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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21의 게시물 표시

웃음 뒤에 자리한 가슴 뻐근한 슬픔, 열대어(熱帶魚, Tropical Fish, 1995)

    *이 글에는 영화 '열대어'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학생 류즈창에게 학교는 수용소 같다. 수용소장 같은 무서운 여자 담임은 툭하면 몽둥이 체벌로 아이들을 훈육하며, 공부 못하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입버릇처럼 강조한다. 학업에 뜻이 없는 류즈창은 친구와 몰래 담배를 피우거나 틈나면 오락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류즈창과 친한 동네 꼬마 다오난이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우연히 마주친 다오난의 납치범들에게 류즈창도 잡히는 신세가 된다. 납치를 주도한 보스가 사고로 죽자, 부하 칭자이는 궁리 끝에 아이들을 자신의 고향 어촌 마을로 데려간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칭자이의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인간적으로 친해진다. 납치 사건이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가운데, 궁핍한 살림의 칭자이의 가족들은 류즈창의 몸값을 받아내 인생역전의 기회를 노린다. 과연 이 어리버리한 일가족 납치단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   '열대어(熱帶魚)'는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인 첸유순(陳玉勳) 감독의 1995년도 작품이다. 주로 상업용 광고 작업을 많이 했던 감독의 재치있고 기발한 감각은 영화 속 여러 장면에서 돋보인다. 류즈창이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상상 속 바다에서 잠수정을 타고 구해내는 장면이라든지, 칭자이 일가족의 우스꽝스러운 협박 전화를 애니메이션으로 구성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그렇다. 기본적으로 코미디의 정서를 밑바닥에 깔고 있음에도, 이 영화가 다루는 주제는 그렇게 가볍지 않다. 류즈창은 고교 입학 시험을 앞두고 있는데, 그 시험은 마치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관문처럼 여겨진다. 방송에서는 납치된 류즈창의 안위 보다도, 류즈창이 시험을 볼 수 있을 것인가를 비중있게 다룬다. 그의 아버지와 시장 후보는 방송 인터뷰에서 납치범에게 류즈창을 풀어줄 것을 호소하는데, 그 이유가 시험을 치루지 못해 '인생을 망치는' 불행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대학 입학

어느 베트남 입양 여성의 과거로의 여행, Daughter from Danang(2002)

    1975년, 미국의 베트남 철군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에 'Babylift'란 명칭의 작전이 수행된다. 그 작전을 통해 미국으로 온 베트남 고아들은 입양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이디(Heidi Bub)도 그렇게 미국으로 온 베트남 아이였다. 미국 남부, 신실한 종교심을 가진 싱글 여성의 아이로 입양된 하이디에게 성장의 과정은 그다지 순탄치 않았다. 억압적이고 냉담한 양모는 하이디에게 베트남과의 연관성을 부정하도록 가르쳤고, 하이디는 부모의 사랑이란 것을 느끼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양모와의 갈등은 급기야 하이디가 대학생이 되면서 완전한 결별로 이어진다. 결혼을 하고 두 딸의 엄마가 된 하이디는 베트남의 친모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 하이디의 친모도 딸을 찾으려고 노력하던 중에 베트남계 미국 언론인 트란의 도움으로 모녀의 상봉이 이루어진다. 게일 돌진과 빈센테 프랑코의 2002년작 다큐멘터리 '다낭에서 온 딸(Daughter from Danang)'은 불행하게 헤어진 모녀의 상봉 속에 가려진 베트남 전쟁의 깊은 상처를 조명한다.   첫 인터뷰 장면에서 관객들은 하이디의 외모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베트남 인과 백인 혼혈인 하이디의 외모는 이 여성에게 드리운 미국 현대사의 그림자를 짐작케 한다. 유색 인종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이 있는 남부에서 성장한 하이디의 정체성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실제로 KKK단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보며 자란 하이디에게 남부는 독선적인 양모와 함께 견뎌야할 삶의 토대였다. 양모와의 단절 이후, 하이디는 무조건적이고 따뜻한 애정에 대한 갈망을 상상 속의 친모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루어진 다낭에서의 상봉, 하이디는 친모 마이와 의붓 아버지, 이부(異父) 형제들을 만난다. 이 만남을 통해 비로소 관객들은 이 가족의 복잡하고 지난한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감독 게일 돌진과 빈센테 프랑코는 이 베트남 모녀의 상

라두 주드의 통찰력 있는 역사극, Aferim!(Bravo!, 2015)

    영화는 숲 속을 헤치며 말을 타고 가는 두 명의 여행자를 비춰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때는 1835년, 루마니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왈라키아 왕조가 시대적 배경이다. 대영주(Boyar로 지칭함)의 법 집행관인 코스탄딘은 영주의 명을 받고 도망 노예 집시 카르핀을 찾는 중이다. 그의 동행은 아들 이오니타. 앳된 티가 역력한 십대의 아들은 군복과 총검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하는 행동이 어설프기 짝이 없다. 도망자를 쫓는 여정은 경험많고 노련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일러주는 직업과 세상살이에 대한 교육의 시간이 된다. 가는 길에 만나는 사제, 집시, 농민, 관료들과의 만남은 당시의 루마니아 사회를 알 수 있는 역사화처럼 묘사된다. 루마니아의 감독 라두 주드(Radu Jude)의 2015년작 'Aferim!'은 관객들을 19세기의 루마니아로 안내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부분은 '집시(Roma)'와 관련되어 있다. 코스탄딘은 가는 도중에 만나는 집시 무리를 매우 가혹하게 다룬다. 그들은 말 그대로 짐승과 같은, 어쩌면 짐승 보다 못한 존재로 여겨진다. 코스탄딘은 채찍을 휘두르며 집시들을 제압하며, 그들이 채굴한 사금도 갈취한다. '사금 채취'는 집시들이 전통적으로 종사한 일이었다. 루마니아의 귀족 계급과 수도원은 그런 집시들을 노예로 두면서 그들의 노동력과 생산물을 수탈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집시란 벌레처럼 더럽고 하찮은 존재라고 가르친다. 그가 집시처럼 경멸하고 역겨워하는 또 다른 대상은 사제와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길에서 만난 사제는 '유대인'에 대한 지독한 혐오와 배척의 감정을 토로한다. 코스탄딘과 사제가 공유하는 그런 차별적 인식은 유럽 사회가 가진 반유태주의의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부자(父子)가 도망 노예를 추적하는 여정의 대부분은 숲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곳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19세기 루마니아인의 정신 세계를 반영한

