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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찡한 성장의 여정, 이사(お引越し, Moving, 1993)

 

*이 글에는 영화 '이사(お引越し)'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삼각형의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는 세 명의 가족들을 비춰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초록색의 이 독특한 모양의 식탁 가운데에는 13살 딸 렌코, 엄마와 아빠가 자리하고 있다. 뭔가 심드렁해 보이는 부부는 서로 엇나가는 대화를 이어가고, 딸은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려고 애를 쓴다. 가족은 이사를 앞두고 있다. 드디어 이사한 새로운 집에서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쌓아가길 기다리는 렌코에게 엄마는 아빠가 주고 간 이혼 서류를 보여준다. 그렇게 다정한 아빠가 이제 더이상 집에 오지 않는다니, 렌코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왜 엄마 아빠가 따로 살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렌코는 어떻게 해서든 아빠의 마음을 되돌려 예전처럼 같이 살고 싶다. 그러나 어른들의 세계는 렌코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비와 호수로의 가족 여행을 몰래 계획한 렌코, 렌코의 부모는 다시 합칠 수 있을까?

  소마이 신지(相米慎二) 감독의 1993년작 '이사(お引越し, Moving)'는 부모의 결별을 마주한 소녀의 성장담을 그린다. 영화는 히코 타나카(ひこ・田中)가 1990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 속 렌코를 연기한 타바타 토모코는 8200명이 넘는 오디션 지원자들을 제치고 발탁되었다. 요정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게이샤로 가업을 이을 운명이었던 소녀는 그렇게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영화는 타바타 토모코의 연기에 큰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 신인인 어린 소녀의 연기 지도가 소마이 신지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닛카츠(日活) 영화사의 조감독 시절에 신인 여배우들의 연기를 지도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소마이 신지는 타바타 토모코를 렌코로 자연스럽게 만들어 버린다.

  부모의 별거는 렌코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렌코가 보여주는 모습은 마치 죽음을 앞둔 인간이 보여주는 5단계의 심리적 변화와도 비슷하다. 임종학 연구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겪는 내적인 과정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5단계로 정리했다. 렌코는 엄마가 건네준 이혼 서류를 숨기고 내어주지 않는다. 학교 친구들에게도 엄마가 아빠의 머리를 잘라주었다며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지어내 말한다(부정). 그러나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혼 가정의 급우 샐리는 렌코의 변화를 알아챈다. 아이들 사이에서 렌코는 거짓말장이가 되어버린다. 당차고 주목받는 아이에서 놀림거리가 된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기 힘든 렌코는 그 모든 원인을 부모의 탓으로 돌린다. 아빠에게 돌아와 달라고 매달리지 않는 엄마도, 딸인 자신을 생각하는 것 같지 않은 아빠도 밉다(분노).

  렌코는 적극적으로 부모의 결합을 위해 애를 쓴다(타협). 욕실에서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는 소동을 겪은 뒤로 렌코의 부모는 렌코를 위해 자주 만나기로 한다. 렌코에게는 희망적인 변화이지만, 그것이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렌코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가족 여행을 통해 부모의 화해를 끌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비와 호수를 찾은 아빠는 자신은 결혼 생활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딸에게 일러준다. 렌코는 자신의 그 어떤 시도로도 부모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한다(우울). 영화는 변화시킬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고 우울감에 빠진 렌코가 '수용'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영화의 후반부에 길고, 다소 지루하게 배치한다. 렌코는 홀로 호수 근방과 산 속을 헤맨다. 마침 열리고 있는 마츠리의 불꽃놀이와 호수에 띄워진 용선(龍船)의 장대한 풍경을 보며 렌코의 마음은 조금씩 새로운 삶의 변화에 열리기 시작한다.

  "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축하합니다)。"

  소마이 신지는 호수 위에 띄워진 불붙은 용선을 바라보며 과거의 렌코를 현재의 렌코가 끌어안는 것으로 소녀의 성장을 묘사한다. 렌코는 호수에서 몇 번이고 '축하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예기치 않게 주어진 상처를 견뎌낸 자신에게 렌코가 던지는 축복의 말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다. 렌코는 헤어질 수 밖에 없는 부모의 상황도, 그리고 아버지의 부재를 견디며 엄마와 함께 살아야하는 자신도 기꺼이 수용하게 된다. 

  여행을 마치고 교토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렌코와 엄마는 '숲속의 곰' 동요를 부른다. 훌쩍 자라버린 렌코에게 그 동요는 어딘지 모르게 어울리지 않지만, 렌코는 엄마 앞에서 모처럼 착한 딸을 '연기'한다. 엄마가 먼저 시작한 노래는 나중에 렌코의 선창을 엄마가 따라 부르게 된다. 렌코는 이제 엄마에게 마냥 기대고 바라보는 아이가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초등학생인 렌코가 어느새 교복을 입은 중학생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웃고 있다. 정지된 화면으로 포착된 그 장면은 비로소 렌코의 작은 성장의 여정이 완료되었음을 보여준다.

  교토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약간씩 서로 다른 간사이 사투리를 구사한다. 교토 출신의 타바타 토모코가 쓰는 간사이 사투리는 투박하면서도 귀엽다. 렌코의 부모를 연기한 사쿠라다 준코와 나카이 키이치의 연기도 꽤 좋다. 영화는 아이의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어른의 세계인 부부가 겪는 갈등과 어려움도 잘 묘사되어 있다. 감독 소마이 신지는 한창 때의 나이인 53세에 폐암으로 세상을 떴다. 올해 초, 일본에서는 그의 사후 20주기를 맞이해서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영화 '이사'는 소마이 신지가 가진 감독으로서의 연출 역량이 집결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보여주는 사춘기 소녀의 성장을 위한 내적 여정은 가슴 찡하면서도 흥미롭다. 과거의 자신을 끌어안으며 성장하게 된 렌코의 모습을 보며 관객은 어린 시절의 자아와 마주하고 화해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진 출처: note.com


**사진 출처: kookaimorita.livedoor.blog       감독 소마이 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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