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10월, 2021의 게시물 표시

광기를 견뎌낸 희망의 예술,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Kusama: Infinity, 2018)

    "창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어요. 그건 미지의 세계에 자신을 던지는 일입니다."   아흔에 가까운 예술가가 매일 작업하는 스튜디오 근처에는 정신 병동이 있다. 젊은 시절부터 앓았던 정신 질환은 이 예술가를 자주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았다. 중년 이후로는 정신 병동에서 거주하면서 창작 작업을 해나갔다. 미치지 않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그리고 만들었다. 광기가 자신을 삼켜버리도록 만드는 대신에, 그것이 주는 두려움과 공포를 창작의 주제로 삼았다. 그가 그리는 무한한 점과 끝없이 이어진 세계는 마침내 자신을 구원했고,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아마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검정색 점들이 촘촘히 박힌 커다란 노란 호박을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헤더 렌즈(Heather Lenz)의 2018년작 다큐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Kusama: Infinity)'는 일본 출신의 현대 미술 작가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의 삶과 예술 세계를 담았다. 다큐는 작가 본인을 비롯해 미술사가와 큐레이터, 지인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의 생애 전반을 다루면서, 작품 세계의 변화 과정과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들여다 본다.    마츠모토 시의 부유한 종묘상의 딸로 태어난 쿠사마 야요이는 어렸을 적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부모는 자식의 예술적 재능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여성 편력은 딸에게 남성에 대한 혐오를 심어주었고, 억압적인 모친은 늘 미술을 그만 둘 것을 종용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야심있는 여성 예술가에게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한 곳이었다. 27살, 마침내 쿠사마 야요이는 혈혈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간다. 가기 전에 그때까지 그렸던 자신의 그림들을 모두 폐기했다. 그리고 다짐한다. 이 그림들 보다 반드시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겠다고...   뉴욕에 정착한 초창기의 쿠사마 야요이를 기억하는 지인

전후 일본 하층민의 암울한 생존기, 붉은 부두(赤い波止場, Red Pier, 1958)와 '태양의 묘지(太陽の墓場, The Sun's Burial, 1960)'

    "죽긴 왜 죽어. 분하다면 살아서 복수를 해야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건 바보같은 짓이야!"   하나코는 앙칼진 목소리로 유약한 타케시를 비웃는다. 타케시는 친구 갱단원이 데이트 커플을 습격할 때 옆에 있었다. 하나코는 그 모든 상황을 냉소적으로 방관한다. 여자 친구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남자가 자살한 것을 알게 된 타케시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어쩌다 오사카 뒷골목의 갱단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타케시에게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그곳의 삶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영화 '태양의 묘지(The Sun's Burial, 1960)'를 만들었을 때의 나이는 스물 여덟이었다. 패기 넘치는 젊은 감독은 이 영화에서 자신의 조국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날 것 그대로 쏟아낸다. 오시마 나기사는 오사카 밑바닥 삶을 전전하는 하층민들의 모습을 통해 패전 후 일본이 결코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이면의 진실에 대해 탐구한다.   오사카의 랜드마크인 츠텐카쿠(通天閣) 탑이 멀리 보이는 도야 거리(ドヤ街, 판자집이 이어진 빈민가를 일컫는 말), 작은 갱단의 리더 신은 매춘업과 갈취로 먹고 살아가고 있다. 갱단원 야스에게 얻어맞고 억지로 신입 단원이 된 타케시. 그는 곧 갱단이 저지르는 착취와 살인, 폭력을 목도하게 된다. 리더 신은 지역의 보스 오마하의 눈을 피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중이다. 한편 야스의 여자 친구 하나코는 낮에는 매혈 사업을, 밤에는 매춘을 하며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타케시는 조직을 벗어나려는 야스의 처참한 죽음을 보고 갱단 생활에 깊은 환멸과 혐오를 느낀다. 매혈 사업을 위해 신과 손을 잡은 하나코, 그러나 신이 자신을 밀어내자 지역의 보스 오마하에게 밀고를 하는데...   전후 일본은 한국 전쟁의 군수 물자 생산 기지로 경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1950년대 후반 일본은 고도의 경제 성장 국면에 진입하지만, 그럼에도 하층민의 삶은 열악한 상황에 처해

이웃집 네오나치(Neo-Nazi), Welcome to Leith(2015)

    "내가 누군 줄 알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인종차별주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구!"   자신의 추종자와 함께 총을 들고 다니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늙은 남자는 그렇게 소리친다. 미국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 주의 한적한 시골 마을 리스(Leith), 이곳에서는 소 방목업과 농장을 하는 주민들이 살고 있다. 2013년, 겨우 24명의 주민이 사는 이 작은 마을에 어느 날 흰머리에 긴 수염의 남자가 들어온다. 혼자 조용히 사는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던 마을 사람들은 뜻밖의 사실과 마주한다. 남자의 이름은 크레이그 콥(Craig Cobb). 미국에서 잘 알려진 네오나치 운동의 열렬한 신봉자인 콥에게는 자신만의 꿈이 있다. 작은 마을 리스를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공동체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는 마을의 땅을 계속 사들이며, 자신의 추종자들을 그곳에 불러모은다. 네오나치 주의자들에게 리스는 성지가 되어가지만, 그것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다. 마이클 니콜스와 크리스토퍼 워커의 2015년작 다큐 'Welcome to Leith'는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과 대결하는 리스 주민들의 고군분투를 그려낸다.   마을 초입에 '리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소박한 나무 간판이 있는 마을, 그곳에 콥은 폭풍을 몰고 온다. 콥의 집 마당에는 마을 간판을 비웃기라도 하듯 'Village of the damned(저주받은 마을)'이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그의 집 앞에는 온갖 종류의 나치 문양과 백인 우월 단체의 깃발이 내걸리고, 미국의 스킨 헤드족들이 리스에 집결한다. 콥은 마을 주민 회의를 장악하고 그곳의 주인이 되어 자신이 지배하는 리스를 만들려고 한다.   네오나치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 마을 사람들은 침입자들의 정착을 막고자 갖은 애를 쓴다. 그러나 리스 주민들은 콥과 그 추종자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들의 권한을 극대화하며 마을을 집어삼키고 있음을 깨

