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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22의 게시물 표시

캐네스 브래너의 안일한 성장 드라마, Belfast(2021)

    Belfast는 북아일랜드의 동쪽에 위치한 도시이다. 도시의 이름은 '강의 입구'라는 아일랜드어에서 유래했다. Kenneth Branagh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태생으로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자라났고, 9살 무렵에 그의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했다. 9살 소년 버디가 주인공인 영화 '벨파스트'에서 브래너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펼쳐놓는다. 영화는 현재의 벨파스트 발전상을 보여주는 컬러 화면에서 1969년 8월의 과거로 들어가면서 흑백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브래너의 선택은 매우 탁월하고 효과적이었다. 브래너는 흑백 화면이 실제의 현실과는 다르지만 훨씬 더 사실적으로 보이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게 촬영했다고 밝혔다(출처: ew.com과의 인터뷰). 그리고 그의 말대로 관객은 이 흑백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이 놀랍도록 생생하고 핍진성있게 다가옴을 느낀다. 그렇다면 1969년 8월, 소년 버디와 가족들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버디는 집앞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갑자기 시위대가 몰려들고 화염병과 돌덩이가 날아든다. 버디의 집을 비롯해 근처의 집들은 파괴되고 불탄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1969년 8월 12일부터 16일 사이에 북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교도 주민들과 프로테스탄트 주민들 사이에 극렬한 폭동이 발생했다. 벨파스트는 그 중심 도시였다. 1922년,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게 되었다. 이 지역에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주민들이 점차적으로 이주해 오면서 종교적,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고, 그것은 1969년을 기점으로 폭발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버디의 가족은 프로테스탄트 교도이다. 폭동 기간 동안 양측은 서로의 집과 건물을 테러의 대상으로 삼았다. 폭동은 영국군이 개입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될 수 있었다.   영화는 버디의 눈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세계와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9살 소년이 자신을 둘러싼 복잡한 세상을

서부극 속 폭력의 시대와 남성성의 문제, The Ox-Bow Incident(1942)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19세기 미국 서부에는 Gold rush뿐만 아니라 Silver Rush도 있었다. 1859년, 'Comstock Lode'로 불리는 은광맥이 네바다주 버지니아 시티에서 발견되었다. 아주 짧은 기간 융성했던 골드 러시의 끝물에서 사람들은 다시 한번 인생역전을 꿈꾸며 네바다로 몰려들었다. 엄청나게 몰려든 사람들로 네바다에는 여러 광산 도시들이 생겨났다. 열기는 18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잦아들었다. 광맥은 곧 바닥을 드러냈고, 이제 네바다 사람들은 광산업이 아닌 목축업으로 전향해서 삶의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영화 '옥스 보우 사건'은 바로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원작자 Walter Van Tilburg Clark(1909-1971)는 네바다에 위치한 가상의 마을 Bridger's Wells에서 일어난 린치 사건을 그려낸다. William Wellman 감독은 이 소설을 무척 좋아해서 영화까지 만들게 되었다.    1885년, 겨울에서 이제 막 봄으로 넘어갈 무렵의 네바다 시골 마을 Bridger's Wells. 친구 사이인 방랑자 카우보이 길 카터(헨리 폰다 분)와 아트 크로프트는 마을에 도착해 선술집을 찾는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은 최근 소도둑들의 출몰로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길과 카터는 외부인인 자신들이 괜한 의심을 받을까봐 저어한다. 그런 가운데 마을에서 존경받는 목장주 킨케이드의 살해 소식이 술집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소도둑들의 소행이라고 여긴 마을 사람들은 보안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 급하게 자경단을 꾸린다. 길과 카터는 마을 사람들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경단에 합류한다. 자경단은 마을의 초입이라고 할 수 있는 옥스 보우(소의 목에 거는 멍에와 닮은 구릉 지대에 붙인 이름)에 도착한다. 그들은 곧 그곳에서 도둑 패거리로 의심되는 세

영화로 재현된 현대 기독교 소설 장르의 변형과 이탈, Redeeming Love(2022)

