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6월, 2022의 게시물 표시

흔들리는 사회, 폭주하는 아이들: 태풍 클럽(台風クラブ, Typhoon Club, 1985)

*이 글에는 영화 '태풍 클럽(Typhoon Club, 1985)' 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어의 '다녀왔습니다(ただいま, 타다이마)' 와 '어서 와(おかえり, 오카에리)' 는 마치 한 벌의 젓가락 같다. 집에 들어오는 사람이 'ただいま'라고 말하면, 집안에 있는 사람은 'おかえり'라고 응답한다. 영화 '태풍 클럽(台風クラブ, 1985)' 의 중학생 켄은 허름한 판잣집에 살고 있다. 켄은 현관문을 계속 열고 닫으면서, 'ただいま'와 'おかえり'를 반복한다. 집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켄에게 가족이 있기는 하다. 폐인처럼 보이는 켄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서 한밤중에 집밖을 서성인다. 그렇다. 켄에게는 가족이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화 속에서 켄은 주문처럼 'ただいま'와 'おかえり'를 뇌까린다.   소마이 신지((相米慎二) 감독의 '태풍 클럽(1985)'의 주인공들은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이다. 8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기이하고 불편하게 엉키며 직조된다. 영화는 도입부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는다. 여름날 저녁, 시골 학교의 수영장에서 여중생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동급생 아키라는 마침 수영을 하고 있다가 여학생들을 훔쳐 본다. 여학생들은 그런 아키라를 골려주기 위해 아키라에 목에 끈을 묶어 수영장 밖으로 억지로 끌어낸다. 아키라는 익사할 위기에서 겨우 되살아난다. 학교에서 바보 취급을 받는, 왕따의 대상인 아키라에게 여학생들이 집단으로 휘두르는 폭력. 무언가 이 학교는 범상치 않은 곳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 지역에 태풍이 예보된 가운데, 영화는 다큐멘터리처럼 시간 순서대로 진행된다. 목요일부터 월요일까지, 태풍이 지나가는 동안 아이들의 일상적인 삶이 뒤흔들리고 억눌렸던 본성이 폭발한다. 주말 동안 어쩌다가 학교에 갇힌 아이들

미국 보수 우파의 LGBT 공포증, What is a Woman?(2022)

    한 남자가 자신이 궁금해하는 질문 하나를 지독하게 파고 든다. 'What is a Woman?' 남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의사와 심리학자를 비롯해 정치인, 교수, 그리고 저 멀리 케냐까지 가서 마사이 부족을 만난다. Justin Folk의 다큐 'What is a Woman?(2022)' 은 6월에 미국에서 개봉된 후 격렬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 다큐를 이끌어 가는 이는 미국의 보수 정치 평론가 Matt Walsh . 그는 '여성'이란 단어의 정의(definition)가 매우 궁금하다. 그런데 그 궁금증의 이면에는 non-binary(제 3의 성, 트랜스젠더나 젠더 퀴어에 속하는 이들) 에 대한 혐오가 내재되어 있다.   Journey . 이 다큐는 성차(sex differences)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닌 보수 정치 평론가의 도발적인 탐구 여정이다. 그는 생물학적 성을 부정하는 이들, 특히 트랜스젠더를 LGBT Movements가 만들어낸 비현실적 존재로 인식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억지 소리를 쏟아내지는 않는다. 과연 '여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에 대한 매트 월쉬의 질문은 전문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진지하게 공명한다. 트랜스젠더이면서 성전환 수술 전문의가 된 의사, 페미니스트 성심리 상담가, 성전환시술인 호르몬 요법을 전문으로 하는 내과 의사, 젠더 연구 전문가인 사회학과 교수... 월쉬의 인터뷰는 '젠더(gender, 사회적으로 획득한 성정체성)'의 실제적 근거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공격적으로 진행된다. 그는 '젠더'를 터무니없는 허상으로 인식한다.   케냐로 날아간 월쉬는 마사이족들과의 인터뷰를 자신의 신념에 단단하게 덧댄다. 마사이 족장은 'non-binary'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월쉬의 질문에 웃음을 터뜨린다. 마사이족 사람들에

