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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 하층민의 암울한 생존기, 붉은 부두(赤い波止場, Red Pier, 1958)와 '태양의 묘지(太陽の墓場, The Sun's Burial, 1960)'

 

  "죽긴 왜 죽어. 분하다면 살아서 복수를 해야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건 바보같은 짓이야!"

  하나코는 앙칼진 목소리로 유약한 타케시를 비웃는다. 타케시는 친구 갱단원이 데이트 커플을 습격할 때 옆에 있었다. 하나코는 그 모든 상황을 냉소적으로 방관한다. 여자 친구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남자가 자살한 것을 알게 된 타케시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어쩌다 오사카 뒷골목의 갱단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타케시에게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그곳의 삶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영화 '태양의 묘지(The Sun's Burial, 1960)'를 만들었을 때의 나이는 스물 여덟이었다. 패기 넘치는 젊은 감독은 이 영화에서 자신의 조국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날 것 그대로 쏟아낸다. 오시마 나기사는 오사카 밑바닥 삶을 전전하는 하층민들의 모습을 통해 패전 후 일본이 결코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이면의 진실에 대해 탐구한다.

  오사카의 랜드마크인 츠텐카쿠(通天閣) 탑이 멀리 보이는 도야 거리(ドヤ街, 판자집이 이어진 빈민가를 일컫는 말), 작은 갱단의 리더 신은 매춘업과 갈취로 먹고 살아가고 있다. 갱단원 야스에게 얻어맞고 억지로 신입 단원이 된 타케시. 그는 곧 갱단이 저지르는 착취와 살인, 폭력을 목도하게 된다. 리더 신은 지역의 보스 오마하의 눈을 피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중이다. 한편 야스의 여자 친구 하나코는 낮에는 매혈 사업을, 밤에는 매춘을 하며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타케시는 조직을 벗어나려는 야스의 처참한 죽음을 보고 갱단 생활에 깊은 환멸과 혐오를 느낀다. 매혈 사업을 위해 신과 손을 잡은 하나코, 그러나 신이 자신을 밀어내자 지역의 보스 오마하에게 밀고를 하는데...

  전후 일본은 한국 전쟁의 군수 물자 생산 기지로 경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1950년대 후반 일본은 고도의 경제 성장 국면에 진입하지만, 그럼에도 하층민의 삶은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오시마 나기사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 오사카의 인력 시장과 하층민 거주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태양의 묘지'가 보여주는 최하층 밑바닥의 삶은 부흥하는 일본 경제의 이면과도 같다. 비참한 처지의 매춘 여성들, 그들을 착취하며 기생하는 갱단, 가난한 이들의 피를 사들여 돈을 버는 하나코, 거기에 군국주의의 망령 같은 퇴역군인은 부랑자들에게 전쟁이 터질 거라며 두려움을 불어넣는다. 영화가 펼쳐놓는 슬럼가의 지옥도는 끔찍하기 짝이 없다. 살인과 폭력, 사기와 착취가 일상인 그곳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타케시와는 달리 하나코는 뛰어난 생존자이다.

  이 강인한 여성 캐릭터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 갱단의 세력 다툼을 이용한다. 오시마 나기사는 갱단에게 학대당하는 매춘 여성들과 대비되는 하나코의 모습을 보여준다. 매혈 사무소를 손에 넣으려는 퇴역 군인과 갱단 리더에 맞서고, 생존을 위한 폭력과 살인도 용인한다. 하나코는 자신이 가진 성적 매력과 두뇌로 치열하게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 물불 안가리는 밑바닥의 여성 전사는 그 무엇에도 지지 않는다. 결국 신의 갱단이 전멸하고, 빈민가의 폭동 속에 일어난 화재로 모든 것이 불타는 상황에서도 하나코는 살아남는다.

  붉은 석양이 츠텐카쿠에 걸려 있는 풍경 속에 하나코는 화재로 스러지는 자신의 집을 떠난다. 오직 돈에 대한 욕망으로만 추동되는 하나코가 손을 붙잡고 같이 떠나는 사람은 채혈을 할 수 있는 늙은 사업 파트너이다. 하나코에게 같이 살던 아버지의 생사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가족은 해체되었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은 자신의 유사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갱단을 이끌어가지만, 그것은 우세한 폭력 집단에 의해 와해된다. 리더 신과 하나코에게 인간적 유대를 갈구하는 타케시의 소망은 헛된 것으로 판명된다. 돈은 그 어떤 인간적 가치 보다 우선한다. '태양의 묘지'에서 오시마 나기사는 자본주의적 욕망에 삼켜진 일본의 현실을 조롱한다.

  마스다 토시오 감독의 1958년작 '붉은 부두(Red Pier)'에서도 전후 일본 사회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감지된다. 고베 항구의 '왼손잡이 지로(이시하라 유지로 분)'는 살인을 비롯한 여러 범죄 혐의에도 증거가 없어서 노로 경관의 감시를 받고 있다. 갱단원으로 뒷골목의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 벼락같은 사랑의 감정이 찾아온다. 그 대상은 지로가 죽게 만든 마약상의 여동생 케이코이다. 영화는 지로와 케이코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면서, 지로를 둘러싼 암흑 세계의 암투를 보여준다. 시원하게 트인 미항 고베의 풍광 속에 야쿠자들과 이국적 분위기의 나이트 클럽, 매춘 호텔이 등장한다.

  케이코는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다 오빠의 죽음을 계기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로는 케이코와의 미래를 꿈꾸지만, 더러운 세계에서 벗어나 손을 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보스의 죽음을 둘러싼 내분으로 지로는 조직에서 제거되어야할 운명에 처한다. 지로에게 조직은 집과 같았고, 조직원들은 형과 동생들이었다. 그 조직의 배신은 지로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다.

  "야쿠자들에게 신의(信義) 따위가 있을 리가 있나. 다 얄팍한 속임수인 게지. 정신차려라, 지로!"

  오히려 왼손잡이 지로에게 인간적 유대를 보여주는 이는 노로 경관이다. 그는 투철한 직업적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지만, 지로가 살아온 삶에 대해 연민을 가지고 있다. 전쟁 고아로 외롭고 거친 삶을 살아온 지로는 일본 사회의 그림자 속에 서있다. 폭력 조직의 일원인 지로의 정상적인 삶에 대한 희구는 잘못된 소망과도 같다. 그는 자신을 열렬히 원하는 화류계 여성인 클럽 댄서 마미 대신 도쿄 여대생 케이코(비록 마약상의 동생이지만)의 사랑을 갈구한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진정한 '집'과 '가족'에 대한 지로의 열망은 케이코에게 투사된다. 그러나 그 꿈은 결국 좌절된다.

  그렇게 영화 '붉은 부두'와 '태양의 묘지'는 전후 일본 하층민의 삶을 보여준다. 그들이 생존을 위해 거래의 대상으로 내놓는 것은 '몸'이다. 피를 팔고 매춘을 하며, 손으로 누군가를 때리고 죽이며 거기에서 나오는 이익을 취한다. 무너진 가족, 폭력과 범죄에 대한 무감각, 물질에 대한 집요한 욕망, 배회하는 군국주의의 유령, 그 모든 것이 뒤엉켜 1950년대를 거쳐 1960년대까지 이어진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사진 출처: twitter.com   '붉은 부두'의 이시하라 유지로와 키타하라 미에. 부부인 두 사람은 함께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 '붉은 부두'와 '태양의 묘지', 두 영화는 모두 간사이 지방(고베, 오사카)을 배경으로 한다. 등장인물들이 구사하는 간사이 사투리가 영화에 독특한 지방색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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