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라벨이 중국 영화인 게시물 표시

문화대혁명의 새로운 영화적 변주, Crossing The Border - ZhaoGuan(2018)

    현대 중국 영화에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Cultural Revolution) 의 그림자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5세대(Fifth generation)와 6세대(Sixth generation) 감독들에게 문화대혁명은 자신들의 시대를 관통하는 대격변의 사건이었다. 비교적 최근작이라고 할 수 있는 6세대 감독 Wang Xiaoshuai 'So Long, My Son(2019)' 도 문화대혁명을 회고한다. 영화 'Crossing The Border - ZhaoGuan(2018)'에도 문화대혁명이 삽화적 사건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의 감독 Meng Huo는 30대의 젊은 감독으로 1984년생이다. 그렇다면 문혁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의 감독은 지난 시대의 역사와 오늘날의 중국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영화의 주인공은 70대의 시골 할아버지 Li Fuchang이다. 이제는 생의 끝자락에 서있는 Li 할아버지는 젊었을 적 친한 친구가 병석에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낡은 삼륜차(tricycle)를 타고 가서 Sanmenxia 있는 친구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그가 있는 시골에서 Sanmenxia는 30km나 떨어진 곳이다. 이 여행에는 7살 손자 닝닝도 함께 한다. 과연 털털거리는 삼륜차로 Li 할아버지는 무사히 친구가 있는 먼도시에 도착할 수 있을까? 영화 '자오관으로 가는 길(중국어 제목: 过昭关)' 의 기본적 얼개는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의 'The Straight Story(1999)' 를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에서도 주인공은 늙은 노인이다. 앨빈 스트레이트는 오랫동안 불화했던 형을 만나기 위해 트랙터를 타고 먼길을 떠난다. 영화는 앨빈이 여행 중에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앨빈의 지나온 인생 역정이 함께 어우러진다. '자오관으로 가는 길'에서도 Li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 닝닝...

인생의 봄을 기다리며, 입춘(立春, And the Spring Comes, 2007)

    별 볼 일 없는 작은 도시의 음악학교 성악 강사로 일하고 있는 왕차이링(장웬리 분)은 아주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파리 오페라단에서 프리마 돈나로 노래를 부르겠다는 것.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추녀까지는 아니지만 왕차이링의 외모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지저분한 피부와 작달만한 키, 살집있는 몸매는 오페라의 여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오로지 목소리만큼은 곱고 아름답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은 베이징으로 거주지를 옮기려고 애를 쓴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주증 (居 住 證)이 필요한데, 이미 거액의 돈을 건네준 베이징의 브로커는 늘 기다리라는 말만 한다. 그런 왕차이링의 주변에 모여든 이들의 인생도 허섭하기는 마찬가지. 시시한 재능을 가진 화가 지망생, 그곳 사람들에게 냉대받는 게이 발레리노, 왕차이링의 목소리에 반해서 쫒아다니는 공장 노동자까지. 과연 왕차이링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빛을 볼까...   꾸창웨이( 顧長衛 , Changwei Gu) 감독의 2007년작 '입춘(立春, And the Spring Comes )' 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주변부에 자리한 이들이다. '예술가병'에 걸린 그저그런 인생들이 현실에서 바스라지는 모습을 담아냈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병'과 비슷한 '영화병'이라는 것도 있다. 자신이 가진 예술과 영화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병. 그 병에는 별다른 치유책이 없다. 성공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개는 청춘의 시간을 내던지다 망가지고 잊혀진다. 어쩌면 '입춘'의 주인공 왕차이링도 그 '예술병'에 걸린 사람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병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 '세월'과 '현실'이 그것이다. 흘러가는 시간과 엄혹한 현실이 어설픈 기대와 희망을 깨부수어 버린다.   왕차이링이 가진 재능이 보잘...