  Redeeming Love(2022), D. J. Caruso   영화의 제목 'Redeeming Love' 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구속(救贖)의 사랑'이 될 것이다. 이 '구속(redeem)'이란 개념은 비기독교도에게는 낯설게 들릴 수 있다. 그것을 풀어서 표현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는 사라졌고 신의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뜻이다. 영화 제목부터가 뭔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그렇다. 이 영화는 기독교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무려 300만 부가 팔린 소설이다. 도대체 어떤 기독교 소설이길래 그런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아주 거칠고 간명하게 영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1850년대 서부 캘리포니아, 불행한 운명의 매춘부 앤젤과 그런 앤젤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농부 마이클의 이야기. 여자 주인공 이름이 천사(Angel)이고, 남자 주인공의 성씨는 무려 호세아(Hosea, 구약 성서의 예언자)이다.   이쯤 되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뭐 맹물같은 성경 이야기의 현대 버전이겠구먼, 할지도 모른다. 속단은 금물이다. 교회 사람들과 이 영화 같이 보러 갔다가는 영화관 나와서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헤어질 수 있다. 원작 소설의 작가 Francine Rivers는 기독교 소설에 화끈한 로맨스를 결합시킨다. 매춘부, 매음굴, 근친상간, 소아성애, 낙태, 폭력과 강간... 도대체 기독교 소설에 어떻게 그런 이야기들이 들어갈 수 있나 싶겠지만, 그것이 다양한 하위 장르로 분화된 현대 기독교 소설(Christian novel)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17세기 존 번연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이나 헨리크 센케비치의 '쿠오 바디스(Quo Vadis)' 는 그 장르의 먼 과거에 해당한다.   영화는 골드 러시로 흥청거리는 서부 정착촌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그 지역에서 최고로 인기가 많은 창부 앤젤은 잔혹한 포

잊혀진 생존자 마그리트의 목소리, The Last Duel(2021)

    "아무도 그 사건의 진실을 알지 못했다."   (No one really knew the truth of the matter.)   Jean Le Coq, Parisian lawyer, 14세기   미국의 중세 문학 연구자인 Eric Jager는 14세기 프랑스의 연대기 작가인 Jean Froissart의 책에 매혹되었다. 1386년,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던 중세 시대의 마지막 결투를 기록한 책이었다. 에릭 재거는 연대기 작가가 펼쳐놓은 이야기를 따라 자신만의 학구적 여정을 시작했다. 무려 10년에 걸쳐 그는 두 명의 남자와 한 여자,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시대에 대해 탐구했다. 그런 후에 낸 책이 'The Last Duel: A True Story of Crime, Scandal, and Trial by Combat in Medieval France(2004)' 였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마지막 결투: 중세 프랑스에서 있었던 범죄와 스캔들, 그로 인한 싸움이 촉발한 재판의 실제 이야기'가 되겠다. 팔순을 넘긴 리들리 스콧 감독은 그 책을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 'The Last Duel(2021)' 은 연대기적 구성에 의해 기술된 책과는 다른 방식을 취했다. 결투 사건의 중요한 세 인물, 장 드 카루주, 자크 르 그리, 마그리트의 시점에서 사건이 각각 펼쳐진다.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羅生門, Rashomon, 1950)' 을 떠올리게 된다.   'The Last Duel'의 뼈대를 이루는 사건은 이러하다. 14세기 프랑스, 장 드 카루주와 자크 르 그리는 피에르 백작을 주군으로 섬기는 가신들이다. 둘은 친한 친구 사이였으나 주군의 총애가 르 그리에게 치우치면서 멀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카루주는 아내 마그리트로부터 르 그리에게 강간당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분노한 카루주는 행동에 나선다. 당시 봉건제 치하에서

결혼의 풍경, 안즈코(杏っ子, Little Peach, 1958)

