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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da(1970), Happy Old Year(2019)

 

1. 바바라 로든의 역작, Wanda(1970)

  여자는 남편과 헤어져 여동생의 집 소파에 대책없이 앉아있다. 이혼 법정에서 두말없이 이혼에 동의하고 아이들 양육권도 포기한다. 봉제 공장에서는 남들보다 느리게 일한다고 해고당한다. 시간이나 때우려고 영화관에 갔는데, 잠깐 잠든 사이 지갑을 도둑맞았다. 화장실 좀 쓰려고 늦은 밤에 들어간 술집, 바텐더는 여자를 내쫓으려고 안달이다. 그런데 여자가 바텐더로 알고 있는 남자는 이제 막 진짜 바텐더를 죽인 강도 살인범이다. 여자가 골칫덩이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한 남자는 하는 수 없이 여자를 데리고 다닌다. 영화의 제목 'Wanda'는 이 여자의 이름이다.

  비운의 여성 감독 Barbara Loden의 유일한 장편 연출작인 영화 'Wanda(1970)'는 매우 기괴한 느낌을 준다. 여자 주인공은 무기력하고, 삶에의 의지도 없고, 자존감도 낮다. 완다의 여정은 사회적으로 취약한 지위의 여성이 어떻게 착취와 범죄에 노출되는가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같다. 완다는 먹을 것, 잘 곳 때문에 아무 남자에게 자신을 의탁한다. 남자들은 완다를 욕정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만 볼 뿐이다. 강도 살인범 노먼은 완다에게 모욕을 주며 복종을 요구한다. 급기야 완다는 노먼의 은행 강도 범죄 행각에 마지못해 동참하며 공범이 된다.

  배우였던 로든은 이 영화에서 완다 역을 맡았다. 영화 속 완다가 보여주는 불안하고 무기력한 모습에는 바바라 로든 자신이 겪었던 정서적인 어려움이 반영되어 있다. 'Wanda'는 어떤 면에서 존 카사베츠의 'A Woman Under the Influence(1974)'와 일맥상통한다. 카사베츠는 하층 계급 여성의 정신적 불안정성이 야기한 알콜중독을 보여준다. 그보다 선구적 초상으로서 로든은 학대와 착취, 범죄의 악순환에 빠져드는 불안한 여성을 그려낸다. 완다의 음울하고 고통스러운 몰락은 실제 현실의 한 단면을 잘라낸 느낌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여성 관객들에게 'Wanda'는 기분 나쁜 공포 영화로,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최악의 여성 캐릭터로 각인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날것 그대로의 진실이 들어있다. 완다의 정서적인 문제는 가정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할 수 없도록 만든다. 결국 가정 바깥으로 밀려난 이 불행한 여성은 사회의 맨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로든의 개인적 경험과 결합한 완다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게는 현재진행형의 현실이다. 'Wanda'는 어려운 복원 과정을 거쳐 2010년에야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있었다. 48살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뜬 로든은 복원된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에 찍힌 'a film by Barbara Loden'을 그 누구보다도 기뻐할 듯하다.


  

2. 의외로 잘 뽑아낸 태국 영화, Happy Old Year(2019)

  이제 막 스웨덴 유학에서 돌아온 진은 엄마와 오빠를 설득해 집정리에 나선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한 진은 살고 있는 집의 1층을 작업실로 쓸 생각이다. 오빠는 흔쾌히 진의 뜻에 따라주지만, 엄마는 그 어떤 것도 버릴 수 없다며 반대한다.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의 '정리 대작전'이 시작된다. 진은 집안 대부분의 물건을 버리기로 생각하고 검정색 쓰레기 봉투에 과감히 넣어 버린다. 하지만 진은 곧 그 많은 물건을 '버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는다. 과연 진은 무사히 집정리를 마치고, 그토록 꿈꾸는 작업실을 가질 수 있을까...

  '정리'에 대한 책이나 TV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면, 그 핵심이 '버리는 기술'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추억'과 같은 감정적 가치가 부여된 물건이라면 그걸 버리는 건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된다. 영화 속 진이 마주한 혼란과 괴로움도 거기에 있다. 어떤 면에서 진은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는 일을 피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진은 자신이 냉정하게 내친 남자 친구 아임의 카메라, 가족을 버린 아버지의 피아노를 두고 고심한다.

  어떻게든 그 물건들을 좋은 방식으로 처리해서 산뜻한 마음으로 새출발을 하고 싶다, 고 진은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은 진의 바램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간다. 카메라를 돌려주려고 다시 만난 전남친과는 복잡한 감정의 파고를 겪는다. 진이 아버지를 잊기 위해 팔아버린 피아노 때문에 엄마는 큰 상처를 받는다. 엄마에게 그 피아노는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진의 과거는 정리되지 않으며, 그 모든 기억과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질 수 없다.

  나와폰 탐롱라타라닛(Nawapol Thamrongrattanarit)은 진의 '물건 버리기 여정'을 통해 관계와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영화의 마지막, 진은 자신이 바라던대로 화이트톤의 미니멀리즘으로 정돈된 새 작업실에 앉아있다.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진은 물건으로 꽉 차있던 원래의 공간을 떠올린다. 거칠고 서툴게 밀쳐낸 과거의 추억과 그 흔적은 여전히 진의 마음에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정리에 대한 여러 조언들이 각각의 챕터들을 이끌어 가는 흥미로운 구성으로 되어 있다. 그러한 정리의 비법에도 불구하고, 다소 낯선 이 태국 영화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드러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criter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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