혁명이 끝난 후, 통금(After the Curfew,1954)

  *이 글은 영화 '통금(After the Curfew, 1954)의 결말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난 내가 외국인처럼 느껴져."   영화의 첫 장면, 어두운 밤길을 걷는 한 남자의 시선이 벽보에 멈춘다.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의 통금을 알리는 글이다. 4년에 걸친 치열한 전쟁이 끝났다. 조국은 원하는 독립을 쟁취했고, 그는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운 전사였다. 이제는 군인이 아니라 일반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스칸다르는 딱히 머물 곳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약혼녀 노르마의 집에서 신세를 진다. 하지만 그 집의 모든 것이 그에겐 불편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부유한 노르마의 집에서 이스칸다르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노르마가 이스칸다르의 귀환 파티를 준비하는 동안, 돌아온 혁명 전사는 너무나도 달라진 현실과 마주한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자신의 재단(The Film Foundation)을 통해 세계 영화사에서 보존될 가치가 있는 영화들의 복원 작업을 후원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영화로 그 프로젝트의 선정작이 된 영화 '통금(Lewat Djam Malam, After the Curfew, 1954)'은 2012년에 공개되었다. 이 영화는 자국의 엄혹한 독재 시절을 지나며 무려 50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 초창기 인도네시아 영화사의 중심 인물인 우스마르 이스마일(Usmar Ismail) 감독은 1949년 독립 직후 조국의 혼란한 상황을 영화로 기록했다. '통금'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혁명의 좌절된 이상을 제대 군인의 시각을 통해 보여준다.   노르마의 아버지는 사윗감이 영 마뜩잖지만 딸을 생각해서 친구인 주지사의 사무실에 취직시킨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루 만에 해고당한 그는 부대원이었던 가파르를 만나러 간다. 이스칸다르는 전쟁 때 자신이 죽였던 사람들의 비명이 아직도 들린다며 고통을 호소한다. 성공한 건축업자가 된 가파르는 그저 과거를 잊고 새출발을 해야 한

1980년대 뉴욕의 펑크와 SF가 만났을 때, Liquid Sky(1982)

  *이 글은 영화 'Liquid Sky(1982)'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 영화는 뉴욕의 신데렐라에 관한 영화죠."   영화 'Liquid Sky(1982)'의 촬영 감독 Yuri Neyman은 그렇게 대답했다(출처: modernmythology.net과의 인터뷰). 마약과 섹스, 동성애자와 양성애자, 외계인, 클럽의 네온 조명과 패션 모델, UFO와 과학자... 그 모든 요소를 다 섞어 넣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희한한 1980년대의 cult movie가 현대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면 그 대답이 얼마나 간명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소련 출신으로 1976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슬라바 추커만(Slava Tsukerman) 감독은 1982년에 자신의 아내와 공동 집필한 시나리오로 영화를 한 편 만들었다. 500만 달러의 예산으로 만든 이 영화는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1700만 달러에 이르는 수익을 냈다. 2021년의 관객의 눈으로 보아도 기괴하기 짝이 없는 영화, 대체 'Liquid Sky'는 어떤 영화인가?   영화는 뉴욕 뒷골목의 어느 클럽을 비춰주며 시작한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특이하고 중독성 있는 신디사이저 음향이 흐르는 가운데, 클럽의 사람들은 한창 춤에 빠져있다. 패션 모델로 마약 중독자이며 양성애자인 마가렛은 동성연인 에이드리언과 같이 살고 있다. 에이드리언은 클럽에서 음악 공연을 하기도 하지만, 본업은 마약상이다. 마가렛과 비슷한 외모의 지미(마가렛을 연기한 Anne Carlisle이 1인 2역을 한다)는 경쟁 관계에 있는 남자 모델이다. 지미는 마가렛을 괴롭히며 모욕감을 준다. 그런데 그들이 있는 클럽 건물의 상공에 정체불명의 비행체가 나타난다. 이 비행체는 외계에서 온 것으로 마가렛의 집 옥상에 자리잡는다. 한편, 독일에서 이 UFO를 추적하러 뉴욕으로 날아온 과학자 요한이 있다.

