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감옥에서 복역중인 남자는 하룻밤 동안의 짧은 외출을 허락받는다. 간수는 남자의 아내가 근처 마을로 찾아와서 기다린다고
알려준다. 눈길을 헤치며 남자는 아내를 만나러 마을로 향한다. 남자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혹독한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일까? 사형수 플라톤은 어두운 밤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그의 기억 속에는 잊을 수 없는 한 여자가 있다. 엘다
라자노프(Eldar Ryazanov) 감독의 '두 사람을 위한 기차역(Station for Two, 1983)'에는 중년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피아니스트인 플라톤(올레그 바실라시빌리 분)은 병중의 부친을 방문하기 위해 기차 여행중이다. 중간 정차역에서 잠깐 점심을 먹기
위해 내린 그는 식당의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일어선다. 하지만 웨이트리스 베라(루드밀라 구르첸코 분)는 음식값을 내라며
플라톤을 채근한다. 둘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플라톤이 타야할 기차는 떠나버린다. 플라톤은 하는 수 없이 다음 기차를 기다린다.
역에는 베라의 애인 안드레이가 운전하는 기차가 도착한다. 안드레이는 멜론 상자를 봐달라고 플라톤에게 부탁하면서 담보로 플라톤의
여권을 가져가 버린다. 안드레이가 돌아올 때까지 플라톤은 이 작은 도시에서 이틀을 보내야 한다. 신분을 증명할 여권이 없으면
숙박도 할 수 없다. 미안함을 느낀 베라는 플라톤이 머물 곳을 함께 찾아보는데...
엘다 라자노프 감독은 코미디 영화에 일가견이 있었다. 특히 그의 로맨틱 코미디는 소련 관객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운명의 아이러니(The Irony of Fate, 1975)', '직장 로맨스(Office Romance, 1977)'의
연이은 성공으로 라자노프 감독은 경력의 정점을 찍었다. 1983년작인 '두 사람을 위한 기차역'은 사랑에 대한 라자노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앞서 제작한 두 개의 로맨틱 코미디와는 좀 다른 결의 분위기를 지닌다. 남녀 주인공의 나이는
중년에 접어들었고, 그들이 처한 상황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베라는 가난한 웨이트리스이며, 플라톤은 감옥행을 앞둔
피아니스트이다. 한마디로 두 사람은 각자의 삶에서 곤경에 처해 있다.
플라톤은 시골 웨이트리스 베라의 고단한
삶을 들여다 보게 된다. 여자의 남편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고, 애인이라는 작자는 푼돈으로 여자를 지배하려고 한다. 여자의
곁에는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해주며 존중해주는 그 누군가가 없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처지는 어떤가? 피아니스트라고 해도 먹고 사는
일은 버겁다. 여기저기 돈을 벌기 위해 연주며 녹음하느라 정신없이 살아왔다. 그는 과실치사 교통사고를 낸 아내를 대신해 죄를
뒤집어쓴다. 유명한 방송인인 아내는 곤경에서 벗어나자 남편을 외면한다. 그런 불편하고 괴로운 상황에서 플라톤과 베라의 사랑이
시작된다.
상처입은 중년 남녀의 가슴 짠한 사랑 이야기.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40년 전의 이 소련 영화는 그다지 큰
흥미를 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을 위한 역'에는 당시 소련 사회의 면면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들이
존재한다. 1982년, 오랫동안 소련을 강권으로 통치한 브레즈네프가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에 취임했다.
안드로포프는 브레즈네프와는 달리 다소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다. 영화 속에서 베라의 친구는 새로 장만한 비디오 기기를 자랑한다.
친구가 보는 것은 러시아어로 더빙된 모잠비크 가수의 공연이다. 베라와 플라톤은 안드레이로부터 넘겨받은 멜론을 장터에 내다파는데, 이
시장의 풍경도 꽤나 활력이 넘친다. 그러한 시장은 집단 농장과 계획 경제 시스템의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경제 행위, 이른바 '제 2
경제(second economy)'의 영역에 자리한다. 1980년대는 소련의 그러한 문화 경제적인 변화가 점차 가속화되는
시기였다.
'서구의 문물'과 '돈에 대한 감각'이 서서히 소련인들의 마음을 차지했다. 사랑의 방식과 그 가치도
변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베라와 플라톤의 사랑은 계층과 물질적 욕망 너머에 자리한다. 영화의 마지막, 플라톤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아내가 아닌 베라임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개봉 첫해에 3580만 명의 관객을 영화관으로 불러들였다. 어떤 면에서
구시대적 감성의 이 영화는 당시 소련인들의 마음을 강타했다. 가망없는 사랑이지만 희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체제에 대한
소련인들의 믿음도 그러했을까? 엘다 라자노프는 멜로 드라마의 틀 안에 흔들리는 소련 사회의 내밀한 풍경을 담아낸다.
*사진 출처: autogear.ru
**엘다 라자노프 감독의 영화 리뷰
차 조심!(Берегись автомобиля, Beware of the Car, 196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beware-of-car-1966.html
어느 이태리인들의 러시아 대모험(Невероятные приключения итальянцев в России, Unbelievable Adventures of Italians in Russia, 197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unbelievable-adventures-of-italians-in.html
운명의 아이러니(Ирония судьбы или с легким паром!, The Irony of Fate, 1975)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blog-post.html
직장 로맨스(Служебный роман, Office Romance, 197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office-romance-1977.html
잔인한 로맨스(Жестокий романс, A Cruel Romance, 198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19-cruel-romance-19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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