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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방향으로부터 10년 후, 당신 얼굴 앞에서(In Front of Your Face, 2021)

 

*이 글에는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자매는 도로변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은 참 배달이 발달했어... 저 멀리 도로에 서있는 쿠* 배송 트럭이 보인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지내다 잠깐 한국에 들어온 상옥(이혜영 분)은 고국의 모든 것이 낯설다. 좀 트였다 싶은 곳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동생 정옥은 미국보다 한국이 살기 좋다며 아파트 하나 사서 여기서 살자고 말한다. 동생은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입주 때보다 2억이나 올랐다며 신나한다. 말 나온 김에 근처 아파트 공사 현장까지 둘러보자고 한다. 상옥이 보기에는 엄청 비싼 아파트, 여기 사람들은 참 돈도 많아...

  홍상수의 '당신 얼굴 앞에서(In Front of Your Face, 2021)'는 중년의 은퇴 여배우 상옥의 하루를 따라간다. 이런 구성은 홍의 2011년작 '북촌 방향(The Day He Arrives, 2011)'과 유사하다. 대구에서 교편을 잡은 영화 감독 성준(유준상 분)은 아주 오랜만에 서울로 올라온다.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서울을 통과하는 거다' 성준은 모처럼의 서울 나들이를 시작하며 그렇게 다짐한다. 과연 성준은 자신의 바람을 이룰 수 있을까? '당신 얼굴 앞에서'의 상옥은 수시로 경건한 기도문을 읊조린다. 과거와 내일은 없으며 오직 이 순간만이 존재합니다. 이곳에 천국이 이미 와있습니다. 미래의 악몽에서 구해주시고, 항상 여기에 머물게 하소서... 마치 신앙고백같은 상옥의 말들은 자연스럽다기보다 의지적인 다짐으로 들린다.

  '북촌 방향'의 성준이 영호 형(김상중 분)과 만나서 '소주'를 마신다면, 상옥은 영화 감독 재원과 '배갈'을 들이킨다. 술이 들어가면서 홍의 인물들의 속내와 과거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상옥의 감사 기도문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상옥은 영화에 출연해 달라는 재원의 부탁을 거절한다. 자신에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이제, 상옥의 여정이 명확히 이해된다. 약속 장소인 인사동으로 가기 전에 상옥은 이태원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어렸을 적에 살았던 집을 둘러본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죽을 때가 되면 누구든 고향을 그리게 된다. 동생과 조카를 만나고, 어린 시절의 집을 찾아보고...

  상옥이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듯, 성준도 이전에 서울에서 지내던 자신의 행적을 복기한다. 지저분하게 끝난 연애, 출연료 아끼려고 치사하게 지인 배우를 내친 일... 상옥과 성준은 마치 영혼의 쌍둥이 같다. 성준은 술 마시다 말고 피아노로 쇼팽의 녹턴을 연주한다. 상옥도 취기가 올라오자, 기타로 바흐의 미뉴엣을 연주한다. 성준이 술자리에서 설파하는 개똥 철학은 자못 진지하다. 우연과 확률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현실이 놀랍고 신기하지 않냐고 침을 튀겨가며 떠든다. 그런가 하면, 상옥은 생판 처음 본 감독에게 17살 때 죽으려 했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때 서울역 광장에서 마주친 이들의 얼굴이 갑자기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다고. 얼굴 앞의 세상을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거기에서 천국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제목 '당신 얼굴 앞에서'는 상옥의 그 말에서 나왔다.

  상옥에게 배우란 직업은 잘 맞지 않는 옷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단서는 작은 다리 밑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조용히 담배를 피우는 상옥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누군가의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는 이 내성적인 여성은 돈을 벌고 모으는 것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동생 정옥은 언니가 미국 생활 동안 모아놓은 돈이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 상옥은 미국에서 Liquor Store를 했던 이유를 들려준다. 큰돈을 벌지 못해도 단골 손님만 있으면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살이에 무심한, 그렇게 사람에게도 무관심한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피붙이인 정옥과도 소식을 끊은 채 살았다. 정옥은 어떻게 그동안 연락도 안하고 살 수 있었냐고 상옥에게 분을 터뜨린다. 그런 상옥에게 '시한부' 선고가 내려진다. 남은 시간 동안 현재에 충실하고 모든 것에 감사하자, 고 결심한다. 자신에게 지갑을 선물한 조카의 마음, 길 가다 사진을 찍어준 여성의 친절, 손님에게 열쇠를 맡긴 술집 주인의 신뢰와 배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상옥은 처음 만난 재원에게도 순수하게 대하며, 그의 지분거림도 깔끔하게 받아넘긴다.

  전날의 숙취가 아직 남아있는 아침, 재원의 음성 메시지에 상옥은 잠이 깬다. 재원은 상옥에게 당장 지방에 가서 단편이라도 찍자고 약속을 해둔 터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고, 미안하다고, 행복하시라고 말을 남긴다. 상옥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상옥의 발작적인 웃음은 경박스럽고 위선적인 인간, 부박한 삶에 대한 경멸과 조소처럼 보인다. 성준의 북촌 체류기가 원래의 다짐을 비켜가듯, 상옥의 한국 체류기도 그렇게 감사의 기도문에서 멀어진다. 

  젊은 감독은 나이든 중년의 여배우로, 피아노는 기타로, 북촌은 이태원과 인사동으로, 우연의 현실은 얼굴 앞의 천국으로 바뀌었다. '당신 얼굴 앞에서'는 홍상수가 지나온 10년의 세월을 그렇게 품는다. 이제 그의 나이는 병고와 죽음을 좀 더 많이 생각할 때이다. '당신 얼굴 앞에서'는 누그러진 홍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것이 홍상수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홍의 영화는 '따뜻함'과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에서 홍상수가 보여준 인간과 삶에 대한 성찰이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젊은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때로 '나이듦'은 영화가 가진 다른 면모를 볼 수 있게 해준다. 젊은 시절부터 홍상수의 영화를 지켜봐왔던, 함께 나이들어가는 그의 관객들에게 '당신 얼굴 앞에서'는 느긋한 쉼표처럼 느껴진다.   




*사진 출처: slant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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