    "탁자 위에 놓인 귤 하나, 그 작은 것으로부터 상상하지 못했던 생활을 꾸려가는 거야."   결혼을 앞둔 딸에게 아버지는 너무 경제적인 조건에 얽매이지 말고 소박한 것에서 출발하라고 그렇게 충고한다.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어린 시절 '안즈(살구 )'라는 애칭으로 불리웠던 안즈코(가가와 교코 분)는 유명한 소설가 아버지(야마무라 소 분)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안즈코에게 아버지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현명한 인생의 상담자이기도 하다. 여러 구혼자들을 만나 보다가, 결국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같이 자란 료키치(기무라 이사오 분)와 결혼하게 된 안즈코. 그러나 결혼 생활은 생각보다 어렵고 마음의 갈등은 커져 간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안즈코(Little Peach, 1958)'에는 결혼의 풍경, 그것도 꽤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내면의 풍경이 펼쳐진다. 마치 접힌 부채가 펼쳐지면서 보이는 그림처럼, 접혔을 때는 알 수 없었던 결혼의 실체가 안즈코에게 다가온다. 자신의 부모처럼 서로를 아껴주고 존중하며 사랑으로 살아가는 결혼 생활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남편 료키치는 소설가로 성공하기를 꿈꾸며 글을 쓰지만, 가진 재능은 턱없이 부족하고 오직 자존심만이 하늘을 찌른다. 장인의 명성에 대한 질투는 아내에 대한 온갖 짜증과 트집잡기로 이어진다. 이 남자의 행동은 그야말로 찌질함의 극치를 이룬다. 그럼에도 안즈코는 어떻게든 결혼 생활을 이어가려고 애를 쓴다. 여성 관객들에게 '안즈코'는 고구마 백 개쯤 먹은 답답함과 울분을 선사하고도 남음이 있다.    안즈코와 장인에게 돼먹지 못한 언사와 행동으로 일관하는 남편 료키치. 그의 찌질함과 무례함은 영화 내내 스크린을 뚫고 나올 기세이지만, 속 깊은 이 부녀( 父 女 )는 묵묵히 감내할 뿐이다. 도대체 왜, 안즈코는 결혼 생활을 쉽사리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일까? 그토록 곱게 키운 딸의 시련과 고생을 보면서도

어느 정념(情念)의 여로, 산의 소리(山の音, 1954)

    "내가 말이지, 아버지의 일생을 한번 생각해 봤어. 결국 부모로서의 성공은 자식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사느냐로 판가름 나는 것이지. 우리 아버지는 어떤지 모르겠네."   아들 슈이치(우에하라 겐 분)는 아버지(야마무라 소 분) 앞에서 태연하게 그런 말을 늘어놓는다. 그 말을 듣는 아버지의 속이 편할 리 없다. 아들 슈이치는 며느리 키쿠코(하라 세츠코 분)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고, 시집간 딸은 남편과 불화가 심해서 툭하면 보따리 싸들고 친정에 온다. 시아버지 싱고는 아들에게 냉대받는 며느리가 안쓰럽고, 어떻게든 아들 내외의 결혼 생활을 이어가게 하려고 애를 쓴다. 과연 그의 바램대로 아들 내외는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산의 소리(The Thunder of the Mountain, 1954)'는 한 가족의 일상에 내재된 균열과 상처를 담아낸다. '안즈코(1958)'에서 딸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감싸주는 아버지로 나왔던 배우 야마무라 소가 이 영화에서는 사람 좋은 시아버지로 나온다. 며느리를 자식 보다 더 예뻐한다는 불평을 딸과 아내가 쏟아낸다. 그런 아버지를 아들도 못마땅하게 생각할 뿐이다. 영화 속에서 싱고가 자신의 가족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그렇게 살갑지 않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가장 걱정하는 동안, 시어머니는 아들 내외에 무관심하며, 친정으로 애들 데리고 온 딸은 속 긁는 소리만 하고, 아들은 밖으로 나돈다. 이 집안 사람들의 가족으로서의 유대와 정서는 여기 저기 균열이 가 있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그들 내면의 풍경은 황량하다.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내는 이런 가족 드라마는 결코 편하게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떤 문제 하나만 해결하면 잘 풀릴 것 같은 데 그렇지 않다. 그 속에는 구불구불하게 얽힌 길이 있으며, 도무지 출구를 찾기가 어려워 보인다. 삶이 가진 복잡성, 그것이야말로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서 진중하고 치열하게

가을이 올 때(秋立ちぬ, The Approach of Autumn, 1960)

