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태풍 클럽(Typhoon Club, 1985)'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어의 '다녀왔습니다(ただいま, 타다이마)'와 '어서 와(おかえり, 오카에리)'는 마치 한 벌의 젓가락 같다. 집에 들어오는 사람이 'ただいま'라고 말하면, 집안에 있는 사람은 'おかえり'라고 응답한다. 영화 '태풍 클럽(台風クラブ, 1985)'의
중학생 켄은 허름한 판잣집에 살고 있다. 켄은 현관문을 계속 열고 닫으면서, 'ただいま'와 'おかえり'를 반복한다. 집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켄에게 가족이 있기는 하다. 폐인처럼 보이는 켄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서 한밤중에 집밖을 서성인다.
그렇다. 켄에게는 가족이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화 속에서 켄은 주문처럼 'ただいま'와 'おかえり'를 뇌까린다.
소마이 신지((相米慎二) 감독의
'태풍 클럽(1985)'의 주인공들은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이다. 8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기이하고 불편하게
엉키며 직조된다. 영화는 도입부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는다. 여름날 저녁, 시골 학교의 수영장에서 여중생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동급생 아키라는 마침 수영을 하고 있다가 여학생들을 훔쳐 본다. 여학생들은 그런 아키라를 골려주기 위해 아키라에 목에
끈을 묶어 수영장 밖으로 억지로 끌어낸다. 아키라는 익사할 위기에서 겨우 되살아난다. 학교에서 바보 취급을 받는, 왕따의 대상인
아키라에게 여학생들이 집단으로 휘두르는 폭력. 무언가 이 학교는 범상치 않은 곳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 지역에 태풍이 예보된 가운데, 영화는 다큐멘터리처럼 시간 순서대로 진행된다. 목요일부터 월요일까지, 태풍이 지나가는 동안
아이들의 일상적인 삶이 뒤흔들리고 억눌렸던 본성이 폭발한다. 주말 동안 어쩌다가 학교에 갇힌 아이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광기에
가깝다. 자신의 감정을 올바르게 표현할 줄 모르는 켄은 좋아하는 여학생 미치코를 겁탈하려고 든다. 영화의 중반부, 8분 가량의 이
시퀀스는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흥분한 켄은 'ただいま'와 'おかえり'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미치코를 쫓는다. 켄은
미치코가 도망친 교무실 문짝을 부수며 압박한다. 그런가 하면 연극반의 3총사 여학생들은 동성애에 빠져든다. 학교에 남은 6명의
아이들은 태풍이 몰고온 폭우 속에서 속옷 차림으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이렇게 청소년 연기자들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면서
최대치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이 감독의 연출력은 비범한 것일까, 아니면 착취적인 것일까?
태풍에 정신이 이상해져 버린 것은 학교에 갇힌 아이들 뿐만이 아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출을 감행한 리에는 인근의 도쿄
도심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낯선 젊은 남자를 따라나서고, 결국에는 남자의 자취방에까지 간다. 남자와 리에가 함께 있는 장면이 주는
공포는 이 남자의 의도가 불분명하다는 데에 있다. 대학생이냐고 묻는 리에의 질문에 남자는 얼버무린다. 리에에게 값비싼 옷을
사주며 자신의 처소로 유인한 이 남자는 어설픈 원조교제를 시도한 것일까? 리에는 결국 정신을 차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온다.
소마이 신지의 '태풍 클럽'은 영화 전체에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의 에너지가 가득하다. 솔직히 이 감독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의 모습은 확실히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이 '태풍'이라는
자연적 재난에 의해 야기된 필연적인 결과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어떤 면에서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단서는 아이들이
아닌, 영화 속 '어른'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태풍 클럽'에서 어른들의 존재는 거의 의도적으로 삭제되어 있다. 학급의 젊은
담임 교사 우메미야가 그나마 비중이 있고, 양호 선생과 교장은 거의 보조 출연에 그친다.
우메미야는 교육자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실패한 사람이다.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난데없이 들이닥친 중년의 남녀를 보게 된다.
