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Aftersun(2022)

 

*이 글에는 영화 'Aftersun(2022)'의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영화는 저화질의 캠코더 화면으로 시작한다. 11살 소피는 아빠를 인터뷰하겠다며 캠코더를 들고 이리 저리 움직인다. 소피는 아빠와 함께 터키로 짧은 여행을 왔다. 이 여행은 소피에게도, 아빠 케일럼에게도 특별하다. 소피의 부모는 이혼했고 소피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아빠와의 여행, 소피는 이 여행의 모든 것을 캠코더에 담고 싶어한다. Charlotte Wells의 장편 영화 데뷔작 'Aftersun(2022)'은 관객을 1990년대 초반, 낯선 터키의 관광지로 데려간다. 30살의 아빠와 11살의 딸은 행복한 여행의 추억을 만들고 돌아올 수 있을까...

  저렴한 호텔에서 머물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아빠. 소피는 그저 아빠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기쁠 뿐이다. 하지만 딸을 먼저 재우고 테라스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는 이 젊은 아빠의 뒷모습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이 감지된다. 케일럼에게 '아빠'의 역할은 무언가 맞지 않는 옷처럼 보인다. 딸과 함께 포켓볼(pocketball)을 하려는 케일럼에게 관광객인 십 대 청년들은 같이 게임을 하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소피를 케일럼의 여동생(sister)으로 오인한다. 기분이 상한 케일럼은 자신은 소피의 '아빠(dad)'라며 즉각 정정해준다. 소피와 오누이로 보이는 이 젊은 아빠 케일럼은 아마도 20대 초반에 '아빠'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을 것이다. 안정된 직업도 없는 그는 스스로를 책임지는 것도 버거운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가 소피와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느리고 무료하게 지나간다. 아빠와 딸은 늘어지게 소파에 누워있거나, 수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은 많은 말을 하지는 않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각별하다. 하지만 이 아빠에게는 무언가 문제가 있다. 한밤중에 바닷가로 달려나간 그는 마치 죽어버릴 것처럼 파도를 향해 돌진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 돌아와서 잠든 딸의 옆에 머문다. 그가 돌아온 가장 큰 이유는 딸 소피 때문일 것이다. 석고 붕대를 한 그의 손이 어떻게 하다 다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손은 어떤 면에서 케일럼의 정신적 불안정성에 대한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방에 혼자 있을 때에 큰소리를 내며 서럽게 울기도 한다.    

  소피는 아빠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그렇지만 무엇이 아빠를 힘들게 하는 것인지 어린 소피는 알지 못한다. 소피는 아빠가 옆에 없는 시간을 십 대 청소년 관광객들을 관찰하면서 보낸다.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그들의 모습은 소피에게 낯설면서 신기하다. 소피는 또래 소년과 입맞춤을 하기도 하고, 두 청년이 서로 부둥켜 안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한다. 관객은 11살의 소피가 20년이란 세월이 흘러 어떤 여자와 함께 있는 침대에서 눈을 뜨는 것을 본다. 그 집에서는 아기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 어떻게 소피가 아기가 있는 여성 동거인과 살게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터키 여행은 소피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탐구의 시작임을 짐작케 한다.    