  풍경과 정서, 나루세 미키오가 건네는 유년의 편린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매우 과묵한 사람이었다. 그와 여려 편의 영화에 함께 한 여배우 타카미네 히데코는 후일 이 감독에 대해 회고하기를 '좀 무서웠다'고 했다. 주연 배우에게조차 그는 별다른 연출 지시를 하지 않아서, 타카미네 히데코는 자신의 감을 믿고 그냥 연기하는 수 밖에 없었다. 젊은 시절의 짧은 결혼 생활과 이혼, 그리고 꾸준히 영화 경력을 이어간 것 이외에 그의 사생활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그의 자전적 편린이 들어있는 영화가 '秋立ちぬ(Autumn Has Already Started, 1960)' 이다. 제목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가을이 다가온다' 쯤이 될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12살 소년 히데오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뜨거운 한여름, 도쿄에 이제 막 도착한 엄마와 아이를 보게 된다. 히데오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삼촌집을 찾아 간다. 허름한 뒷골목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고 있는 삼촌. 엄마는 히데오를 맡기고 근처 여관에 일자리를 얻는다. 가장이 세상을 뜬 후, 이 모자(母子)는 살던 나가노를 떠나 도쿄에 왔다. 팍팍한 숙모 아래에서 조금 눈칫밥을 먹기는 해도, 사촌들은 히데오에게 잘 대해 준다. 동네 애들은 히데오를 촌뜨기라며 무시하고 텃세를 부리지만 히데오는 의연하다. 우연히 알게 된 준코라는 여자 아이는 히데오에게 호감을 보인다. 알고 보니 엄마가 일하는 여관 여주인이 준코의 엄마다.   러닝타임 79분. 이 소품 같은 흑백 영화는 아이들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나루세 미키오는 이 영화를 제작하기 이전에 '내 마음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 1959)' 에서 아이들과 작업한 적이 있다. 말수가 적었던 감독이 일일이 아이들에게 연출 지시를 하는 일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듬해인 1960년에 '가을이 올 때'를 만든 것을 보면, 감독 본인이 꼭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소설과 영화 사이, 그 창의적 간극(間隙): The Mist(2007)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안개가 다가오고 있었다.'   (The mist was coming)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The Birds, 1963)' 는 이전까지 사람에게 무해한 존재로 인식되던 '새'를 공포 영화의 주인공으로 둔갑시킨다. Frank Darabont의 2007년작 'The Mist' 에서는 안개가 죽음을 몰고 온다. 정확히는 안개와 함께 온 괴생명체들이 한 마을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영화의 원작은 Stephen King이 1980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다.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은 원작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수정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소설과 영화는 어떻게 다를까?   메인주의 작은 마을, 화가 데이비드에게는 아내와 5살 아들 빌리가 있다. 심한 뇌우로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불안해진 마을 사람들은 식료품을 쟁여놓기 위해 동네 슈퍼마켓에 모여든다. 데이비드도 아들과 함께 마트에 들른다. 그런데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들어온다. 남자는 위험하다며 마트를 나가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밖은 순식간에 밀려든 안개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소 괴팍하고 신경질적인 중년 부인 카모디는 이건 죽음의 징조라며 혼자 중얼거린다.   영화 '미스트'에서 공포의 대상은 안개 그 자체가 아니라 안개 속의 괴생명체들이다. 거대한 촉수와 빨판이 달린 괴물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죽인다. 마트 안의 사람들은 이 괴물들과 대적하는 동안 두 부류로 나뉜다. 데이비드를 비롯해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이들은 총과 빗자루, 화염방사기로 괴물과 사투를 벌인다. 반면 카모디 부인이 주축이 된 일군의 무리는 일그러진 종교적 신념에 휩쓸린다. 영화는 카모디 부인을 비뚤어진 광신도로 묘사한다. 하지만 원작 소설 속의 카모디는 기이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면서 일종의 주술사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미스트

대공황 시대 미국인들의 초상, William Wellman 감독의 영화 두 편

Wild Boys of the Road(1933) Heroes for Sale (1933) 1. 상처입고 방황하는 아이들, Wild Boys of the Road(1933)   존 포드 감독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40)' 는 가장 잘 알려진 대공황 시대의 초상일 것이다.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1939년작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대공황으로 길바닥에 나앉은 이주 노동자의 처절한 삶을 그려낸다. 사실주의적 시각에서 그려졌음에도 영화 '분노의 포도'는 소설에 비해서 다소 온건하고 현실타협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1940년대 헐리우드 영화는 황금기의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그 시기 영화 속 메시지들은 잘 절제되어 있다. 그렇게 만든 배경에는 '검열'이 있었다. 1934년, 미국 영화 산업계는 자율적인 검열 기준을 도입했다. 이른바 'Hays Code' 로 불리는 영화 심의 기준이 헐리우드 영화의 내면을 지배했다. 검열은 특정 항목의 금지를 지시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다. 정부에 대한 비판을 비롯해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정치적 논제도 회피하게 만들었다. '분노의 포도'의 경우는 사회주의적 메시지를 최대한 걷어내는 데에 스튜디오의 입김이 작용했다.   그런 면에서 1933년에 제작된 William Wellman 감독의 영화 두 편은 대공황에 대한 아주 사실적인 초상을 제공한다. 'Pre-Code Era(1930-1934)' 에 제작된 'Wild Boys of the Road(1933)' 와 'Heroes for Sale(1933)' 은 'Hays Code'가 표현의 자유를 옥죄기 이전의 다채로운 영화적 발언들을 내포한다. 두 영화가 개봉된 시기인 1933년에 미국민들은 대공황의 터널을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윌리엄 웰먼 감독은 자신과