잠들지 못하는 욕망의 병원, The Sleeping City(1950)

  *이 글은 영화 'The Sleeping City(1950)'의 결말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The Sleeping City'는 특이한 도입부를 가지고 있다. 영화의 주연 배우인 리처드 콘테가 영화 속 사건과 실제 뉴욕시의 벨뷰 병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설명하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이 영화가 배경이 된 뉴욕시와 벨뷰 병원(Bellevue Hospital)의 평판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시장의 입장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 영화는 뉴욕 벨뷰 병원의 인턴이 의문의 총격을 당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수사 당국은 병원 내부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형사 프레드(리처드 콘테 분)를 의사로 잠입시킨다. 그는 주변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해 나간다. 프레드는 곧 매력적인 간호사 앤, 사교적인 엘리베이터 기사 팝과 친해진다. 그러던 중에 같은 방을 쓰는 동료 의사의 자살 사건이 일어난다. 동시에 프레드에게도 어둠의 손길이 다가온다. 팝에게 진 도박빚 때문에 한두 번 써주기 시작한 마약 처방전은 계속 늘어난다.   조지 셔먼 감독의 'The Sleeping City'는 명백히 줄스 다신 감독의 'The Naked City(1948)'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두 영화 모두 Universal Pictures에서 제작했다). 뉴욕이라는 도시를 다루고 있으며, 대도시의 풍경 속에 '밤'이 아닌 '대낮'에 범인과의 추격전이 이루어진다. 일종의 도시 탐구 필름 느와르의 면모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매우 현대적이고 세련된 벨뷰 병원의 내부 모습을 포함해 1950년대 뉴욕의 풍광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멋진 외관의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범죄의 양상은 은밀하고 복잡하다. 영화 속 '의사'는 직업적 스트레스 때문에 도박과 우울증, 약물 중독에 취약한 상황 속에

전후 청년 세대의 그늘진 현실, 봄날이여 안녕(惜春鳥, Farewell to Spring, 1959)

    영화는 기차 안에서 만난 두 사람의 대화에서부터 시작된다. 대학생 이와가키와 그의 친구 마키타의 삼촌은 고향 와카마츠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와가키는 2년 만에 고향 친구들과 재회한다. 친구들은 각자의 삶을 버겁게 살아내고 있다. 여관집 아들로 가업을 잇고 있는 미네무라, 어머니의 술집 일을 도우며 바텐더로 일하는 마키타, 목공예 장인인 아버지에게 일을 배우는 마스기, 몰락한 무사 집안의 자손으로 노조일에 앞장서는 테시로기, 이들은 오랜만에 만난 이와가키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곧 이 친구들의 우정에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의 1959년작 '봄날이여 안녕(惜春鳥, Farewell to Spring)'은 와카마츠 현의 시골 마을 청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젊은 세대의 불안한 초상을 그려낸다.   이와가키를 집안이 운영하는 여관에 머물게 한 미네무라는 친구들의 술자리에 게이샤들을 불러 환대한다. 게이샤 미도리는 비감한 백호(白虎)춤을 선보인다. 영화 속에서 이 '백호'의 노래와 이야기는 주요한 테마가 된다. 1868년, 존황양이파와 막부파의 결전이 아이즈 번에서도 일어났다(아이즈 전쟁, 会津戦争). 막부파의 호위 부대였던 아이즈 번의 무사들(白虎隊, White Tiger Unit)은 처절하게 싸웠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끝까지 저항한 19명의 청년 사무라이들은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다. 무사도를 보여준 이들의 이야기는 '신선조(新選組)'와 함께 일본 대중 문화에서 자주 다루는 이야기로 자리매김한다. 미도리가 추는 백호춤을 보며 청년들은 좋았던 과거와 자신들의 현재의 모습을 함께 떠올린다.   '봄날이여 안녕'에는 전후 청년 세대가 당면한 현실적 갈등이 드러나 있다. 백호춤과 노래는 전통적 가치와 과거의 향수를 상징한다. 영화 속 다섯 명의 친구들은 '우정'이라는 가치로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 각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

화가와 도둑의 기이한 우정, The Painter and the Thief(2020)

    "그런데 내 그림은 왜 훔쳤어요?"   "그러니까, 그건... 그림이 아름다워서요."   화가는 전시를 위해 화랑에 걸어 두었던 그림 2점을 도둑맞았다. 감시 카메라에 찍힌 두 명의 강도는 곧 경찰에 붙잡혔다. 재판정에서 자신의 그림을 훔친 도둑과 마주친 화가는 그림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부탁한다. 벤자민 리 감독의 2020년작 다큐 '화가와 도둑(The Painter and the Thief)'은 그림을 두고 생겨난 화가와 도둑 사이의 기이한 유대를 담는다. Photorealism (사진을 바탕으로 다양한 매체적 이미지로 재현하는 예술) 화가 바르보라와 그의 그림을 훔친 도둑 칼의 이야기가 3년에 걸친 시간 동안 펼쳐진다.   도둑의 몸에는 눈에 띄는 많은 문신들이 새겨져 있었다. 마약 중독자로 이미 전과가 있는 이 남자는 신진 작가의 그림을 훔쳤다. 화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자신의 그림을 왜 훔쳤는지 궁금해 한다. 그림이 아름다워서 그랬다는 답이 바르보라의 마음을 움직였다. 남자는 화가의 요청대로 모델이 되었고,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친구처럼 인간적으로도 가까워진다. 과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칼을 범죄자로 인식하는 관객들이 화가에게 생길 수 있는 안좋은 일에 대해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대담한 화가는 칼을 처음 본 순간부터 범죄자가 아닌 상처받은 인간으로 보았다. 바르보라가 그린 칼의 초상화는 그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준다. 그림을 보고 그가 흘린 눈물은 거짓처럼 보이지 않는다. 화가와 도둑의 예기치 않았던 예술적 협업 관계는 그런 신뢰 속에 지속된다.     관객들은 전반부에는 화가 바르보라의 시점으로, 후반부에는 도둑 칼의 시점에서 그 관계의 전모를 탐색할 수 있다. 칼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바르보라는 그의 불우했던 인생에 대해 알게 된다. 어린 나이에 겪었던 부모의 이혼, 외로웠던 성장기와 그로 인해 겪은 정서적인 문제, 그 모든 것이 칼의