과거의 긴 그림자, 나의 아들에게(地久天长, So Long, My Son, 2019)

    Wang Xiaoshuai의 2019년 영화 '나의 아들에게(So Long, My Son)' 는 러닝 타임이 무려 3시간이다. 보고나서 내가 느낀 것은 그렇다.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나 길게 영화를 찍다니... 이 영화는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인물들의 내면을 따라간다. 과거와 현재가 그렇게 뒤섞여서 흘러가기 때문에 관객에게 꽤나 집중을 요구한다. 과거의 커다란 슬픔과 상처를 지닌 인물의 내면은 현재까지도 황폐하고 쓸쓸하다. 영화는 나름대로 치유와 용서에 이르는 여정을 보여주고 싶어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피상적이고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야오쥔(왕징춘 분)과 리윈(융메이 분), 잉밍과 하이옌 부부는 국영 기업에서 오랫동안 친한 동료로 지내왔다. 그러나 야오쥔의 아들 싱싱이 잉밍의 아들 하오와 댐에서 놀다가 빠져 죽는 비극적인 일이 생긴다. 야오쥔과 리윈은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도망치듯이 그곳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아이를 입양해 싱싱이라는 이름으로 키운다. 그러나 삶은 결코 쉽게 풀리질 않는다. 고등학생이 된 새 아들 싱싱은 사고뭉치로 자라났다. 그럴수록 야오쥔의 마음속에는 죽은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어야 했던 아이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정부의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 때문에 아내 리윈은 억지로 중절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리윈의 임신 사실을 당국에 고발한 사람은 다름 아닌 하이옌이었다. 그렇게 두 가족 사이에 얽힌 슬픔과 원망의 실타래는 깊다. 그로 인해 드리워진 과거의 그림자에서 그들이 벗어나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중국 영화에서 6세대로 분류되는 왕 샤오슈아이는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 Beijing Bicycle(2000)' 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대도시의 주변부를 맴도는 소년의 일상을 통해 급변하는 중국의 현실을 담아낸 그 작품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6세대( Sixth...

뿌리 뽑힌 이들의 슬픔, 청홍(靑紅, Shanghai Dreams, 2005)

    "내가 아는 건 우리는 상하이에서 왔다는 것과 우리 애들도 상하이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야."   칭홍( 靑 紅 )의 아버지는 '상하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에게는 이 시골 촌구석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래 살던 곳인 상하이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다. 아버지 '우'는 아내의 분별력 없는 판단 때문에 상하이를 떠나서 십수 년 동안 시골에 처박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 가족이 상하이에서 그곳 꾸이양에 오게 된 것은 칭홍의 엄마 탓만은 아니다. 그 배경에는 문화혁명 시기 마오쩌둥이 추진했던 삼선건설 (三線建設)이 있었다. 그것은 미국과 소련의 침략에 대비해 연안 지역(일선과 이선지역)의 주요 산업시설을 서북부 지역(삼선지역)으로 이전하거나 새롭게 공업 단지를 건설하는 정책이었다. 그에 따라 연안 대도시의 주민들은 강제적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왕 샤오슈아이( Wang Xiaoshuai)의 2005년작 '靑紅' 은 그 삼선정책으로 뿌리 뽑힌 삶을 살아야 했던 일가족의 모습을 담아낸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왕 샤오슈아이는 이 영화를 자신의 부모와 삼선에서 일했던 이들에게 바친다고 썼다. 강제적으로 시행된 당의 정책은 일반 민중들 의 삶에 고통스러운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되고서야 그들은 비로소 자신의 원거주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칭홍의 아버지에게 그 기다림의 시간은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안겨준다. 어떻게든 자신의 아이들은 그 깡촌 시골에서 벗어나 상하이로 가게 해야한다는 일념으로 그는 칭홍과 어린 아들을 엄격하게 훈육하고 다그친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된 칭홍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둘도 없는 친구 찐찐, 그리고 남자친구 홍껀이 있는 그곳에서 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마을의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그곳 출신의 홍껀이 칭홍의 아버지 마음에 들 리가 없다. 칭홍의 뒤를 늘 따라다니며 일거수 일투족을 ...