폴 토마스 앤더슨이 선사하는 쇠맛 청춘 로맨스, Licorice Pizza(2021)

    조지 루카스의 1973년작 영화 '청춘 낙서(American Graffiti)' 는 루카스가 첫 영화를 보기좋게 말아먹은 후 찍은 작품이었다. 영화가 제작된 시점에서 정확히 10년 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그야말로 초대박을 쳤다. 흥행수익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제작비 대비 180배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American Graffiti'는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당시 미국인들은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베트남전의 패배에 뒤이어 오일 쇼크의 긴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루카스의 영화는 미국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잘 나가고 좋았던 시절, 1960년대를 추억하게 만들었다.   Paul Thomas Anderson의 'Licorice Pizza(2021)' 도 영화 '청춘 낙서'처럼 과거로 돌아간다. 그것도 무려 50년 전인 1973년이다. 루카스의 영화가 당시 청장년층들에게 소구했다면, 폴 토마스 앤더슨의 2021년작 영화는 어떤 관객층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을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시대적인 정서와 이야기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청춘이었던 이들의 나이는 이제 중년을 넘어 노년에 들어선다. 분명 그들을 대상으로 만든 영화는 아니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니 의외로 이 영화의 주 관객층은 20대와 30대 초반에 걸쳐 있었다. 지금 시대의 젊은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새삼 궁금해졌다. 자, 그렇다면 '감초 피자'는 어떤 영화인지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1973년, 15살 게리(쿠퍼 호프만 분)는 학교 졸업 사진을 담당하는 보조 사진가 알라나(알라나 하임 분)에게 마음을 뺏긴다. 대뜸 사귀자고 말하는 게리. 알라나에게 그 상황은 웃기지도 않는다. 뭐야, 이제 15살 짜리가 25살인 나에게 수작을 걸다니. 일단 퇴짜는 놓았는데 알라나의

순전한 기쁨, 단편 다큐 They Took Us to the Sea(1961)

    "아직까지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다. 여긴 좀 메스꺼운 냄새가 난다."   (Never seen the sea before. It’s got a funny smell to it.)   아이는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을 그렇게 말한다. 영국의 영화 제작자이며 교육자였던 존 크리쉬(John Krish, 1923-2016) 의 단편 다큐 'They Took Us to the Sea(1961)' 는 빈민가 아이들의 바닷가 소풍을 담는다. 다큐는 버밍엄(Birmingham)의 전형적인 하층민 주거지를 비춰주면서 시작한다. 아이들은 허물어진 건물이 있는 황량한 공터를 놀이터로 삼는다. 구태여 '가난'이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아도, 아이들의 행색에서는 그 단어가 빗물처럼 뚝뚝 흘러내린다. 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어있는 옷, 흙먼지로 얼룩이 진 신발, 위축되고 생기 없는 얼굴 표정. 이 아이들에게 어느 날 자선 단체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말한다. 너희들을 바닷가에 데리고 갈 거란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버밍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약간의 긴장과 설렘을 안고 기차역에 모인 아이들에게 단체의 인솔 감독자들은 이름표를 달아준다. 기차에 올라탄 아이들은 창밖의 가족들과 짧은 이별 인사를 나눈다. 마침내 기차가 출발하고 그렇게 선물과도 같은 하루가 주어진다. 꼬마의 내레이션은 신나거나 흥분으로 가득차 있지 않다. 조심스럽고 담담하게 들린다. 아이들은 수줍음이 많고 쭈빗거린다. 농장과 소가 보이는 바깥 풍경을 보면서 간식도 먹는다. 조금은 긴장이 누그러지는 것 같다. 마침내 기차는 Weston-super-Mare의 바닷가에 도착한다.   조금은 이상한, 메스꺼운 냄새가 나는 곳. 하지만 그곳은 곧 즐거운 추억을 선사하는 장소가 된다. 즐거운 식사 시간, 볼이 미어져라 음식을 입에 넣는다. 피시 앤드 칩스(fish and chips)에 여유있게 식초를 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먹음직스러운 푸딩도

