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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2의 게시물 표시

12년의 기다림, Emily the Criminal(2022)

  *이 글에는 'Emily the Criminal(2022)'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영화는 한 젊은 여성이 채용 면접을 보고 있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면접관은 여자의 신상 정보에 기재된 음주 운전 전과 기록(DUI, Driving Under the Influence)에 대해 묻는다. 여자는 그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면접관은 명확한 해명을 요구한다. 그러자 여자는 거칠게 화를 내며 자신의 이력서를 챙겨서 나가버린다. 이 여자의 이름은 에밀리. 에밀리는 바로 그 전과 때문에 번번이 취업이 좌절된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에밀리는 7만 달러의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만 한다. 그런데 취직이 되지 않으니, 빚을 갚기는 커녕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걱정이다. 하는 수 없이 에밀리는 케이터링(catering) 업체에서 배달을 하며 거대 도시 LA에서의 삶을 겨우 버티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잠깐 일하고 200달러를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받는다. 그렇게 에밀리의 위험한 아르바이트가 시작된다.   John Patton Ford 의 'Emily the Criminal(2022)' 은 관객을 에밀리의 삶 속으로 순식간에 밀어넣는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디자이너로 일하고 싶어하는 에밀리에게 현실은 가혹하다. 에밀리는 방세 때문에 2명의 룸메이트와 허름한 아파트를 함께 쓰고 있다. 에밀리가 배달하는 포장 음식은 고층 건물 사무실의 번듯한 직원들의 식사를 위한 것이다. 그들은 에밀리가 음식을 차려놓는 것을 지켜보며 기다린다. 에밀리는 케이터링 업체의 고용 직원이 아니라 명목상으로는 개인 사업자이다. 하지만 그 계약은 회사의 뜻에 따라 언제든 해지될 수 있다. 고용 시장에서의 에밀리의 취약한 위치는 에밀리를 더욱 돈에 목마르게 만든다. 에밀리는 위조된 신용카드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기단의 일원이 된다.   어떻게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사기꾼의 세계에 발을 디딜

두 남자의 부서진 우정이 말해주는 것, The Banshees of Inisherin(2022)

  *이 글에는 영화 'The Banshees of Inisherin(2022)'의 일부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앞으로 자네가 나한테 말을 걸어 오거나 귀찮게 하면, 그때마다 내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네."   아일랜드의 평화로운 작은 섬 이니셰린. Pádraic과 Colm은 오랜 우정을 이어온 친구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콤은 파드릭에게 무시무시한 절교 선언을 한다. 파드릭은 그 모든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그는 도대체 콤이 자신에게 왜 저러는 건지 알 수 없다. 콤은 파드릭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친구이며, 그 우정은 무익하다는 말을 한다. 콤은 음악가로서 앞으로 작곡에 전념하겠다고도 덧붙인다. 매일 두 사람은 동네 맥주집에서 흑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제 파드릭은 혼자서 맥주를 들이켜야만 한다. 콤의 빈자리가 주는 외로움을 파드릭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떻게든 우정을 되찾을 방법이 있을 거야. 파드릭은 콤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애를 쓴다. 결국 콤은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서 파드릭의 집 앞에 내던진다.   Martin McDonagh 감독 의 'The Banshees of Inisherin(2022)' 는 의문의 도입부로 시작한다. 왜 콤은 파드릭에게 절교를 선언했을까? 무엇보다 절교를 당한 파드릭에게 그것은 가장 큰 의문일 것이다. 이는 곧 작은 섬 이니셰린의 주민들에게도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파드릭이 콤에게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닐까? 영화는 이 갑작스런 절교의 원인을 파고드는 여정을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에 파드릭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 파드릭 자신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파드릭을 '좋은(nice)' 사람 이라고 말한다. 파드릭이 지루하다는 콤의 말은 절교의 이유가 되기에 부족하다. 왜냐하면 콤은 그 지루한 친구 파드릭과 오랜 우정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콤에게 파드릭의 평범함과 무지가 갑자기 크게 다가

