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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미로, 중국 영화의 새로운 경향 Bi Gan 감독의 영화들

 

1. 영화적 마법, 59분의 Long take: 지구 최후의 밤(地球最後的夜晚, 2018)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고 그 길에 들어선 이들은 무척 많다. 중국의 Bi Gan(毕赣) 감독도 그들 가운데 한 명이다. 러닝타임 2시간 18분. 그의 2018년작 영화 '지구 최후의 밤(
Long Day's Journey into Night)'은 도입부에서부터 매우 불친절하고 지루한 서사를 이어간다. 심드렁하게 영화를 보다가 1시간이 좀 지났을 무렵이었다. 주인공 남자는 허름한 시골 극장에 들어가서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제목이 그제서야 뜬다. 남자는 동굴의 협궤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시작된 롱 테이크(long take)에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나중에 시간을 재어 보니 1시간에서 1분이 빠진다. 무려 59분의 롱 테이크. 이 기기묘묘한 영화적 마법을 보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허름한 유곽의 어느 창녀의 집에서 몸을 일으킨 남자는 기억 속에서 한 여자를 떠올린다. 영화의 전반부는 '루오'라는 이름의 이 남자가 완 치완(탕웨이 분)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주를 이룬다. 남자는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고향 Kaili를 방문한다. 계모로부터 받은 아버지의 유품인 벽시계 뒤에는 주소가 적힌 사진이 있다. 그 주소에는 죽어버린 루오의 친구 Wildcat의 모친이 살고 있다. 그 모친에게서 루오는 한때 Wildcat과 가까웠던 완 치완의 소식을 듣는다. 이렇게 대강의 줄거리를 적고 있지만, 사실 이 영화는 현실과 과거의 기억이 뒤엉켜 도대체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아마도 영화 속 세계를 설계한 감독 자신 뿐이리라.

  비선형적인 시간 구조 속에서 비간은 이야기 중심의 서사에서 이탈하며 끊임없이 이미지들을 배열한다. 이 영화에서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Stalker, 1979)'에서 차용한 '물'의 이미지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산사태와 홍수 예보가 나오는 도시, 루오는 물이 흥건한 폐가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머문다. 완 치완은 루오와 함께 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완 치완의 행방을 찾아 시골 마을에 다다른 루오는 영화관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59분의 롱 테이크가 영화의 후반부를 이룬다. 동굴 안에서 소년을 만난 루오는 길을 잃었다고 말한다. 출구를 찾는 여정, 그것은 루오가 꿈에서 현실과 기억을 변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완 치완은 당구장을 운영하는 여주인으로, Wildcat의 모친은 사랑에 미쳐버린 늙은 여자로 나온다.

  어떻게 59분 동안 하나의 테이크를 이어갈 수 있을까? 루오가 타고 들어간 협궤 열차에서부터 시작된 테이크는 동적인 에너지에 의해 연속적으로 추동된다. 소년의 오토바이, 외줄 수송선, 움직이는 장난감 트럭, 당구공, 흥분해서 날뛰는 소... 마치 게임에서 최고난도의 퀘스트를 깨는 사람처럼 비간은 그 모든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통제한다. 물론 완성된 테이크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무려 7번에 이르는 시도 끝에 성공할 수 있었다(출처 indiewire.com). 드론을 이용한 촬영은 놀라운 공감각적인 풍광을 제시한다. 3D로 변환된 이 테이크는 오직 영화관에서만 온전히 볼 수 있다. 비록 일반 화면으로 볼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비간의 영화적 실험은 전율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다루며, 롱 테이크를 비중있게 배치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것. 비간의 영화 문법은 기존 중국 영화의 전통에서 특이하게 동떨어져 있다. 그의 2015년작 'Kaili Blues(路边野餐)'에는 신인 감독 비간의 영화적 근원을 알 수 있는 단서들이 흩어져 있다. 구이저우성은 중국 소수민족 '묘족(苗族)'들의 중심 거주지이다. 구이저우성 Kaili출신인 비간은 변방의 정서에, 이미지 중심의 새로운 서양 영화 문법을 결합시켰다. 자신의 영화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타르코프스키에게서 빌려온 물의 이미지를 기본으로 시계, 사진, 동굴, 터널, 기차와 같은 이미지들이 변주된다. '지구 최후의 밤'의 도입부에서 언급된 불교의 경전 '금강경(金剛經)'의 구절처럼 함축적이고 다의적 의미를 지닌 언어와 노래 또한 비간의 영화 세계를 이루는 주요한 소재가 된다. '카일리 블루스'에서 주인공은 계속해서 자신이 쓴 시를 읊는다. 두 영화에서 인물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2. 고장나고 망가진 현실을 떠나: Kaili Blues(路边野餐, 2015)