쑨위(孫瑜, 1900-1990) 감독의 중국 무성 영화 두 편: 대로(大路, The Big Road, 1935), 체육 황후(体育皇后, Sports Queen, 1934)

  대로(大路, The Big Road, 1935), 104분 체육 황후(体育皇后, Sports Queen, 1934), 89분 1. 애국 영화 속 전복된 젠더 이미지, 대로(大路, The Big Road, 1935)   그의 부친 김필순은 의사로 독립운동가였다. 조선에서의 독립운동이 힘들게 되자 김필순은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북동부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져감에 따라 김필순에 대한 일제의 압박도 커져갔다. 결국 김필순은 일제에 의해 독살당한다. 가장을 잃은 가족의 삶은 무척 어려웠다. 힘들게 정규 교육 과정을 마친 그는 영화계로 흘러들게 된다. 준수한 외모의 그에게 운이 따른다. 그가 출연한 무성 영화가 연이어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조선인 김염(金焰) 은 그렇게 1930년대 중국 무성 영화계의 스타가 되었다. 쑨위(孫瑜) 감독의 1935년작 영화 '대로(The Big Road)' 는 김염의 대표작이다.   영화는 기근을 피해 길을 떠나는 한 가족을 비춰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린 아이를 두고 어머니가 죽고, 10년 후에는 아이의 아버지도 길에서 죽는다. 세월이 흘러 1930년대, 부모를 잃은 아이 진(김염 분)은 이제 20대 청년이 되었다. 진은 도로 건설 현장에서 만난 동료들과 형제처럼 지낸다. 건설 현장 인근의 식당에는 유쾌하고 발랄한 두 아가씨 딩샹과 자스민(리 리리 분)이 있다. 진과 동료들은 두 아가씨들과 친분을 쌓으며 즐겁게 보낸다. 하지만 좋은 시간도 잠시, 일본군의 침략이 임박함에 따라 도로 건설 현장에서 긴장이 고조된다. 그들이 짓는 도로는 중국군의 진군을 위한 것이다. 일본군과 내통한 지역의 유지 후는 도로 건설을 중단시키려고 한다. 진과 동료들이 그 뜻에 따르지 않자 후는 그들을 자신의 지하 감옥에 가둔다.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과 일본군을 동시에 상대해야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었다. 장제스는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세력을 ...

꿈의 미로, 중국 영화의 새로운 경향 Bi Gan 감독의 영화들

  1. 영화적 마법, 59분의 Long take: 지구 최후의 밤( 地球最後的夜晚, 2018)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고 그 길에 들어선 이들은 무척 많다. 중국의 Bi Gan(毕赣) 감독도 그들 가운데 한 명이다. 러닝타임 2시간 18분. 그의 2018년작 영화 '지구 최후의 밤( Long Day's Journey into Night )' 은 도입부에서부터 매우 불친절하고 지루한 서사를 이어간다. 심드렁하게 영화를 보다가 1시간이 좀 지났을 무렵이었다. 주인공 남자는 허름한 시골 극장에 들어가서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제목이 그제서야 뜬다. 남자는 동굴의 협궤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시작된 롱 테이크(long take)에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나중에 시간을 재어 보니 1시간에서 1분이 빠진다. 무려 59분의 롱 테이크. 이 기기묘묘한 영화적 마법을 보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허름한 유곽의 어느 창녀의 집에서 몸을 일으킨 남자는 기억 속에서 한 여자를 떠올린다. 영화의 전반부는 '루오'라는 이름의 이 남자가 완 치완(탕웨이 분)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주를 이룬다. 남자는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고향 Kaili를 방문한다. 계모로부터 받은 아버지의 유품인 벽시계 뒤에는 주소가 적힌 사진이 있다. 그 주소에는 죽어버린 루오의 친구 Wildcat의 모친이 살고 있다. 그 모친에게서 루오는 한때 Wildcat과 가까웠던 완 치완의 소식을 듣는다. 이렇게 대강의 줄거리를 적고 있지만, 사실 이 영화는 현실과 과거의 기억이 뒤엉켜 도대체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아마도 영화 속 세계를 설계한 감독 자신 뿐이리라.   비선형적인 시간 구조 속에서 비간은 이야기 중심의 서사에서 이탈하며 끊임없이 이미지들을 배열한다. 이 영화에서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타르코...