  영화는 중간 중간 수수께끼 같은 장면을 보여준다. 나이트클럽에서 정신없이 춤을 추고 있는 케일럼과 그런 그를 쳐다보는 젊은 여성이 있다. 케일럼은 딸 소피 몰래 관광지의 나이트클럽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일까? 물론 케일럼은 딸과 모든 시간을 하지도 않았고, 딸의 요구에 무조건 응하지도 않았다. 관광객을 위한 노래 자랑 시간에 소피는 케일럼에게 무대에 나가 같이 노래를 부르자고 한다. 하지만 케일럼은 딸의 제안을 거절한다. 소피는 혼자 가라오케에 맞추어 쓸쓸히 노래를 부른다. 케일럼은 그런 소피를 무심하게 쳐다볼 뿐이다. 그때 소피가 부른 노래는 R.E.M.의 'Losing My Religion'. 이 노래는 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미국 남부의 속어로 'lose religion'은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뜻이다. 노래는 짝사랑하는 사람의 괴롭고도 절망적인 심정을 담았다.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아빠 케일럼에 대한 소피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빠와 딸은 곧 다시 화해하고 관광지에서의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낸다. 레스토랑에서의 저녁 식사 시간, 케일럼과 소피는 웨이터에게 부탁해서 둘의 모습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는다. 검은색의 필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둘의 다정한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변한다. 그 폴라로이드 필름처럼 관객은 나이트클럽의 케일럼을 바라보던 젊은 여성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된다. 정신을 잃고 미친듯이 춤추는 아빠 케일럼을 소피는 필사적으로 붙잡으려고 한다. 소피는 아빠를 끌어안지만, 곧 소피는 아빠를 놓친다.

  31살이 된 딸은 11살에 아빠와 함께 찍은 홈비디오를 본다. 조악한 화질 속에 담긴 아빠와 딸의 시간은 마침내 봉인에서 풀려난다. 어느 시점에서 아빠는 어린 딸의 삶에서 사라져버렸다. 딸은 그 아빠를 흔들리는 홈비디오 화면과 불완전한 기억의 방에서 그리움으로 불러낸다. 서른 살의 아빠가 맞닥뜨려야 했던 인생의 무게와 불안, 고통과 외로움을 딸이 이해하기까지 2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11살의 소녀가 알 수 없었던 것을 이제 31살의 소피는 바라보고 느낀다.

  영화 'Aftersun'에서 아빠와 딸이 함께 했던 시간은 파편화되고 모호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관객은 소피가 깨닫게 된 아빠 케일럼의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 이 영화의 그러한 불친절함은 놀랍게도 영화가 가진 위대한 본질과 연결된다.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기(retrospection). 영화가 마침내 끝났을 때 나는 자리에서 한참을 일어날 수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고, 가슴이 먹먹해져옴을 느꼈다. 감독 Charlotte Wells는 혈육지친(血肉之親)에 대한 내밀한 이해와 사랑을 매혹적인 영상 태피스트리로 직조해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Shirley Clarke의 실패한 타자성 탐구, Portrait of Jason(1967)

  1. 이상한 나라의 Jason Holliday   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한다. 자신의 이름이 Jason Holliday라고 말한 그는 본명이 Aaron Payne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유명한 재즈 연주자)와도 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가진 직업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가 말한 직업들 중에는 남창(whore)도 있다. 손에 술잔을 든 그는 심부름꾼(houseboy)으로 시작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늘어놓는다. 미국의 독립 영화 제작자 Shirley Clarke는 1966년 12월 3일, 자신이 머물던 첼시 호텔(Hotel Chelsea) 펜트 하우스에서 제이슨 할러데이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다큐를 찍었다. 저녁 9시에 시작된 촬영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Portrait of Jason(1967)'이다.   제이슨은 술에 취해 기분이 아주 좋아보인다. 화면 밖에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셜리 클라크는 제이슨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인형극의 조종하는 사람(puppeteer)처럼 클라크는 제이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 같다. 흑인이며 동성애자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미리 준비해놓은 소품으로 작은 공연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소품 가방에서 꺼낸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는 제이슨은 여성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킬킬거린다. 제이슨이 원하는대로 술과 담배가 계속해서 제공된다. 시간이 갈수록 술에 취한 제이슨의 말소리는 알아듣기 어렵게 뭉그러진다.   러닝 타임 1시간 45분의 이 다큐 'Portrait of Jason(1967)'은 보면 볼수록 기이하다. 관객은 'Jason Holliday'라는 인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도록 초대받지만, 다큐가 끝나고 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제이슨이 가진 뛰어난 공연자(performer)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