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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긴 애증의 서사, MBC 드라마 '아들과 딸(1992)'

 

  오래전 드라마 '아들과 딸(1992)'은 케이블 드라마 채널에서도 나름대로 사랑받는 재방목록에 들어간다. 누군가 그 드라마에서 자신에게 가장 충격적인 대사는 바로 이것이었다고 썼다.

  "아이고, 귀남이한테 폐병 옮기는 거 아녀?"

  아들 딸 쌍둥이로 태어난 귀남과 후남, 늘 모든 애정을 독차지하는 귀남에 비해 구박덩어리로 자란 후남은 온갖 고생을 하다가 결핵에 걸렸다. 그걸 듣고 귀남 엄마가 하는 말이다.

  그 드라마를 주의깊게, 인상적으로 본 연령대는 아마도 30대 후반에서 50대에 이르는, 특히 여성 시청자들이 아닐까 싶다. 아직도 올라오는 그 드라마 감상평을 보면 그러하다. 그 연령대의 여성들이 경험한 시대는 이전 세대에 비하면 사회적으로 여성 인권이 많이 향상된, 눈에 보이는 남녀차별, 가부장제가 물리적으로 해체되어가던 시절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관습법적으로 굳어져온 남성 위주 사회의 정신적 지형은 견고했다. 드라마 '아들과 딸'은 그러한 사회적 균열이 일어나던 1990년대에 방영되면서 높은 시청률과 함께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었다.

  정혜선이 분한 귀남 엄마(그는 결코 후남 엄마로 불리우지 않는다)가 보여주는 지독하고, 신앙에 가까운 '아들 사랑'은 결핵에 걸린 딸 걱정 보다는 아들에게 전염이 될까 걱정하는 것에까지 미친다. 그걸 보는 이들에게는 그쯤되면 진짜 딸이 맞나 싶을 정도의 생각마저 들게 한다. 나중에 후남이가 귀남의 친구 석호와 결혼하게 되자, 사법고시에 합격한 석호를 보는 게 귀남이가 괴롭지 않겠냐며 딸의 혼사를 탐탁지 않게 여기기도 한다. 한마디로 딸 잘되는 것이 귀남 엄마는 '싫다'. 그 이유는 하나다. 쌍둥이로 태어난 후남이가 잘 풀리는 것은, 귀남의 운을 뺏어가서 귀남이의 인생이 엉키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귀남 엄마는 6대 독자 집으로 시집와서 연달아 딸 셋을 낳았다. 귀남이가 그저 '아들'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을 세워주고, 삶의 의미를 부여해준 '귀한 아들'이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귀남 엄마가 살아왔던 시대의 여성의 인권이란게 얼마나 보잘 것 없었던 시대였는지는 1960년대에서야 민법에 규정된 배우자 상속권을 보면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여성은 자신의 남편이 사망해도 상속을 받을 수가 없었다. 상속법은 일제 식민시대 구관습법을 그대로 인정해서 호주(戶主) 상속 순위를 따랐는데, 적출 장남과 차남, 직계 비속의 순서를 따랐다. 딸이라 하더라도 출가한 자식은 제외되었다. 그러니까 여성 배우자는 남편이 사망하면 재산을 상속한 아들에게 기대어 살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1958년에 새롭게 제정된 민법이 1960년부터 효력을 미칠 때까지 이어졌다.

  삼종지도(), 유교의 고전 '예기()'에 나오는 여자가 따라야할 세 가지 도리. 즉, 여자는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을 따라야 한다는 유교 문화권의 도덕규범이다. 귀남 엄마에게 남편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 허세가 가득하고, 제멋대로이며, 가정 돌보는 일에는 등한한 무능한 가장을 둔 귀남 엄마는 낚시터 점방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한다. 귀남 엄마에게 오직 꿈이 있다면,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아들 귀남이가 잘 되어서 집안을 일으키고, 자신의 노후도 편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애정을 '몰빵'하는 귀남이의 인생은 뜻대로 풀리지 않고, 후남이는 어렵게 방통대를 졸업한 후 교사가 되고 검사 남편까지 얻는다. 거기다 소설가의 꿈까지 이룬다. 귀남 엄마는 그 모든 상황에 마음이 편치 않다. '아들이 잘 되어야 집안이 풀리는 것인데', 하면서 한탄을 했을 것이다.

  드라마 방영 당시, 귀남 엄마로 나온 정혜선은 그 뛰어난 연기력 덕분에 온갖 미움을 다 받았다. 드라마의 내용과는 달리 정작 사람들의 관심과 응원을 받은 사람은 김희애가 분한 '후남'이었다. 귀남 엄마와 함께 귀남이도 밉상으로 여겨졌다. 귀남이가 보여준 쪼잔함, 자기 중심성, 우유부단함, 그 모든 것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드라마의 귀남 엄마와 귀남이를 보면서 미운 감정이 들지 않았다. 어떤 면으로는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연민을 느꼈고, 이해가 되기도 했다. 특히 귀남이가 살아낸 삶, 부모의 넘치는 관심과 기대를 받으면서 그가 느꼈을 그 부담감과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에서의 좌절감을 주의깊게 보았다.

  드라마는 귀남 엄마가 딸 후남이와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고 화해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후남이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살아갈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귀남이를 편애할 수 밖에 없었던 어머니를 연민의 감정으로 바라보고, 그 오랜 애증의 시간들을 담담히 받아들일까? 어떻게 딸이라고 해서 그렇게 자식을 모질게 대할 수 있느냐고 평생에 걸쳐서 울분을 쏟아낼까? 아마도 귀남 엄마의 아들 사랑은 평생동안 지속될 것이기에 후남이의 속내는 더 복잡하고 괴로울 것이다.

  귀남 엄마의 과도한 아들 사랑, 또 그 근원이 되는 가부장제와 남녀차별에 모든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일은 이 드라마를 보는 단선적 시선이 될 것이다. 그 보다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그 질기고도 거대한 서사를 볼 필요가 있다. 부모 자식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과 고통의 원인이 애정의 많고 적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이 특별한 관계는 서로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받으며, 생채기가 난 자리에 애정을 들이붓고 거두기를 반복한다.

  자식은 부모가 온전히 자신을 사랑해주고 이해해주길 바라지만, '부모'는 결코 완전무결한, 흠결이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니므로 그것은 이루어지기 힘든 꿈이다. 그 보다는 '부모'는 나름의 결점과 약함을 가진 이들로, 그들의 타고난 성정대로 자식을 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자식'은 그러한 부모를 한 인간으로서 바라보고 연민을 가질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것이 평생을 두고 이어지는 부모 자식 사이의 '애증의 서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힘이 될지도 모른다.

  드라마는 후남이에게 안정적인 직업, 좋은 남편, 소설가로서의 성공을 선물함으로써 후남이의 인생에 빛을 드리운다. 시청자들이 원하는 결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후남이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긍정하고, 어머니를 연민으로 바라보았을 것 같다. 그것이 애증의 서사에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나간 여성,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후남이의 선택으로 어울리지 않을까. 그 오래된 드라마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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