기타노 타케시가 만들어낸 잔잔한 감동의 파고,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A Scene at the Sea, あの夏、いちばん静かな海。1991)

  * 이 글은 영화의 결말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래전,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 선생의 인터뷰를 국악방송에서 들은 적이 있다. 어떻게 가야금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화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6ㆍ25 동란이 터지고 부산에서 잠시 보냈던 피난 시절, 중학생이었던 선생은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어느 집의 처마밑에 서있었다. 그런데 그 집에서 들리는 가야금 소리가 선생의 마음을 가만히 사로잡았다. 그것이 그가 평생을 두고 함께 할 가야금과의 시작이었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의 청각 장애인 청년 시게루는 쓰레기 수거업체에서 일한다. 어느 날, 해변가의 쓰레기를 치우던 그는 부서져서 버려진 서핑 보드를 발견한다. 그렇게 시게루는 서핑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기타노 타케시 감독의 1991년작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닷가(あの夏、いちばん静かな海。)' 는 농아 청년 시게루와 연인 타카코의 잊지 못할 여름날의 이야기를 담는다.   주워온 서핑 보드를 시게루는 정성껏 수리한다. 스티로폼과 스카치테이프로 이어붙인 보드를 들고 무작정 바다로 가서 매일 연습을 하는 시게루. 그의 곁에는 언제는 여자 친구가 함께 한다. 둘 다 농아인 이 커플은 말 대신에 마음으로 이야기한다. 타카코는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시게루의 옷을 개켜놓고, 연인이 있는 바다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그러나 같은 해변가의 서핑 클럽 회원들의 눈에 시게루는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테이프로 칭칭 감은 변변찮은 보드에 서핑복도 없이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시게루를 그들은 비웃고 한심하게 바라본다.    '소나티네(1993)', '하나비(1997)'로 자신의 이름을 알린 기타노 타케시 감독은 폭력과 유혈이 난무하는 어둠의 미학을 보여준다. '기쿠지로의 여름(1999)'은 그의 영화들 가운데 좀 이례적이다. 전직 야쿠자와 이웃집 소년의 한바탕 유쾌한 이 로드 무비는 마치 중간의 쉼표 같은 느낌이다

'NEP' 시기 소련의 흔들리는 풍경, 파트니츠카야의 선술집(Трактир на Пятницкой, The Tavern on Pyatnitskaya, 1978)

  10년 동안 경찰로 일했던 그는 서른 살에 퇴직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추리 소설을 써내기 시작했다. 구 소련의 추리 소설 작가 니콜라이 레오노프 (Nikolai Leonov)가 1977년에 출간한 소설 '파트니츠카야의 선술집'은 이듬해에 영화로 만들어졌다. Aleksandr Faintsimmer 감독의 이 독특한 탐정물은 1978년의 흥행작 가운데 하나였고, 5400만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소련의 1920년대를 배경으로 복고적 세트, 다양한 이력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를 비롯해 차르 시대의 전직 관료와 귀족, 갱단과 거리의 소매치기가 나온다. 영화에서는 뭔가 느슨하면서도 혼란과 불안이 뒤엉킨 시대적 분위기가 감지된다.   '그레이(Grey)'란 별명으로 불리는 갱단의 두목은 연이은 강도와 살인을 저지르며 모스크바 범죄수사국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수사국 신입 경관 파닌은 정보 수집을 위해 갱단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파트니츠카야의 선술집에 웨이터로 잠입한다. 한편, 그레이는 강도 현장에서 경찰과 맞닥뜨리자 조직에 첩자가 있다고 의심한다. '프랑스인'으로 불리는 갱단의 조력자, '집시'라는 별명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부하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레이는 소매치기 '파슈카 아메리카'에게 정보력을 동원해 첩자 색출에 협력하라고 강요한다. 그러던 중에 신분이 드러날 위기에 처한 파닌을 구하려다 퇴직 경관이 목숨을 잃는다. 마침내 수사국은 갱단을 일망타진할 마지막 작전을 펼치는데...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고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그러나 볼셰비키 정권은 혁명에 저항하는 세력들과 치열한 적백 내전을 치룬다. 내전은 곧 진압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심각했다. 소련의 경제는 그야말로 파탄 상태였다. 레닌은 급격한 사회주의 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유예하는 결정을 내린다. 1921년, 신경제 정책(

길 잃은 이들의 쓸쓸한 노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 1961)

    여배우는 촬영장에 늦기 일쑤였다. 정서 불안에 심한 약물 중독 상태였으므로 촬영은 힘겹게 이루어졌다. 시나리오를 쓴 여배우의 남편은 쓰디쓴 결혼 생활의 끝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에게도 이 영화는 버거운 숙제였다. 대본은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고, 배우들은 촬영 당일에 '쪽대본'을 받는 일이 잦았다. 문제가 있는 것은 그 두 사람 뿐만이 아니었다. 주연 남자 배우들 가운데 한 명은 여배우와 비슷한 처지였다. 역시 약물 중독 상태였던 그는 여배우에게 연민의 대상이었다. 여배우가 보기에 그는 자신보다 더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감독 또한 촬영에 집중하지 못했다. 촬영지 네바다 주는 도박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천국이었다. 감독은 밤이면 도박장에서 시간을 보냈고, 낮에는 촬영장의 감독 의자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졸았다. 그것이 영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 1961)'을 찍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여배우는 마릴린 먼로, 먼로가 자신 보다 걱정한 남자 배우는 몽고메리 클리프트, 쪽대본을 양산한 여배우의 남편은 극작가 아서 밀러, 도박장과 촬영장을 오간 감독은 존 휴스턴이었다.    리노에서 이제 막 이혼을 한 로즐린은 정비공 귀도(일라이 왈러크 분)와 그의 카우보이 친구 게이(클라크 게이블 분)를 알게 된다. 귀도는 로즐린에게 매혹되지만, 로즐린은 곧 게이와 연인이 된다. 그들이 로데오 구경을 가는 길에 떠돌이 카우보이 퍼스(몽고메리 클리프트 분)가 합류한다. 퍼스는 로데오 경기에서 부상을 입고, 그런 퍼스를 보며 로즐린은 연민을 느낀다. 귀도와 게이는 사막의 야생마 머스탱(mustang)을 잡는 일감을 맡고, 곧 그들은 말 사냥을 위해 길을 떠나는데...   매력적인 외모의 로즐린은 불행한 결혼생활에서 이제 겨우 벗어났을 뿐이다. 영화의 도입부, 로즐린은 이혼 법정에서 진술할 증언을 외운다. 증언에는 남편의 폭행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 실제로 로즐린 역의 마릴린 먼로는 전 남편인 야구 선수