견고한 인습의 벽 앞에 선 소녀, Yuni(2021)

  *이 글에는 영화 'Yuni(2021)'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중년의 부부가 Yuni의 집을 찾아온다. 여고생 유니는 이제 두 번째 청혼 신청을 받는다. 늙수그레한 남자는 두툼한 돈봉투를 내민다. 결혼 전, 신부의 집안에 건네는 지참금이다. 남자는 아내의 동의를 얻었다면서 유니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 나라에서는 본부인의 동의만 있다면, 남자는 세 명의 아내를 더 둘 수 있다. 유니의 집안은 그리 넉넉치 않다. 유니의 부모는 돈을 벌기 위해 먼 도시 자카르타에서 일하고 있다. 할머니와 지내는 유니는 이제 고 3, 명석한 이 소녀는 대학에 가고 싶지만 학비 때문에 고민이다. 그런 가운데 연달아 혼담이 들어온다. 유니가 사는 곳에서는 두 번의 혼담을 거절한 여자는 영원히 결혼하지 못한다는 믿음이 있다. 유니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우리에게는 멀고 낯설게 느껴지는 인도네시아 영화. Kamila Andini 감독의 영화 'Yuni(2021)' 는 인도네시아 시골에 사는 여고생 유니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속옷부터 시작해서 방안의 물건이며 소지품이 온통 보라색인 소녀와 만난다. 유니는 보라색만 보면 눈이 뒤집힌다. 보라색 물건이 눈에 띄기만 하면 훔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보라색 매니아 유니. 그렇지만 학교에서는 치렁치렁한 교복 치마와 흰색의 히잡(hijab)만이 허용될 뿐이다. 유니의 학교에서는 이슬람 율법에 의한 교육이 강화되고 있다. 조만간 여학생들이 처녀성(virginity) 검사를 받게 될 거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음악 동아리 활동은 이슬람적 가치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금지당한다. 좀처럼 믿기 어렵지만, 그게 유니가 처한 현실이다.    오랜 가부장적 전통은 유니 또래의 소녀들에게 남자에 예속된 삶을 강요한다. 유니의 동급생 가운데에는 일찍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여학생도 있다. 조혼(早婚, child marriage) 은 인도네시아 사회의 커다란 사회 문제

호주 아웃백의 공포와 야만, Wake in Fright(1971)

    남자는 자신을 교육부의 '노예(slave)'라고 소개한다. 그 말에 경찰관 크로포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크로포드는 남자에게 거듭 맥주를 권한다. 호주의 내륙 오지(outback) Tiboonda, 학교 교사 존 그랜트는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 학교를 이제 막 떠나왔다. 그에게는 6주 동안의 크리스마스 휴가가 주어졌다. 시드니로 날아갈 비행기를 타기 위해 그는 인근 소도시 Bundanyabba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 술집에서 만난 이 경찰관은 친절한듯 보이지만 그 태도는 꽤나 위압적이다. 존은 내키지 않으면서도 이 낯선 도시에서의 하룻밤을 술집 말고 달리 보낼 데가 없다.   그가 크로포드의 소개로 들어간 음식점 한 켠에서는 동전 도박장이 열렸다. 두 개의 동전을 던져서 둘 다 앞면이냐, 뒷면이냐에 따라 돈을 따는 단순한 도박. 남자들은 도박장의 열기에 취해있다. 존은 심심풀이로 도박에 참가한다. 행운의 여신이 연달아 미소를 짓는다. 단숨에 400달러를 따낸다. 좀 더 운이 따라준다면, 그를 교육부의 노예로 만든 1000달러의 보증금을 갚을 수 있다. 휴가비까지 탈탈 털어서 도박판에 건다. 그가 도박장을 나왔을 때, 그의 수중에는 담배 몇 개비와 약간의 동전이 전부였다. 존 그랜트는 말 그대로 분단야바에 발이 묶인다. 과연 그는 여자 친구가 있는 시드니에 갈 수 있을까...   Ted Kotcheff 감독의 영화 'Wake in Fright(1971)' 는 호주 출신의 작가 Kenneth Cook 의 동명 소설(1961)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케네스 쿡은 자신이 머물렀던 Outback의 소도시 Broken Hill(영화에서 가상의 도시 분단야바로 형상화됨)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소설로 썼다. 그는 내륙 오지의 황량한 환경과 그곳 사람들의 무지와 야만성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소설은 그러한 케네스 쿡의 날것 그대로의 감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영화는 143쪽 가량의 중편 소설을 충실히 재현한