중국 현대 여성의 서사와 담배, The Cloud in Her Room(2021)

    Soju movie. 홍상수의 영화는 종종 그렇게 불린다. 이젠 외국 평론가들도 '소주'가 뭔지 안다. 가끔은 외국 리뷰어들의 흥미로운 질문글도 올라온다. 왜 '홍'의 영화에는 소주가 빠지지 않고 나오는가? 그 질문에 댓글을 달아본 적은 없지만, 나라면 이렇게 적겠다. '소주'가 들어가야 카메라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촬영 현장에는 소주가 박스째로 꽤 높게 쌓여있을 것이다. 중국의 신진 감독 Zheng Lu Xinyuan의 영화 'The Cloud in Her Room(2021)' 에도 홍의 소주 같은 매개체가 등장한다. '담배'이다. 여자 주인공을 비롯해 등장인물들은 계속해서 담배를 피운다.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니, 이 여성 감독이 골초라는 것도 확인된다.   22살의 여성 Muzi는 춘절을 맞이해 고향 항저우에 온다. 오래전에 이혼한 부모는 각자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무지는 새엄마와 어린 이복 여동생이 있는 아빠의 집에 머무른다. 무지와 또래 친구처럼 친밀한 친엄마에게는 외국 연인이 있다. 별다른 계획도, 할 일도 없는 무지는 가족이 함께 살던 예전의 낡은 아파트를 찾아가서 시간을 보낸다. 베이징에 있던 사진작가 남자 친구가 갑자기 무지를 찾아온다. 그 와중에 무지는 동네 술집 주인과 가벼운 연애를 시작한다.   어떤 영화들은 보고 나면 참 좋은 영화인데 막상 글로 쓰려면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반면에 별로인 영화인데 쓰고 싶은 것이 많을 때도 있다. 'The Cloud in Her Room(2021)'은 그 후자에 속한다. 이제 중국 영화 감독의 세대 구분은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내가 그나마 주의깊게 지켜본 감독이 6세대 감독 리위(李玉, Li Yu) 였는데, 한때 눈부셨던 리위도 영화적 재능이 바닥을 드러낸듯 하다. Zheng Lu Xinyuan은 중국 출신으로 미국 USC에서 영화를 전공한 해외파 신진 감독이다. ...

둑길에 흘려 보낸 것들, 둑길(紅顔, Dam Street, 2005)

    내 이름은 샤오윈. 올해 나이 스물 여섯. 별 볼 일 없는 시골 극단에서 노래를 부르며 웃음을 팔고 있지.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는 유부남인데, 딱히 죽고 못사는 사이도 아냐. 그냥 마음 둘 데가 없어서 그런 거지. 학교 선생인 우리 엄마는 나를 마치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셔. 극단에서 공연하고 버는 돈은 달리 쓸 데도 없고, 그냥 엄마를 드리는데 그걸 싫어하시는 것 같아. 그냥 사는 게 지겹고 그래. 그런데 요새 알게 된 마을의 조그만 녀석 샤오융이 자꾸 날 따라 다니네. 극단 사람들은 걔를 내 '꼬마 애인'으로 불러. 가만 보면, 이 심한 개구쟁이 녀석은 밉지가 않아. 가끔 난 얼굴도 모르는 그 아이 생각을 하곤 하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고 들었어. 어쩌면 내 인생이 이렇게 꼬여버린 건 그 아이가 생긴 이후부터였을 거야...   중국의 여성 감독 리위의 2005년 영화 ' 둑길(紅顔, Dam Street) '은 16살에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생의 행로가 뒤틀어져 버린 젊은 여성의 삶을 담아낸다. 리위는 2012년작 '로스트 인 베이징( 苹果, Lost in Beijing)'으로 급변하는 중국의 현실과 젊은이들의 모습을 대담하게 담아내었다. 이 작품의 일부 성적인 묘사와 몇몇 장면들은 중국 당국의 심기를 건드려서, 리위와 제작사는 한동안 영화 제작을 할 수 없었다. 그 이전 작품인 '둑길'에서는 도시가 아닌 시골, 그곳의 정체된 삶과 전근대적인 가치관 속에서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로스트 인 베이징'이 치열한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주었다면, '둑길'에서는 여성 감독으로서 인물들의 섬세한 내면 묘사와 깊이있는 연출이 돋보인다.   샤오윈은 고등학교 시절, 동급생 왕펑과 사귀다 임신하게 되고 그 사실이 알려진 후 공개적으로 퇴학을 당한다. '헤픈 여자'라는 손가락질과 비난을 오물처럼 뒤집어쓴 채로 지난 십 년을 ...

