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라벨이 Hong Sang-soo인 게시물 표시

클레어의 카메라(Claire's Camera, 2018): 홍상수의 진심, 혹은 내밀한 일기

    만희(김민희 분)는 영화사 직원입니다. 만희는 지금 칸(Cannes)에 머물고 있어요. 영화사의 일 때문에 출장을 온 거죠. 한창 바쁘게 일하던 만희는 상사인 양혜의 호출을 받습니다. 카페에서 만희와 마주앉은 양혜는 만희의 해고를 통보합니다. 양혜는 만희가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함께 일할 수 없다고 말하지요. 만희는 자신의 어떤 점이 정직하지 않은 것이냐고 묻지만, 양혜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만희는 상사의 말대로 정말 정직하지 못한 사람일까요? 도대체 상사 양혜는 무슨 이유로 5년 동안 함께 일해온 부하 직원 만희를 해고한 것일까요?   홍상수의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Claire's Camera, 2018)'는 낯선 타국의 휴양지에서 그렇게 해고 통보를 받은 만희의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만희의 이야기라고 하기도 그렇군요. 만희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라고 해두죠.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클레어(이자벨 위페르 분)의 카메라를 통해 전달됩니다. 클레어는 칸에 온 관광객인데 우연히 만희와 만나게 됩니다. 클레어의 우연한 만남은 만희의 상사 양혜, 영화감독 소완수와도 이어지고요. 홍상수의 영화에서 '우연'이 이야기에 색을 입히고, 그 얼개를 짜임새 있게 만드는 건 하나의 공식 같아요. '클레어의 카메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과연 만희가 해고당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양혜가 만희를 해고한 다음의 시퀀스에 그 답이 들어있습니다. 양혜와 영화감독 소완수는 칸의 해변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죠. 양혜는 만희가 소완수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소완수는 양혜가 영화사 대표로서 후원하는 감독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두 사람은 연인 사이입니다. 소완수는 양혜에게 만희와의 일이 술에 취해서 저지른 실수라고 말해요. 그는 앞으로 그런 실수는 없을 거라는 다짐도 합니다.  클레어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것이 취미입니다. 곧 ...

우리의 하루(In Our Day, 2023): 예술가의 삶과 부서진 기타

  *이 글에는 영화 '우리의 하루'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원은 전직 배우입니다. '전직'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현재는 배우 일을 그만둔 상태입니다. 해외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한 상원은 선배 정수의 집에 잠시 머물고 있어요. 이 집에는 '우리'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있습니다. 먹는 걸 좋아하는, 아주 통통하고 귀여운 고양이예요. 홍상수의 영화 '우리의 하루(In Our Day, 2023)' 에는 고양이 '우리'의 하루가 살포시 들어가 있어요. 고양이 집사들을 위한 영화냐구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영화 '우리의 하루'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죠.   영화에는 2명의 중심인물이 등장합니다. 전직 배우 '상원(김민희 분)'과 시인 '홍의주(기주봉 분)'가 그들입니다. 영화는 두 인물이 각자 보내는 하루의 일상을 대비시켜서 보여줍니다. 딱히 할 일이 없는 상원은 낮잠을 청하고, 나중에 조카 지수의 방문을 받습니다. 나이든 시인 홍의주도 아침나절에 잠을 좀 잤다가 일어납니다. 그런 그에게 배우 지망생 재원이 찾아오지요. 상원의 조카 지수도 배우 지망생입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지수는 유명 배우였던 상원에게 배우의 길에 대한 조언을 청합니다. 재원은 시인 홍의주에게 인생의 지혜를 듣고 싶어하구요. 그리하여 상원은 지수에게, 홍의주는 재원에게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자, 어떻습니까? 두 사람의 하루는 다른듯 하지만 비슷하게 보이지 않은가요? 초심자(novice)는 권위자(expert)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하루'는 각각 배우와 시인이라는 예술가가 들려주는 마스터 클래스(Master class) 같은 인상을 줍니다.   이 영화에서 상원의 캐릭터에는 그 역을 연기하는 배우 김민희의 이야기가, 시인 홍의주의 모습에는 감독인 홍상수가 겹쳐 보이...