정념(情念)의 강물, 스자키 파라다이스(洲崎パラダイス 赤信号, Suzaki Paradise: Red Light, 1956)

    1946년,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일본의 공창제(公娼制)를 폐지시켰다. 종래의 사창가는 특수음식점 거리로 부르며 경찰의 관할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그곳의 명칭이 이른바 적선지대(赤線地帯) 이다. 청선지대(青線地帯) 는 외형은 일반 주점과 음식점의 간판을 내걸었으나 암암리에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곳을 뜻했다. 적선과 청선으로 나뉘어 관리되던 일본의 성매매 산업은 1956년에 의회에서 통과된 성매매 방지법으로 전환기를 맞는다. 카와시마 유조 감독의 영화 '스자키 파라다이스(Suzaki Paradise: Red Light, 1956)' 는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이듬해에 제작된 그의 영화 '막말태양전(Sun in the Last Days of the Shogunate, 1957)' 에도 그러한 시대 배경이 삽화적으로 제시된다.   전후 일본 영화사에서 나루세 미키오가 성취한 '여성의 삶'에 대한 정밀한 초상은 독보적이다. 그에 비한다면 카와시마 유조(川島雄三) 감독이 그려낸 전후 일본 사회와 여성에 대한 영화적 탐구는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그의 영화 '풍선(風船, The Balloon, 1956)' 은 이 감독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전쟁 미망인으로 술집 여종업원이 된 여성은 부자 애인에게 버림받자 죽음을 택한다. 남자는 여자의 죽음에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와 그의 어머니는 윤리적 과오조차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풍선'에서 카와시마 유조는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풍경과 하층민의 삶을 분명하게 대비시킨다. 이 영화는 전후의 경제적 풍요가 가져다준 탐욕과 내면의 타락을 직시하게 만든다.   '풍선'과 같은 해에 만들어진 '스자키 파라다이스'에서 카와시마 유조의 시선은 사회의 맨 밑바닥으로 향한다. 영화의 주인공 츠타에와 요시지는 당장 수중에 밥 사먹을 돈도 없는 가난한 연인들이다. 남

가족주의와 여성의 삶, '딸, 아내, 어머니(娘・妻・母, Daughters, Wives and a Mother, 1960)

     이제 환갑을 앞둔 아키 여사는 5남매를 두었다. 모처럼 가족이 모인 자리,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집 이야기가 나온다. 시세가 얼마인지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막내딸 하루코가 계산기를 찾으면서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다. 하루코는 대략의 감정가를 바탕으로 가족 구성원들 각자가 받게될 돈을 계산한다. 하루코의 셈법을 듣다 보면, 당시 일본 민법에서 여성 배우자의 상속분은 3/1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루세 미키오의 1960년작 '딸, 아내, 어머니(Daughters, Wives and a Mother)' 를 관통하는 주제는 역시 '돈'과 긴밀히 얽혀 있다. 어머니 앞에서 태연히 유산 상속분을 이야기하는 자식들. 어머니 아키 여사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자식들을 바라볼 뿐이다.   영화 '딸, 아내, 어머니'의 가족 구성원들은 돈과 관련된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장남은 아내의 삼촌이 하는 공장에 투자하면서 형제들 모르게 집을 저당잡혔다. 둘째 딸 카오루는 홀시어머니의 시집살이에서 벗어나 분가를 하고 싶다. 그런데 돈이 없다. 큰며느리 카즈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툭하면 사업 자금 빌려달라고 찾아오는 삼촌 때문에 괴롭다. 이 가족에게 큰딸 사나에(하라 세츠코 분)가 가진 백만 엔의 돈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갑작스런 사고로 남편을 잃은 사나에는 남편의 보험금을 받는다. 큰오빠는 투자 좀 하겠다고, 여동생은 아파트 얻을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러닝 타임 2시간 3분, 컬러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로 제작된 이 영화는 나루세 미키오의 완성판 가족극 같다. 영화 속 아키 여사의 자녀들은 큰딸 사나에를 제외하고 매우 계산적이고 냉정하다. 유이치로는 처삼촌의 부도 때문에 집이 은행에 넘어가게 될 거라고 동생들에게 알린다. 그러자 동생들은 자신들의 상속분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유이치로가 폭탄 선언을 한다. "그럼 난 어머니 모실 수 없다. 의무도