집을 찾아가는 여정, 관음산(观音山, 2010)

    "사실 쉬운 건 하나도 없어. 이 큰 도시에서 우리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지."   흐느껴 우는 난펑(판빙빙 분)을 위로하며 친구가 하는 말이다. 난펑은 재혼한 엄마에게 생활비를 보낸다. 술집에서 노래부르고 웃음 팔며 버는 돈이다. 술주정뱅이에 폭력까지 휘두르는 남자를 떠나지 못하는 엄마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술병이 나서 입원한 남자를 찾아온 난펑은 술 마시고 죽어버리겠다고 난동을 부린다. 이렇게 마음 둘 데가 없기는 난펑의 남자 친구 딩보(진백림 분)도 마찬가지. 병으로 죽은 엄마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여자 생겨서 재혼하는 아버지가 밉다. 페이저우라는 이름 대신 뚱보로 불리우는 친구는 부모와 불화로 집을 나왔다. 이들 셋은 버려진 빈집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다 집이 철거를 하게 되자, 셋집을 알아 보다 경극을 가르치는 창 여사의 집에 방을 얻는다. 뭔가 잘 어울리지 않을 이 네 사람들은 별 문제 없이 같이 살 수 있을까...   '둑길(2005)', '로스트 인 베이징(2007)', 이 두 작품에 이은 리위 감독의 '관음산(2010)'은 방황하는 젊은이들과 인생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만듦새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야기를 좀 편하고 쉽게 끌어가려다 보니, 인물들 간의 관계는 헐겁고 내적인 유기성은 떨어진다. 이 영화는 리위 감독에게 중국 내 흥행으로 큰 성공을 가져다 주었고, 주연 배우인 판빙빙의 연기도 꽤 좋은 편이어서 이 영화로 동경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대중성을 위해 자신만의 개성을 죽이고 적당히 타협한 결과인지도 모르지만, 영화는 다소 진부하게까지 느껴진다.   영화 속 난펑과 딩보, 뚱보가 직면한 현실의 괴로움은 그들만이 겪는 특출난 것이 아니다. 부모와의 갈등, 진로에 대한 고민, 연애와 생계의 문제, 이런 고민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관음산'의 세 친구들이 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상처입고 접혀진 삶의 날개, 공작(孔雀, Peacock, 2005)

    어떤 영화들은 보고 있노라면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이 다소 벅차게 느껴질 때가 있다. 무언가 보는 이의 내면을 건드리기 때문인데,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 어떤 의미로든 허탈함과 비애감을 느끼게 된다. 꾸창웨이 감독의 2005년작 공작(孔雀, Peacock)은 문화 대혁명이 끝나가던 무렵, 1970년대 어느 소도시에 살던 일가족의 삶을 펼쳐놓는다. 아직 문혁의 정치적 여진이 남아있는 어수선하고 침체된 시대적 분위기는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러나 꾸창웨이 감독은 최대한 정치적인 색채를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인물들의 이야기와 정서에 집중한다.   평범한 소시민 부부에게 세 명의 자녀가 있다. 영화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서사가 진행되는데, 맨 처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딸 웨이홍이다. 동네에 잠시 주둔한 낙하산 부대를 보며 새로운 인생을 꿈꾸던 웨이홍은 지원서를 내지만 탈락한다. 웨이홍은 크게 상심하지만, 지긋지긋하고 괴로운 삶의 출구는 도무지 쉽게 보이지 않는다. 동네 제약회사에서 약병이나 닦으며 사는 것은 견디기 힘든 모멸감만을 안길 뿐이다. 결국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해서 탈출구를 찾는다.   두번째 이야기는 바보형 맏이 웨이구오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이런 방식은 마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 (羅生門, 1950)'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인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되며 커다란 그림을 향해 나아간다. 다소 떨어지는 지능과 비만한 체구 때문에 남들에게 놀림받고 얻어맞는 그의 삶도 결코 녹록지 않다. 어렵게 얻은 일자리들마다 크고 작은 사고를 쳐서 그만두게 된다. 웨이구오는 엄마가 맺어준 다리 저는 아가씨와 결혼해서 포장마차로 그럭저럭 먹고 살아간다.   마지막 이야기는 막내의 몫이다. 웨이창은 바보형 때문에 학교에서 왕따 신세로 괴롭게 지내다 쥐약을 타서 형을 죽일 생각까지 하게 된다....