내가 뽑은 2022 올해의 영화

  내가 뽑은 2022 올해의 영화 1. Aftersun(2022)   31살이 된 딸은 자신이 11살 때에 아버지와 떠난 터키 여행을 회상한다. 오래전 여행에서 찍은 비디오 테이프가 알려주는 뜻밖의 진실.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슬픔과 감동으로 가슴이 뻐근해짐을 느낄 것이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2/aftersun2022.html 2. The Banshees of Inisherin(2022)   1923년 아일랜드 내전을 배경으로 한 부조리극. 고요하고 평화로운 섬에서 오랜 우정을 이어온 두 남자. 한 친구의 갑작스러운 절교 선언은 뜻밖의 파란을 불러온다. 배우들의 놀라운 열연, 아름다운 자연 풍광 속에서 관객은 인간 내면의 심연을 바라볼 기회를 얻는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2/banshees-of-inisherin2022.html 3. Tár(2022)   뛰어난 재능을 지닌 여성 지휘자 타르는 경력의 정점에서 갑자기 추락한다. 어떻게 타르는 무너져 내렸을까? 영화는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의 어두운 내면을 깊이있게 성찰한다. 이 영화에서는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의 여진도 감지된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2/todd-field-tar2022.html 4. Armageddon Time(2022)   감독 제임스 그레이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그리움과 고통 속에서 돌아본다. 그가 지나온 소년 시절은 1980년대의 시대상과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 영화가 들려주는 소년의 이야기 속에서 시대를 읽어내는 것은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2/armageddon-time-2022.html 5. The Fabelmans(2022)   70대 중반에 접어든 스티븐 스필버그가 털어놓는 그 자신의 진짜 이야

두 산파의 관계 속에 투영된 미얀마의 정치 현실, 산파들(Midwives, 2022)

    라카인주(Rakhine State) 는 미얀마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주이다. 리카인주에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불교도 아라칸족(Arakanese) 이, 그 다음으로는 이슬람교도 로힝야족(Rohingya) , 그리고 여러 소수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라카인주의 어느 마을, Hla라는 이름의 산파(産婆) 는 신참 조수 Nyo Nyo 를 수련시키는 중이다. Nyo Nyo는 로힝야족으로 이슬람교도이다. Hla는 불교도로 자신의 진료소를 갖고 있다. 2016년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으로 라카인주는 준전시( 準 戰 時 ) 상태에 처해 있다. 학살을 피해 이미 100만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 국경 지대로 떠났다.   라카인주에 남아있는 로힝야족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라카인주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 로힝야족은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며, 그로 인해 공교육과 의료 서비스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Hla는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로힝야족을 돕기 위해 Nyo Nyo를 조수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Hla는 동족들로부터 불교도가 로힝야족을 돕는다는 비난과 위협을 받는다. 그 때문에 진료소 운영도 어려워진다. 과연 Nyo Nyo의 산파 실습은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미얀마 출신 다큐멘터리 제작자 Hnin Ei Hlaing 는 5년에 걸쳐서 Hla와 Nyo Nyo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불교도인 Hla이 로힝야족 Nyo Nyo에게 보여주는 배려와 연대의식은 분명 놀라운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Hla의 말과 행동에서는 인종차별적 태도가 드러난다. Hla는 Nyo Nyo에게 'kala'라고 거리낌 없이 부른다. kala의 원래 뜻은 '남부 아시아 출신(South Asian descent)'이지만, 현재는 로힝야족을 멸시하는 '검은 얼굴(Black face)'이란 뜻의 말이 되었다. 말하자면 이 단어는 흑인(Black people)에게 깜둥이(N-wor

태양과 장미(太陽とバラ, The Rose on His Arm, 1956)