그 질긴 애증의 서사, MBC 드라마 '아들과 딸(1992)'

    오래전 드라마 '아들과 딸(1992)'은 케이블 드라마 채널에서도 나름대로 사랑받는 재방목록에 들어간다. 누군가 그 드라마에서 자신에게 가장 충격적인 대사는 바로 이것이었다고 썼다.   "아이고, 귀남이한테 폐병 옮기는 거 아녀?"   아들 딸 쌍둥이로 태어난 귀남과 후남, 늘 모든 애정을 독차지하는 귀남에 비해 구박덩어리로 자란 후남은 온갖 고생을 하다가 결핵에 걸렸다. 그걸 듣고 귀남 엄마가 하는 말이다.   그 드라마를 주의깊게, 인상적으로 본 연령대는 아마도 30대 후반에서 50대에 이르는, 특히 여성 시청자들이 아닐까 싶다. 아직도 올라오는 그 드라마 감상평을 보면 그러하다. 그 연령대의 여성들이 경험한 시대는 이전 세대에 비하면 사회적으로 여성 인권이 많이 향상된, 눈에 보이는 남녀차별, 가부장제가 물리적으로 해체되어가던 시절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관습법적으로 굳어져온 남성 위주 사회의 정신적 지형은 견고했다. 드라마 '아들과 딸'은 그러한 사회적 균열이 일어나던 1990년대에 방영되면서 높은 시청률과 함께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었다.   정혜선이 분한 귀남 엄마(그는 결코 후남 엄마로 불리우지 않는다)가 보여주는 지독하고, 신앙에 가까운 '아들 사랑'은 결핵에 걸린 딸 걱정 보다는 아들에게 전염이 될까 걱정하는 것에까지 미친다. 그걸 보는 이들에게는 그쯤되면 진짜 딸이 맞나 싶을 정도의 생각마저 들게 한다. 나중에 후남이가 귀남의 친구 석호와 결혼하게 되자, 사법고시에 합격한 석호를 보는 게 귀남이가 괴롭지 않겠냐며 딸의 혼사를 탐탁지 않게 여기기도 한다. 한마디로 딸 잘되는 것이 귀남 엄마는 '싫다'. 그 이유는 하나다. 쌍둥이로 태어난 후남이가 잘 풀리는 것은, 귀남의 운을 뺏어가서 귀남이의 인생이 엉키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귀남 엄마는 6대 독자 집으로 시집와서 연달아 딸 셋을 낳았다. 귀남이가 그저 '아들

조지 로메로의 잊혀진 공포 영화, The Amusement Park(1975)

  2001년, 조지 로메로(George Romero) 감독의 잊혀진 영화가 발견되었다. 'The Amusement Park(1975)' 는 그때까지 영화학자들 사이에서 그 존재만 알려졌을 뿐,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펜실베이니아의 루터교 봉사 협회(Lutheran Service Society) 는 로메로에게 의뢰한 작품을 받아보고 너무 놀라서 그냥 협회 캐비닛에 넣어버렸다. 협회 관계자들 눈에 그건 노인 학대 방지 캠페인 영화가 아니라 견디기 힘든 공포 영화였다. 16mm 필름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복원 과정을 거쳐서 2021년에 다시 관객들과 만날 수 있었다.   공포 영화의 대부로 불리는 로메로와 노인 학대 방지 캠페인이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 이 기묘한 조합은 뜻밖의 결과물로 나왔다. 제목 'The Amusement Park'의 뜻대로 영화는 유원지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배우 링컨 마젤이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노인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짤막한 설명을 곁들인다. 화면이 바뀌면 온통 하얀색인 방에 흰색 양복을 입은 두 명의 노인(링컨 마젤이 연기함)이 보인다. 한 노인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얼굴에는 상처가 나있고 몰골이 말이 아니다. 또 다른 노인은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다친 노인을 염려스럽게 쳐다 본다. 무언가 도와줄 것이 없냐고 묻자 지친 노인은 손을 내저으며 말을 잇지 못한다. 멀쩡한 노인이 그럼 자신은 밖에 나가보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그 노인은 외친다. "나가지 마! 거긴 아무 것도 없어. 아무 것도 없다구!"   문이 열리고, 바로 놀이공원이 펼쳐진다. 그곳에서 노인이 앞으로 겪게 될 모험이 영화를 채운다. 사실 모험이라기 보다는 차별과 멸시, 강탈과 몰락의 경험이다. 노인들은 유원지 입장 티켓을 사기 위해 자신들의 소중한 물건을 내다 판다. 매입업자는 말도 안되는 헐값에 물건을 사들인다. 이 놀이공원에서 노인은 결코 환영받는 존재가 아