중국의 현대사를 반추하는 지아장커의 두 영화, 山河故人(2015)과 江湖儿女(2018)

      광산 도시 다통의 범죄 조직 보스 빈은 차오와 연인 사이이다. 둘은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만, 그 사랑은 곧 위기를 맞는다. 빈의 조직을 삼키려고 경쟁 조직은 자객들을 보낸다. 연인의 목숨이 위험에 처하자 차오는 빈의 총으로 그들을 위협한다. 차오는 총기의 출처에 대해 함구한 댓가로 5년의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다. 세상 밖으로 나와보니, 남자에게는 애인이 있고 여자한테는 '우리 인연은 끝'이라고 말한다. 여자와 남자의 사랑은 거기에서 정말로 끝난 것일까?    '江湖儿女'의 영어 제목은 'Ash Is Purest White'와 'Sons and Daughters of Jianghu', 이렇게 두 가지가 존재한다. '재는 가장 순수한 흰색이다'와 '강호의 아들과 딸'이라니,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제목들에는 어떤 뜻이 있는 걸까? 아마도 서구의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가장 어렵고 까다롭게 다가올 개념은 '강호(江湖, Jianghu)'일 것이다. '강호아녀'를 본 서구 비평가들의 글을 보면, 그들에게 이 영화에 내재된 문화적 코드를 해석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강호'는 무엇일까? 무협물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그 단어는 매우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무협 영화도 아닌 현대 중국을 그려낸 이 영화에서 '강호의 아들과 딸'이라니, 영화의 제목 '강호'에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강호'라는 단어의 기원은 중국의 고대 신화와 전설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교 철학에서부터 시작된 신선계( 神 仙 界 )의 개념, 이것은 점차로 모험과 방랑을 의미하는 이상화된 공간으로 변모했다. '강호'가 중국인들의 삶에 깊숙이 파고든 것은 명청(明清)시대였다. 강호를 배경으로 활약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

월극 여배우의 삶 속에 재현된 격동의 시대, 무대 위의 두 자매(舞臺姐妹, Two Stage Sisters, 1964)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Chorus)의 역할은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극의 내용을 설명하고, 때론 춤과 노래로 적극적으로 극에 참여하기도 한다. 중국의 3세대 감독 시에진(谢晋)의 '무대 위의 두 자매(Two Stage Sisters, 1964)'에서 영화에 배경으로 깔리는 합창단의 노래는 바로 그 코러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의 중요한 대목마다 상황을 요약하고 주인공의 정서를 잘 묘사해서 들려준다. 예를 들면 주인공인 두 의자매가 극적으로 대면하는 법정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재판정에 많은 참새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까마귀가 섞여 있구나' 여기에서 까마귀는 의자매를 갈라놓으려는 불의하고 사악한 이들을 뜻한다.   영화는 1930년대, 시골 마을을 찾은 월극(越剧) 극단의 공연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앳된 외모의 젊은 여자가 관객들 사이로 필사적으로 달아난다. 여자를 뒤쫓는 이들은 밧줄을 들고 있다. 여자는 극단의 소품 상자에 몸을 숨긴다. '춘화'라는 이름의 이 여자는 매매혼으로 팔려온 시집에서 도망을 쳤다. 단장은 반대하지만, 딱한 처지의 그를 연기 사부 싱이 받아들인다. 춘화는 싱의 지도하에 그의 딸인 여홍과 함께 무대에 서게 된다. 가난한 떠돌이 극단이지만, 춘화와 여홍은 의자매로 서로 힘이 되어주며 배우의 길을 걷는다. 사부가 세상을 뜬 후, 교활한 단장 아신은 두 자매를 상하이의 인기 극단에 팔아넘긴다. 대도시 상하이에서 춘화와 여홍은 인기 배우가 되지만, 단장 탕은 막대한 수익을 가로챌 뿐만 아니라 여홍에게 접근한다. 여홍은 안락한 생활을 꿈꾸며 점점 변해가고, 춘화는 그런 여홍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결국 무대 위의 두 자매는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데...   '무대 위의 두 자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여성들 사이의 연대이다. 봉건제의 굴레 속에서 겨우 빠져나온 춘화는 여홍의 부친인 싱 사부의 도움으로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같이 무대에...