키노시타 케이스케가 바라본 전후의 일본 사회와 태양족 *이 글에는 영화 '태양과 장미'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한여름의 바닷가, 피서 인파로 가득한 해수욕장에 한 청년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앉아있다. 누군가 물에 빠졌다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바다로 몰려간다. 그러자 청년은 자리를 비운 누군가의 소지품을 잽싸게 훔쳐서 달아난다. 청년은 같은 또래의 불량배 친구들와 어울리며 절도 행각을 이어간다. 하는 일 없이 동네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주먹다짐을 하기도 한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보는 것이 너무나도 괴롭다. 키요시의 모친은 부잣집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 아들이 마음을 다잡고 돈을 벌어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어주면 좋으련만, 그 아들은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는다.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Keisuke Kinoshita) 감독의 영화 '태양과 장미(太陽とバラ, The Rose on His Arm, 1956)' 는 전후의 상흔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일본 사회를 응시한다. 이 영화의 제목에 나오는 '태양'은 새롭게 등장한 젊은 세대 '태양족(太陽族, Taiyouzoku)' 과 무관하지 않다. 그 단어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가 1955년에 발표한 소설 '태양의 계절(太陽の季節)'에서 유래되었다. 소설은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하며 무절제한 향락에 빠진 청년 세대의 모습을 그렸다. 기성 세대에게 태양족의 출현은 충격이었지만, 젊은이들은 태양족에 그들의 욕망을 투사했다. 영화사들도 태양족을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도 그런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 '태양과 장미'의 주인공 키요시를 '태양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하층 계급 불량배 청년의 모습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진정한 '태양족'은 키요시의 모친이 가정부로 일하는 부잣집 아들 마사히로이다. 부유한 부모를

Todd Field가 그려낸 예술가의 어두운 심연(深淵), Tár(2022)

  *이 글은 영화 '타르(2022)'의 부분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난 페트라의 아빠야."   냉정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여자 아이에게 말하는 사람은 금발의 중년 여성이다. 여자의 딸 페트라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딸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자신을 페트라의 아빠라고 소개하는 이 여자의 이름은 '리디아 타르'. 베를린 필 역사상 최초로 선출된 여성 수석 지휘자이다. 영화의 도입부, 뉴요커 페스티벌에서 인터뷰하기로 되어 있는 타르는 길고 화려한 이력으로 소개된다. 커티스 음악원 졸업, 빈 대학교 음악학 박사, 페루 원주민 마을에서 5년을 보내면서 민속 음악 연구, 2013년에 베를린 필 지휘자로 선출, 에이미와 토니 오스카 그래미 수상... 눈부시게 빛나는 타르의 경력은 이 여성이 클래식 음악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짐작케 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이어지는 음악계 관계자들과의 대화는 타르의 세속적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은퇴한 마에스트로는 타르의 든든한 지원자이며, 동료 지휘자는 타르의 음악적 통찰력을 배우려고 비굴함도 마다하지 않는다. 타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부지휘자를 내치고 자신의 사람으로 바꾸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이제까지 남성들이 주류였던 지휘계에서 타르는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했다. 지휘자로서 타르의 경력에는 '여성' 이 강조된다. 하지만 이 여자는 딸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스스로를 '아빠' 로 소개한다.    뉴욕에서 돌아온 타르가 베를린의 집에서 마주하는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아프고 불안해 보이는 동거인 샤론이다. 샤론은 타르와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며 불만을 표현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타르가 열렬히 재회의 기쁨을 표현하는 사람은 딸 페트라. 페트라는 타르와 샤론이 입양한 딸이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타르는 남편과 아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교향악단을 지휘할 때의 타르도 온화한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Aftersun(2022)