술꾼들의 놀랍고도 오묘한 세계, Bloody Nose, Empty Pockets(2020)

    "난 내가 실패한 뒤에 알콜 중독자가 되지 않은 것이 자랑스러워. 왜냐하면 그건 정말 지루한 일이거든."   남자의 이름은 마이클, 화면 너머로도 그에게서는 술 냄새가 풍기는 것 같다. 아침 10시 59분, 술집 출근 도장을 찍는 58살의 머리 허연 알콜 중독자에게 오늘은 어떤 하루가 펼쳐질까? Bill Ross IV와 Turner Ross, 두 형제들의 다큐 'Bloody Nose, Empty Pockets(2020)'는 라스베가스의 술집 'Roaring '20s'의 마지막 영업일을 카메라에 담는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진정한 술꾼들의 다채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보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을 술 취하게 만드는 희한한 다큐. 그대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즐거울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아주 흥미있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술집의 터줏대감 같은 마이클을 시작으로 하나 둘씩 술꾼들이 모여든다. 서로를 잘 아는 그들은 정답게 포옹하며 인사를 나눈다. 수염을 기른 큰 체구의 바텐더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벽면의 TV들에서는 뉴스와 예능 프로그램, 헐리우드 고전 영화들이 쉴 새 없이 나온다. 때는 바야흐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직전, 다큐는 2016년에 만들어졌다. 트럼프가 나오는 화면을 보면서 술꾼 한 명은 예언자적 통찰을 보여준다.   "내 장담하지. 저 인간이 대통령이 되면 탄핵이 되거나, 안그러면 암살을 당할 거야."   손님들의 면면은 참으로 다양하다. 트랜스 젠더, 흑인 노숙자, 아인슈타인 머리를 한 백발의 남자, 60살 된 늙은 여자, 호주 출신 중년 남자, 음악가 등등... 다큐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무려 22명에 이른다. 그들은 모두 코가 깨질 때까지, 바의 마지막 영업을 기념하며 동이 트는 새벽까지 술을 마신다. 다큐 내내 넘쳐나는 술에 음악이 빠질 수 없다. 주크 박스에서는 끊임없이 음악이 흘러 나오고, 손님들은 자신들

홍콩 뮤지컬 영화의 스타 Grace Chang, Mambo Girl(1957)과 'The Wild, Wild Rose(1960)'

    러닝타임 95분의 영화가 30분으로 느껴지는 마법, 이것은 1950년대와 60년대를 풍미했던 여배우 Grace Chang의 영화 '맘보 걸(Mambo Girl, 1957)을 볼 때 일어났다. 영화는 시작부터 흥겨운 맘보 음악과 춤으로 시작한다. 체크 무늬의 날렵한 바지를 입은 여성이 놀라운 춤과 노래 실력을 뽐낸다. 무려 7분에 달하는 도입부의 장면은 이 여배우가 영화의 진정한 주인임을 알려준다. 중국의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어렸을 적부터 재능이 출중했던 그레이스는 1949년, 가족의 홍콩 이주로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싱가포르를 기반으로 한 MP & GI 영화사는 극장 체인을 비롯해 동남아시아를 무대로 영화 산업을 확장해 나갔다. 홍콩에 세운 자회사에서는 광둥어가 아닌 만다린(Mandarin, 표준 중국어)으로 영화를 제작했는데, 그레이스는 그 영화들의 주역을 도맡았다. '맘보 걸'은 그레이스가 24살이 되었을 때 찍은 작품으로 큰 흥행 성적을 거두며, 이 여배우의 독보적 스타 파워를 입증하는 계기가 된다.    학교의 퀸, 그리고 '맘보 걸'이라는 사랑스러운 별명으로 불리는 카이링은 남부러울 것이 없다. 번화가에서 커다란 인형 가게를 하는 부모와 귀여운 여동생, 그리고 카이링을 떠받드는 친구들과 부유하고 멋진 남자 친구까지 있다. 카이링의 20살 생일을 앞두고 남자 친구 다니안은 성대한 생일 파티를 계획한다. 한편 카이링의 집에서는 부모가 카이링의 정확한 생일 날짜를 두고 옥신각신한다. 출생증명서를 꺼내보며 확인하는데, 마침 카이링의 여동생이 그 서류를 보게 된다. 카이링은 입양된 딸이었던 것. 나중에 친딸을 얻었지만 부부는 카이링을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며 키웠다. 그 사실을 알고 고민하던 여동생은 카이링을 시기하는 친구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출생의 비밀은 카이링에게 가출을 감행하게 만든다. 친모를 찾아나선 카이링, 사랑스런 맘보 걸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남자