다큐 Mifune: The Last Samurai(2015)

  마지막 사무라이로 기억될 배우, 미후네 토시로     "뭐랄까, 그는 바다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동료 여배우는 그를 그렇게 회고했다. Steven Okazaki의 2015년작 다큐 'Mifune: The Last Samurai'는 일본의 명배우 미후네 토시로(三船敏郎, 1920-1997) 의 영화 인생을 돌아본다. 어떤 사람을 '바다' 같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과연 어떤 것일까? 여배우는 로케이션 촬영할 때 음식이 맞지 않아 고생하는 이들을 위해 미후네 토시로가 요리를 해주었던 이야기를 한다. 대스타이면서도 거만하지 않고 소탈했던 한 인간, 배우로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했던 사람. '바다'라는 단어야말로 그의 인간됨을 잘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후네 토시로의 영화 인생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黒澤明, 1910-1998) 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다큐는 영화를 구도자적인 엄격함으로 만들었던 한 감독의 이야기 또한 비중있게 다룬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배우들에게 매우 철저하고 치밀하게 연출 지시를 내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영화에 출연했던 이들은 촬영 현장이 훈련소 같은 분위기였다고 말한다. 완벽주의자 감독의 지시를 따라가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그런 감독이 아무런 연출 지시를 하지 않는 유일한 배우가 바로 미후네 토시로였다. 구로사와 아키라에게 미후네 토시로는 예술적 동반자였다.   다큐는 일본 시대극을 대표하는 배우로서 미후네 토시로를 부각하면서 시작한다. 사무라이들이 나오는 시대극은 '찬바라(チャンバラ)'로 불린다. 그 단어는 칼들이 부딪히며 내는 '찬찬, 챙챙'하는 소리에서 따왔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Seven Samurai, 1954)' 와 '요짐보(Yojimbo, 1961)' , 이나가키 히로시(稲垣浩) 감독의 '미야모토 무사시(Samurai I

폭력과 고독의 서사, Walter Hill 감독의 영화 세계 2부

  Hard Times(1975) The Driver(1978) The Warriors(1979)    48 Hrs.(1982) Last Man Standing(1996) 3. 여성: 월터 힐 영화의 하위 주체(subaltern)   앞의 글에서 월터 힐 영화 속 남성 캐릭터들이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이른바 '외로운 늑대'임을 언급했다. 그들은 타자와 관계를 맺는 것에 별 다른 관심이 없거나, 그것을 갈구하더라도 결국 그 소망은 좌절된다. 그보다 더 안좋은 경우는 타자를 학대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다. 월터 힐의 영화들에서 특히 여성 캐릭터들이 일관되게 열등하고 부수적인 위치에 놓여있음을 보게 된다. 영화 속 남성 캐릭터들은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주변부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여성에 대해서는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48시간'에서 형사 잭(닉 놀테 분)의 여자 친구는 잭과 안정적 관계가 되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잭은 그러한 요구를 회피한다. 여자 친구는 잭의 직업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지 못하며, 전화로 잭에게 투정이나 부릴 뿐이다. 'The Warriors'에서 지역 갱단 리더의 연인인 머시는 워리어스 갱단의 스완에게 마음을 뺏긴다. 머시는 스완의 애정을 갈망하지만, 스완은 그런 머시를 조심스럽게 밀어낸다. 스완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이지 사랑이 아니다. 'The Driver'에서 이자벨 아자니가 연기한 '플레이어'는 좀 예외적인 경우이다. '드라이버'와 약간의 인간적 교감을 나누기는 하지만, 둘 사이에는 명백한 거리감이 존재한다. 플레이어가 드라이버에게 감정적으로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것이 플레이어를 드라이버의 조력자이면서 동등한 사업 파트너로 존재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월터 힐의 영화에서 여성은 본질적으로 남성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없다. 'The Driver'에서 드라이버에게 일감을 소개해주는