인트로덕션(Introduction, 2021): 홍상수의 흥미로운 MZ 세대 탐구

    영화가 시작되면 중년의 한 남자가 모니터 앞에서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신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고아원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나름 숭고한 봉헌의 기도인데, 첫 장면에서부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습니다. 그래요. 홍상수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스스로를 진실하다고 생각하고, 삶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객은 주인공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게 되지요. 그 균열의 지점이 나에게는 늘 흥미롭습니다. 홍상수가  '인트로덕션(Introduction, 2021)' 에서 보여줄 등장인물들의 삶 속 균열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영화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영화의 제목 'Introduction'처럼 앞으로 등장할 인물들에 대한 '도입부' 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자신의 전 재산을 고아원에게 기부하겠다고 기도한 중년의 남자는 한의사입니다. 그에게는 청년이 된 아들 영호가 있지요. 영호는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를 찾은 것처럼 보입니다. 영호는 여자 친구 주원에게 잠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한의원에 왔습니다. 영호는 별로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하지요. 따로 떨어져 사는 아들은 갑작스런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한의원에 앉아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 좀 이상합니다. 그는 급한 환자도 아닌 지인을 먼저 만나고 아들에게는 그냥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지인은 유명한 배우(기주봉 분)입니다. 아버지는 지인에게 침을 놓아주고는, 영호를 만나는 대신에 자신의 방으로 가버립니다. 그렇게 1부는 영호가 아버지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끝납니다.   2부에서는 영호의 여자 친구 주원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주원은 패션 공부를 하겠다면서 이제 막 독일로 유학을 왔죠. 지원은 엄마에게 껌딱지처럼 붙어있습니다. 엄마는 딸에게 자신의 화가 친구(김민희 분)를 소개해 주려고 합니다. 화가 친구가 당분간 딸의 숙소를 제공해 주기로 했거든요. 영화의 제목 'Introd...

아, 홍상수: 물안에서(In Water, 2023)

    오래전, 영화를 공부할 때의 일이다. 강의를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신경을 긁는듯한 소음이 계속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강의실 뒷문으로 나와서,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나섰다. 영상원 본관 3층의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마침내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냈다. 열린 교수 연구실 안쪽에, 희끗희끗한 머리의 한 남자가 이상한 악기를 천천히 두드리고 있었다. 홍상수였다. 그는 매우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악기를 두들기던 그가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약간 당황했는지, 잠시 연주를 멈추었다. 나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동남아시아인지, 아프리카인지 원산지를 알 수 없는 악기 소리는 내가 다시 강의실에 도착할 무렵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해 가을, 홍상수가 영상원 교수직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홍상수의 강의는 영화과 학생들에게 악명이 자자했다. 거의 강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상수가 영상원을 떠날 무렵에는, 자신의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교수직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형편없이 어그러졌다. 나는 홍상수의 그 지치고 지루했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결국 떠날만한 때에 떠났다. 그건 학생들에게도, 그에게도 좋은 결정이었다.     어제, 홍상수의 2023년 작 영화 '물안에서'를 보았다. 러닝타임 61분의 이 영화는 대부분의 화면이 초점이 나간 상태(ouf of focus)로 흐릿하게 나온다. 처음에는 또렷했던 화면이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로 나오니, 관객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등장인물은 세 명. 배우로 활동하던 승모는 자신의 단편 영화를 찍겠다며 섬에 왔다. 승모와 동행한 사람은 촬영을 맡은 친구 상국, 연기를 할 여배우 남희이다. 승모는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모은 돈 300만 원을 들고 왔다. 그런데 정작 그는 시나리오조차 쓰지 않았다. 상국과 남희...

