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합작이 소련 영화에 남긴 유종의 미, 어느 이태리인들의 러시아 대모험(Невероятные приключения итальянцев в России, Unbelievable Adventures of Italians in Russia, 1974)
노부인은 임종을 앞두고 있다. 러시아 혁명의 불길을 피해 이태리에 정착한 이 할머니에게는 손녀딸이 있다. 할머니는 손녀딸에게
그야말로 엄청난 유언을 남긴다. 고국을 떠나기 전,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자상 밑에다 수십억에 달하는 보석들을
감추어 두었다는 것. 병실에서 그 유언을 들은 사람은 손녀딸 올가를 비롯해 주치의, 다리 깁스를 한 환자, 남자 간호사 안토니오와
주제페, 마피아 로사리오까지 모두 여섯 명. 이들은 곧 러시아행 비행기에 올라 보물을 찾을 생각에 들뜬다. 마피아 로사리오는
의사의 여권을 몰래 버리고, 깁스 환자는 밀수범이라고 세관에 신고해서 두 명을 떼놓는다. 나머지 세 명과 보물을 나눠가질 생각이
없는 올가는 그들을 피해 달아난다. 마피아는 나머지 경쟁자를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안토니오와 주제페는 러시아 여행 가이드
안드레이와 함께 올가를 찾으려 애를 쓴다. 우여곡절 끝에 레닌그라드에 도착한 그들은 그곳에 너무나도 많은 사자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자상마다 파헤쳐 보는 보물 탐사대, 과연 보물 찾기는 성공할 것인가...
엘다 라쟈노프(Eldar Ryazanov)감독의 1973년작 '어느 이태리인들의 러시아 대모험(Unbelievable
Adventures of Italians in Russia)'은 소련 국영 영화사 모스 필름(Mosfilm)과 이태리 영화사와의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이태리 영화사가 모스 필름에 진 빚을 갚기 위한 대안이었다. 1970년,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감독의 '워털루(Waterloo)'가 이태리와 합작으로 만들어져 개봉되었다. 소련은 그 영화를 위해 막대한 제작비와 물량을
쏟아부었지만, 해외 흥행 실적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스탠리 큐브릭은 '워털루'가 망하는 것을 보고 나폴레옹에 대한 시대극을
만들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이태리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지만, 소련 영화 당국과 모스 필름의 손해는
컸다. 그에 대해 일종의 빚 청구서로 수익을 내기 위한 합작 영화 한 편을 더 만들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양쪽에서 공동으로
쓰기로 한 시나리오는 여러 번 엎어진 끝에 겨우 결과물을 낼 수 있었다. 이태리 촬영시 제작비는 로렌티스가 부담하기로 했는데, 이
짠돌이 제작자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배우들을 기용했고 영화를 위해 온 소련 촬영팀들에 대한 대우도 박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렇게 이 영화는 시작부터 쉽지가 않았다.
이 골치 아픈 프로젝트를 맡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소련 영화 촬영 국가 위원회(Goskino)는 그 책임을 라쟈노프에게
맡겼다. 코미디 연출에 소질이 있는 라쟈노프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라쟈노프는 처음에는 시나리오 작업에만 참여하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영화를 떠맡았다. 그리고 그는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멋지게 만들어 냈다. 이 영화를 보면 나름대로 큰 제작비가
투입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초반부에 마피아 로사리오의 실수 때문에 비행기가 고속도로에 긴급 착륙하는 장면이 나온다.