앤드류 안(Andrew Ahn)의 영화들, Spa Night(2016)와 Driveways(2019)

    한국계 미국인 감독 앤드류 안(Andrew Ahn)의 장편 데뷔작 'Spa Night(2016)'를 보는 동안 떠올렸던 영화는 스티븐 프리어스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My Beautiful Laundrette, 1985)'였다. 두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동성애자가 주인공이다. 한국인 이민자 2세인 앤드류 안은 첫 영화로 자신의 출신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영화의 대사는 대부분 한국어이며, 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주제의 이야기이고, 정서적으로도 잘 와닿는다. 하지만 그러한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가 없는 서양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그저 그런 퀴어 영화(Queer film)로 인식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좀 뻔한, 진부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낯선 땅에 정착하는 이민 1세대의 고군분투,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2세대, 거기에 동성애가 버무려진 'Spa Night'는 그럼에도 감독의 놀라운 연출력, 내러티브의 핍진성이 돋보인다.   창작자에게 가장 편하고, 다루기 쉬운 소재는 무엇일까? 바로 자기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이다.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세하고 치밀하게 쓸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들은 관객들과 만나 공명을 이루어낸다.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동성애자인 앤드류 안은 첫 영화로 그것을 성취한다. 'Spa Night'는 도입부를 목욕탕에서 시작한다. 사우나실에 있는 아버지는 열기를 힘들어하는 아들에게 더 있으라고 말한다. 파랑색 이태리 타올로 아버지와 아들은 때를 민다. 목욕을 끝낸 후 휴게실에서 팥빙수를 같이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이 가족에게 한국식 목욕탕은 화합과 소통의 장소이다. 부모는 아들에게 한국인 아가씨를 며느리로 맞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비춘다. 그러나 아들 데이비드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 완곡히 부인한다.   매일 조깅을 하며

로맨스의 틀에서 재현된 인간 관계의 본질, Asako I & II(寝ても覚めても, 2018)

    *이 글은 영화 '아사코 (寝ても覚めても , 2018)'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심드렁하게 보고 나서, 다른 사람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궁금해졌다. 이건 걸작이니 꼭 보아야 한다고 말한 외국의 평론가가 있었다. 르 몽드(Le Monde)에 영화 비평을 쓰는 자끄 만델바움이었다. 정말 내가 이 사람과 같은 영화를 본 것이 맞을까?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말해야 '영잘알'이 되는 기이한 현실에 대해서 말이다.   오사카에 사는 아사코는 사진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난 바쿠와 사랑에 빠진다. 불 같았던 사랑의 감정은 갑작스런 바쿠의 잠적으로 상처 속에 봉인된다. 2년 뒤, 아사코는 도쿄에서 바쿠와 똑같이 생긴 외모의 회사원 료헤이를 보게 된다. 료헤이가 바쿠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사코는 료헤이와의 관계를 이어간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흐르고,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청혼한다. 그런데 아사코는 예전의 지인 하루요를 만나 바쿠의 소식을 듣는다. 유명 모델이 된 바쿠, 아사코는 감정의 혼란을 느끼고 그런 아사코에게 바쿠가 찾아오는데...   바쿠와 처음 만나게 된 사진 전시회에는 일본의 사진 작가 고초 시게오(牛腸茂雄)의 'Self and Others'의 작품들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에 앓은 병으로 신체 기형의 후유증을 갖게 된 이 사진 작가는 타인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했다. 그 결과물이 1977년에 나온 사진집 'Self and Others'이다. 다큐멘터리 감독 사토 마코토는 2001년에 이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한 다큐를 동명의 제목으로 만들었다. 이미지의 리듬감이 느껴지는 이 다큐를 보고 나면 영화 '아사코'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그 사진집에는 아이들을 비롯해 평범한 사람들의 초상 사진이 실려 있다. 고초 시게오의 작업은 마치 다이앤 아버스와 로버트 프랭크의 시적인 결합처럼 느껴진

아프간 파병 군인 가족의 재건 드라마, Father Soldier Son(2020)

    아이들은 아빠의 모습이 보이기를 초조하게 기다린다. 마침내 군복 차림의 한 남자가 나타났다. 12살 아이작, 7살 조이는 아빠를 열렬히 환영하며 끌어안는다. 남자는 2주간의 휴가를 보내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 아이들과 보내는 좋은 시간도 잠시, 남자는 다시 떠난다. 카트린 아인혼과 레슬리 데이비스의 다큐 'Father Soldier Son(2020)'는 제대 군인 가족의 삶을 10년의 시간을 두고 담아낸다.   삼촌 내외와 함께 지내는 아이작과 조이, 부모는 이혼했고 아빠는 먼 나라 아프간에서 군 복무 중이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영웅이며, 거대한 산과 같은 그리움이다. 그런데 그 아빠가 부상을 입고 제대한다.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견뎠지만, 결국 절단 수술을 받게 된다. 군인으로만 살아온 남자는 장애인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아이들도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는 동안 아빠의 동거녀 마리아, 마리아의 아들 조던이 새로운 가족으로 들어온다. 다큐는 파병 군인의 부상과 제대, 그 가족이 보내는 긴 재건의 시간을 펼쳐 보여주면서도 거기에 그 어떤 정치적 신념과 쟁점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물 흐르듯 펼쳐지는 이 가족 드라마를 보며 관객은 미국의 골치아픈 아프간 전쟁에 대해 구태여 떠올릴 필요가 없다. 어떤 면에서 그것이 다큐 제작자들의 의도이기도 하다. 아인혼과 데이비스는 '가족'이라는 주제에 집중하고 싶었다고 말한다(출처 coffeeordie.com과의 인터뷰).   일반적으로 전쟁 다큐가 보여주는 긴박하고 치열한 전투 현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참상, 부상과 죽음, 그러한 장면들은 이 다큐에서 볼 수 없다. 브라이언이 주둔한 아프간 쿤두즈 기지와 그가 수행한 전투가 짧게, 삽화적 장면처럼 들어가기는 한다. 그러나 다큐는 그가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뉴욕 타임즈에서는 아프간 파병 군인에 대한 기사를 시리즈로 내보냈는데,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 대한 성찰, The Imposter(2012)와 American Animals(2018)

