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잘못 탄 기차가 데려다준 곳, 뜻밖의 사랑 이야기가 있는 영화 세 편 '운명의 아이러니', '런치 박스', '황무지'

잘못 탄 기차가 데려다준 곳, 뜻밖의 사랑 이야기가 있는 영화 세 편

'운명의 아이러니(Ирония судьбы, или С лёгким паром!, The Irony of Fate, or Enjoy Your Bath!, 1975)', 엘다 라자노프 감독
'런치 박스(The Lunchbox, 2013)', 리테쉬 바트라 감독
'황무지(Badlands, 1973)', 테렌스 멜릭 감독


1. 소련 시절의 기념비적 로맨틱 코미디, 운명의 아이러니

  소련의 예술 창작 원리인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로맨틱 코미디는 어째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코미디에 재능있는 엘다 라자노프 감독은 그걸 잘 해내었다. 1977년작 '오피스 로맨스(Служебный роман, Office Romance)'는 애 딸린 이혼남과 나이든 독신녀와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로 큰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그 이전에 만들어진 '운명의 아이러니(The Irony of Fate, or Enjoy Your Bath!, 1975)'는 라자노프를 명실상부한 코미디의 제왕으로 만들어준 작품이다. TV방영용 2부작 영화인 '운명의 아이러니'는 1976년 1월 1일에 시청자들에게 선보였다. 첫 방영 때 1억 명의 소련 시청자가 관람한 이 영화는 쏟아지는 재방영 요청에 2월에 다시 편성되었다. 그 후, 해마다 12월 31일이면 이 영화를 TV에서 틀어주는 것이 소련의 문화적 관습이 되었다. 참으로 소련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노총각 외과의사 제냐는 마음에 둔 아가씨 갈리야에게 청혼을 하려는 참이다. 갈리야에게 자신의 아파트 열쇠를 주며 새해 첫날에 집에 오길 부탁하는 제냐. 그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은 늘 절친들과 목욕탕에서 만나는데, 오랜만에 만나서 만취하고 만다. 취한 상태의 친구들은 레닌그라드에 사는 파벨을 비행기에 태워 보내는 대신 제냐를 보낸다. 술에 취한 제냐는 택시 기사에게 주소를 불러주고 아파트에 도착한다. 어떻게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쓰러져 누워 자는데, 그 집 주인인 나디야는 침대에 누워있는 낯선 남자의 존재에 혼비백산한다. 우연의 일치로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 같은 모양으로 지어진 아파트가 같은 주소에, 심지어 아파트 열쇠마저 같았던 것이다. 나디야의 집에 오기로 한 약혼자 이폴리트, 제냐, 모스크바에서 제냐를 기다리는 갈리야, 이 네 명의 엇갈린 만남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무려 3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을 가진 이 영화는 하나도 지루하지 않다. 노래 사랑하는 러시아 사람들답게 남녀 주인공들이 기타치면서 노래도 여러 곡 부른다. 무엇보다 제냐와 나디야 역을 맡은 안드레이 미야코프와 바르바라 브릴스카의 호흡이 아주 좋다. 브릴스카는 폴란드 출신의 배우로 라자노프 감독이 이 영화를 위해 특별히 캐스팅했는데, 정말로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브레즈네프 시대에 도시마다 찍어낸 것처럼 만들어낸 비슷한 아파트를 소재로 했다. 운명의 장난으로 만나게 된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2. 참신하고 세련된 인도 로맨스 영화, 런치 박스

  인도의 리테쉬 바트라 감독의 '런치 박스(The Lunchbox, 2013)'도 예기치 못한 실수가 맺어다준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인도의 대도시 뭄바이, 이곳의 직장인들은 자신의 집에서 만든 도시락을 점심마다 배달시켜 먹는다. 남편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둔 일라는 무관심한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도시락 반찬 만들기에 온힘을 쏟는다. 이웃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정성들여 만든 도시락은 배달원의 실수로 남편이 아닌 퇴직을 앞둔 홀아비 공무원 사잔에게 배달된다. 일라는 곧 도시락이 잘못 배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어쩌다 쓰게 된 쪽지를 주고 받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친밀한 감정이 싹튼다. 그러는 와중에 일라는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고,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낀다. 일라와 사잔은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사잔은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는다.

  노라 에프론 감독의 '유브갓 메일(You've got mail, 1998)'을 떠올리게 하는 '런치 박스'의 설정은 이메일 보다 구식인 '손편지'이다. 이 의외의 설정이 강력한 유인물로 작용한다는 것은 영화를 보다 보면 알 수 있다. 얼굴도 모르는 두 사람이 매일 도시락 속에 넣은 편지를 확인할 때의 설레임과 짜릿함이 스크린 너머 그대로 전해진다. 일라와 사잔이 편지를 통해 나누는 추억과 일상은 점차 서로의 마음을 물들인다. 마치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처럼 사랑이 그렇게 찾아온다. 뭄바이의 독특한 도시락 배달 시스템을 엿볼 수 있는 것도 덤이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잊을 수 없는 대사는 사잔의 후임 셰이크가 하는 대사일 것이다.

