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우리의 하루'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원은 전직 배우입니다. '전직'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현재는 배우 일을 그만둔 상태입니다. 해외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한
상원은 선배 정수의 집에 잠시 머물고 있어요. 이 집에는 '우리'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있습니다. 먹는 걸 좋아하는, 아주 통통하고
귀여운 고양이예요. 홍상수의 영화 '우리의 하루(In Our Day, 2023)'에는 고양이 '우리'의 하루가 살포시 들어가 있어요. 고양이 집사들을 위한 영화냐구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영화 '우리의 하루'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죠.
영화에는 2명의 중심인물이 등장합니다. 전직 배우 '상원(김민희 분)'과 시인 '홍의주(기주봉 분)'가 그들입니다. 영화는 두
인물이 각자 보내는 하루의 일상을 대비시켜서 보여줍니다. 딱히 할 일이 없는 상원은 낮잠을 청하고, 나중에 조카 지수의 방문을
받습니다. 나이든 시인 홍의주도 아침나절에 잠을 좀 잤다가 일어납니다. 그런 그에게 배우 지망생 재원이 찾아오지요. 상원의 조카
지수도 배우 지망생입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지수는 유명 배우였던 상원에게 배우의 길에 대한 조언을 청합니다. 재원은 시인
홍의주에게 인생의 지혜를 듣고 싶어하구요. 그리하여 상원은 지수에게, 홍의주는 재원에게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자,
어떻습니까? 두 사람의 하루는 다른듯 하지만 비슷하게 보이지 않은가요? 초심자(novice)는 권위자(expert)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하루'는 각각 배우와 시인이라는 예술가가 들려주는 마스터 클래스(Master class)
같은 인상을 줍니다.
이 영화에서 상원의 캐릭터에는 그 역을 연기하는 배우 김민희의 이야기가, 시인 홍의주의 모습에는 감독인 홍상수가 겹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홍상수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이전의 작품들과는 좀 다르게, 자신의 이야기를 좀 더 적극적으로
집어넣습니다. 그런 데에는 아마도 감독 자신의 매끄럽지 못한 사생활이 포개어져 있기 때문이겠죠. 홍상수가 영화를 통해 자기 삶과
사랑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것을 보면 아주 흥미로워요.
"그냥 입 좀 조용히 하세요! 다 자격 없어요! 다 비겁하고, 다 가짜에 만족하고 살고, 다 추한 짓 하면서, 그게 좋다고 그러구 살고 있어. 다 사랑받을 자격 없어요!"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7)'에서
여배우 영희를 연기한 김민희의 대사를 나는 기억합니다. 그 영화는 명백하게 홍상수의 자기 변명과 연민이 범벅이 된 영화에요.
'당신들이 뭔데, 우리의 사랑에 왈가왈부 하는 거냐?' 네, 그렇습니다. 그게 홍상수의 본심인 거죠. 좀 뻔뻔하지 않은가요?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그런 뻔뻔함에도 불구하고, 홍상수가 영화를 통해 구현해 내는 영화적 세계에는 기이한 매력이 있거든요. 그
영화는 배우 김민희에게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이라는 명예를 안겨주기도 했구요.
자, 다시 '우리의 하루'로 돌아갑니다. 상원은 지수에게 자신의 배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상업 영화가 배우의 내면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드는지, 진정한 배우로 연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죠. 상원은 배우란 직업은 '솔직해야 한다'고
말하지요. 글쎄요, 그게 어떤 걸까요? 배우라는 직업도 멀게 느껴지는데, 상원이 말하는 '솔직함'이 무엇인지 일반인이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영화 속 초심자 지수에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상원은 지수에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냐고 확인하듯 묻습니다.
지수가 상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끼는 막막함을 시인을 찾아간 재원도 느낍니다. 재원은 존경하는 시인 홍의주를 만나서 삶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삶과 사랑의 의미를 아는 것이 배우를 꿈꾸는 재원에게 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걸까요? 시인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온 자신의 삶에서 건져낸 지혜들을 풀어놓습니다. 인생은 짧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진짜' 삶을 살아라.