사랑할 때와 죽을 때, 강변 호텔(Hotel by the River, 2018)

  *이 글에는 영화 '강변 호텔(2018)'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시인 영환(기주봉 분)은 오랜만에 두 아들과 만난다. 그가 자식들을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영환은 죽음의 예감을 느끼고 있다. 밤에는 악몽에 시달린다. 그는 자식들에게 사진관에 가서 영정 사진까지 찍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시인은 지금 강변 호텔에 머물고 있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난 호텔 주인이 시인의 팬이었다. 주인은 영환에게 아무 부담없이 호텔에 와서 지내라고 초대했다. 그 호텔에는 손을 다친 젊은 여자 아름(김민희 분)이 머물고 있다. 아름은 연인과 결별한 후유증에 시달리는듯 하다. 그런 아름을 위로하기 위해 아는 언니(송선미 분)가 찾아온다. 그저 평화로워 보이는 겨울 강변의 풍경, 시인의 불길한 예감은 괜한 것일까?   근래에 들어 홍상수의 영화에서 '죽음'이란 단어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최근작인 '당신 얼굴 앞에서(2021)' 는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중년의 여배우가 등장한다. '강변 호텔(Hotel by the River, 2018)' 은 죽음의 예감에 사로잡힌 노시인이 주인공이다. 홍상수의 영화들도 감독 자신처럼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강이 보이는 호텔방에서 몸을 일으키는 영환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두 아들 경수와 병수를 만날 생각이다. 도착을 알리는 큰아들 경수의 전화, 영환은 객실로 올라오겠다며 방번호를 알려달라는 경수의 청을 완곡히 거절한다. 부모 자식간이지만 자신의 공간을 개방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의지가 보이는 장면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영환과 두 아들 사이의 정서적 거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환은 사랑 때문에 젊어서 처자식을 내친 인물이다.   "미안한 것 때문에 인생을 같이 할 수는 없는 거야"   늙은 시인은 가족을 나 몰라라 했던 자신의 과거를 그렇게 옹호한다. 영환의 모습에서 홍상수 본인의 현실이 겹치는 것은 어쩔 ...

홍상수가 아직 말하지 않은 이야기들, 소설가의 영화(The Novelist's Film, 2022)

    준희(이혜영 분)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소설가이다. 예전에는 열정적으로 써내던 소설을 이제는 좀처럼 쓰지 못하고 있다. 오래전에 알고 지냈던 후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우연히 여배우 길수(김민희 분)와 마주친다. 여배우의 소탈한 면모에 호감을 갖게 된 작가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꿈을 털어놓는다. "길수 씨와 영화를 찍고 싶어요." 마침 여배우의 조카와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영화 전공생이다. 금상첨화. 과연 소설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캐릭터에서 홍상수의 영화적 자아를 찾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사실 그것이 전혀 터무니 없는 나만의 허황된 공상도 아니다. 홍상수는 자신을 비롯해 영화쪽 관계자들, 주변인들의 일상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세상과 관객을 향한 메시지 박스 같다. 그렇다면 '소설가의 영화(The Novelist's Film, 2022)' 에서 홍상수의 본심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누구일까? 이전까지는 '감독'으로 나왔던 캐릭터들이 그러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소설가 준희'가 그 역할을 떠맡는다. 관객은 준희가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에서 홍의 본심을 엿본다.   준희는 도시의 전망대에서 예전에 알았던 감독 부부와 마주친다. 감독 효진(권해효 분)은 준희의 소설을 영화로 찍으려다가 그만 둔 적이 있다. 효진과 그 아내(조윤희 분)와의 대화에서 준희는 그때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 효진은 그 영화가 엎어진 이유가 투자자들 때문이었다고 둘러댄다. 하지만 준희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준희는 효진이 돈을 밝히는 감독이라서 돈 안되는 영화를 접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효진의 아내를 향해서는 '돈에 악착스러워 보인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과연 준희의 소설을 좋아하고, 그 영화를 정말로 찍고 싶었다는 효진의 말은 진심일까? '그렇다면 어떻게든 ...