우메미야가 사귀는 여자의 엄마와 삼촌을 자처하는 이들은 우메미야에게 조카를 책임지라며 행패를 부린다. 그들의 입을 통해 아이들은
우메미야가 연인의 돈을 물쓰듯 쓰며 비겁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메미야는 학교에 갇혀 있던 아이들이 학교로
와달라고 전화를 걸었을 때에도 그 요청을 무시해 버린다. 전화를 건 우등생 미카미가 그런 우메미야를 비난하자, 우메미야는 이렇게
강변한다.
"너 말이야. 대단한 것처럼 굴지만, 15년 전에 나도 너 같았어. 네가 15년 뒤엔 나처럼 된다고, 알겠냐?"
실패한 인생을 자인하는듯한 우메미야의 미카미를 향한 질타는 기묘한 울림을 준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이성적이며 냉정한 미카미는
오직 학업에만 열중한다. 미카미는 도쿄의 고등학교로의 진학이 결정된 상태이다. 미카미의 눈에 동급생들의 모든 행동은 유치하고
한심하게 보일 뿐이다. 미카미는 출세하고 성공했다고 여기는 삶에 진입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그런데 미카미도 그 삶이 정말로
괜찮은 건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믿고 따르던 우메미야의 한심스런 행태는 미카미를 좌절에 빠뜨린다. 15년이 지난 후에
자신이 저런 모습이라면, 과연 이대로 계속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는 걸까...
소마이 신지는 아이들을 사각의 틀 안에 가둔 쇼트들을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미카미가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장면, 독서실 창문
밖에서 찍은 쇼트는 미카미를 학교의 수인(囚人)처럼 보이게 만든다. 아이들은 학교 창문의 안과 밖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강당의
무대 위 사각의 프레임에 갇힌 존재들이다. 결국 그 틀은 태풍 속 비바람이 몰아치는 운동장으로 뛰쳐나감으로써 부서진다. 다른
아이들이 그렇게 감정을 분출시키면서 잦아든 것과는 달리, 미카미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옥죄는 틀에서 탈출한다. 교실 안의 책상을
창가에 차곡차곡 쌓은 후, 미카미는 창문을 열고 투신 자살을 시도한다.
이 영화는 얼핏 보기에 청소년 성장 영화라는 외피를 두른 것 같다. 하지만, '태풍 클럽'의 아이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일반적인
청소년기의 성장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아이들의 일탈과 폭주는 병리적인 현상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학교'라는 공간은 거대한 병동으로서의 일본 사회와 맞닿아 있다. 1980년대, 일본은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이었다. 고도
성장의 정점에서 일본인들은 안정적인 삶을 향유했다. 그럼에도 일본 사회는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견고한
가족주의에는 균열이 가고 있었으며. 청소년 세대는 약물 남용(암페타민 복용과도 같은)을 비롯해 여러 범죄 문제에
노출되었다(1983년, 저널리스트 Robert C. Christopher는 이에 대한 칼럼을 뉴욕 타임즈에 기고했다). 개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은 삶의 구심점을 설정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영화 속 '태풍'이라는 자연 현상은 그러한 일본 사회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작용한다. 책임감을 지닌 어른의
부재, 가족의 붕괴, 방향성을 상실한 아이들... '태풍 클럽'에서 학교는 물질적 풍요 속 정서적 공황에 처한 일본 사회의
축소판인 셈이다. 소마이 신지는 자신이 통과하는 동시대의 일본을 냉철하게 직시한다. 이 영화가 개봉된 1985년, 일본은 미국의
강압적 요구로 '플라자 합의(Plaza Agreement)'를 받아들이게 된다. 침체에 빠진 미국 경제를 구하기 위한 인위적인 환율 조정이었다. 그 합의로 일본은 소위 '잃어버린 10년(Lost Decade, 1991-2001)'이라는 경제 침체기를 마주한다. 영화 '태풍 클럽'은 그러한 격변기에 접어들기 직전, 임계점을 향해 가는 일본 사회의 피폐한 내면을 중학생의 눈을 통해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소마이 신지 감독의 영화 '이사(お引越し, Moving, 1993)'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6/moving-19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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