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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보면 허술하고 우스운 부분도 있겠지만, 의외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장면들이 꽤 있다. 예를 들어 공자우의 자객들이 심야의 공터에 장기판을 그려놓고 부홍설과 연남비를 장기 두는 것처럼 공격하는 장면이 그렇다. 우리의 주인공 부홍설은 자객들의 꽤 공들인 장기판 세팅을 그리 어렵지 않게 무력화해버리기는 한다.

  이 영화에서 또한 눈길을 끄는 부분은 노파 자객의 등장이다. 사악하기 짝이 없는 노파 자객의 활약은 생각보다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와호장룡(卧虎藏龙, 2000)'에 나오는 푸른 여우의 선구적 캐릭터처럼 보일 정도다. 무협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약하고 울기나 하는, 때로는 짐짝처럼 귀찮은 존재처럼 그려질 때가 많은데 이 영화에서는 여성 자객들도 여럿 나온다. 또한 음흉하기 짝이 없는 기생 명월심 캐릭터도 있고, 지고지순한 추옥정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은 빈약한 서사를 나름대로 충실하게 메꾸어 나가는 역할을 한다.

  계속 이어지는 '대결-이동-대결-이동'에 좀 지칠 무렵, 부홍설은 공자우의 근거지에 들어간다. 가면을 쓴 공자우와의 대결에서 이기고 보니, 상대가 연남비였다. 그는 가짜였다. 진짜 공자우는 명월심을 보내 부홍설에게 자신의 밑에 들어오면 부와 권력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부홍설은 그 제안을 거절한다. 강호의 일인자가 되기 위해 고향과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 방랑의 세월을 보냈던 그에게 돈과 권력, 여자는 먼지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는 마치 도인처럼 행동한다. 영화는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초연한 부홍설의 과거에 대해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다. 다만 관객은 그가 엄청난 무공을 가졌다는 것과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라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우연히 만난 가난한 창녀에게 밥을 사주고 여비를 건네는 모습은 상남자 그 자체이다.

  다시 영화의 제목으로 돌아간다. '천애명월도'는 칼의 이름이 아니다. '천애(天涯)', 이승에 살아있는 핏줄이나 부모가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명월(明月)'은 그가 한 때 마음을 주었던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기생 명월심을 가리킨다. '도(刀)'는 칼 하나에 의탁해 강호를 떠도는 부홍설 자신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이라는 고독한 검객의 방랑 서사를 일컫는 제목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의 내적 여정은 모두 생략해 버리고, 오직 그의 출중한 무공만을 펼쳐서 보여준다. 과감한 물량 공세가 돋보이는 대결 장면들에 비해 인물들의 캐릭터 설정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적룡의 능수능란한 무술 연기와 다양한 장치들이 등장하는 대결 장면들을 보는 것으로도 나름대로 즐겁다. 적룡이 휘두르는 검이 특이한데, 팔에 끼운채 회전이 가능하며 쇠줄까지 장착된 검이다. '천애명월도'는 강대위와 더불어 쇼브라더스 무협 영화의 주역이었던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사진 출처: faceb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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