부주의하고 나른한 청춘의 얼굴들, Last Summer(1969)

    아주 오래전에 EBS '세계의 명화'에서 'The Swimmer(1968)'를 방영한 적이 있다. 버트 랭카스터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독특하고 기이한 작품으로 내 기억에 남았다. 아주 가끔씩,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버트 랭카스터가 수영복 차림으로 비를 맞으며 야외 수영장을 배회하는 장면이었다. 그 시절 헐리우드에서 저런 영화도 만들 수 있다니 참 놀랍네,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은 프랭크 페리(Frank Perry)였다. 'Last Summer'는 그가 이반 헌터(Evan Hunter)의 소설을 원작으로 1969년에 만든 영화이다. 1968년, 미국 영화에 새로운 등급 시스템이 도입된다. 'MPA(Motion Picture Association) film rating system'은 기존의 검열 제도인 'Hays Code'를 대체했다. 'Last Summer'는 새롭게 만들어진 등급 시스템에서 'X 등급(Rated X; 16세 미만 관람 불가)'을 받았는데, 이는 TV 방영은 물론 일반 상영에서도 상당한 제약을 받는 등급이었다. 영화가 어떤 장면을 포함하고 있길래 그런 판정을 받았을까? 십대들의 방종하고 타락한 여름을 그린 이 영화는 오랫동안 과소평가되고 잊혀져 있었다.   영화는 부유한 이들의 여름 별장지인 Fire Island의 해변가를 배경으로 한다. 샌디(바바라 허쉬 분)는 해변에서 낚시 바늘에 목을 다친 갈매기를 발견한다. 마침 지나가던 피터(리처드 토마스 분)와 댄(브루스 데이비슨 분)이 샌디의 갈매기 치료를 돕는다. 피터와 댄은 매력적인 샌디의 호감을 사려고 애를 쓰고, 샌디는 그들을 조종하며 군림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어느 날, 해변가에서 샌디가 갈매기를 끈으로 묶어 애완 동물처럼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본 로다(캐서린 번즈 분)는 샌디를 비난한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외로움을 느끼고

가슴 찡한 성장의 여정, 이사(お引越し, Moving, 1993)

  *이 글에는 영화 '이사(お引越し)'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삼각형의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는 세 명의 가족들을 비춰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초록색의 이 독특한 모양의 식탁 가운데에는 13살 딸 렌코, 엄마와 아빠가 자리하고 있다. 뭔가 심드렁해 보이는 부부는 서로 엇나가는 대화를 이어가고, 딸은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려고 애를 쓴다. 가족은 이사를 앞두고 있다. 드디어 이사한 새로운 집에서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쌓아가길 기다리는 렌코에게 엄마는 아빠가 주고 간 이혼 서류를 보여준다. 그렇게 다정한 아빠가 이제 더이상 집에 오지 않는다니, 렌코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왜 엄마 아빠가 따로 살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렌코는 어떻게 해서든 아빠의 마음을 되돌려 예전처럼 같이 살고 싶다. 그러나 어른들의 세계는 렌코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비와 호수로의 가족 여행을 몰래 계획한 렌코, 렌코의 부모는 다시 합칠 수 있을까?   소마이 신지(相米慎二) 감독의 1993년작 '이사(お引越し, Moving)'는 부모의 결별을 마주한 소녀의 성장담을 그린다. 영화는 히코 타나카(ひこ・田中)가 1990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 속 렌코를 연기한 타바타 토모코는 8200명이 넘는 오디션 지원자들을 제치고 발탁되었다. 요정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게이샤로 가업을 이을 운명이었던 소녀는 그렇게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영화는 타바타 토모코의 연기에 큰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 신인인 어린 소녀의 연기 지도가 소마이 신지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닛카츠(日活) 영화사의 조감독 시절에 신인 여배우들의 연기를 지도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소마이 신지는 타바타 토모코를 렌코로 자연스럽게 만들어 버린다.   부모의 별거는 렌코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렌코가 보여주는 모습은 마치 죽음을 앞둔 인간이 보여주는 5단계의 심리적 변화와

장 피에르 멜빌의 독특한 전쟁 영화, 바다의 침묵(Le Silence de la mer, The Silence of the Sea, 1949)

    미워해야할 이유가 있는 사람을 미워하는 일은 쉽다. 나치 점령기의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 조카딸과 함께 사는 시골 노신사는 자신의 집을 독일군 장교의 숙소로 징발당한다. 뜻하지 않게 적과 동거하게 된 노인과 조카는 독일군 중위 베르너에게 한결같은 침묵으로 대한다. 그들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베르너는 매일 저녁, 노인과 조카가 있는 거실 벽난로에서 대화가 아닌 독백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노인과 조카의 단단한 침묵에 어느새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미워하는 점령군 장교가 매우 예의바른 사람이며, 예술적인 소양을 지닌 교양인임을 알게 된다. 비록 말로 이루어지는 그 어떤 대화도 없지만, 그들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의 교류가 생겨난다.   장 피에르 멜빌(Jean-Pierre Melville)의 데뷔작 '바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Sea, 1949)'은 1942년에 출간된 작가 베르코스(Vercors)의 동명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멜빌은 자신이 첫 장편으로 반전 문학 작품을 선택했다. 이 짧은 소설에는 그 어떤 거친 폭력이나 살상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노인과 조카의 내면 묘사와 독일군 장교의 혼잣말이 잔잔하게 펼쳐질 뿐이다. 멜빌은 소설의 그 단조로움과 고요함을 오로지 영상과 소리에 의지해서 풀어나간다. 영화의 서사 대부분이 노인의 집 거실 벽난로를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실제 작가의 집에서 이루어진 촬영은 그 비좁은 거실 공간을 다채롭게 제시하고 활용한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교의 발소리, 그가 거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벽난로의 장작을 뒤적거리는 소리, 등장 인물들의 손의 움직임, 그 모든 것이 영화의 느슨한 서사를 메꾼다. 오히려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사용된 영화 음악이 귀에 거슬리게 들린다.   작곡을 전공했다는 베르너는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자신의 열렬한 애정을 고백한다. 그는 자신의 정

