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견고한 인습의 벽 앞에 선 소녀, Yuni(2021)

 

*이 글에는 영화 'Yuni(2021)'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중년의 부부가 Yuni의 집을 찾아온다. 여고생 유니는 이제 두 번째 청혼 신청을 받는다. 늙수그레한 남자는 두툼한 돈봉투를 내민다. 결혼 전, 신부의 집안에 건네는 지참금이다. 남자는 아내의 동의를 얻었다면서 유니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 나라에서는 본부인의 동의만 있다면, 남자는 세 명의 아내를 더 둘 수 있다. 유니의 집안은 그리 넉넉치 않다. 유니의 부모는 돈을 벌기 위해 먼 도시 자카르타에서 일하고 있다. 할머니와 지내는 유니는 이제 고 3, 명석한 이 소녀는 대학에 가고 싶지만 학비 때문에 고민이다. 그런 가운데 연달아 혼담이 들어온다. 유니가 사는 곳에서는 두 번의 혼담을 거절한 여자는 영원히 결혼하지 못한다는 믿음이 있다. 유니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우리에게는 멀고 낯설게 느껴지는 인도네시아 영화. Kamila Andini 감독의 영화 'Yuni(2021)'는 인도네시아 시골에 사는 여고생 유니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속옷부터 시작해서 방안의 물건이며 소지품이 온통 보라색인 소녀와 만난다. 유니는 보라색만 보면 눈이 뒤집힌다. 보라색 물건이 눈에 띄기만 하면 훔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보라색 매니아 유니. 그렇지만 학교에서는 치렁치렁한 교복 치마와 흰색의 히잡(hijab)만이 허용될 뿐이다. 유니의 학교에서는 이슬람 율법에 의한 교육이 강화되고 있다. 조만간 여학생들이 처녀성(virginity) 검사를 받게 될 거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음악 동아리 활동은 이슬람적 가치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금지당한다. 좀처럼 믿기 어렵지만, 그게 유니가 처한 현실이다. 

  오랜 가부장적 전통은 유니 또래의 소녀들에게 남자에 예속된 삶을 강요한다. 유니의 동급생 가운데에는 일찍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여학생도 있다. 조혼(早婚, child marriage)은 인도네시아 사회의 커다란 사회 문제로 남아있다. 인도네시아에서 18세 이전에 결혼하는 여성의 숫자는 무려 120만 명에 이른다(2018년 통계 기준, 자료 출처: https://reliefweb.int). 2019년, 인도네시아의 혼인법 개정으로 부모의 허락 하에 여성이 결혼할 수 있는 연령은 16세에서 19세로 상향 조정되었다. 그럼에도 이 나라의 높은 조혼율은 좀처럼 내려오지 않고 있다. 조혼은 여성의 교육 기회를 박탈하며, 신체적으로 취약한 상태에서 가정 폭력에 쉽게 노출되게 만든다. 이러한 조혼과 일부다처제는 특히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에게 무거운 굴레가 된다.

  유니와 친해진 미용사 수치는 자신이 이혼녀가 된 이유를 들려준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수치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으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결국에는 이혼에 이르렀다. 그런가 하면 유니의 절친 사라는 사귀던 남자 친구와 함께 있다가 그 장면이 사진에 찍혀서 협박을 당한다.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의해 혼전의 연애 관계는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며, 여성과 그 가족은 불명예의 상황에 놓인다. 결국 사라는 남자 친구와 생각지도 못한 이른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식에서 사라가 흘리는 뜨거운 눈물은 결코 기쁨의 눈물이 아니다. 사라가 꿈꾸던 미래와 자유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겉으로 보기에 유니는 평범한 여고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틈만 나면 친구들과 즐겁게 수다 떨고, 연모하는 문학 선생님 때문에 어쩔 줄 모른다. 자신을 좋아하는 남학생 요가와는 풋풋한 연애를 시작한다. 하지만 유니가 바라는 밝은 미래는 점점 더 멀어진다. 좋은 성적으로 대학 입학 장학금을 받으려는 계획도 틀어졌다. 두 번의 청혼을 거절함으로써, 유니는 그 지역의 암묵적 전통에 저항한다. 견고한 가부장제와 종교적 인습에서 벗어나려는 유니의 몸부림은 보라색에 대한 집착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유니에게는 꿈과 열정의 색인 보라색은 실은 그곳에서 '과부(widow)'를 상징하는 색이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유니보다 더 안좋은 처지에 놓인 사람은 문학 교사 다마르일 것이다. 다마르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알아챈 유니에게 청혼한다. 어머니의 소원을 이루어주고 싶다면서 다마르는 유니에게 애원한다. 인도네시아에서 LGBT의 인권은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다. 그들 대부분은 가족의 요구에 순응하고, 사회적 낙인을 피하기 위해 결혼 제도에 안착한다. 감독 카밀라 안디니는 'Yuni'를 통해 인도네시아 사회의 성적 차별과 폐쇄성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유니와 같은 하층민 여성들은 조혼과 일부다처제, 가정폭력과 같은 어려움과 마주한다. 동성애자인 다마르는 어쩌면 평생 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가야 한다.