  *이 글에는 영화 'Aftersun(2022)'의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영화는 저화질의 캠코더 화면으로 시작한다. 11살 소피는 아빠를 인터뷰하겠다며 캠코더를 들고 이리 저리 움직인다. 소피는 아빠와 함께 터키로 짧은 여행을 왔다. 이 여행은 소피에게도, 아빠 케일럼에게도 특별하다. 소피의 부모는 이혼했고 소피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아빠와의 여행, 소피는 이 여행의 모든 것을 캠코더에 담고 싶어한다. Charlotte Wells의 장편 영화 데뷔작 'Aftersun(2022)' 은 관객을 1990년대 초반, 낯선 터키의 관광지로 데려간다. 30살의 아빠와 11살의 딸 은 행복한 여행의 추억을 만들고 돌아올 수 있을까...   저렴한 호텔에서 머물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아빠. 소피는 그저 아빠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기쁠 뿐이다. 하지만 딸을 먼저 재우고 테라스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는 이 젊은 아빠의 뒷모습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이 감지된다. 케일럼에게 '아빠'의 역할은 무언가 맞지 않는 옷처럼 보인다. 딸과 함께 포켓볼(pocketball)을 하려는 케일럼에게 관광객인 십 대 청년들은 같이 게임을 하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소피를 케일럼의 여동생(sister)으로 오인한다. 기분이 상한 케일럼은 자신은 소피의 '아빠(dad)' 라며 즉각 정정해준다. 소피와 오누이로 보이는 이 젊은 아빠 케일럼은 아마도 20대 초반에 '아빠'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을 것이다. 안정된 직업도 없는 그는 스스로를 책임지는 것도 버거운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가 소피와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느리고 무료하게 지나간다. 아빠와 딸은 늘어지게 소파에 누워있거나, 수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은 많은 말을 하지는 않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각별하다. 하지만 이 아빠에게는 무언가 문제가 있

키오스크를 통해 바라본 사람과 세상, Le Kiosque(The Kiosk, 2020)

    2미터가 채 되지 않은 좁은 공간에서 여자는 하루를 보낸다. 파리 16구, 빅토르 위고 거리의 신문 가판대(kiosk) 는 4대에 이르는 여자 집안의 가업이었다. 여자는 대학에서 장식 미술을 전공했지만, 예술로 먹고 사는 일은 언제나 버거운 일이다. 처음에는 어머니를 잠깐 돕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새 그 일은 6년 동안 이어졌다. 감독 알렉산드라 피아넬리(Alexandra Pianelli) 는 자신의 첫 장편 다큐 'Le Kiosque(The Kiosk, 2020)' 를 바로 그곳, 키오스크에서 찍었다. 감독이 머리에 두른 GoPro(액션캠) 와 카운터에 세워둔 iPhone 카메라에는 키오스크를 찾는 다양한 이들이 찍힌다. 새벽 5시, 키오스크의 셔터 문이 열리고 도시의 소음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다큐는 시작된다. 피아넬리는 자신이 서있는 카운터에 대한 소개부터 시작한다. 벽에는 온갖 메모와 주의 사항, 단골 손님들의 캐리커쳐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거스름돈이 있는 돈통에는 그 자리를 거쳐간 가족의 손가락 자국들이 마치 오래된 화석처럼 남아있다.     키오스크의 첫손님은 노숙자 다미엔이다. 고양이를 안고 온 남자는 늘 고양이를 잃어버리고 어디선가 또 주워오는 것 같다. 금발의 노부인 마르셀은 유쾌한 대화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발레를 배우는 어린 꼬마 숙녀도 엄마와 함께 온다. 길을 묻는 청년도 있다. 매일 가게를 찾는 단골들과의 대화는 유쾌하고 정겹다. 달달한 간식을 들고와서 나누어주는 영감님도 있다. 여러 손님들이 오가는 가운데 피아넬리는 키오스크에서 자신이 처리해야하는 일들을 설명한다. 300개가 넘는 잡지의 위치, 가격을 숙지해야하는 것은 기본이다. 단골 손님들의 구매 선호도를 잘 알고 있으면 판매에 도움이 된다. 말을 걸어오는 온갖 손님들에게 적절히 응대하는 것도 중요하다. 더러는 무례한 이도 있고, 추근대는 남자 손님도 있다. 카운터에 와서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인간도 있다. 과일 노점상을 하는 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인생의 의미를 이야기할 때, 소울(Soul, 2020)