가족 소동극에 숨겨진 소련의 사회 문제, 사랑과 비둘기(Любовь и голуби, Love and Pigeons, 1984)

    영화 '사랑과 비둘기(Love and Pigeons, 1984)'는 감독 블라디미르 멘쇼프(Vladimir Menshov)가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1980)'로 대중적인 성공을 얻은 뒤에 찍은 작품이다. 블라디미르 구르킨의 희곡을 각색한 이 영화 또한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개봉 당시 4450만명의 관객이 영화를 보았으며, 이 영화를 아직도 기억하고 다시 보는 러시아 관객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길래 그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을까? 의외로 영화의 줄거리는 지극히 평범하다.   강이 흐르는 시골 마을에서 목재 노동자로 일하는 바실리는 비둘기 사육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아내 몰래 생활비를 빼내어 비둘기를 사들이는 그에게 아내 나쟈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차분한 성격의 큰딸 류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은 아들 레오니드, 아버지를 이해하는 속 깊은 막내 올리야는 부부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이웃에는 알콜 의존증이 심한 삼촌 미챠와 그런 남편 때문에 속끓이는 숙모 슈라가 산다. 별 다를 게 없는 소소한 그들의 일상에 어느 날 일이 생긴다. 바실리는 일하다 얻는 부상 때문에 휴양지에서 쉴 수 있는 휴가를 받는데, 그곳에서 만난 라이사와 눈이 맞는다. 비둘기와 가족 밖에 모르던 바실리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라이사의 집에 머무른다. 바실리의 아내 나쟈는 상심해서 드러눕고, 자식들은 아버지의 행동에 상처받는다. 부유한 라이사의 생활 방식에 맞추지 못하던 바실리는 가족이 그리워진다. 다시 집에 돌아온 바실리. 과연 아내와 자식들은 그를 받아줄까?   바람난 남편의 귀환을 둘러싼 가족 소동극은 겉보기엔 아주 흔하고 진부한 이야기 같다.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나쟈는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비탄에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걸 연기하는 배우 니나 도로시나(Nina Doroshina)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나쟈의 상황이 너무나 심각한데,

리나 베르트뮬러의 강렬한 영화적 선언, 바실리스크(I basilischi, The Lizards, 1963)

  *이 글에는 영화 '바실리스크(I basilischi)'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61년, 리나 베르트뮬러( Lina Wertmüller )는 이탈리아 남부를 여행하는 길에 아버지의 고향 Palazzo San Gervasio에 들른다. 남부의 고즈넉한 풍광과 그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베르트뮬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것은 곧 시나리오 작업으로 이어졌다. 일주일 만에 쓰여진 시나리오는 곧 영화가 되었다. '바실리스크(I basilischi, The Lizards, 1963)'는 이탈리아 남부의 낙후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세 젊은이의 이야기를 담는다. 러닝 타임 84분의 그리 길지 않은 이 영화는 시골 청년들의 시시껄렁한 잡담과 일상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후일 이 감독의 영화 작업을 이해할 수 있는 여러 단서들을 내포한다. '귀부인과 승무원(1974)'에서 보여주었던 성과 계급에 대한 전복적 정치학은 베르트뮬러가 자신의 영화에서 끊임없이 성찰했던 주제이다. 베르트뮬러의 데뷔작 '바실리스크'에는 이탈리아 남부 주민의 정서, 토지 개혁을 둘러싼 계급간의 갈등, 삶의 근원으로서의 성에 대한 감독의 관점이 들어가 있다.   영화는 한낮의 낮잠(siesta)에 빠진 시골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모두들 자느라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이 마을의 나른하고 한가로운 풍경은 그들이 낮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별다를 게 없다. 프란체스코는 마음에 둔 아가씨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구애하지만, 그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세 젊은이 가운데 가장 나이들어 보이는 세르지오는 지나가는 여자의 몸매를 훑어보거나 밤의 홍등가를 찾는 것으로 자신의 욕구를 해결한다. 베르트뮬러가 묘사하는 시골 청년들의 성에 대한 이런 관심은 건전한 것이라기 보다는 억눌린 현실에서의 유일한 출구처럼 보인다. 그들은 모두 지겹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자신들

사막에서 길을 잃다, Another Sky(1954)

    * 이 글에는 'Another Sky'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좋은 교육을 받았다. 옥스포드에서 영문학을 배우던 그는 학위를 따려면 중세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말을 듣고 학교를 떠났다. 재학 중에 그는 훗날 영국 프리 시네마(Free cinema)의 주역으로 떠오른 카렐 라이츠, 린제이 앤더슨과 친구가 되었다. 영화에 대한 흥미는 곧 직업적 경력으로 이어졌다. 편집과 시나리오 작업을 했고, 자신의 영화도 찍었다. 어렵게 찍은 영화는 개봉도 하지 못했다. 그의 영화 경력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이유없는 반항(1955)'으로 유명한 감독 니콜라스 레이의 개인 비서가 되었고, 레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도 맡았다. 동성애자로서 그는 레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자신이 보고 들은 할리우드 배우들의 개인사에 관심을 가지고 전기 작가로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개빈 램버트(Gavin Lambert), 'Another Sky(1954)'는 그가 남긴 유일한 영화이다.   젊고 단아한 영국 여성 로즈는 부유한 중년 여성 셀레나의 비서로 일하기 위해서 낯선 나라 모로코로 왔다. 로즈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롭다. 셀레나가 잘생긴 한량 마이클을 애인으로 두고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모습에도 익숙해진다. 로즈는 나이든 현지인 통역 아흐메드의 안내를 받아 마라케시 곳곳을 탐방하며 이국 생활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 어느 날, 셀레나와 마이클을 따라 간 파티에서 로즈는 젊은 악사 타예프에게 반한다. 아흐메드의 도움을 받아 타예프와의 밀회를 이어가던 로즈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이별을 결심한다. 로즈는 타예프에게 이별을 고하려고 하지만, 타예프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타예프를 꼭 만나야 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로즈는 셀레나의 돈까지 훔쳐서 타예프를 찾아 나선다.   이 영화에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모로코의 풍광과 현지인들의 모습이다. 마치 민속지 다큐멘터

광기와 환상의 삶을 택한 남자, 엔리코 4세(Enrico IV, 1984)

