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잠들지 못하는 욕망의 병원, The Sleeping City(1950)

 

*이 글은 영화 'The Sleeping City(1950)'의 결말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The Sleeping City'는 특이한 도입부를 가지고 있다. 영화의 주연 배우인 리처드 콘테가 영화 속 사건과 실제 뉴욕시의 벨뷰 병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설명하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이 영화가 배경이 된 뉴욕시와 벨뷰 병원(Bellevue Hospital)의 평판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시장의 입장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 영화는 뉴욕 벨뷰 병원의 인턴이 의문의 총격을 당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수사 당국은 병원 내부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형사 프레드(리처드 콘테 분)를 의사로 잠입시킨다. 그는 주변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해 나간다. 프레드는 곧 매력적인 간호사 앤, 사교적인 엘리베이터 기사 팝과 친해진다. 그러던 중에 같은 방을 쓰는 동료 의사의 자살 사건이 일어난다. 동시에 프레드에게도 어둠의 손길이 다가온다. 팝에게 진 도박빚 때문에 한두 번 써주기 시작한 마약 처방전은 계속 늘어난다.

  조지 셔먼 감독의 'The Sleeping City'는 명백히 줄스 다신 감독의 'The Naked City(1948)'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두 영화 모두 Universal Pictures에서 제작했다). 뉴욕이라는 도시를 다루고 있으며, 대도시의 풍경 속에 '밤'이 아닌 '대낮'에 범인과의 추격전이 이루어진다. 일종의 도시 탐구 필름 느와르의 면모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매우 현대적이고 세련된 벨뷰 병원의 내부 모습을 포함해 1950년대 뉴욕의 풍광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멋진 외관의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범죄의 양상은 은밀하고 복잡하다. 영화 속 '의사'는 직업적 스트레스 때문에 도박과 우울증, 약물 중독에 취약한 상황 속에 놓여있다. 오늘날에도 의사들의 약물 중독은 민감한 문제로 다루어지는데, 1950년대의 상황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영화의 내용이 '사실 무근'임을 알리는 도입부 내레이션은 외부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것이다.

  주인공 프레드는 기숙사 룸메이트 스티브가 재정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에게는 또한 가난한 간호사 여자 친구 캐시가 있다. 스티브의 자살은 캐시에게 큰 충격이 되는데, 캐시는 자신의 남자 친구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지 잘 모른다. 이 가련하고 순수한 간호사 아가씨는 추악한 범죄의 연결 고리에서 동떨어진 희생자로 묘사된다. 이와는 달리 프레드와 같은 병동에서 근무하며 애인처럼 가까워진 앤은 전형적인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모습을 보여준다. 앤은 영화 초반부 총을 맞고 사망한 인턴을 비롯해 스티브와도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암시된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앤은 새로운 먹잇감이 될 프레드에게도 접근한다. 프레드는 앤이 도박 자금을 의사들에게 빌려준 댓가로 마약을 얻어내는 팝과 공모하고 있음을 알아챈다. 앤의 돈에 대한 갈망은 자신이 유혹한 남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물론 앤에게도 사정은 있다. 이혼녀로 아이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 앤에게 돈은 목숨과도 같다. 그렇게 일그러진 모정은 범죄에 스며든다.

  앤과 함께 의사들의 약점을 이용해 마약 유통 범죄에 끌어들이는 엘리베이터 기사 팝은 늙고 추악한 얼굴의 악인을 보여준다. 그가 영화의 마지막에 프레드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는 장소는 병원의 거대한 지하실이다. 크고 구불구불한 파이프들이 뱀처럼 끝없이 이어진 공간 속에서 형사와 범죄자는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최신식 병원의 지하 공간은 마치 욕망의 하수구처럼 묘사된다. 'The Naked City'의 살인범이 백주의 도시의 다리 맨 꼭대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처럼, 팝은 병원 옥상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곳에서 보이는 한낮의 도시 풍경은 정물화처럼 평온하게 흐르고 있다.

  이 영화는 필름 느와르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병원'이라는 의외의 공간, 그리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범죄 사건을 담았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조지 셔먼 감독은 프레드가 병원에 부임해서 의사들의 세계에 적응하는 일련의 과정을 짜임새 있게 제시한다. 수술방에 들어간 프레드는 학술회의 참가자처럼 동료 의사의 수술 장면을 참관한다. 의사들이 무리지어 내려가는 수직의 계단을 부감 쇼트로 찍은 장면은 '병원'과 그곳에서 일하는 전문직 종사자들의 권위를 그 자체로 드러낸다. 영화는 병원이라는 공간 속에 내재된 구조적인 문제들이 인간적인 결함과 결합했을 때, 어떻게 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건조하게 묘사한다.

  'The Sleeping City'가 보여주는 병원은 결코 온기가 느껴지는 곳이 아니며, 환자들의 고통이 깔리는 배경 뒤에 돈에 대한 집착과 뒤틀린 욕망, 그로 인해 불안하게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이 감춰진 장소이다. 영화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프레드가 홀로 거리를 걸어가는 가운데, 거대한 성처럼 서있는 병원을 비춰주며 끝난다. 그 성채의 위엄을 손상시킨 범죄자는 제거되었다. 빠지고 부서진 부품을 교체하듯 새로운 사람들이 그곳의 일원으로 채워질 것이다. 이 필름 느와르 영화는 도시 속 인간의 삶을 탐구한 작은 보석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pinterest.com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