    뉴욕의 중학교 기간제 교사 조 가드너는 학교로부터 정규직 채용 제안을 받는다. 비정규직에서 '비'자가 빠지는, 정말 기쁘고 좋은 소식인데 정작 조는 시큰둥하다. 사실 조에게는 좀 다른 꿈이 있다. 바로 재즈 피아니스트로 성공하는 것. 그런데 의외로 행운은 빨리 찾아온다. 조는 유명 재즈 뮤지션 도로시아 윌리엄스가 이끄는 재즈 콰르텟 오디션에 합격한다. 하늘을 날으는듯한 기분도 잠시, 조는 정말로 자신이 하늘을 날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도로 맨홀에 빠진 그는 바로 저승으로 향하는 천상 계단에 서있게 된 것이다. 잠깐, 난 정말 죽은 게 아니야. 세상에서 해야할 일이 있다구! 조는 그렇게 외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디즈니 Pixar의 애니메이션 '소울(Soul, 2020)' 의 도입부는 주인공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햄릿만 그 대사를 읊조리지 않는다. 우리의 주인공 조도 필사적으로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애를 쓴다. 사실 이 애니메이션의 도입부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Soul'의 스토리적 기원은 1940년대 영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이클 파웰(Michael Powell)과 에머릭 프레스버거(Emeric Pressburger)가 공동 감독한 'A Matter of Life and Death(1946)' 에 있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된 전투기 조종사는 천국 안내자의 실수로 목숨이 연장된다. 그를 저승으로 데려오려는 안내자와 치열한 줄다리기를 하게 되는 주인공. 이 영화에 나오는 천상 세계로 가는 계단을 비롯해 천국의 내부 모습은 'Soul'에서 조가 가게 되는 영혼 세계와 유사하다.   조는 지구에서 태어나기로 예정된 영혼을 훈련시키는 멘토가 된다. 조에게 배정된 영혼은 22번. 인생의 불꽃(spark) 를 찾아낸 영혼만이 지구로 내려갈 수 있는 배지를 받게 되는데, 22번은 만나는 멘토마

가족 드라마에 내재된 문화와 정체성의 갈등, The Farewell(别告诉她, 2019)

    사랑하는 가족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단 몇 개월, 영화 'The Farewell(2019)' 에서 주인공 빌리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 그러하다. 어린 시절에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중국계 미국인 빌리. 할머니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진 빌리는 할머니가 말기 폐암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가족들은 할머니가 받을 충격을 염려하여 병세를 숨기기로 결정한다. 마침 빌리의 사촌 결혼식을 앞두고 대가족은 고향인 중국 창춘에 모인다. 빌리도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중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빌리는 할머니에게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가족들의 결정에 마지못해 동의한다. 과연 할머니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은 끝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Lulu Wang 감독의 영화 'The Farewell(别告诉她, 2019)' 은 얼핏 보기에 가족 드라마라는 장르의 틀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빌리의 중국에서의 여정이 진행될수록 이민자의 정체성과 문화적 동질성에 대한 고민이 하나씩 펼쳐지기 시작한다. 창춘 공항에 도착한 빌리는 정신없이 달려드는 호객꾼들에 놀란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는 곳곳마다 건축중인 고층 건물들이 보인다. 어린 시절에 중국을 떠난 빌리에게 변화하는 중국의 모든 것은 낯설기만 하다. 호텔의 프런트 직원은 빌리가 미국에서 왔다는 말에 미국과 중국 두 나라 가운데 어디가 더 좋으냐고 묻는다. 빌리는 두 나라가 서로 다를 뿐이라고만 답한다. 숙모는 미국보다 중국에서 돈을 벌기가 쉽다며 빌리에게 중국으로 돌아오라며 호기롭게 말한다. 정작 숙모는 아들을 미국 유학 보내려고 애를 쓴다.   빌리에게 중국의 외양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그 실질은 가족주의적 전통에 단단하게 갇혀 있는 기이한 모습으로 비춰진다. 결혼식장 예약을 비롯해 피로연 음식을 정하는 모든 문제는 가모장(家母長)인 할머니의 손에 달려있다. 할머니는 손님들에게 체면이 깎여서는 안된다며 무엇이

5명의 흑인 청년들을 통해 바라본 미국 Foster Care System, We Gotta Get Out Of Here(2019)