자본주의적 탐욕이 음악 축제와 만났을 때, Woodstock 99: Peace, Love, and Rage(2021)

    프로모터인 Michael Lang과 John Scher는 1994년, Woodstock의 영광을 재현하는 뮤직 페스티벌을 뉴욕에서 열었다. 축제는 평화롭게 치뤄졌으나, 갑작스럽게 내린 비 때문에 흥행은 성공하지 못했다. 5년 후, 두 사람은 새롭게  Woodstock '99 를 기획한다. MTV에서는 축제 전기간의 공연을 생중계하기로 했다. 뉴욕 Rome에서 열린 축제에 무려 40만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인파였다. DMX, Limp Bizkit, Korn, Red Hot Chili Peppers, Rage Against the Machine, Metallica 같은 뮤지션들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 축제는 성황리에 끝났을까? 다큐 'Woodstock 99: Peace, Love, and Rage(2021)' 의 감독 Garret Price는 시작부터 못을 박는다. "그 축제는 공포 영화 같았습니다."   1969년의 Woodstock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그 시대의 반문화(counter culture)를 대표하는 평화와 사랑의 축제이다. 다큐 'Woodstock(1970)' 으로 우드스탁은 일종의 신화적 상징성을 획득했다. 그럼에도 그 축제의 이면에는 폭력과 마약, 성범죄와 같은 문제가 엄연히 존재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Woodstock '99는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기는커녕 오명만을 뒤집어 쓴다. 지독한 상업주의와 결합한 이 음악 축제는 폭력과 방화, 총체적인 혼란으로 점철되었다. 다큐는 그러한 실패의 원인을 축제 관계자와 뮤지션들, 참가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나씩 되짚어 나간다.   축제가 열린 곳은 폐쇄된 공군 기지로 유해 물질에 오염된 지역(superfund)이었다. 이미 문제가 있는 장소에서 열리는 축제. 거기에다 날은 미치도록 더웠다. 38도가 넘는 더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나루세 미키오 여성 영화의 원형, 긴자 화장(銀座化粧, Ginza Cosmetics, 1951)