  이 영화에서 요가는 유니에게 사랑의 마음을 고백하며 매번 시를 써서 전한다. 그 시들은 인도네시아의 위대한 시인 Sapardi Djoko Damono(1940-2020)의 것이다. 카밀라 안디니는 특히 시 'Rain in June'이 이 영화를 만드는 데에 부분적으로 영감을 주었다고 밝혔다(출처: womenandhollywood.com). 영화의 마지막, 유니의 결혼식 날에 폭우가 쏟아진다. 그 비를 맞으면서 보라색 예복을 입은 유니는 맨발로 걸어간다. 인도네시아에서 우기는 일반적으로 10월에 시작한다. 6월에 내리는 비는 예외적인 일이다. 퍼붓는 비가 꽃이 피기 직전의 나무에 마구 밀려든다. 아직 자신의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되지 않은 유니가 겪는 감정적인 시련은 '6월의 비'로 형상화된다. 영화 'Yuni'는 인도네시아의 주변부, 십 대 소녀의 삶에 대한 정밀한 초상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Sapardi Djoko Damono의 시 'Hujan Bulan Juni(Rain in June)'

Tak ada yang lebih tabah
Dari hujan bulan juni
Dirahasiakannya rintik rindunya
Kepada pohon berbunga itu
Tak ada yang lebih bijak
Dari hujan bulan juni
Dihapuskannya jejak-jejak kakinya
Yang ragu-ragu di jalan itu
Tak ada yang lebih arif
Dari hujan bulan juni
Dibiarkannya yang tak terucapkan
diserap akar pohon bunga itu

------------------------

No one is more patient
From the rain of June
Withheld her longing
To the flowering tree
No one is the wiser
From the rain of June
He removed his footprints
The hesitant in the street
No one is wiser
From the rain of June
He left the unspoken
absorbed the roots of the flower tree

원문 출처: https://steemit.com/art/@suhaimich/indonesian-poetry-maestro-sapardi-djoko-damono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Shirley Clarke의 실패한 타자성 탐구, Portrait of Jason(1967)

  1. 이상한 나라의 Jason Holliday   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한다. 자신의 이름이 Jason Holliday라고 말한 그는 본명이 Aaron Payne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유명한 재즈 연주자)와도 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가진 직업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가 말한 직업들 중에는 남창(whore)도 있다. 손에 술잔을 든 그는 심부름꾼(houseboy)으로 시작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늘어놓는다. 미국의 독립 영화 제작자 Shirley Clarke는 1966년 12월 3일, 자신이 머물던 첼시 호텔(Hotel Chelsea) 펜트 하우스에서 제이슨 할러데이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다큐를 찍었다. 저녁 9시에 시작된 촬영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Portrait of Jason(1967)'이다.   제이슨은 술에 취해 기분이 아주 좋아보인다. 화면 밖에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셜리 클라크는 제이슨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인형극의 조종하는 사람(puppeteer)처럼 클라크는 제이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 같다. 흑인이며 동성애자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미리 준비해놓은 소품으로 작은 공연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소품 가방에서 꺼낸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는 제이슨은 여성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킬킬거린다. 제이슨이 원하는대로 술과 담배가 계속해서 제공된다. 시간이 갈수록 술에 취한 제이슨의 말소리는 알아듣기 어렵게 뭉그러진다.   러닝 타임 1시간 45분의 이 다큐 'Portrait of Jason(1967)'은 보면 볼수록 기이하다. 관객은 'Jason Holliday'라는 인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도록 초대받지만, 다큐가 끝나고 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제이슨이 가진 뛰어난 공연자(performer)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