  *이 글에는 영화 '엔리코 4세'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는 연극학 전공자들에게 매우 친숙한 이름이다. 희곡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에는 작가가 창조한 희곡 속 등장인물들을 두고 모델이 된 실제 인물들의 싸움이 리허설 장면에서 펼쳐진다. 현실과 허구를 오가는 이 독특한 희곡은 피란델로의 대표작으로 그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진짜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그가 1921년에 쓴 희곡 '엔리코 4세'에도 그런 질문이 동일하게 반복된다. 여기에, 피란델로는 '광기'라는 요소를 추가한다. 작가는 자신이 역사 속 인물 '엔리코 4세'라고 믿는 광인의 이야기를 통해 정상과 비정상, 현실과 환상, 기억과 정체성에 대해 다룬다. 이탈리아 감독 마르코 벨로키오(Marco Bellocchio)의 1984년작, '엔리코 4세(Enrico IV)'는 피란델로의 희곡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차에 탄 이들이 한적한 시골에 자리한 성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성에는 20년전의 낙마 사고로 정신이상이 된 놀리 후작의 삼촌이 살고 있다. 자신이 '엔리코 4세'라고 믿는 남자는 부유한 여동생의 경제적 지원으로 미친 왕 노릇을 하며 살 수 있었다. 그에게는 시종들과 광대도 있다. 왕관을 쓰고 왕의 복장을 한 엔리코 4세와 중세의 옷을 입은 시종들과 광대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놀리 후작은 삼촌의 정신병을 낫도록 하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실행하기 위해 그곳에 왔다. 정신과 의사, 엔리코 4세의 젊은 시절의 친구 벨 크레디, 젊은 시절 엔리코 4세가 짝사랑했던 마틸다, 마틸다의 딸 프리다가 광인의 치료를 위한 사이코 드라마의 배역을 연기한다. 엔리코 4세에게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치료의 핵심이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의 배역을 맡는다.

프리 코드 시대(Pre-Code Era)의 두 영화에 나타난 결혼 제도와 여성: 'What Price Hollywood?(1932)'와 'Millie(1931)'의 경우

  *이 글에는 'What Price Hollywood?(1932)'와 'Millie(1931)'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이디 가가 주연의 영화 '스타 탄생(A Star Is Born, 2018)'은 꽤 오랜 기원을 가지고 있다. 1976년에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주연을 맡은 영화가 있고, 1954년 영화에서는 조지 큐커 감독이 주디 갈란드와 함께 작업했다. 그 이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윌리엄 A. 웰먼 감독의 1937년작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 영감을 준, 어떤 면에서 이야기의 원형인 작품은 조지 큐커 감독의 'What Price Hollywood?(1932)'이다. 이 영화는 'Hays Code'라고 불리는 미국의 검열 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이전의 '프리 코드 시절(Pre-Code Era, 1930-1934)에 만들어졌다.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시스템과 스타 산업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이 독특하고 매력적인 작품은 이후에 만들어진 '스타 탄생'의 원석과도 같다.   배우 지망생 메리는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유명 감독 맥스를 알게 된다. 그는 스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할리우드의 유력 인사로 메리가 영화계로 들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 재능있는 감독이지만 늘 술어 절어 사는 그는 메리의 빛나는 배우 경력을 함께 한다. 메리는 잘생긴 바람둥이 폴로 선수 로니와 결혼한다. 바쁘게 정신없이 돌아가는 아내의 배우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는 얼마 안가 이혼을 택한다. 한편 술 문제로 경력에 손상을 입은 맥스는 어려움에 처한다. 메리는 맥스를 따뜻하게 보듬지만, 맥스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세상을 뜬다. 그 일로 메리는 스캔들 속에 은퇴를 택한다. 프랑스의 시골에서 은거하던 메리에게 남편 로니가 찾아오면서 영화는 끝난다.   조지 큐커 감독은 'What Price Hollywood

루이 말이 회고하는 그해 5월, 밀루의 어떤 여름(Milou en mai, May Fools, 1990)

  *이 글에는 '밀루의 어떤 여름'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 해외의 영화 블로거들 글을 보게 될 때가 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특이한 블로거가 있었는데, 고양이가 나오는 영화만을 리뷰하는 이였다. 애묘가임이 분명한 그는 리뷰 글에 올리는 사진도 오직 영화 속 고양이만을 캡쳐해서 올린다. '밀루의 어떤 여름'에도 고양이가 나온다. 주인공 밀루(미셸 피콜리 분)의 노모 뷰작 부인이 아끼던 검정 고양이는 의외로 영화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 고양이야말로 주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유일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여주인의 장례식을 앞두고 모인 가족들은 그다지 슬퍼보이지 않는다. 집안의 변호사가 도착해서 유언장을 낭독하기도 전에 노모가 남긴 재산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두고 신경전을 벌인다. 파리에서 일어난 1968년 5월의 시위는 남부의 한적한 시골 저택에도 영향을 미친다. 장례업자들의 파업으로 여주인의 시신은 기약없이 집안에 머무르게 된다. 격화되는 시위 소식과 그로 인한 두려움으로 이 부르주아 가족은 혼란에 빠지고, 마침내 숨겨진 갈등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루이 말 감독의 1990년작 '밀루의 어떤 여름(Milou en mai, May Fools)'은 프랑스 68 혁명을 배경으로 장례식을 앞둔 부르주아 가족의 기이한 풍경을 그린다. 대저택과 넓은 땅을 소유한 밀루의 노모는 이 집안의 실질적인 여가장이다. 밀루는 그런 노모의 그늘에서 유유자적하며 지내다가,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으로 살던 집에서 나가야할 판이다. 동생 조르주, 교통 사고로 죽은 여동생의 딸 클레르와 함께 저택과 땅을 매각해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언장을 뜯고 보니 나눌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하녀로 일했던 아델도 엄연한 상속자의 지위를 차지한다. 할머니의 보석을 몰래 꿍치는 밀루의 딸 카미유, 혁명을 옹호하며 열변을 펼치는 대학생 아들, 레즈비언으로 애인을 데려온 조카 클레르,

생각하는 어느 경찰의 초상, Poliţist, adjectiv(Police, Adjective, 2009)