      "여자 나이 마흔이 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버린다구. 그러니 얼른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해야 해."   유키코(타나카 키누요 분)는 마흔 문턱에 접어들었다. 동생처럼 아끼는 쿄코(카가와 쿄코 분)에게 유키코는 그렇게 충고한다. 미혼모로 어린 아들 하루오를 키우고 있는 유키코는 쿄코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 바란다. 유키코는 술집 마담으로 일하며 빠듯한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비슷한 처지였던 친구 시즈에는 돈 많은 남자의 첩으로 들어앉았다. 어디 괜찮은 남자라도 있으면 마담일 그만 두고 의탁이라도 하련만, 주변에 꼬이는 이들은 죄다 글렀다. 후원자였던 후지무라는 사업이 망한 후 가끔 용돈을 얻기 위해 유키코를 찾아온다. 젊은 건달과 중년의 느물거리는 사업가는 유키코를 욕망의 대상으로 볼 뿐이다. 그런 유키코에게 친구 시즈에가 소개해준 부유한 지주의 아들 이시카와가 나타난다. 여자 나이 마흔, 유키코의 인생에 기회가 온 것일까?   1951년이면 일본은 패전 후 이제 6년이 지났을 뿐이다. 나루세 미키오의 '긴자 화장(Ginza Cosmetics, 1951)' 을 보고 있노라면, 적어도 도쿄의 거리에서 전후의 상흔을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의 도입부, 하루오는 혼자 보내는 낮시간을 도심의 이곳저곳을 쏘다닌다. 하루오가 지나는 거리에는 활기가 넘친다. 유키코가 이시카와에게 안내하는 도쿄 시내는 빌딩이 공사 중이며, 번화한 상점가는 인파로 붐빈다. 유키코가 일하는 술집 '벨 아미(Bel Ami)'의 손님들은 음주와 여흥을 즐긴다. 거기에는 여종업원들과의 '외박'이라는 매춘도 슬쩍 끼워져 있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속 여성들은 대개가 불운한 처지에 놓여 있다. '긴자 화장'에서 유키코는 미혼모라는 열악한 사회적 지위에 자리한다. 쿄코는 가난한 집안 살림에 어쩔 수 없이 화류계로 흘러 들었다. '돈'은 언제나 문제가 된다

끝나지 않는 멕시코 국경의 악몽, Identifying Features(2019)

  멕시코의 외딴 시골 마을, 막달레나의 어린 아들 헤수스는 갑작스럽게 작별을 고한다. 헤수스는 동네 친구와 함께 멕시코 북부로 향한다. 석 달 후, 헤수스와 동행한 친구는 차가운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막달레나는 이제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다. 어떻게든 아들의 생사를 알아내야만 한다. 북부 국경 지대, 실종자 수색 센터에서 막달레나는 아들의 불에 탄 가방을 확인한다. 담당 공무원은 막달레나에게 아들의 사망을 인정하라며 서류를 내민다. 막달레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아들이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찾아야 한다. 그렇게 아들을 찾는 막달레나의 고통스런 여정이 시작된다.   영화는 헤수스와 동네 친구가 왜 떠났는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다. 2006년, 칼데론 정부가 주도한 멕시코의 마약 전쟁은 멕시코 전체를 폭력과 범죄의 온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약 카르텔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전쟁은 초기의 목적과는 달리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정부의 공격을 피해 카르텔들은 공권력이 취약한 지방으로 침투했다. 북부에 집중되어 있었던 마약 카르텔들은 멕시코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 와중에 무수한 민간인들이 죽었으며, 구조적인 빈곤과 폭력은 더욱 심화되었다. 어린 청소년과 청년들은 갱단들의 조직 확장 과정에서 주요한 목표가 되었다. 마약 전쟁은 처음엔 멕시코 정부와 마약 카르텔과의 대결이었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갱단들의 치열한 세력 다툼 속에 민간인 희생이 커지는 양상으로 고착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난한 멕시코인들에게 미국행은 생존의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막달레나의 아들 헤수스도 그렇게 북쪽을 향해 떠났다.   영화는 막달레나의 눈을 통해 국경 지대 실종자 센터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곳은 마치 거대한 시체 안치소 같다. 컨테이너에는 시신이 담긴 검정색 Body Bag들이 빼곡하게 쌓여있다. 가족의 행방을 찾는 이들이 길다란 줄을 이루며 기다린다. 담당 공무원은 사무적인 태도로 냉담하게

Wanda(1970), Happy Old Year(2019)

