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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러시아 사회의 정밀한 풍속화, 잔인한 로맨스(Жестокий романс, A Cruel Romance, 1984)

 

  영화는 화려한 결혼식 피로연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오구달로바 부인은 이제 막 첫째 딸 올가를 결혼시켰다. 부유한 귀족 사위를 맞았다는 기쁨도 잠시, 몬테카를로에서 살고 있는 둘째 딸로부터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받는다. 남편이 도박으로 재산을 날려 버렸다는 것. 어쩔 수 없이 집을 저당잡힌다. 몰락한 귀족 미망인은 집안을 일으키는 길이 세 딸들의 성공적 결혼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막내딸 라리사만 남았는데, 가난한 집안 형편에 딸의 지참금을 마련할 길은 요원하다. 19세기 러시아에서는 계층을 막론하고 여성이 지참금(dowry)을 가지고 결혼하는 것이 관례였다. 많은 지참금을 지닌 신부는 좋은 신랑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라리사에게는 그 지참금이 없다.

  엘다 라자노프(Eldar Ryazanov) 감독의 1984년작 영화 '잔인한 로맨스(Жестокий романс, A Cruel Romance)'는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19세기의 러시아 극작가 알렉산더 오스트로프스키(Alexander Ostrovsky)가 1878년에 발표한 희곡 '결혼 지참금(Бесприданница, Without a Dowry)'이 그것이다. 라자노프 감독은 준비 중이던 영화가 미뤄지던 시기에 아내의 권유에 따라 오스트로프스키의 작품을 읽게 되었다. 주로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코미디 영화를 만들던 그는 생각지 않게 러시아 고전 희곡을 영화화하기로 마음 먹었다. 지참금 없이 결혼하려는 가난한 귀족 여성 라리사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알렉산더 오스트로프스키는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극작가이다. 그는 특히 당시 러시아에서 새롭게 부상한 상인 계층을 등장 인물로 내세워 러시아 사회의 변화를 그려냈다. 영화의 원작이 된 희곡 '결혼 지참금'은 물질적 욕망과 뒤엉킨 결혼 제도를 통렬하게 묘사한다. 작가는 당시 그가 들었던 실제 사건을 가지고 희곡을 썼다. 지참금 때문에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어느 남자의 이야기였다.

  오구달로바 부인은 항상 대문을 열어두고 구혼자들을 환대한다. 그런데 어째 오는 인간들의 면면이 부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부유하지만 늙은 상인 크누로프, 그다지 큰 재산이 없는 라리사(라리사 구제에바 분)의 어린 시절 친구 보체바토프, 가난한 우체국 직원 유리가 그들이다. 라리사도 그들이 눈에 차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 그러던 중에 부유한 선주 파라토프(니키타 미할코프 분)가 등장한다. 증기선을 소유한 그는 멋진 외모에 호탕하기까지 하다. 청혼을 기대하는 라리사, 그러나 파라토프는 말도 없이 떠나버리고 그렇게 1년이란 시간이 흐른다.
 
  비록 지참금은 없지만 딸의 미모와 젊음으로 어떻게든 잘 나가는 사윗감를 붙잡으려는 오구달로바 부인의 소원은 이루어질 기미가 없다. 약혼하려던 은행원이 횡령범으로 눈 앞에서 체포되는 꼴을 겪고 나서 이 집안의 체면은 더 구겨졌다. 될 대로 되라, 라리사는 자포자기 상태로 우체국 직원 유리와 결혼하기로 마음먹는다. 가난하지만 성실해 보이는 이 남자는 라리사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 같지만, 결혼 전부터 소유욕을 드러내며 통제하려 든다. 앞으로 남들 앞에서 노래도 부르지 말라고 하는 이 남자. 여자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만 소용이 없다. 그런 여자 앞에 과거의 사랑이 나타난다. 파라토프는 라리사에게 묻는다. '너 아직도 나 사랑하는 거 맞지?'

  "왜 여자들은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겁니까? 좋은 품성의 남자들을 내팽겨쳐두고 말입니다."
  "그건 나도 몰라요." 

  1년 전에 파라토프에게 첫눈에 반한 라리사를 보고 유리가 물었고, 돌아온 대답은 그러했다. 진짜 '나쁜 남자'가 맞는 파라토프는 이제 결혼을 앞둔 신부의 마음을 뒤흔든다. 라리사는 남편이 될 유리의 가난함, 술에 취해서 보여주는 상스런 행동거지, 자신에 대한 집착을 보며 넌더리를 낸다. 과연 라리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영화는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여성의 사회적 지위, 결혼을 둘러싼 적나라한 세태를 보여준다. 딸을 마치 결혼 시장의 상품으로 내놓는 부인의 뻔뻔함은 늙고 부유한 상인 크누로프의 값비싼 선물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데에서 드러난다. 유부남인 그의 흑심을 알면서도 못 본 체 하는 것이다. 오구달로프 부인에게 결혼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돈'이다. 내 딸 데려가려면 돈, 그것도 많은 돈을 내놔야 해. 그것이 부인의 본심이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괜찮은 남자들은 가난한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영화는 물질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하기 위해 유리는 아내의 구혼자들을 초대해서 성대한 피로연을 베푼다. 가난한 그는 싸구려 와인을 '상표갈이'로 비싼 와인인 것처럼 대접한다. 그러나 구혼자들은 그런 유리를 비웃으며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가난을 경멸하며 모든 것을 돈으로 판단하는 그들은 라리사 또한 하나의 물건으로 바라본다. 크누로프와 보체바토프는 파라토프에게 버림받은 라리사를 누가 차지하냐를 두고 동전 '제비뽑기'로 결정한다.

  엘다 라자노프 감독은 '잔인한 사랑'을 원작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다. 영화에서 라리사가 결혼을 기대하며 파라토프와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은 원작 희곡에는 없는 부분이었다. 그 때문에 원작과는 달리 라리사가 분별력 없는, 어리석은 여성 캐릭터로 묘사된 것에 문학 평론가들은 분개했다. 그와는 달리 당시 관객들은 이 영화를 아주 좋아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돈에 대한 지독한 열망은 다가올 개혁 개방 시대 소련인들의 주된 관심사가 될 터였다. 때로 영화는 시간을 앞질러 시대 정신을 예견한다.

  이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안드레이 페트로프의 감미로운 로망스, 집시 악단의 멋진 공연, 1870년대를 충실히 재현한 의상과 세트들도 좋다. '잔인한 로맨스'는 물질적 욕망에 종속된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단면을 정밀하게 그려낸다. 결국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비운의 운명을 맞이한 라리사의 마지막은 통렬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사진 출처: autogear.ru



**그림 출처: en.wikipedia.org  

Reception of a Dowry in a Merchant Family(Vasili Pukirev, 1873)

  

***엘다 라자노프 감독의 영화들 리뷰

 

차 조심!(196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beware-of-car-1966.html

어느 이태리인들의 러시아 대모험(197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unbelievable-adventures-of-italians-in.html 

운명의 아이러니(1975)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blog-post.html

직장 로맨스(197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office-romance-19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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