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비 오는 날에는 소련 코미디 영화를, 차 조심!(Берегись автомобиля, Beware of the Car, 1966)

 

  소련 시절 제작된 영화들 가운데 대중에게 가장 인기 있고 환영받는 영화 장르는 코미디였다. 국가가 영화 산업을 총괄하는 소련 당국의 입장에서도 코미디는 수익률이 높은 장르였기 때문에 제작과 검열에서도 비교적 관대했다. 엘다 라쟈노프(Eldar Ryazanov) 감독은 코미디 영화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었다. 'Unbelievable Adventures of Italians in Russia(1973)', 'Office Romance(1977)'는 그의 대표작으로 소련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라쟈노프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도 대부분 자신이 했다. 1966년작인 '차 조심!(Beware of the Car)'도 그가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영화의 첫 부분, 어두운 밤, 서류 가방에 모자, 트렌치 코트를 입은 남자가 복잡한 계단을 오르내리며 조심스럽게 차고에 접근한다. 소련 느와르인가 싶은 생각이 들 무렵, 남자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전지적 시점의 이 해설자는 사건의 국면마다 설명을 덧붙이며 영화에 독특한 색채를 덧입힌다.

  겸손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지닌 자동자 보험 설계사 유리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그는 고객들 가운데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의 차를 훔친다. 수사관 막심은 연이은 차량 도난 사건의 범인 때문에 골머리를 썩인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만난다. 연극을 좋아하는 유리와 막심은 지역 극장의 배우로도 활약하는데, 그들은 새로 상연될 '햄릿'을 함께 준비하고 있다. 차량 절도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들을 조사하던 막심은 유리가 범인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연극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로서 막심은 유리를 체포하는 일을 주저한다. 범인과 경찰, 이 두 사람의 브로맨스는 어떻게 끝날까...

  사실 소련 코미디 영화가 빵빵 터지는 웃음을 주는 일은 별로 없다. 이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 느와르로 시작했던 영화는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유리의 캐릭터는 정말로 특이한데, 차를 훔칠 때 보여주는 계획성과 명민함과는 달리 일상에서는 순진하고 어수룩한 모습을 보여준다. 라쟈노프 감독은 유리라는 인물을 '돈키호테와 미슈킨(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의 주인공), 로빈 후드'의 특성을 조합해 설정했다. 유리는 자신의 물욕 때문에 차를 훔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 일을 한다. 그가 훔친 차의 고객들은 부정한 이득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이다. 백화점에서 외제 물건을 빼돌려 비싼 가격에 파는 소매상,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저지른 이들이 유리의 표적이다. 유리는 차를 팔아 그 돈을 고아원에 기부한다.    

  영화 '차 조심!'은 당시 소련 사회가 가진 문제를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공산주의 정권이라고 해서 부정부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공권력에 대한 불신, 그것이 순박하고 착실한 유리가 차량 절도범으로 변모하는 이유이다. 어쨌든 '소련 영화 촬영 위원회(Goskino)'는 차량 절도범이 주인공인 이 영화에 난색을 표했다.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차량 절도를 모방할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칙에 따라 인민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들은 배격되었다. 라쟈노프는 시나리오를 수정해서 잡지에 실었고, 독자들의 반응이 좋자 비로소 영화로 만들 기회를 얻는다.

  이 영화를 본 어느 러시아의 관객은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에도 비현실적인 내용이었고, 지금의 관객들은 더 이해못할 구식 영화라고 평했다. 일정부분, 그 관객의 말이 맞기는 하다. 그러나 영화 '차 조심!'은 여러 흥미로운 지점들을 보여준다. 영화는 '값비싼 자동차'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주인공 유리는 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훔치는 차들의 주인들은 '돈', 그것도 부정하게 축재하고 소비하는 비도덕적인 인물들로 제시된다. 백화점 소매상으로 나오는 디마(안드레이 미로노프 분, 그는 라쟈노프 영화의 단골 출연 배우이다)의 장인은 은퇴한 군 장교로 교외에 화려한 다챠(dacha, 교외 별장)를 짓는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사유재산을 전적으로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근로소득을 비롯해 개인 소유의 주택이 인정되었고, 상속도 법적으로 보장되었다. 디마는 재판정에서 소련의 법은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고 소리치며, 유리의 처벌을 요구한다. 물론 유리는 당연히 죗값을 치루는 것으로 나온다.

  '연극'이라는 공통분모로 묶인 유리와 막심이 보여주는 연대의식 또한 눈길을 끈다. 막심은 유리의 체포영장을 찢어버리려고까지 한다. 그는 유리가 차를 훔치는 이유, 그리고 유리의 자선 행위에 감화를 받는다. 이 두 사람이 보여주는 우정은 극중극으로 공연되는 '햄릿'의 장면들과 함께 제시된다. 유리 역을 맡은 이노켄티 스목투노프스키(Innokenty Smoktunovsky)는 미묘하고 복합적인 캐릭터를 잘 소화해낸다. 라쟈노프는 사회비판적인 요소를 다루면서도 코미디의 본질을 살리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는 밋밋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차 조심!'은 잔잔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흐루시초프의 실각으로 '해빙기'는 끝나가고 있었지만, 영화 속 모스크바의 모습은 여전히 활기가 넘친다. 소련 영화 음악의 간판스타였던 안드레이 페트로프의 정겨운 음악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에 소련 코미디 영화를 보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다.


*사진 출처: ru.wikipedia.org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자작시: 다래끼

  다래끼 무지근한 통증은 너와 함께 온다 나는 네가 절대로 그립지 않다 너 없이도 잘살고 있다 하지만 너의 부드러운 눈길을 기억한다 아주 약한 안약에서부터 센 안약까지 차례대로 넣어본다 나는 너를 막아야 한다 나은 것 같다가 다시 아프고 가렵다 나는 조금씩 끈기를 잃어가고 있다 너는 물기를 머금은 염화칼슘처럼 끈덕지게 내 눈가를 파고들며 묻는다 이길 수 있니? 곪아서 터지게 내버려둘 자신이 없으므로 열심히 눈을 닦아주며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대로 그렇게 잠들어 줄 수 있다면 그래,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자작시: 하이엔드(high-end)

  하이엔드(high-end) 싸구려는 항상 냄새가 나 짜고 눅진한 부패의 냄새 썩은 감자의 냄새는 오천 원짜리 티셔츠의 촉감과 비슷해 등고선(等高線) 읽는 법을 알아? 만약 모른다면 안내자를 찾는 것이 좋아 안내자의 등에 업혀 이곳에 올 수도 있지 더러운 수작, 아니 괜찮은 편법 차별하고, 배제하고, 경멸을 내쉬어 우리가 서 있는 곳 우리가 가진 것 우리들만의 공론장(公論場) 즐겁고 지루한 유희 불현듯 당신들의 밤은 오고 부러진 선인장의 살점을 씹으며 낙타가 소금 바늘귀를 천천히 바수어내는 하이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