  1. 바바라 로든의 역작, Wanda(1970)   여자는 남편과 헤어져 여동생의 집 소파에 대책없이 앉아있다. 이혼 법정에서 두말없이 이혼에 동의하고 아이들 양육권도 포기한다. 봉제 공장에서는 남들보다 느리게 일한다고 해고당한다. 시간이나 때우려고 영화관에 갔는데, 잠깐 잠든 사이 지갑을 도둑맞았다. 화장실 좀 쓰려고 늦은 밤에 들어간 술집, 바텐더는 여자를 내쫓으려고 안달이다. 그런데 여자가 바텐더로 알고 있는 남자는 이제 막 진짜 바텐더를 죽인 강도 살인범이다. 여자가 골칫덩이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한 남자는 하는 수 없이 여자를 데리고 다닌다. 영화의 제목 'Wanda' 는 이 여자의 이름이다.   비운의 여성 감독 Barbara Loden 의 유일한 장편 연출작인 영화 'Wanda(1970)'는 매우 기괴한 느낌을 준다. 여자 주인공은 무기력하고, 삶에의 의지도 없고, 자존감도 낮다. 완다의 여정은 사회적으로 취약한 지위의 여성이 어떻게 착취와 범죄에 노출되는가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같다. 완다는 먹을 것, 잘 곳 때문에 아무 남자에게 자신을 의탁한다. 남자들은 완다를 욕정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만 볼 뿐이다. 강도 살인범 노먼은 완다에게 모욕을 주며 복종을 요구한다. 급기야 완다는 노먼의 은행 강도 범죄 행각에 마지못해 동참하며 공범이 된다.   배우였던 로든은 이 영화에서 완다 역을 맡았다. 영화 속 완다가 보여주는 불안하고 무기력한 모습에는 바바라 로든 자신이 겪었던 정서적인 어려움이 반영되어 있다. 'Wanda'는 어떤 면에서 존 카사베츠의 'A Woman Under the Influence(1974)' 와 일맥상통한다. 카사베츠는 하층 계급 여성의 정신적 불안정성이 야기한 알콜중독을 보여준다. 그보다 선구적 초상으로서 로든은 학대와 착취, 범죄의 악순환에 빠져드는 불안한 여성을 그려낸다. 완다의 음울하고 고통스러운 몰락은 실제 현실의 한 단면을 잘라낸 느낌이다

멜로 드라마에 스며든 소련의 변화, 두 사람을 위한 기차역(Вокзал для двоих, Station for Two, 1983)

    시베리아의 감옥에서 복역중인 남자는 하룻밤 동안의 짧은 외출을 허락받는다. 간수는 남자의 아내가 근처 마을로 찾아와서 기다린다고 알려준다. 눈길을 헤치며 남자는 아내를 만나러 마을로 향한다. 남자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혹독한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일까? 사형수 플라톤은 어두운 밤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그의 기억 속에는 잊을 수 없는 한 여자가 있다. 엘다 라자노프 (Eldar Ryazanov) 감독의 '두 사람을 위한 기차역(Station for Two, 1983)' 에는 중년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피아니스트인 플라톤(올레그 바실라시빌리 분)은 병중의 부친을 방문하기 위해 기차 여행중이다. 중간 정차역에서 잠깐 점심을 먹기 위해 내린 그는 식당의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일어선다. 하지만 웨이트리스 베라(루드밀라 구르첸코 분)는 음식값을 내라며 플라톤을 채근한다. 둘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플라톤이 타야할 기차는 떠나버린다. 플라톤은 하는 수 없이 다음 기차를 기다린다. 역에는 베라의 애인 안드레이가 운전하는 기차가 도착한다. 안드레이는 멜론 상자를 봐달라고 플라톤에게 부탁하면서 담보로 플라톤의 여권을 가져가 버린다. 안드레이가 돌아올 때까지 플라톤은 이 작은 도시에서 이틀을 보내야 한다. 신분을 증명할 여권이 없으면 숙박도 할 수 없다. 미안함을 느낀 베라는 플라톤이 머물 곳을 함께 찾아보는데...   엘다 라자노프 감독은 코미디 영화에 일가견이 있었다. 특히 그의 로맨틱 코미디는 소련 관객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운명의 아이러니(The Irony of Fate, 1975)' , '직장 로맨스(Office Romance, 1977)' 의 연이은 성공으로 라자노프 감독은 경력의 정점을 찍었다. 1983년작인 '두 사람을 위한 기차역'은 사랑에 대한 라자노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앞서 제작한 두 개의 로맨틱

격변의 시대, 탈주를 꿈꾸다: 막말태양전(幕末太陽傳, Sun in the Last Days of the Shogunate, 1957)