진짜로 비행기가 차들이 달리는 도로 한 가운데에 착륙을 한다! 물론 실제 고속도로에서의 촬영이 아니라, 공항의 활주로에서
이루어졌지만 거의 묘기에 가까운 그 착륙 장면은 놀랍기만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안토니오와 주제페, 안드레이가 올가를 자동차로
따라가는 장면에서 볼 수 있는 자동차 스턴트는 박진감이 넘친다. 자동차 스턴트는 이태리의 레이서 겸 스턴트맨인 세르지오 미오니가
맡아서 멋진 장면을 만들어 냈다. 이 영화에 합성으로 처리된 가짜 장면은 하나도 없다. 라쟈노프 감독은 그런 장면들을 합성이 아닌
실제의 것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주유소 폭발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주유소 모양의
건물을 똑같이 지어놓고, 진짜로 폭파한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국가가 영화 산업을 총괄하고 지원하는 소련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볼거리에 더해 어설픈 보물 탐사대가 가는 곳마다 벌이는 소동은 끊임없는 웃음을 만들어 낸다. 사자상 아래 도로를 파헤치는가
하면, 동물원의 사자 우리까지 가서 보물을 찾다가 사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 게으르고 말 안듣는 사자를 다루는 것은
라쟈노프 감독에게 가장 큰 시련이었다. 사자는 이태리 배우 한 명에게 상처를 입히기까지 했는데, 촬영이 끝날 무렵에는 부주의하게
접근한 일반인에게 덤벼들었다가 경찰의 총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 때문일까? 영화를 보다 보면 사자와 근접한 거리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는 것이 조마조마하다. 러시아 여행 가이드 역을 맡은 안드레이 미로노프는 두어 발자국 거리에서 사자에게 말을 건네는
연기를 해야했다. 이 대단한 근성을 가진 배우는 자동차 스턴트 신의 일부분과 6층 호텔 창문에서 카펫으로 내려오는 장면까지 직접
해냈다. 그는 1969년작 '다이아몬드 팔(The Diamond Arm)'에서도 몸을 유연하게 쓰는 연기며 슬랩스틱도 잘
소화해냈다.
라쟈노프 감독의 연출은 성공적이었다. 소련에서 개봉 첫해 5천만 명의 관객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 액션과 코미디가 적절히
어우러진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 '워털루'는 소련 영화 당국에 트라우마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왜
소련은 이태리와의 영화 합작을 시도했을까? 소련 국내 관객만을 대상으로 한 내수 시장을 넘어선 새로운 수익 창출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에 따른 정책적 지원은 흐루시초프 시절의 '해빙기'와도 맞물려 추진되었다. 소련은 원래 서독과의 영화 합작을
모색했다. 그러다 1967년에 이태리와의 상호 합작에 대한 협약이 이루어지면서 서독 대신 이태리가 제작 파트너가 되었다. 이태리는
제작 기술 쪽의 강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본 조달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던 터였다. 영화에 대한 소련의 국가 정책적 지원은
이태리 제작사들에게 매력적인 조건이었고, 소련은 이태리를 통해 해외 배급과 판권 시장을 확장해 나간다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그러나 이태리 영화사의 자본주의적 마인드와 소련의 관료주의는 사사건건 충돌했다. 거기에 제작 현장에서의 의사 소통의 어려움과 그로
인한 오해는 영화의 완성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미하일 칼라토조프 감독의 1969년작 'The Red Tent'는 그런 가운데
나온 첫 결과물이었다. 시작부터 삐걱거리던 합작 영화 시스템은 '워털루'의 대실패로 결국 결별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어느 이태리인들의 러시아 대모험'은 그 결별의 과정에서 소련이 거둔 유종의 미일지도 모른다. 러시아어 대사는 더빙으로
처리되었지만, 주연 여배우를 비롯해 4명의 이태리 배우들의 연기도 괜찮은 편이다. 소련 영화 당국과 라쟈노프 감독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으로 활용했고,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렇게 이 영화의 제작 배경에는 소련이 가진 영화 산업적 고민이 깔려
있다. 안정적인 내수 시장을 넘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고 했던 소련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쓰디쓴
경험들이 훗날 소련 붕괴 이후 해외 합작으로 활로를 찾으려 했던 민간 영화 제작사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영화의 산업적
측면과 상업적 속성에 대해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1967년부터 1970년대 후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태리와의 합작을 통해 그렇게
충분히 학습할 수 있었다.
*사진 출처: film.ru
**사진 출처: pikabu.ru 실제 주유소로 착각한 운전자들이 기름을 넣기 위해 찾았던 주유소 세트의 폭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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