  "LA에는 3만 명의 위탁 아동(foster child)이 있으며, 그들이 사회로 나갈 무렵에는 65%의 청소년들은 갈 곳이 없다."   다큐는 간결하고 건조한 자막과 함께 시작한다. Jen Araki 의 다큐 'We Gotta Get Out Of Here(2019)' 은 LA의 위탁 가정 출신 5명 청년들의 삶을 들여다 본다. 미국의 Foster Care System은 부모의 학대, 유기, 방치 등에 의해 제대로 양육될 수 없는 아동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 복지 서비스이다. 위탁 부모는 정해진 자격 요건을 갖추고 필수 교육 과정을 이수한 이들이 될 수 있다. 그 시스템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허점이 있는지는 다큐에 처음 등장하는 TY의 사례에서 알 수 있다. 21살 TY 는 3달 전에 위탁 가정을 떠나서 룸메이트 마이크와 지내고 있다. TY는 7살 때부터 위탁 아동이 되었고, 38개의 위탁 가정을 거쳤다. 그는 자신이 복용하고 있는 여러 약병들을 보여준다. 뇌전증(간질)을 앓고 있는 TY는 정기적으로 병원 진료를 받는 중이다. 만약 그가 직업을 얻는다면 정부로부터 받는 여러 혜택들은 박탈된다. 지병이 있는 TY가 직업을 갖는 일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TY의 룸메이트 마이크 의 경우는 상황이 좀 더 낫다. 인생의 진로를 군대에서 찾기로 결심한 마이크는 매우 성실한 청년이다. TY는 이제까지 자신이 함께 지낸 위탁 가정의 아이들은 대부분 정신 질환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건강하고 활달한 마이크가 아주 예외적인 친구라고 덧붙인다. 당연하게도 TY에게 마이크는 가장 친한 친구이지만, 마이크는 해병대 입대가 예정되어 있다. TY는 지금 지내고 있는 집에서는 더이상 지내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살 집을 알아봐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이다.   돈은 18살 TJ 와 19살 티파니 에게도 절실히 필요하다. 연인 사이인 둘은 열악한 위탁 가정 환경에서 무작정 뛰쳐나왔다. 하지만 당장 머물

제임스 그레이의 진정성 있는 유년의 고백, 아마겟돈 타임(Armageddon Time, 2022)

    영화 '질투는 나의 힘(2002)' 에서 배우 문성근이 연기한 잡지사 편집장 한윤식은 자신이 작가가 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작가라는 게 근본적으로 원한이 있어야 해. 영혼의 상처. 후벼파서 팔아먹을 상처가 있어야 되는데, 난 너무 평탄하게 자랐어.' 성장 과정에서의 고통과 상처는 창작자에게 저주이자 축복인지도 모른다. 감독 James Gray 는 영화 '아마겟돈 타임(Armageddon Time, 2022)' 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상처를 드러내 보인다. 1980년, 뉴욕의 퀸즈 거리에 살고 있는 11살 폴(Banks Repeta 분)은 공립학교 6학년의 첫학기를 맞이한다. 완고한 담임 선생에 대한 반항심을 공유한 폴과 흑인 동급생 조니는 곧 친구가 된다.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진 폴과 NASA의 직원이 되고픈 조니. 폴은 학교 화장실에서 조니가 가져온 대마초를 나누어 피다 담임에게 걸린다. 그 일을 계기로 폴의 부모는 폴을 사립학교로 전학시킨다.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겉돌던 폴은 조니와 함께 가출할 생각을 한다. 과연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두 친구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진 폴과 NASA의 직원이 되고픈 조니. 둘은 서로의 꿈을 공유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그들 사이에는 분명한 계층적 장벽이 존재한다. 폴의 외할아버지 애런(앤소니 홉킨스 분)은 어린 손주 폴에게 정서적 지지와 함께 물질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폴은 조니에게 외할아버지와 런던의 명소 Big Ben을 구경했던 이야기를 한다. 부유한 외할아버지가 있는 폴과는 달리, 조니는 빈민가에서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살고 있다. 흑인이라는 피부색과 가난, 양육자의 부재는 조니의 상황을 악화시킨다. 결국 집에서도 머물 수 없게 된 조니는 폴의 집 뒷마당에 은신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관객은 1980년대 유대인 이민자 출신의 가정 풍경 속으로 초대받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