    오래 전에 MBC에서 방영한 '경찰청 사람들'이란 프로그램이 있다. 1993년부터 1999년 초까지 방영되었던 이 프로그램은 실제 사건을 극화로 재구성해서 보여준다. '경찰청 사람들'이 독특했던 점은 요새 방영되고 있는 '이것은 실화다' 같은 재연 프로와는 달리, 실제 '경찰'들이 출연한다는 점이었다. 약간은 촌스럽고 강렬한 인트로 화면과 음악, 어색하지만 때론 좋은 연기력을 보여준 진짜 경찰들, 다양하고 극적인 실제 사건 이야기가 있어서 프로그램은 꽤나 인기가 있었다. 루마니아의 감독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Corneliu Porumboiu)의 2009년작 '경찰, 형용사 (Police, Adjective) '에도 경찰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2시간 가까운 러닝 타임 동안 긴박한 추격전도, 범인 검거도 없다. 통쾌하고 짜릿한 형사물을 생각하고 이 영화를 보려는 이들은 지루한 롱테이크와 그 어떤 별 다른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에 실망할 것이다. 보면서 무언가를 먹고 있다면 그걸 영화가 나오는 화면에 내던져 버릴지도 모른다.   올해 마흔 다섯인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감독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루마니아 국립 연극 영화학교에 들어가서 영화를 공부했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Vaslui를 배경으로 영화들을 찍었는데, 그 이유는 그곳이 그에게 영화를 찍기에 가장 친숙하고 알맞은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Cineuropa와의 인터뷰 참조). 역시 '경찰, 형용사'도 Vaslui에서 찍었다. 작은 도시의 경찰 크리스티는 잠복 근무 중이다. 대마초를 피우는 고등학생 세 명을 감시한다. 그의 일과는 잠복과 추적, 경찰서로 돌아와 근무 일지 쓰기, 퇴근 후 집으로 이어진다. 신혼인 그는 아내와 같이 밥 먹을 시간도 없다. 지방 검사와 서장은 고등학생들을 빨리 검거해 버리라고 닥달을 하지만, 크리스티는 체포를 주저한다. 루마니아에서 대마 소지와

분쟁 지역의 영화가 갖추어야할 덕목, 레몬 트리(Etz Limon, Lemon tree, 2008)

    2004년, 이스라엘의 서안 지구(West Bank)에 살고 있던 72살의 노파는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샤울 모파즈(Shaul Mofaz)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장관의 집과 25미터 거리에 있는 노파의 과수원을 군부에서 없애 버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노파는 사는 곳이 맘에 안들면 장관이 이사가면 될 것을, 먼저 살고 있는 자신의 땅 근처에 이사와서 땅을 빼앗으려 한다고 말했다. 과수원에 심어진 오렌지와 레몬 나무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전부라고도 덧붙였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안보상의 이유로 나무들을 베는 것은 정당하다고 판결을 내렸다(출처 Al Jazeera). 이스라엘의 감독 에란 리클리스(Eran Riklis)는 그 사건에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영화 '레몬 트리(Etz Limon, Lemon tree, 2008)'를 만들었다.   영화 속 과부 살마가 제기한 소송 변론에서 변호사는 나무를 베는 것이 성서에도 어긋난다는 말을 한다. 그 부분이 흥미로운데, 실제로 구약 성서의 신명기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한 성을 함락시키려고 포위 공격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리더라도, 거기에 있는 나무를 도끼로 마구 찍어 내지는 말라. 나무에 여는 것을 따 먹어야 할 터인데 찍어 내면 되겠느냐? 들에 서 있는 나무가 사람처럼 너희를 피하여 성 안으로 들어 갈 리 없지 않느냐?" (공동 번역 성서 신명기 20:19)   과연 성서가 살마의 목숨과도 같은 레몬 나무들을 보호해 줄까? 개인의 재산권은 가볍게 깔아뭉개고 나무를 베어버리려는 군부에 대항해 힘겨운 싸움을 하는 살마. 마을의 촌장은 이길 수 없으니 포기하라고 하면서도 팔레스타인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보상금 따위는 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팔레스타인 당국은 과부의 레몬 나무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이 없다. 결혼한 딸과 미국에 가서 정착한 아들도 심드렁하기는 마찬가지. 사위가 소개해준 젊은 변호사 지아드만이 살마의 싸움을 지지하고 격려해 준다.  

사무라이의 길과 인간의 길, 어용금(御用金, Goyokin, 1969)

    "마고베이, 죽음을 각오해라!"   사무라이는 한 무리의 자객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고향 사바이를 떠나 에도에 머물던 그는 3년 만에 사바이 땅을 밟은 참이었다. 그는 에도에서도 자신을 죽이려는 자객들을 물리쳤다.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도대체 그는 무슨 이유로 그 땅을 떠났으며 왜 다시 돌아올 결심을 한 걸까? 고샤 히데오 감독의 '어용금(御用金, 1969)'은 1830년대를 배경으로 양심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가길 택한 어느 사무라이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어부의 딸 오리하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돈을 벌러 도시로 떠났던 오리하는 폐허로 변한 마을을 발견한다. 그 어떤 인적도 없이 오직 까마귀 떼만이 을씨년스럽게 울어댄다. 가족도, 결혼을 하기로 한 정혼자도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3년의 시간이 지났다. 오리하는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는 청년과 주사위 도박으로 도박꾼들의 돈을 뜯어내며 살아간다. 속임수가 들통나서 쫓기는 오리하를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의 마고베이가 구해준다. 그 두 사람은 3년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인생이 바뀌었다.   사건의 시작은 막부의 무지막지한 조공 요구였다. 번의 가신 타테와키는 막부의 금 수송선을 탈취한다. 그 일에 동원된 어부들과 마을 주민들은 입막음을 위해 몰살당했다. 마고베이는 타테와키에게 부당한 일이라며 항의하지만, 타테와키는 번의 생존이 달린 일이라며 정당화한다. 낭인이 되어서 떠도는 것을 택한 마고베이. 그는 또 다시 번에서 벌일 어용금 탈취극을 막으려고 고향에 돌아온다. 더이상의 무고한 죽음을 그는 용납할 수 없다.   사무라이는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주군의 안녕을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해낸다. 마고베이는 어용금을 탈취하는 것까지는 이해하지만, 아무 죄없는 어민들을 잔혹하게 죽인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타테와키는 마고베이와는 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그에게 무사도란 주

어느 프랑스인의 미국 만화경(萬華鏡), America As Seen by a Frenchman(1960)