북촌 방향으로부터 10년 후, 당신 얼굴 앞에서(In Front of Your Face, 2021)

  *이 글에는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자매는 도로변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은 참 배달이 발달했어... 저 멀리 도로에 서있는 쿠* 배송 트럭이 보인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지내다 잠깐 한국에 들어온 상옥(이혜영 분)은 고국의 모든 것이 낯설다. 좀 트였다 싶은 곳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동생 정옥은 미국보다 한국이 살기 좋다며 아파트 하나 사서 여기서 살자고 말한다. 동생은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입주 때보다 2억이나 올랐다며 신나한다. 말 나온 김에 근처 아파트 공사 현장까지 둘러보자고 한다. 상옥이 보기에는 엄청 비싼 아파트, 여기 사람들은 참 돈도 많아...   홍상수의 '당신 얼굴 앞에서(In Front of Your Face, 2021)'는 중년의 은퇴 여배우 상옥의 하루를 따라간다. 이런 구성은 홍의 2011년작 '북촌 방향(The Day He Arrives, 2011)'과 유사하다. 대구에서 교편을 잡은 영화 감독 성준(유준상 분)은 아주 오랜만에 서울로 올라온다.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서울을 통과하는 거다' 성준은 모처럼의 서울 나들이를 시작하며 그렇게 다짐한다. 과연 성준은 자신의 바람을 이룰 수 있을까? '당신 얼굴 앞에서'의 상옥은 수시로 경건한 기도문을 읊조린다. 과거와 내일은 없으며 오직 이 순간만이 존재합니다. 이곳에 천국이 이미 와있습니다. 미래의 악몽에서 구해주시고, 항상 여기에 머물게 하소서... 마치 신앙고백같은 상옥의 말들은 자연스럽다기보다 의지적인 다짐으로 들린다.   '북촌 방향'의 성준이 영호 형(김상중 분)과 만나서 '소주'를 마신다면, 상옥은 영화 감독 재원과 '배갈'을 들이킨다. 술이 들어가면서 홍의 인물들의 속내와 과거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상옥의 감사 기도문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상옥은 영화에 출연해 달라는 재원의 부탁...

홍상수가 그려낸 영화판 사람들, 우리 선희(2013)

    "나 학교 마치면 어디 딴 데 가 있고 싶어. 이 영화판 사람들 정상인 사람들 아무도 없어. 다 또라이야."   이제 막 자신의 영화를 찍은 대학원생 문수(이선균 분)는 전 여자친구 선희(정유미 분)에게 그렇게 말한다. 홍상수의 2013년작 '우리 선희' 에는 문수가 말한 그 '또라이' 천지인 영화판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맞아, 거긴 또라이들이 가득했어. 결국 그래서 '어디 딴 데'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과 학생 선희는 한동안 학교를 떠나 있었다. 그러다 유학을 앞두고 추천서를 받기 위해 최교수(김상중 분)를 찾는다. 헤어진 남자 친구 문수, 가깝게 지냈던 선배 재학(정재영 분)은 다시 보게 된 선희가 너무나도 반갑다. 그들 모두는 서로 다 알고 지내는 사이이다. 세 남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선희에 대한 마음을 토로한다. 문수는 선희의 마음을 다시 얻고 싶어하고, 재학은 숨겨왔던 연심을 내비치고, 최교수 또한 제자가 아닌 여자로 선희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는 언제나 그러하듯 홍상수의 '소주'가 함께 한다.    절친한 사이인 세 남자는 한 여자를 좋아하지만, 그 여자가 '선희'라는 사실은 서로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희는 세 남자에게 각각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확실히 문수와는 끝났고, 최교수에 대해서는 모호하며, 재학에 대해서는 진심인 것처럼 보인다. 이 사각 관계의 오묘한 퍼즐을 풀 수 있는 단서는 오로지 '소주'에 있다. 술이 들어가고 나서야 그들은 본심을 말하고, 솔직해지며, 자신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에 근접한다. '소주'는 홍의 영화적 각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게 영화쪽 사람들에게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다. 술과 담배는 인간 관계, 영화 작업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

사랑에 빠진 여배우의 영화적 고백,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7)

