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필름 느와르 영화를 보다 보면 자주 만나게 되는 조연 배우들이 있다. 스튜디오의 저예산 제작 영화인 B movie,
리처드 콘테(Richard Conte)도 그 영화들에 단골 출연한 배우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Conte'라는 성이 말해주듯
그는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 출신이었다. 대개 유명인들의 이름 발음은 위키피디아에 표기되어 있는데, 콘테는 이름과 관련된 특별한
표기가 없다. 미국식으로 발음하면 콘트, 이태리식 발음은 콘테와 콩티의 그 중간쯤 될 것 같다. 나는 '콘테'로 표기하려고 한다.
내가 처음으로 본 콘테의 출연작은 '잠자는 도시(The Sleeping City, 1950)'였다.
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이 독특한 필름 느와르에서 콘테는 형사로 나온다. 형사 프레드는 살인 사건 조사를 위해 의사 신분으로
병원에 잠입한다. 자칫 신분이 탄로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 나간다. 그런데 프레드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강인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매력적인 간호사 앤의 유혹에 흔들리는가 하면, 상당한 도박빚도 지게 된다. 과연
그는 범인을 찾아낼 수 있을까?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서야 그런 그의 인간적인 약함이 일종의 연막 작전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콘테가 연기하는 프레드의 모습에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의 심리적 갈등과 불안이 감지된다.
'잠자는 도시'의
프레드가 그러했듯 콘테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결코 단선적이지 않다. 콘테의 얼굴에는 선과 악의 양면이 절묘하게 감춰져 있다.
배우들이 자신의 경력을 거듭하게 될수록 겪게 되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캐릭터의 고착화일 것이다. 선인과 악인, 그 두 캐릭터
중에 어느 한 가지에 치우치게 되는데 콘테는 그 경계선을 자유롭게 오갔다. 프리츠 랑 감독의 'The Blue Gardenia(1953)'에서
그는 신문기자로 나온다. 투철한 직업 정신으로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케이시는 살인 용의자로 의심되는 여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진실을 보도해야 하는 직업 윤리와 사랑의 감정 사이에서 케이시는 갈등하고 고뇌한다. 콘테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않는
정의로운 신문기자를 연기하면서,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의 면모도 보여준다.
그런데 선인 역할 보다 콘테에게 더 많이 주어진 것은 악인 역할이었다. 1955년작 영화 'The Big Combo'에서의
콘테는 그야말로 진짜 악당으로 등장한다. 온갖 비리와 범법 행위를 저지르는 갱단 두목 브라운은 매우 잔혹한 인물로 묘사된다.
브라운의 사디즘적 성향을 잘 보여주는 장면은 한때는 자신의 보스였으나 이제는 부하가 된 맥클루어를 조롱할 때이다. 그는 귀가
안좋은 맥클루어를 괴롭히기 위해 보청기에다 악을 쓴다. 이 영화에서 관객은 콘테가 지닌 연기 역량을 확인한다. 브라운은 수족처럼
부리던 부하를 자신의 안위를 위해 거리낌없이 폭사시켜 버린다. 이 난폭하고 잔인한 악당은 형사에게 잡히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도
이렇게 소리지른다.
"이 짭새야, 차라리 날 죽여. 죽여 보라구! 난 감옥 따위에 들어갈 위인이 아니란 말이다!"
(Go ahead! Kill me! Kill me! ... I won't go to jail!)
그 장면에서 콘테가 연기하는 브라운의 패악질을 보고 있노라면, 성질 급한 형사 같으면 총을 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악인 역할은 'Somewhere in the Night(1946)'에서도
볼 수 있다. 전후 미국의 혼란과 불안이 반영된 이 필름 느와르 영화에서 콘테는 조력자를 가장한 악당 멜 필립스를 연기한다.
그는 배포가 넓은 뒷골목 클럽의 소유주로 어려움에 빠진 주인공을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하지만 뭔가 의뭉스러운 이 인물은 막판에
가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주인공을 협박한다. 양면성을 지닌 교활한 악인을 연기한 콘테는 분명히 이 영화에서 조연임에도 주연보다
관객의 시선을 강하게 붙잡는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 역을 맡은 존 호디악(John Hodiak)에게 이 영화는 처음으로 따낸
주연이었다. 상대 여배우 낸시 길드(Nancy Guild)는 이 작품이 첫 출연작이었다. 이미 1939년부터 경력을 시작한
콘테는 안정적인 연기로 주연 배우들을 뒷받침함으로써 영화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B
movie 출연 전문 배우라고 해서 연기 역량도 B급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영화 공장처럼 돌아가던 당시 스튜디오의 제작
시스템에서 다양한 역할로 다작을 소화해내는 재능있는 배우들이었다. 리처드 콘테의 긴 필모그래피는 그가 스튜디오의 신뢰를 받는
배우였음을 보여준다. 어느 역할이 주어지든 콘테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나름의 존재감이 있었다. 나에게 그 대표적인 작품은
1948년작 영화 'Call Northside 777'이었다. 이 영화는 금주법 시대에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복역한 Joseph Majczek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그 인물이 영화 속에서는 콘테가 연기한 프랭크가 되었다.
프랭크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사건을 조사하는 신문기자 역은 제임스 스튜어트가 맡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스튜어트의 경직되고
거들먹거리는 연기를 보는 것은 정말이지 지루하기 짝이 없다. 고전기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로서 스튜어트가 가지는 상징성은
상당부분 신사적 이미지의 외모에 기대고 있다. 내가 유일하게 좋게 평가하는 스튜어트의 영화 연기는 앤소니 만의
'Winchester '73(1950)'이다. 영화에서 스튜어트는 그야말로 신들린 총솜씨를 보여준다. 뛰어난 총잡이 역할을 하기
위해 스튜어트는 죽으라고 사격 연습을 했고, 그것이 영화에 그대로 나온다. 그 작품을 제외하고 나에게 스튜어트의 연기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다큐멘터리적 구성으로 짜여진 'Call Northside 777'의 러닝타임 111분 동안
주연 배우 스튜어트의 존재감은 매우 적은 분량으로 나오는 콘테에 미치지 못한다. 나는 감옥에 갇힌 콘테가 나오는 장면을 기다릴
정도였다. 콘테가 연기하는 프랭크의 얼굴에는 모호한 선량함이 존재한다. 정말로 경찰 살인범인지, 아니면 억울한 누명을 쓴
피해자인지 관객은 끝까지 의문을 품게 된다. 마침내 프랭크가 석방되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때 콘테가 보여주는
미소는 진실된 한 인간 그 자체이다.
콘테의 필모그래피 끝자락에서 우리는 잘 알려진 영화를 발견하게 된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The Godfather, 1972)',
그 영화에서 콘테는 돈 콜레오네와 대립하는 마피아 보스 바지니 역을 연기했다. 겉으로는 갱단들 사이의 휴전을 외치면서 음흉한
수를 쓰는 바지니는 콘테에게 잘 어울리는 역할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 콘테는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뜬다. 65살이라는
나이는 배우로서 충분히 더 활동할 여력이 있는 나이였다. 가끔 인생이 B급 영화 같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럴 때에 나는 리처드
콘테를 떠올린다. 그가 출연한 영화들에서 그는 배역의 경중을 떠나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주었다. 콘테는 B movie의 진정한
스타였다. 그처럼 우리들도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별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tcm.com 'The Big Combo(1955)'에서의 리처드 콘테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 리처드 콘테의 출연작 리뷰
영화 '잠자는 도시(The Sleeping City, 195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sleeping-city1950.html
영화 'Somewhere in the Night(194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somewhere-in-night1946-doa1950-no-wa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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