    '도미(渡美)하다'라는 단어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희망과 성공을 상징하는 결말로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오래 전 드라마라 제목이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시골 마을의 돈푼깨나 있는 여자는 자신의 아들 이름을 그 '도미'로 지었다. 반드시 미국에 가서 성공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다. 주인공이 미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공항 장면은 그냥 그 자체로 장밋빛 미래를 뜻했다. 1980년대까지도 한국인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유효했다. 그런데 1960년, 어느 프랑스인에게도 미국은 신기하고 놀라운 나라였던 모양이다. 프랑수아 라이헨바흐(François Reichenbach) 감독이 미국을 둘러 보고 찍은 다큐멘터리 'America As Seen by a Frenchman'은 당시 미국의 다양한 사람들과 풍광을 담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프랑스인의 미국 탐방기는 미국의 엄청난 소비주의에서부터 시작한다. 상업용 광고 사진을 찍는 사진 작가와 모델들의 작업 과정을 비롯해 곳곳에 넘쳐나는 관광객들이 화면을 장식한다. 이 나라는 그 무엇이든 스케일 면에서 보통을 뛰어넘는다. 꼬마 아이가 주문한 밥솥 크기의 그릇에 담겨 나온 아이스크림(녀석은 그걸 혼자서 맛있게 다 먹는다), 수박 먹기 대회의 아이들, 엄청나게 큰 피자, 너른 마당을 채운 바비큐 화덕... 먹거리에서부터 풍요로움이 넘치는 미국을 보여준다. 먹을 거리 구경은 뭐 별 것도 아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는 볼 거리도 넘쳐난다. 항공 모함에서 이착륙하는 전투기들은 세계의 경찰이라는 미국의 위상을 부각시킨다. 도처에서 벌어지는 축제와 군악대 행진은 당시의 미국에 '황금기(golden age)'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여성과 남성이 번갈아 가며 들려주는 내레이션은 결코 정적이거나 무미 건조하지 않다. 그들은 놀라움과 찬탄을 담은 목소리로 미국을 이야기 한다. 그런 내레이션과 함께 쓰인 다양한 음악들은 이

인생이란 그런 거야,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 1960)

    식어버린 커피와 김빠진 맥주. 흘러간 옛 영화를 보는 것이 가끔은 풍미를 잃은 커피와 맥주를 들이키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카렐 라이츠(Karel Reisz) 감독의 데뷔작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 1960)'을 보면서 느낀 감정이 그러했다. 이 영화에서 카렐 라이츠는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영국의 새로운 영화 사조 '프리 시네마(Free Cinema)'의 주역으로서 현실에 천착하는 사실주의와 영화의 결합을 보여준다. 이른바 '싱크대 사실주의(Kitchen Sink Realism, 표현주의 화가 John Bratby가 주방 싱크대, 쓰레기통과 같은 일상적 소재로 그린 그림에서 유래)'의 영향은 당시 영국의 문화 영역 전반을 아우른다. 그것은 하층 노동자 계급의 실제적 삶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성과 낙태, 범죄에 대한 소재까지 다루었다.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은 어떤 면에서 그 사조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자전거 공장에서 선반공(旋盤工)으로 일하는 청년 아서는 고된 노동을 주말의 여흥과 음주로 달랜다. 그는 직장 동료의 아내 브렌다와 불장난 같은 밀회를 이어가고 있다. 우연히 알게 된 도린과 진지한 연애를 시작하지만, 아서는 결혼 생각은 하고 싶지가 않다. 그 즈음, 브렌다는 임신 사실을 알리고 아서는 낙태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아서의 뜻대로 되어가지 않는다. 브렌다의 낙태는 여의칠 않고, 아서와의 관계를 알게 된 남편의 군인 동생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고된 육체 노동으로 부모와 자신의 생계를 겨우 해결하는 삶, 결혼은 멀고 답답하게만 느껴지고 그렇다고 별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서의 청춘에 볕들 날은 있는 걸까?   혈기왕성한 이십대의 청년 아서에게 현실의 모든 것은 불만족스럽다. 그가 하는 공장일은 위험하고 고된 것이다. 기계에 손이 끼여서

피와 폭력의 기억이 있는 땅에서, 광란의 오후(One False Move, 1992)

    *이 글에는 영화 '광란의 오후(One False Move)'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약간 들떠있다. 아칸소 주 스타 시티라는 작은 시골 마을의 경찰 데일 딕슨은 LA 경찰국으로부터 마약상들을 잔인하게 죽인 3인조 강도가 자신의 마을에 들를 수 있다는 연락을 받는다. 매일의 일상에서 별 일이라고 해봐야 술 취한 남자가 집 문짝을 도끼로 부수는 걸 말리는 정도인 딕슨에게 그것은 진짜 경찰 업무를 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진다. LA에서 파견된 경찰 콜과 맥필리와 함께 딕슨은 범죄자들을 기다린다. 이 마을 출신의 환타지아와 애인 레이, 뛰어난 지능을 가진 냉혈한 플루토는 마약상들에게서 탈취한 마약을 거래하기 위해 휴스턴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들이 기대한 거래는 결렬되고, 환타지아는 고향집에 있는 어린 아들을 보기 위해 이탈한다. 레이와 플루토는 환타지아를 찾기 위해 스타 시티로 향하고, 어리버리해 보이는 시골 경찰 딕슨에게 그렇게 위기의 시간이 다가온다.   칼 프랭클린(Carl Franklin) 감독의 '광란의 오후(One False Move, 1992)'는 잔혹한 살인 장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불안하고 흥분하기 쉬운 레이(빌리 밥 손튼 분)와는 달리 플루토(마이클 비치 분)는 뛰어난 두뇌와 침착성으로 서슴없이 마약상들을 죽이고 마약을 탈취한다. 이 장면을 보는 것은 꽤나 곤혹스럽다. Pluto(그리스 신화에서 저승의 신 Hades의 영어식 명칭)라는 이름처럼 그는 자신에게 방해되는 것은 칼을 사용해 무엇이든 저승으로 보낸다.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냉혹한 살인마로 실질적인 강도단의 리더인 그는 흑인이다.     이 영화에서 '인종'이란 요소는 매우 중요하고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레이의 부주의하고 다혈질적인 성향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것도 플루토이다. 마약에 절은, 팔에는 지저분한 문신으로 도배한 레이는 전형적인 백인 루저의 모습을 보여준다. 레이의 흑인 애인