그런데 그 '진짜 삶'이 뭘까요? 의외로 홍의주가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이 인생철학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건 홍상수 자신의 인생
철학이기도 할 테니까요. 상원이 조카 지수에게 했듯, 역시 시인 홍의주도 재원에게 자신이 한 말을 알아듣냐고 묻습니다.
영화감독으로서 홍상수는 예술가적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술가는 오롯이 예술가가 성취해 낸 작품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예술지상주의인 낭만주의적 관점이지요. 그런 그에게, 자신의 사생활이 논란이 되는 것은
참기 힘든 역경일 거예요. 작가로서 그는 영화로 자신의 입장을 항변합니다. '우리의 하루'에서 홍상수는 연인 김민희를,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영화 속에서 상원이 말하는 배우의 '솔직함'과도 일맥상통하는군요. 예술가로서 그들 자신은
쉽지 않은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홍상수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과 김민희가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강변합니다. 그건 영화 속에서 정수와 고양이 '우리'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정수는 '우리'를 잃어버린 걸 알고서는 실신해 버립니다. 정수는 현관문 앞에서 쓰러져서는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하죠. 겨우
정신을 찾은 정수는 고양이를 찾기 위해 현상금 '천만 원'을 내 건 전단지를 만듭니다. 물론 고양이는 나중에 정수의 품 안으로
다시 돌아오기는 하지요. 고양이의 이름 '우리(We)'는 어쩌면 뻔한 클리셰(cliche) 같기도 해요. 홍상수는 자신과 김민희를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뿐인가요? 상원은 홍의주가 라면에 고추장을 풀어서 먹는 것과 똑같이 그렇게
라면을 먹습니다. 라면에 고추장을 풀어 먹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죠. 물론 영화 속에서 상원과 홍의주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명백한
암시는 없어요. 관객은 그냥 그럴 것이다, 라고만 추측할 뿐이죠.
영화 '우리의 하루'는 홍상수가 써낸 어느 하루의 일기 같은 인상을 줍니다. 무겁지도 않고 담담한 이 일기에는 뚜렷한 감독
자신의 각인이 찍혀 있어요. 예술가의 삶은 자신의 작품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홍상수는 자신이 바라보는 인생과 예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놓습니다. 거기엔 가식이 없어요. 영화 속에서 시인 홍의주는 심장이 좋지 않아서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술을 마시는 대신에 무알콜 맥주를 마시면서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아요. 영화의 마지막, 시인은 담배를 피우면서 양주를 한 잔 들이키죠. 그것이 자신의 남은 삶을 재촉할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가 그에게는 시인으로서의 '진짜 삶'을 살아가게 만드니까요. 영화 속 시인 홍의주의 '술과 담배'는
홍상수에게는 '영화'임이 자명하죠.
홍상수의 삶에서 '영화'는 시인 홍의주의 '부서진 기타'와도 겹칩니다. 홍의주에게는 기타가 있었는데, 후배가 술 마시다 실수로
부수어 버렸죠. 후배는 홍의주에게 멋진 새 기타를 선물해 주지만, 홍의주는 그 기타를 자신의 다큐를 찍는 대학생 기주에게 선물해
버립니다. 시인은 기주에게 새 기타는 연주하기도 어렵고 익숙하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전직 배우 상원에게도 누군가 선물해 준
작은 기타가 있어요. 상원은 그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시인의 '부서진 기타'는 상원의 작은 기타를 통해서 노래를
이어가는 거죠. 그건 감독의 영화와 삶을 함께하는 배우 김민희의 관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고요.
영화 '우리의 하루'는 이제 노년에 접어든 감독 자신의 영화적 선언문 같아요. 홍상수는 자신과 김민희가 잘 견뎌왔고,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세간의 비난이야 어찌 되었든, 그들에게는 버팀목과 같은 예술, 그러니까 '영화'가 있어요.
'우리의 하루'를 통해 관객은 작가 홍상수의 진솔한 내면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가 영화를 통해 들려줄 부서진 기타의 노래는
앞으로도 이어질 겁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홍상수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on-beach-at-night-alone-20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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