폭력과 고독의 서사, Walter Hill 감독의 영화 세계 1부

  Hard Times(1975) The Driver(1978) The Warriors(1979)    48 Hrs.(1982) Last Man Standing(1996) 1. 월터 힐의 영화 속 방랑자들   남자는 황량한 사막을 가로지르며 차를 운전 중이다. 낮게 깔리는 남자의 내레이션이 이 영화가 그의 시점에서 진행될 것임을 알려준다. 운전을 하며 술을 들이키다 내린 그는 술병을 땅바닥에 놓고 돌려 본다. 술병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다시 차를 모는 남자. 그렇게 존 스미스(브루스 윌리스 분)는 멕시코 국경 근처 제리코 마을에 도착한다. 그런데 어째 이 마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한 무리의 갱단원들이 몰려와서 스미스의 차를 망가뜨린다. 근처 술집으로 들어간 그는 술집 주인으로부터 대강 이 마을의 돌아가는 꼬라지를 알게 된다. 밀주업을 하는 두 개의 갱단이 서로 물어뜯으면서 마을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 보통 사람 같으면 오금이 저려서 떠나련만 스미스는 자신의 차를 망가뜨린 갱단의 사무실을 찾아간다. 존 스미스, 그는 제리코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Last Man Standing(1996)' 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Yojimbo, 1961)' 에서 거의 대부분의 설정을 따왔다. '요짐보'에서 미후네 토시로가 연기한 낭인(浪人, ろうにん) 산주로는 긴 막대기로 자신의 갈 길을 정한다. 그렇게 도착한 마을의 초입에서 그는 비쩍 마른 개가 사람의 손목을 들고 있는 것을 본다. 시나리오를 직접 쓴 월터 힐은 산주로의 막대기를 스미스의 술병으로, 개는 백마의 사체로 대체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에 대한 월터 힐의 경배에 가까운 모방은 이 영화가 처음은 아니다. 'The Warriors(1979)' 에서 워리어스 갱단의 스완이 자신의 적대자와 대결할 때, 그는 총을 든 상대방의 손목에 단검을 던진다. 이 장면 역시 '요짐보'의 마지막 결투 장면에서 차용한 것이다. &#

B movie의 명배우: 리처드 콘테(Richard Conte, 1910-1975)

    1940년대 필름 느와르 영화를 보다 보면 자주 만나게 되는 조연 배우들이 있다. 스튜디오의 저예산 제작 영화인 B movie, 리처드 콘테(Richard Conte)도 그 영화들에 단골 출연한 배우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Conte'라는 성이 말해주듯 그는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 출신이었다. 대개 유명인들의 이름 발음은 위키피디아에 표기되어 있는데, 콘테는 이름과 관련된 특별한 표기가 없다. 미국식으로 발음하면 콘트, 이태리식 발음은 콘테와 콩티의 그 중간쯤 될 것 같다. 나는 '콘테'로 표기하려고 한다.   내가 처음으로 본 콘테의 출연작은 '잠자는 도시(The Sleeping City, 1950)' 였다. 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이 독특한 필름 느와르에서 콘테는 형사로 나온다. 형사 프레드는 살인 사건 조사를 위해 의사 신분으로 병원에 잠입한다. 자칫 신분이 탄로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 나간다. 그런데 프레드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강인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매력적인 간호사 앤의 유혹에 흔들리는가 하면, 상당한 도박빚도 지게 된다. 과연 그는 범인을 찾아낼 수 있을까?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서야 그런 그의 인간적인 약함이 일종의 연막 작전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콘테가 연기하는 프레드의 모습에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의 심리적 갈등과 불안이 감지된다.   '잠자는 도시'의 프레드가 그러했듯 콘테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결코 단선적이지 않다. 콘테의 얼굴에는 선과 악의 양면이 절묘하게 감춰져 있다. 배우들이 자신의 경력을 거듭하게 될수록 겪게 되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캐릭터의 고착화일 것이다. 선인과 악인, 그 두 캐릭터 중에 어느 한 가지에 치우치게 되는데 콘테는 그 경계선을 자유롭게 오갔다. 프리츠 랑 감독의 'The Blue Gardenia(1953)' 에서 그는 신문기자로 나온다. 투철한 직업 정신으로 살인

