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브레즈네프 시기의 빛나는 로맨틱 코미디, 직장 로맨스(Служебный роман, Office Romance, 1977)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아마도 '직장 로맨스'의 아나톨리에게는 루드밀라의 눈물을 보았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영화는 통계청 직원 아나톨리가 자신의 직장 동료들을 소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통계청의 수장으로 오로지 일 밖에 모르는 구닥다리 옷차림의 노처녀 루드밀라, 무한긍정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나톨리의 대학 동창 올가, 루드밀라의 비서로 멋내기가 취미인 패션 리더 베라, 마당발로 직장 내 대소사를 챙기는 노조위원장 슈라. 이런 이들과 함께 일하는 아나톨리는 바람난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홀로 아들 둘을 키우고 있다. 어느 날, 그의 대학동창 유리가 부청장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평온했던 직장에는 예기치 않은 로맨스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게 된다.

  엘다르 랴자노프(
Eldar Ryazanov) 감독의 1977년 영화 '직장 로맨스(Служебный роман, Office Romance)'는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일벌레 직장 상사와 사랑에 빠지는 소심남 아나톨리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 '가을 마라톤(Осенний марафон, 1979)'에서 흔들리는 가을 남자를 연기했던 올레그 바실라시빌리가 이 영화에서는 철벽남 유리로 나온다. 그는 돈에 쪼들리는 친구 아나톨리에게 새로 생긴 부서장 자리의 승진을 위해 상사 루드밀라를 꼬드겨 보라고 한다. 유리의 부임 축하 파티에서 아나톨리는 루드밀라에게 시와 노래를 불러보며 호감을 보여주려 애를 쓰지만, 루드밀라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그런 루드밀라에게 아나톨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일벌레라며 모욕을 주고, 루드밀라는 당혹감 속에 자리를 뜬다. 다음 날, 사과를 위해 찾아간 자리에서 아나톨리는 상처받은 루드밀라의 눈물을 보고 연민을 갖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의 직장 로맨스가 시작되는 가운데, 올가는 유리에 대해 가졌던 대학 시절의 연애 감정이 되살아나서 편지 공세를 시작한다. 이 어지러운 직장 로맨스는 어떻게 끝날 것인가...

  이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음악이다. 구 소련 시절 모스 필름 제작의 많은 영화에서 안드레이 페트로프의 음악은 독보적이었다. '나는 모스크바를 걷고 있네(1964)'와 '가을 마라톤(1979)'에서의 서정적인 선율은 모두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 '직장 로맨스'에서도 페트로프의 눈부신 실력이 발휘된다. 랴자노프 감독이 가사를 쓴 여러 곡의 노래들이 영화에서 흘러나오는데, 모스크바의 가을 풍경과 매우 잘 어울린다. 주인공들의 심정을 잘 나타내는 시적인 가사들은 랴자노프가 시인들의 시에서 인용한 구절들이 포함되었다. 그 노래들이 흐르는 '직장 로맨스'는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는 1977년의 모스크바, 그곳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풍속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직장 로맨스'의 캐릭터들은 구시대의 도식적인 젠더 관념을 명백하게 반영하고 있다. 사회적 경력에서는 나름의 성취를 이룬 루드밀라는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외로운 여자로 묘사된다. 루드밀라는 자신이 일에 매진하는 이유가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라고 아나톨리에게 말한다. 삼십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중년의 여자처럼 보이는 촌스러운 옷차림과 딱딱한 매너를 지닌 루드밀라를 직원들은 '우리의 할멈(our hag)'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흉을 본다. 이런 루드밀라가 사랑에 빠지게 되자 심정의 변화와 함께 외모를 가꾸기 시작한다. 오직 '사랑'만이 이 가엾은 처지의 노처녀를 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올가의 처지는 루드밀라 보다 더 나쁘다. 가정을 가진 유부녀임에도 대학 동창 유리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올가는 그런 자신을 추스리지 못한다. 올가가 유리에게 보낸 편지들은 곧 직장 동료들에 의해 웃음거리가 되고, 결정적으로 유리는 노조에 공식적으로 올가의 문제 해결을 의뢰함으로써 모멸감을 안겨주기에 이른다. 랴자노프 감독이 그려낸 '직장 로맨스'의 여성들은 사랑의 감정에 말할 수 없이 약하고 흔들리는 그런 존재로 그려진다. 이것은 영화 초반부에 통계청의 여직원들이 출근하자마자 화장이며 외모 치장에 열을 올리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에서도 부각된다. 여성은 나이에 관계없이 끊임없이 외모를 가꾸고, 타인의 시선과 관심을 갈구하는 존재임을 각인시킨다. 여성에 대한 관음적 시선은 음흉한 눈길로 여직원들의 몸매를 훔쳐보는 중년의 남자 직원 표트르가 대변한다.

  '직장 로맨스'는 그렇게 당시 소련 여성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관점을 투영한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서도 여전히 여성은 전통적 가정의 안주인 역할을 수행해야 했고, '직장'은 '가정'의 하위 범주에 속했다. 루드밀라의 비서 베라는 멋진 패션 리더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틈만 나면 얼마전 이혼한 남편에게 다시 돌아와줄 수 없냐고 전화를 걸어 애걸한다. 루드밀라는 아들 둘을 혼자 키우느라 힘들다는 아나톨리의 푸념에 그래도 당신은 아이들이 있으니 행복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런 루드밀라는 얼마 안가 자신의 꿈을 실현하게 된다. 영화는 마지막의 자막에서 9개월 후, 아나톨리에게 세 번째 아들이 태어났다고 알려준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에 소련에서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고,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었던 영화였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본 오늘 날의 젊은 러시아 여성은 영화가 매우 구시대적이며, 아나톨리의 세 번째 아기가 아들이라고 분명히 알려주는 자막도 우습기 짝이 없다고 짧은 감상평을 썼다. 그렇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2011년에 러시아에서 개봉된 리메이크 영화가 혹평 속에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럼에도 '직장 로맨스'가 보여주는 로맨틱 코미디의 서사는 매우 부드러우며 관객을 즐겁게 만든다. 직장 내의 위계 관계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 마음을 열고 사랑에 빠지는 루드밀라와 아나톨리의 사랑 이야기는 결코 억지스럽지 않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는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아나톨리 역의 안드레이 미야코프, 루드밀라 역의 알리사 프로인드리치는 구 소련 시절을 대표하는 국민 배우들이었다. 브레즈네프 시절의 경제적 침체기에 소련의 관객들은 이런 즐거운 영화라도 보면서 삶의 시름을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 쏟아져 나온 코미디 영화의 유산 가운데 랴자노프 감독의 '직장 로맨스'는 빛나는 보석과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러닝 타임이 꽤 길다. 155분의 길이로,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다.

**구 소련 시절의 영화사 모스 필름(Mosfilm)은 유튜브에 전용 채널을 개설해 놓았다. 무료이며, 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번역이 간결하고 아주 좋다.

***사진 출처: newperexod.com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