  '카일리 블루스'에서 전반부는 Kaili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전과 경력이 있는 Chen은 늙은 여의사와 마을 진료소를 꾸려간다. 그는 아이에게 무관심한 이복 동생을 대신해 어린 조카 웨이웨이를 보살핀다. 그러던 어느 날, 조카가 사라진다. Chen은 동생을 거칠게 다그치지만 조카의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웨이웨이를 찾아 나서는 길, 늙은 동료 의사는 Chen에게 자신의 옛 연인을 찾아서 셔츠와 카세트 테이프를 전해주라고 부탁한다. 기차를 타고 Chen이 도착한 곳은 Dangmai라는 기이한 마을이다.

  '지구 최후의 날'에서 루오가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는 그의 무의식, 꿈에 해당하는 영역의 탐험과도 같다. 과거와 현실이 마구 혼재된 루오의 이 여행은 '카일리 블루스'에서는 Chen의 Dangmai 여정과 맞닿아 있다. 주인공들은 어느 시점에서 현실의 경계를 넘어 자신의 내면 깊숙이 닻을 내린다. 물은 현실을 꿈으로 이행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루오가 완 치완과 함께 누워있을 때 강물이 그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Chen은 상상 속에서 어머니의 파란 색 신발이 강물에 가라앉는 것을 본다.

  현실이 아닌 그 모든 것은 주인공의 여정에 계속해서 틈입한다. 감춰둔 과거의 기억과 감정, 소망과 두려움이 인물을 감싼다. '카일리 블루스'에서 Chen은 자신의 기억 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과거와도 마주한다. Chen은 입고 갔던 셔츠를 벗고, 동료 여의사가 준 셔츠로 갈아입는다. 마치 영매(靈媒)가 되듯, Chen도 자신의 의뢰자인 동료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변모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의 행동은 예상과는 다르다. 옛 애인에게 전해달라는 카세트 테이프를 아내의 얼굴을 닮은 미용실 주인에게 선물한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있었을 때 아내를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그렇게 속죄하고 싶어한다. 늙은 여의사의 오래전 이루어지지 못한 애절한 사랑은 Chen의 과거와 닮아있다. 나중에 그는 여의사의 옛 애인이 고인이 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테이프는 전해지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렇게 '작별(farewell)'이란 노래가 실린 테이프는 어머니와 아들처럼 의지하고 지낸 두 의사의 과거를 통합한다.

  "그런데, 너 이름이 뭐냐?"
  "웨이웨이."
  "이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군."

  마침내 마을을 떠나려는 Chen은 자신을 오토바이에 태워준 청년에게 이름을 묻는다. 그의 이름 '웨이웨이'는 Chen이 찾는 조카의 이름이기도 하다. 꿈 같다고 혼잣말을 하는 Chen의 대사와 함께 40분 동안 이어진 Dangmai에서의 롱 테이크가 끝난다. 비간은 영화의 전반부에 Chen의 집 거실 벽을 스크린 삼아 달리는 기차의 이미지를 투영한다. 마치 진짜 기차가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것 같은 그 장면에서 기차는 위와 아래가 바뀐 전복된 이미지로 제시된다. 뒤집어진 기차처럼 Chen의 Dangmai 여정은 현실의 반대 지점에 자리한 꿈의 미로를 달리며 구현된다.

  '카일리 블루스'는 진료소의 고장나 깜빡거리는 전등불을 비춰주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Chen의 집 선풍기는 작동이 되다가 멈춘다. 마을에는 광인이 시시때때로 분란을 일으킨다. 라디오에서는 괴물과 같은 야인의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흐리고 습한 Kaili의 날씨는 세기말의 풍경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제 삼십 대에 접어든 이 젊은 감독에게 현실은 수리가 필요한, 망가진 그 어떤 것일까?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은 터널과 동굴 속에 서있다. '카일리 블루스'에서 영화의 제목은 어두운 터널에 서있던 Chen이 오토바이를 타고 떠날 때, 영화가 시작한지 30분 즈음에 등장한다. 비간에게 현실은 그 자체로 온전히 기능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는 현실을 벗어난 미지의 영역에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꿈의 미로로 초대한다.  




*사진 출처: artforum.com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지구 최후의 밤'의 영어 제목은 'Long Day's Journey into Night'이다. 제목과는 달리 영화는 극작가 유진 오닐의 동명 희곡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 1962)'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long-days-journey-into-night-1962.html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이반의 어린 시절(Иваново детство, 1962)'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19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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