호명된 국민, 재조명된 호주인의 서사: Breaker Morant(1980), Gallipoli(1981)

  호주 영화의 눈부신 전성기, 호주 뉴 웨이브(Australian New Wave) 영화들 4부 호명된 국민, 재조명된 호주인 서사: Breaker Morant(1980), Bruce Beresford Gallipoli(1981), Peter Weir   "이 친구야, 우린 피 묻은 제국의 희생양이야!"   (Harry Morant: George! We're scapegoats to the bloody empire!)   1881년, 남아프리카에 살던 보어인(Boer, 당시 그곳에서 살던 네덜란드인을 일컫는 말)들은 영국과의 싸움을 통해 자신들의 땅에 대한 우선적 권리를 확인받았다. 그래봤자 그들도 원주민의 땅을 뺏은 침략자에 지나지 않았다. 평화는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그 땅에서 발견된 다이아몬드와 금이 문제였다. 그건 대박이 아니라 피바람을 몰고 올 재앙이었다. 영국은 보어인들에게서 다시 땅을 뺏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1899년에 시작된 2차 보어 전쟁(Second Boer War)은 결국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영국은 남아프리카에 새로운 식민지를 구축했다.   보어 전쟁은 침략자들끼리 식민지를 두고 피 터지게 싸운 제국주의의 냉혹한 단면이었다. Bruce Beresford의 1980년작 영화 'Breaker Morant'는 바로 그 2차 보어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모랜트는 호주인으로 보어 전쟁에 참전한다. 전쟁이 막바지에 달한 1902년, 세 명의 군인이 군사 법정에 회부된다. 모랜트와 핸콕, 위튼은 보어인 포로와 독일인 선교사를 적법한 절차없이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들을 변호하는 임무를 맡은 토마스 소령은 상부로부터 어떻게든 유죄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언질을 받는다. 영화는 법정 재판 장면과 사건의 발단이 된 전투 장면을 교차 편집해서 보여준다. 전쟁 영화의 외피를 입었으나, '파괴자 모랜트'는 의외로 차분한 군사 재판 장면이 내러티브의 주를 이룬다.  

발굴된 호주 여성의 서사, My Brilliant Career(1979)

  호주 영화의 눈부신 전성기, 호주 뉴 웨이브(Australian New Wave) 영화들 3부   작가 지망생인 아가씨는 자신의 자전적 경험과 상상력을 좀 보태어서 소설 한 편을 써냈다. 몇 군데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궁리 끝에 이름 있는 작가에게 원고를 보내 보았다. 소설이 괜찮다고 생각하면 책으로 나올 수 있게 도와달라는 부탁과 함께. 행운이 따랐다. 소설은 곧 책으로 나왔다. 모국 호주가 아닌 바다 건너 스코틀랜드의 출판사에서였다. 스무 살의 Miles Franklin은 비로소 작가가 되었다. 소설의 제목은 'My Brilliant Career'. 소설은 꽤 잘 팔렸고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원작 소설 속의 17살 아가씨 시빌라는 예쁘지도, 그렇게 뛰어난 예술적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시빌라는 소젖을 짜며 집안의 농장일을 돕는다. 시빌라의 어머니는 주정뱅이 남편 뒤치다꺼리하기도 버겁다. 가난한 집안 살림에 입이라도 덜게 딸이 얼른 시집이나 가버렸으면 싶다. 그러던 중에 친정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온다. 시빌라의 부자 할머니가 외손녀딸을 불러들인다. 시빌라를 잘 단장시켜서 부잣집에 결혼시켜 보낼 심산이다. 별 볼 일 없는 남자와 결혼해서 인생이 망가진 딸의 전철을 외손녀가 밟게 할 수는 없다. 과연 선머슴 같은 시빌라는 결혼으로 인생역전을 이룰 수 있을까?   Gillian Armstrong이 영화 'My Brilliant Career(1979)'를 찍었을 때의 나이는 스물 아홉이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영화 경력을 시작한 이 여성 감독에게 마일즈 프랭클린의 소설은 매우 적합한 텍스트였는지도 모른다. 결혼보다 직업적 성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빌라는 부자에다 잘 생긴 구혼자의 손길을 뿌리친다.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내는 것으로 화려한 경력의 첫 걸음을 내딛는다. 대강의 줄거리만 본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