    사빠죄아. 작년에 방영된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불륜에 빠진 남편이 아내에게 했던 유명한 대사이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라고 외치고 싶은 사람들이 여기 또 있다. 홍상수의 2017년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에 나오는 영희(김민희 분)와 상원(문성근 분)이 그들이다. 배우인 영희는 유부남 영화 감독 상원과 사랑하는 사이이다. 2부로 나누어져 있는 이 영화는 1부는 독일 함부르크, 2부는 한국의 강릉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피해 해외로 도피한 것처럼 보이는 영희는 낯선 외국의 도시에서 선배 지영을 만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오랜 지인들과 만남을 갖는다. 관객들은 영희가 나누는 대화들을 통해 이 배우가 처해있는 상황과 감정을 유추해볼 수 있다. 실제 이 영화의 감독 홍상수와 연인 사이이기도 한 김민희는 영화 속 영희를 통해 현실의 자신을 연기한다.   "그냥 입 좀 조용히 하세요! 다 자격 없어요! 다 비겁하고, 다 가짜에 만족하고 살고, 다 추한 짓 하면서, 그게 좋다고 그러구 살고 있어. 다 사랑 받을 자격 없어요!"   강릉에서 지인들과 함께 가진 술자리, 갑자기 영희는 '사랑 받을 자격'을 운운하며 좌중을 향해 일갈한다. 어째 영희가 하는 대사가 아니라 홍상수가 자신의 사생활에 관심을 보이는 한국의 대중들에게 퍼붓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는 '우리 제발 사랑하게 해주세요!', 가 아니라 '당신들이 뭔데 우리 사랑에 대해 떠드는 거야?', 라고 말한다. 그것은 영희의 지인 준희(송선미 분)와 천우(권해효 분)가 나누는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두 사람은 영희의 사생활을 비난하는 이들을 천박한 관심을 지녔다며 폄하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가 들려주는 자신의 연애 보고서인 동시에 대중들을 향한 입장을 포함하고 있...

떨치기 힘든 홍상수 월드의 마법, 도망친 여자(The Woman Who Ran, 2020)

    오랜만에 한국 영화를 보았다. 영어 자막이 있었는데, 계속 외국 영화를 보다 보니 우리말 대사임에도 나도 모르게 자막을 따라가고 있었다. 한 5분 정도를 그러다가 대사에 익숙해지니 그제서야 자막을 무시할 수 있었다. 미국 사람들이 자막 있는 외국 영화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거추장스러운 자막 없이 온전히 영화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렇게 본 영화는 홍상수의 2020년작 '도망친 여자'이다.   영화의 첫 장면, 전원 주택의 텃밭에서 물을 주고 있는 영순이 등장한다. 이웃에 사는 젊은 여성이 오늘 면접을 보러 간다며 영순에게 인사를 한다. 그런데 영순의 대사톤은 연극하는 것처럼 영 어색하고 느리게 들린다. 영순과 대화하는 이웃 여성도 마찬가지. 영화 내내 이 이질적이고 느린 대사톤이 이어진다. 보다보면 적응이 되기는 한다. 홍상수식 '낯설게 하기'인가? 아무튼 그렇게 이어지는 대화들의 내용도 시시하기 짝이 없다.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에 모처럼 영순을 방문한 감희(김민희 분)는 고기와 막걸리를 사들고 온다. 고기 구워먹으면서 하는 대화들이 어떤 것이냐 하면, '고기맛이 정말 좋다'와 '소의 눈망울이 세상에서 제일 순수하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들. 뭐 그런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웃에 산다는 남자가 그들을 찾아온다. 아내가 고양이를 무서워 하니까 고양이 밥을 주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 감희는 집안에서 CC TV로 그것을 보고 있다가 나중에 나온다.   두 번째 방문에서도 그런 상황은 비슷하게 반복된다. 감희는 인왕산 아래 주택에 사는 수영(송선미 분)을 만나러 간다. 대화 도중 수영의 집을 찾아온 남자가 있다. 감희는 현관의 인터폰 화면으로 수영과 남자의 대화 장면을 본다. 세 번째 만남의 장소는 영화관, 그곳에서 감희는 과거의 친구를 우연히 만난다. 우진은 감희와 한 때 사귀었던 남자 정 선생과 결혼했다. 정 선생(권해효 분)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