라리사 셰프티코의 봉인된 영화적 숨결, 상승(Восхождение, The Ascent, 1977)

  *이 글에는 영화 '상승(The Ascent, 1977)'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서 강행되었다. 혹한의 벨라루시 무롬(Murom)에서의 촬영 기간 동안 감독과 제작진들은 추위 때문에 동상에 시달렸다. 배우들이 촬영을 위해 입은 옷은 한겨울의 칼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감독은 배우들 보다 옷을 껴입지 않았고, 허약해진 체력을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버텼다. 그 영화는 감독에게 무척 소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는 촬영 허가가 나기까지 무려 4년에 이르는 시간이 걸렸다. 그가 이전에 찍은 영화들은 검열 당국의 전적인 비호감을 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동떨어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렵게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었지만, 촬영 내내 감독은 검열을 강제하는 힘들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1977년에 소련의 여성 영화 감독 라리사 셰프티코(Larisa Shepitko)가 만든 '상승(Восхождение, The Ascent)'은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상승'은 2차 대전의 동부 전선, 독소 전쟁의 격전지였던 벨라루시의 겨울을 배경으로 한다. 독일군에 밀려 퇴각하는 파르티잔들의 상태는 처참하다. 추위과 부상, 굶주림에 시달리는 부대원들과 민간인들은 절멸의 위기에 처한다. 두 명의 병사가 근처 민가에서 먹을 것을 가져올 임무를 부여받는다. 콜야와 소트니코프가 길을 나선다. 겨우 찾아낸 마을 촌장의 집에서 양 한 마리를 받아낸 그들은 돌아오는 길에 독일군의 습격을 받는다. 총상을 입은 소트니코프는 포로로 끌려가는 대신 자결을 택하려 하지만, 콜야의 저지로 목숨을 건진다. 도망친 그들은 아이들만 있는 민가에 숨어든다. 남편을 독일군에 잃은 세 아이들의 엄마 돔치카는 내키지 않지만 그들을 숨겨준다. 그러나 독일군의 수색으로 두 병사는 체포되고, 돔치카도 첩자라며 체포된다. 독일군 본부로 이송된 그들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운 현실이 기다린다.   셰

영국 필름 느와르의 독특한 변용, 일요일에는 언제나 비가 내린다(It Always Rains on Sunday, 1947)

      필름 느와르(Film noir)를 장르로 볼 것이냐, 스타일의 한 유형으로 볼 것이냐에 대해 아직도 영화학자들 사이의 의견은 엇갈린다. 사실 필름 느와르의 본질적 요소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이냐도 쉽지 않은 문제이다. 대체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이 있다면, 범죄와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탐구, 비정형적인 내러티브와 비극적 결말, 촬영 기법에서 두드러지는 명암 대비,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인물들(팜므 파탈을 포함해)이 등장하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일반적 범주에서 하드보일드(hard-boiled) 추리 소설이 초창기 필름 느와르의 원천이 되었던 것도 그런 요소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1947년에 영국의 일링 스튜디오(Ealing Studios)에서 제작한 로버트 해머(Robert Hamer) 감독의 '일요일에는 언제나 비가 내린다( It Always Rains on Sunday)'도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필름 느와르에 속한다. 영화는 런던 동부의 Bethnal Green을 배경으로 범죄자의 탈주를 둘러싼 일련의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 내내 비가 내리는 풍경이지만, 영화는 결코 스산하거나 어둡지 않다. 가족 멜로 드라마의 외양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시종일관 유지되는 긴장과 스릴은 소시민의 평범한 일상과 결합해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로즈는 두 명의 십대 딸을 둔 중년 남자와 결혼해서 자신의 아들을 두었다. 유순하고 착한 둘째 의붓딸 도리스와는 달리 첫째 딸 바이는 사사건건 로즈와 부딪힌다. 자신 보다 15살 연상인 남편 에드워드는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팍팍한 하층민의 삶은 로즈를 지치게 만든다. 비가 내리는 일요일 아침, 남편이 읽고 있던 신문에는 탈옥수 토미 스완의 기사가 실린다. 10년 전, 토미와 로즈는 연인 사이였다. 경찰들은 토미를 잡기 위해 탐문 수사를 진행하고, 그 와중에 토미는 로즈의 집에 숨어든다. 로즈는 가족 모두가 외출한 사이 부부의 침실에서 토미를 쉬게 해주지만, 수시로 드나드는 가

필름 느와르에 나타난 이국성과 식민지주의, 편지(The Letter, 1940)

  *이 글에는 영화 '편지(The Letter, 1940)'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26년, 영국의 작가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은 말레이시아 여행을 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단편들을 모아 출간한다. '편지(The Letter)'는 바로 그 단편집에 실려 있었던 작품이다. 그는 싱가포르의 한 변호사로부터 1911년에 있었던 악명높은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 주석 광산 책임자의 아내가 관리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이었다. 여자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곧 사면되었다. 서머싯 몸은 그 실화를 그대로 따왔다. 그가 한 것은 거기에 '편지'라는 소재를 추가한 것이다. 그 단편 소설은 인기가 있었고, 작가는 그것을 희곡으로 다시 썼다. 1929년에 헐리우드에서 처음으로 영화화되었고,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1940년에 베티 데이비스를 주연으로 같은 제목의 영화를 찍었다.   영화는 충격적인 첫 장면으로 시작한다. 열대 나무 숲 사이에 자리한 저택에서 별안간 총소리가 이어진다. 총에 맞은 남자가 계단을 굴러 넘어지는데, 뒤따라 나온 여자는 남자가 쓰러진 뒤에도 총격을 가한다. 여자가 쏜 총알은 한 발이 아닌, 모두 여섯 발이었다. 침착하고 담담하게 집으로 들어간 그 여자, 레슬리는 집사에게 경찰에 사건을 신고하라고 말한다. 레슬리는 체포되고, 남편 로버트는 부부와 친분이 있는 변호사 조이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레슬리는 자신을 범하려던 해먼드에게 맞서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진술한다. 그 주장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조이스에게 중국인 비서 옹은 레슬리에게 불리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고 귀뜸한다. 죽은 해먼드의 부인이 레슬리가 해먼드에게 와달라고 쓴 편지를 갖고 있고, 그것을 건네주는 댓가는 만 달러라는 것. 조이스는 로버트를 설득해 편지를 획득할 돈을 타내고, 조이스와 동행한 레슬리는 해먼드 부인으로부터 편