  영화를 보면서 내내 든 생각은 '쟤들 선 넘네'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범죄 피해자가 된 도서관 사서도 인터뷰에서 들려준다. 'cross the line', 중산층 출신으로 미래가 보장된 4명의 백인 대학생들은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었고 그에 대한 댓가를 치룬다. 바트 레이튼(Bart Layton) 감독의 2018년작 'American Animals'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2004년, 트란실바니아 대학교 도서관에서 있었던 고서적 강탈 사건을 재연한다. 특이하게도 사건과 관련된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가 중간 중간에 들어간다. 레이튼 감독은 이전 작품인 다큐 'The Imposter(2012)'에서는 영화적 형식을 잘 결합시켰는데, 'American Animals'는 역으로 극영화의 틀에 다큐멘터리를 이식시켰다.    미술을 전공하는 스펜서는 도서관 안내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매혹시키는 고서적과 만난다. 19세기 미국의 자연 화가이며 조류학자 존 오듀본(John Audubon)의 화첩 'The Birds of America'였다. 아름다운 핑크 플라밍고가 펼쳐져 있는 그 화첩은 무려 1200만 달러에 달하는 희귀한 책이었다. 약간의 비행(非行) 기질이 있는 친구 워렌은 스펜서가 흘리듯 말한 그 이야기에 혹한다. 그걸 훔쳐보면 어떨까, 하고 했던 농담은 1년이 지난 뒤에 치밀한 계획으로 변모한다. 모범생 회계학과 학생 에릭, 운동을 좋아하는 채스가 거기에 합류하고, 4명의 대학생들은 마침내 결전의 그날에 강도로 돌변하는데...   영화는 Heist film의 전형적인 경로를 따라간다. 훔쳐야할 대상이 있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사람들이 모이며,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된다. 레이튼 감독은 4명의 영화 속 인물들을 내러티브에 풀어놓고,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를 병치시킨다. 그런데 그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영화 속 워렌이 편의점에 들른 스펜

1970년대 소련 지식인의 고뇌와 방황, 당신과 나(Ты и я, You and Me, 1971)

    '손 들어!'하는 대사와 함께 카우보이 복장의 남자가 아파트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겁에 질린 집주인 남자와 침입자 사이의 총질이 시작된다. '소련 웨스턴(Red Western)'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 무렵에 남자들은 서로를 부둥켜 안고 인사를 나눈다. 잠시 후 나오는 오프닝 크레딧을 보고 나서야 이 영화가 소련의 여성 영화 감독 라리사 세피트코(Larisa Shepitko)의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신과 나(You and Me, 1971)', 도입부 장면부터 범상치 않은 영화는 러닝타임 97분 내내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한다. 영화의 줄거리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으며,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감독의 의중에 조금 다가설 수 있다. 관객을 내러티브 바깥으로 밀쳐내는 영화, 세피트코는 동시대에도 그랬고 후대의 관객들과도 불화할 것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비선형적인 시간 구조를 갖고 있는 이 영화는 주인공 표토르의 과거 기억이 플래시백으로 중간 중간 제시된다. 의사인 표토르는 친구 샤샤와 의학 연구소에서 뇌종양 연구를 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표토르는 연구를 그만 두고 스웨덴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일한다. 샤샤 또한 정부 기관의 관리직으로 안정된 위치에 오른다. 표토르는 어느 날 갑자기 스웨덴에서 귀국해서 다시 이전의 연구를 이어가려 한다. 샤샤에게 함께 할 것을 제안하지만 샤샤는 거절한다. 실망한 표토르는 연락도 없이 사라지고, 그러는 동안 표토르의 아내 카티야는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샤샤와 가까워진다. 시베리아의 시골 마을 의사가 된 표토르, 친구의 아내에게 마음을 빼앗긴 샤샤, 자신과 아이를 두고 잠적한 남편을 이해할 수 없는 카티야, 이 세 사람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1950년대에 러시아 국립 영화학교(VGIK)에서 구세대 감독들에게 영화를 배웠던 새로운 세대의 학생들이 있었다. 바실리 슉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라리사 세피트코 같은 이들이 그러

14년 동안의 감금 그 이후, The Wolfpack(2015)

