싸들고 친정에 온다. 시아버지 싱고는 아들에게 냉대받는 며느리가 안쓰럽고, 어떻게든 아들 내외의 결혼 생활을 이어가게 하려고 애를 쓴다. 과연 그의 바램대로 아들 내외는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산의 소리(The Thunder of the Mountain, 1954)'는 한 가족의 일상에 내재된 균열과 상처를 담아낸다. '안즈코(1958)'에서 딸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감싸주는 아버지로 나왔던 배우 야마무라 소가 이 영화에서는 사람 좋은 시아버지로 나온다. 며느리를 자식 보다 더 예뻐한다는 불평을 딸과 아내가 쏟아낸다. 그런 아버지를 아들도 못마땅하게 생각할 뿐이다. 영화 속에서 싱고가 자신의 가족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그렇게 살갑지 않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가장 걱정하는 동안, 시어머니는 아들 내외에 무관심하며, 친정으로 애들 데리고 온 딸은 속 긁는 소리만 하고, 아들은 밖으로 나돈다. 이 집안 사람들의 가족으로서의 유대와 정서는 여기 저기 균열이 가 있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그들 내면의 풍경은 황량하다.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내는 이런 가족 드라마는 결코 편하게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떤 문제 하나만 해결하면 잘 풀릴 것 같은 데 그렇지 않다. 그 속에는 구불구불하게 얽힌 길이 있으며, 도무지 출구를 찾기가 어려워 보인다. 삶이 가진 복잡성, 그것이야말로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서 진중하고 치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