방관자의 기억 속으로, 승객(Pasażerka, Passenger, 1963)

    남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촬영 중이었다. 원래는 40분 정도로 찍으려 했던 대본은 1시간 분량으로 늘어났다. 유대인 강제 수용소의 조사 자료들이 쌓여갔고, 영화 촬영은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이미 찍어 놓은 필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폐기하기도 했다. 수용소 장교 숙소에 머물면서 촬영했던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트럭과 정면 충돌한다. 마흔 살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63년, 그의 동료 감독 비톨트 레시에비츠가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영화를 최종 편집하고 완성한다. 안제이 뭉크(Andrzej Munk) 감독의 유고작 '승객(Pasażerka, Passenger)'은 그렇게 관객과 만나게 되었다.   리자는 남편과 함께 크루즈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중간 기착지 항구에서 자신이 예전에 알던 여자와 흡사한 외모의 승객이 타는 것을 보고 리자는 놀라서 얼어붙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나치 친위대 감독관으로 복무했던 리자는 수감자 마르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리자는 남편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들려준다. 고통스런 과거로의 여행은 다음 기착지에서 중단된다. 마르타와 닮은 외모의 승객이 내리고, 리자는 비로소 안도한다.   폴란드의 작가 조피아 포즈미스는 1959년에 라디오 방송 드라마 대본으로 '45번 칸의 승객(Passenger from Cabin Number 45)'을 썼다. 포즈미스는 독일에 항거한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종전과 함께 풀려났다. 아우슈비츠로 이송될 때 포즈미스가 탔던 칸의 번호가 45번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쓴 라디오 드라마에 뭉크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61년에 시나리오를 썼고, 영화 제작에 착수했다. 1963년에 영화가 개봉된 것과는 별개로 원작자 포즈미스는 1962년에 이전의 라디오 대본에 이야기를 추가해 책으로 펴냈다. 소설을 바탕으로 1968년에는 소련에서 오페라 작품이

두샨 마카베예프의 첫 영화적 비상, 인간은 새가 아니다(Čovek nije tica, Man Is Not a Bird, 1965)

    두샨 마카베예프(Dušan Makavejev) 감독의 'WR: 유기체의 신비(W.R.-Misterije organizma, 1971)'를 영화사 교과서에서 글로만 보았던 적이 있다. 그 시절에는 희귀한 예술 영화 자료들은 구하기가 힘들어서, 책 속에서 영화 제목을 읽고 마치 신화 속의 황금 양털을 상상하듯 그렇게 생각만 했었다. 이제는 그 영화를 보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는데도, 영화를 보려는 마음이 나지 않는다. '저주받은 걸작', 시놉시스만 봐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영화, 아마도 'WR: 유기체의 신비'는 영화 보기의 전위적 모험을 하려는 사람에게 적합한지도 모른다. 그럼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데뷔작은 어떨까? '인간은 새가 아니다(Čovek nije tica, Man Is Not a Bird, 1965)'는 의외로 점잖다.   마치 제정 러시아 말기의 혹세무민의 상징이었던 수도승 라스푸틴을 연상케 하는 최면술사의 등장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는 관객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최면술' 공연을 하고 있는 참이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서사 구조에서 벗어나 있다. 주된 플롯이 광산 마을 보르(Bor)에 파견된 발전기 엔지니어 루딘스키와 젊은 여성 라이카의 연애담이라면, 하위 플롯으로 무식하고 천박한 공장 노동자 바르뷸로빅과 아내의 이야기가 자리한다. 거기에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촬영된 공장의 모습과 노동자들의 일상, 황량하고 건조한 광산 마을 일대의 풍경, 마을을 방문한 서커스 장면들이 중간 중간 들어가 있다. 이런 서사의 불균일성은 관객에게 낯설음과 불편함을 선사하지만, 소화못할 정도는 아니다.   1960년대를 휩쓸었던 새로운 영화 사조 누벨 바그(Nouvelle Vague)는 동유럽 국가 유고슬라비아에도 도착했고, 그것은 'Black Wave'로 탄생했다. 개인주의적인 경향, 정부에 대한 비판적 성향을 지닌 영화 창작의 흐름에 두샨 마카베예프도

1970년대 미국의 보수적 가치의 투영, 슈가랜드 특급(The Sugarland Express, 1974)

  *이 글에는 영화 '슈가랜드 특급(The Sugarland Express, 1974)'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의 미국 영화를 관통하는 소재가 있다면 아마도 '자동차'일 것이다. 몬티 헬만의 '자유의 이차선(Two-Lane Blacktop, 1971)', 조지 루카스의 '청춘 낙서(American Graffiti, 1973)'에서 차는 영화를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 시절의 자동차가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 그것이 미국인들에게 자유와 정체성 그 자체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장편 영화 데뷔작 '슈가랜드 특급(The Sugarland Express, 1974)'에도 차가 나온다. 경찰차 박람회장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기동순찰대 차량이 등장한다. 그뿐인가? 경찰을 인질로 삼은 납치범들을 취재하기 위한 방송용 차량, 그들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시민들의 차도 있다. 스필버그는 아예 중고차 판매장을 불꽃튀는 총격전의 장소로 선택했다. 이 영화에는 차가 너무 많이 나온다. 주인공이 면회하러 온 동료 죄수 부모의 고물차를 타고 감옥에서 도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의 죽음까지, 영화는 차에서 시작해 차에서 끝난다.      절도 혐의로 감옥에 있다가 풀려난 루(골디 혼 분)는 어린 아들을 아동보호국에서 데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출소를 4개월 앞둔 남편 클로비스(윌리엄 애서튼 분)를 찾아가 아이를 되찾아 와야 한다며 탈옥을 부추긴다. 차를 탈취해 경관을 인질로 잡고, 아들이 있는 슈가랜드로 향하는 이 어중띤 납치범 부부는 곧 경찰과 언론의 추적 대상이 된다. 그 와중에 보니와 클라이드의 마일드 버전 같은 납치범 부부와 인질 슬라이드 경관(마이클 삭스 분)은 마음을 터놓는 친구 사이처럼 되어버린다. 경찰 추적팀을 이끄는 온화하고 합리적인 태너 반장(벤 존슨 분)은 어떻게든 인명 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