과거로부터 걸려온 전화, 틈입자(闖入者, Red Amnesia, 2014)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구든 자신의 과거로부터 벗어난다는 일은. 왕 샤오슈아이의 2014년작 '틈입자(闖入者, Red Amnesia)는 어느 노부인의 길고 어두운 과거의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베이징의 낡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덩 부인의 일상은 늘 바쁘다. 결혼한 큰 아들 가족을 비롯해 혼자 살고 있는 막내 아들의 먹을거리를 챙기고, 요양원에 있는 노모를 방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버거워 보이는 핸드 카트를 끌고 다니며 악착스럽게 자식의 삶에 관여하는 덩 부인에게 본인의 삶이란 없어 보인다. 집에서 혼자 식사할 때, 죽은 남편을 떠올리며 대화하는 것이 덩 부인의 가장 개인적인 시간이다. 그런 변함없는 일상에 어느 날부터 걸려온 장난 전화가 균열을 일으킨다. 아무 말도 없이 끊어버리는 전화는 계속 이어지고, 창문으로는 돌이 날아온다. 큰 아들의 집 문 앞에는 쓰레기가 투척된다. 도대체 누가, 왜 그런 장난을 하는 것일까?   '상하이 드림(靑紅, 2005)', '11송이 꽃(我十一, 2011)'에 이어 나온 왕 샤오슈아이의 '틈입자'는 그의 문화대혁명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사실 이 영화를 그 연작의 마지막으로 보기도 어려운 것이 그의 2019년작 '아들(地久天长)'에서도 문혁은 변주된 주제로 이어진다. 문화대혁명이 이 감독에게 그토록 중요한 영화적 주제가 된 이유는 왕 샤오슈아이의 어린 시절에서 찾을 수 있다. 문혁 시기의 '하방(下放)'은 대도시 출신의 지식인과 중산층들에게 지방과 시골로의 집단적 이주를 강제했다. 그의 가족도 상하이에서 귀주 지역으로 이주했고, 그는 13살이 되었을 때에야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그 시절의 궁핍하고 고통스러웠던 가족의 삶은 왕 샤오슈아이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그는 '청홍'에서는 상하이로의 귀환을 꿈꾸는 시골 마을 일가족을, '아들'에서는 문혁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화해...

편지로 들여다 본 시대의 음울한 내면, 포스트맨(郵差, Postman, 1995)

    영화는 사람 키만한 커다란 우체통이 설치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북경의 우편배달부 샤오두는 상사로부터 새로운 구역의 배달 업무를 부여받는다. 전임 집배원은 배달해야할 편지들을 몰래 뜯어본 혐의로 체포되었다. 매우 내성적이고 다른 이들과 그 어떤 교류도 하지 않는 샤오두는 결혼한 여동생 부부와 살고 있다. 여동생은 신혼집을 구해놓고도 오빠를 떠나지 못한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뜬 후로 둘은 어린 시절부터 의지하며 살아왔다. 어느 날, 우연히 뜯어서 보게 된 편지 한 장을 시작으로 샤오두는 몰래 남들의 편지를 뜯어서 보는 것이 일과가 된다. 그는 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편지의 사연을 읽고 자신의 맘대로 답장을 위조해 보내기도 한다.   '포스트맨(郵差, 1995)'은 중국 6세대 감독 허지엔준의 2번째 장편 영화이다. 이 영화는 촬영은 중국에서 했으나, 후반 작업은 해외에서 해야만 했다. 중국 정부의 검열에 걸려서 작업을 더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 영화는 9년이 지난 2004년이 되어서야 해금되어서 자국에서 상영을 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내용이었길래 그랬을까? '포스트맨'은 매우 불편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샤오두가 배달해야할 편지를 몰래 뜯어서 읽는 행위 자체도 문제가 있는데, 편지의 인물들과 내용들도 예사롭지가 않다. 매춘부의 사랑 이야기, 동성애자들의 마약 중독 문제, 이런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중국 정부 당국이 진짜 열받을 만했겠구나 싶기도 하다.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읽기 시작한 편지들은 샤오두를 점점 더 비윤리적인 행동에 둔감하게 만든다. 죽은 아들의 소식을 모르는 노부부에게 아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편지를 써보낸다. 편지의 사연으로 여자의 직업이 매춘부라는 것을 알고는 스토킹을 하기도 한다. 관음증은 타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더 나아가 샤오두는 여동생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까지 품게 된다. 감독 허지엔준은 정말 갈데까지 가 보자는 생각이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