    이 영화의 도입부에는 도쿄의 시나가와(品川) 지역을 소개하는 영상이 나온다. 도쿠가와 막부 시기, 시나가와는 에도의 유명한 홍등가였다. 그러던 곳이 1956년, 매춘금지법이 시행되면서 변화를 맞이한다. 카와시마 유조 감독의 '막말태양전(Sun in the Last Days of the Shogunate, 1957)' 은 시간을 거슬러 1862년을 배경으로 한다. 쇼군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다. 시나가와의 어느 유곽(遊廓), 사헤이지(프랭키 사카이 분) 일행은 게이샤들을 불러 진탕 퍼마시고 논다. 술값을 내지못한 사헤이지는 외상을 갚을 때까지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빌붙어 지낸다. 그런데 이곳에는 사헤이지 말고 또 다른 외상 손님들이 진을 치고 있다. 타카스기(이시하라 유지로 분)와 동료 사무라이들은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 그들은 왜 그곳에 모였을까...   카와시마 유조(川島雄三) 감독은 4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지병이 있었다.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 우리가 루게릭병으로 알고 있는 병이다. 그는 버는 돈의 대부분을 술값과 유흥으로 탕진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사헤이지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 감독의 분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헤이지가 대책없이 외상으로 술을 마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 결핵으로 고생하는 사헤이지는 겨울 동안 시나가와의 바다 공기를 마시며 요양차 눌러 앉을 심산이다. 당시로서는 불치병에 걸렸지만, 사헤이지에게서는 결코 그늘진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놀라운 기지와 순발력, 유머 감각으로 사헤이지는 술집의 골치아픈 대소사를 해결해주며 환영받는 객식구가 된다.   영화에서 술집 이곳저곳을 누비는 사헤이지의 민첩한 몸놀림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병자가 맞나 싶다. 카와시마 유조는 사헤이지가 술집의 모든 공간에서 주도권을 갖고 움직이도록 만든다. 가진 것도 없고 몸도 아프지만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넘볼 수 없는 배포가 있다. 그러므로 타카스기의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타카스기 일행은 영국 공사

타인의 삶, 수정의 구조(The Structure of Crystals, 1969)

  남자와 여자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멀리서 차가 한 대 다가온다. 남자의 오랜 친구 마렉이다. 그는 휴가를 보내러 이 외딴 시골 마을의 친구를 찾았다. 한때 촉망받는 물리학자로 함께 연구소에 있었던 그들은 이제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얀은 시골 기상 관측소 일을, 마렉은 하버드에서도 공부하고 아주 잘 나가는 학자가 되었다. 마렉은 재능있는 친구가 시골 촌구석에 처박혀 어떻게 5년 동안이나 살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 그렇게 얀과 그의 아내 안나의 시골 마을 일상에 마렉이 들어온다.   폴란드의 감독 Krzysztof Zanussi 의 데뷔작 '수정의 구조(Struktura kryształu, 1969)' 는 제목만 본다면 무슨 학문과 깊은 관련이 있는 영화같다. 74분의 그리 길지 않은 러닝타임을 가진 이 흑백 영화는 의외로 매우 명쾌하고 단순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마렉은 관찰자로서 친구 얀의 시골 생활을 들여다 본다.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는 어린 아이들처럼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빙판길에서 미끄러지기, 팔씨름, 썰매 타기... 둘은 곧 떨어져 있었던 5년의 시간을 메꾸며 친밀감을 회복한다. 하지만 마렉이 보기에 얀의 삶은 지루하고 단조롭기 짝이 없다.   "넌 낭비하고 있어. 재능과 너 자신을."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마렉에게 얀과 안나 부부의 삶은 낯설면서도 흥미롭다. 마렉은 부부 침실의 열려진 문으로 안나가 얀에게 베개를 던지며 장난을 거는 것을 본다. 이혼한 마렉에게 부부의 친밀한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인지도 모른다. 소박하고 활달한 안나는 마렉과도 곧 친해진다. 그들 세 사람이 일상을 함께 하며 지내는 모습에서 프랑소와 트뤼포의 '쥴과 짐(Jules et Jim(1962)' 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본질은 관계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서로 다른 삶을 사는 두 친구의 인생에 대한 가치관, 태도의 차이를 대비시킨다.   미국에서 지내다 온 마렉은 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