  "때론 잘못 탄 기차가 우릴 목적지에 데려다 줍니다."


3. 낯설고 기이한 종착지, 황무지

  '운명의 아이러니'와 '런치 박스'의 주인공들이 잘못 탄 기차 같은 실수 때문에 사랑의 목적지에 이르게 되는 것과는 달리, '황무지(Badlands, 1973)'의 종착지는 낯설고 기이하다. 테렌스 멜릭(Terrence Malick)의 데뷔작인 이 영화는 아서 펜의 1967년작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의 마일드 버전 같은 느낌을 준다. 사우스 다코타주의 시골 마을, 억압적인 아버지와 살고 있는 15살 홀리(시시 스페이식 분)는 25살의 청소부 키트(마틴 신 분)와 알게 된다. 홀리는 제임스 딘을 닮은 키트에게 끌리지만, 홀리의 아버지는 둘의 만남을 반대한다. 홀리의 아버지에게 적대감을 드러낸 키트는 총을 쏘아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결국 시신과 집을 불태우고 정처없이 길을 떠나는 홀리와 키트. 이 괴상한 한 쌍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몬태나주의 황무지로 들어간다. 황무지에서 보낸 둘만의 평화로운 시간도 잠시, 곧 현상금 사냥꾼을 비롯해 경찰과 주방위군이 그들의 뒤를 쫓는다.

  좋아하는 여자의 아버지를 죽인 남자, 그리고 그 남자와 길 떠나는 여자. 이 잘못된 인연의 끝에 무엇이 기다릴지 추측하는 일은 쉽지 않다. '황무지'는 테렌스 멜릭이 그려낸 1970년대 미국의 황폐한 내적 자화상 같다. 홀리의 아버지와 집으로 상징되는 기성 세대의 권위와 가부장적 질서에 거침없이 총질을 하고 불까지 질러 멸실에 이르게 하는 장면은 참혹하다. 홀리와 키트가 마주하는 몬태나의 황량한 풍경들은 마치 베트남전의 패배가 남긴 젊은 세대의 내적 트라우마처럼 보인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선율 속에 펼쳐지는 이 기이한 범죄 스릴러 영화는 쓰디쓴 뒷맛을 남긴다. 어디로 가야할지 목적지도, 방향성도 잃은 세대. 멜릭은 서정적인 풍광 속에 정신병적 징후를 지닌 키트와 철부지 십대의 로맨스를 짜넣는다. 잘못된 만남은 어그러진 여정으로 이어지고, 도착한 곳에서 보게 되는 것은 파멸일 뿐이다. 테렌스 멜릭이 '황무지'에서 보여준 영화적 감성을 계속 유지했더라면 나았을 텐데, 그의 2011년작 'The Tree of Life'를 보고 있노라면 한숨만 나온다. 멜릭의 영화 종착지는 의미없는 공허함으로 가득하다. 어쨌든 이 '황무지'와 '천국의 나날들(1978)'은 볼만한 영화이므로 멜릭의 작품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챙겨볼 것을 추천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en.unifrance.org


***사진 출처: themusichall.org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아, 홍상수: 물안에서(In Water, 2023)

    오래전, 영화를 공부할 때의 일이다. 강의를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신경을 긁는듯한 소음이 계속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강의실 뒷문으로 나와서,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나섰다. 영상원 본관 3층의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마침내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냈다. 열린 교수 연구실 안쪽에, 희끗희끗한 머리의 한 남자가 이상한 악기를 천천히 두드리고 있었다. 홍상수였다. 그는 매우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악기를 두들기던 그가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약간 당황했는지, 잠시 연주를 멈추었다. 나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동남아시아인지, 아프리카인지 원산지를 알 수 없는 악기 소리는 내가 다시 강의실에 도착할 무렵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해 가을, 홍상수가 영상원 교수직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홍상수의 강의는 영화과 학생들에게 악명이 자자했다. 거의 강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상수가 영상원을 떠날 무렵에는, 자신의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교수직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형편없이 어그러졌다. 나는 홍상수의 그 지치고 지루했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결국 떠날만한 때에 떠났다. 그건 학생들에게도, 그에게도 좋은 결정이었다.     어제, 홍상수의 2023년 작 영화 '물안에서'를 보았다. 러닝타임 61분의 이 영화는 대부분의 화면이 초점이 나간 상태(ouf of focus)로 흐릿하게 나온다. 처음에는 또렷했던 화면이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로 나오니, 관객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등장인물은 세 명. 배우로 활동하던 승모는 자신의 단편 영화를 찍겠다며 섬에 왔다. 승모와 동행한 사람은 촬영을 맡은 친구 상국, 연기를 할 여배우 남희이다. 승모는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모은 돈 300만 원을 들고 왔다. 그런데 정작 그는 시나리오조차 쓰지 않았다. 상국과 남희는 승모가 찍을 영화가 어떤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