    길을 가다가 특이한 외모에 남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았다고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피해서 갈 것이다. 경찰은 그 사람에게 어떤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에게 접근하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일 것이다. 뉴욕 거리를 친구와 함께 걷던 크리스탈 모젤(Crystal Moselle)이 그랬다. 모젤은 눈길을 사로잡는 한 무리의 청소년들을 보게 된다. 선글라스를 쓰고 눈에 띄는 옷차림을 한 그들은 한 형제들로 신기한 표정으로 거리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모젤과 그 형제들 사이에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다. '영화'였다. 모젤은 그들과 시간을 두고 연대감을 쌓아갔고, 4년 후에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6명의 앙굴로(Angulo) 형제들은 14년 동안 아버지에 의해 감금된 삶을 살았다. 모젤이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형제들은 그 즈음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웃들은 앙굴로 일가의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도 않았고, 오직 집에서 갇혀서 지냈다. 어떻게 대도시 뉴욕의 한 복판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기이한 삶의 행로를 걷는 이들은 언제나 다큐 제작자들의 관심을 끈다. 다이렉트 시네마의 기수 메이슬스 형제의 'Grey Gardens(1975)'는 온갖 잡동사니 쓰레기로 가득찬 대저택에서 사는 상류층 모녀(재클린 케네디의 고모와 사촌)의 삶을 담았다. 테리 즈위고프의 'Crumb(1994)'은 외설적이고 기괴한 만화를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한 만화가 Crumb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프리드먼가 사람들 포착하기(Capturing The Friedmans, 2003)'의 감독 앤드루 재러키는 '광대'라는 직업을 찍으려고 취재하는 도중에 자신의 취재 대상이 아동 성범죄자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다큐에는 범죄 가족의 뒤

사랑에 빠진 여배우의 영화적 고백,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7)

    사빠죄아. 작년에 방영된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불륜에 빠진 남편이 아내에게 했던 유명한 대사이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라고 외치고 싶은 사람들이 여기 또 있다. 홍상수의 2017년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에 나오는 영희(김민희 분)와 상원(문성근 분)이 그들이다. 배우인 영희는 유부남 영화 감독 상원과 사랑하는 사이이다. 2부로 나누어져 있는 이 영화는 1부는 독일 함부르크, 2부는 한국의 강릉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피해 해외로 도피한 것처럼 보이는 영희는 낯선 외국의 도시에서 선배 지영을 만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오랜 지인들과 만남을 갖는다. 관객들은 영희가 나누는 대화들을 통해 이 배우가 처해있는 상황과 감정을 유추해볼 수 있다. 실제 이 영화의 감독 홍상수와 연인 사이이기도 한 김민희는 영화 속 영희를 통해 현실의 자신을 연기한다.   "그냥 입 좀 조용히 하세요! 다 자격 없어요! 다 비겁하고, 다 가짜에 만족하고 살고, 다 추한 짓 하면서, 그게 좋다고 그러구 살고 있어. 다 사랑 받을 자격 없어요!"   강릉에서 지인들과 함께 가진 술자리, 갑자기 영희는 '사랑 받을 자격'을 운운하며 좌중을 향해 일갈한다. 어째 영희가 하는 대사가 아니라 홍상수가 자신의 사생활에 관심을 보이는 한국의 대중들에게 퍼붓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는 '우리 제발 사랑하게 해주세요!', 가 아니라 '당신들이 뭔데 우리 사랑에 대해 떠드는 거야?', 라고 말한다. 그것은 영희의 지인 준희(송선미 분)와 천우(권해효 분)가 나누는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두 사람은 영희의 사생활을 비난하는 이들을 천박한 관심을 지녔다며 폄하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가 들려주는 자신의 연애 보고서인 동시에 대중들을 향한 입장을 포함하고 있

미국 청소년 영화(Teen film)의 새로운 길, Over the Edge(1979)

     Nirvana의 커트 코베인은 이 영화의 열광적인 팬이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Smells Like Teen Spirit' 뮤직 비디오의 분위기와 겹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학교를 점거한 아이는 치어리더의 응원술을 마구 흔든다). 영화의 제목은 'Over the Edge', 시나리오를 본 이들은 제작을 꺼렸다. 하지만 제작자 조지 리토(George Litto)는 과감하게 제작에 착수했고, 젊은 조너선 캐플란을 감독으로 내세웠다. 로저 코먼 아래서 그저 그런 돈 되는 영화나 찍으면서 초창기 영화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던 캐플란은 이 영화로 비로소 자신의 역량을 입증해 보인다. 비록 영화는 영화관에 얼마 걸리지도 못하고 내려졌으나, 그 진가를 알아본 관객들에 의해 점차 독보적 위치를 확보해 나갔다.   콜로라도 주, 어느 교외에 위치한 계획 도시 New Granada. 황량한 허허벌판에 급조된 듯한 이 마을에 아이들의 오락거리라고는 'Rec(레크리에이션 센터)'라고 부르는 작은 건물 밖에 없다. 이제 14살이 된 중학생들은 온갖 비행의 집합체들처럼 보인다. 비비총으로 경찰차를 쏘아맞추는가 하면,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신다. 해시시를 공급하는 아이도 있다. 부모나 선생들 말 안듣는 것은 기본, 경찰도 우습게 생각한다. 마을의 경찰 도버만(Doberman)은 그런 아이들을 상대하느라 골머리를 썩는다. 그가 해시시 공급책 아이 팁을 강압적으로 체포한 것을 계기로 아이들의 반감은 점점 커져 간다. 그 중심에는 칼과 리치가 있다. 리치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추격하는 도버만, 리치는 장전하지 않은 총을 꺼내어 들고 도버만은 리치를 쏜다. 칼은 리치의 죽음에 분노하고, 아이들을 규합해 항의의 뜻을 보여주려고 한다. 학교에서 학부모들과 경찰이 모여 학생 폭력 예방 대책을 의논하는 동안, 아이들은 대대적인 파괴극을 감행하는데...   1970년대 미국에서 청소년 폭력은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