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호주 아웃백의 공포와 야만, Wake in Fright(1971)

 

  남자는 자신을 교육부의 '노예(slave)'라고 소개한다. 그 말에 경찰관 크로포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크로포드는 남자에게 거듭 맥주를 권한다. 호주의 내륙 오지(outback) Tiboonda, 학교 교사 존 그랜트는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 학교를 이제 막 떠나왔다. 그에게는 6주 동안의 크리스마스 휴가가 주어졌다. 시드니로 날아갈 비행기를 타기 위해 그는 인근 소도시 Bundanyabba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 술집에서 만난 이 경찰관은 친절한듯 보이지만 그 태도는 꽤나 위압적이다. 존은 내키지 않으면서도 이 낯선 도시에서의 하룻밤을 술집 말고 달리 보낼 데가 없다.

  그가 크로포드의 소개로 들어간 음식점 한 켠에서는 동전 도박장이 열렸다. 두 개의 동전을 던져서 둘 다 앞면이냐, 뒷면이냐에 따라 돈을 따는 단순한 도박. 남자들은 도박장의 열기에 취해있다. 존은 심심풀이로 도박에 참가한다. 행운의 여신이 연달아 미소를 짓는다. 단숨에 400달러를 따낸다. 좀 더 운이 따라준다면, 그를 교육부의 노예로 만든 1000달러의 보증금을 갚을 수 있다. 휴가비까지 탈탈 털어서 도박판에 건다. 그가 도박장을 나왔을 때, 그의 수중에는 담배 몇 개비와 약간의 동전이 전부였다. 존 그랜트는 말 그대로 분단야바에 발이 묶인다. 과연 그는 여자 친구가 있는 시드니에 갈 수 있을까...

  Ted Kotcheff 감독의 영화 'Wake in Fright(1971)'는 호주 출신의 작가 Kenneth Cook의 동명 소설(1961)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케네스 쿡은 자신이 머물렀던 Outback의 소도시 Broken Hill(영화에서 가상의 도시 분단야바로 형상화됨)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소설로 썼다. 그는 내륙 오지의 황량한 환경과 그곳 사람들의 무지와 야만성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소설은 그러한 케네스 쿡의 날것 그대로의 감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영화는 143쪽 가량의 중편 소설을 충실히 재현한다. 시나리오 작업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인 Evan Jones가, 감독은 캐나다 출신의 Ted Kotcheff가 맡았다. 참으로 기묘한 조합이었다. 두 사람은 호주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으나, 이 이방인들의 눈으로 바라본 호주 내륙과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전율을 느낄 정도로 사실적이다.

  동전 도박으로 파산한 존은 남은 돈을 그러모아 맥주 한 잔을 들이킨다. 그 술집에서 만난 중년의 남자 하인즈는 존에게 호의를 베풀며 자신의 집에 머물 것을 권유한다. 존은 하인즈의 집에서 거친 광부 조와 딕, 알콜 중독자 의사 닥을 만난다. 무지막지하게 술을 마시면서 그들은 곧 친구가 되고, 캥거루 사냥에 가기로 의기투합한다. 이 네 사람이 캥거루 사냥에서 보여준 잔혹함과 광기는 야만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장면은 실제로 캥거루 사냥꾼들을 섭외해서 찍었다. 캥거루들은 난사된 총알에 의해 피투성이가 되고, 칼에 의해 난도질 당한다.

  호주 뉴 웨이브 영화의 신호탄이 된 Nicolas Roeg'Walkabout(1971)'은 백인의 시각으로 호주 자연의 원시성을 이상화한다. 영화 'Wake in Fright'에서 자연은 경외와 찬미의 대상이 아니다. 황량하고 거친 오지 내륙의 풍광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을 변화시킨다. '우리'라는 테두리 바깥에 있는 외지인은 차별과 감시의 대상이 된다. 광대한 자연 속에서 통제되지 않은 인간 내면의 본성은 일탈 행위에 무감각해진다. 존 그랜트는 처음엔 야바의 모든 것에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술집을 꽉 채운 남자들의 폭음, 도박장의 미친듯한 열기, 광부 조와 딕의 역겨운 언행, 의사임에도 술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진 닥의 삶. 그런데 문학과 역사를 전공한 존의 지성은 그곳에서 순식간에 야만적 폭력으로 대체된다. 존은 그렇게 '야바'의 사람으로 변해간다.

  호주 내륙의 이 오지 도시는 어떤 의미에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술과 도박, 사냥과 같은 오락이 극대화되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호주 Outback 사람들의 초상은 결코 과장되거나 과거의 것이 아니다. Pete Gleeson의 다큐 'Hotel Coolgardie(2016)'는 내륙 오지 마을의 주점을 배경으로 그곳 주민들의 상스러운 민낯을 드러낸다. 폭음, 무자비한 살육, 성적 일탈(존과 닥의 동성애를 암시하는 장면이 있다)... 깔끔한 양복 차림의 존 그랜트는 거지 노숙자의 신세가 되어 거리를 헤맨다. 어떻게든 시드니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히치하이킹으로 트럭에 몸을 맡긴다. '시드니'라는 글자가 박힌 트레일러의 기사는 존에게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그런데 그곳은 시드니가 아니다. 마치 반복되는 악몽처럼 존은 다시, 야바의 역 앞에 서있다. 이 영화의 제목 'Wake in Fright'는 원작 소설을 여는 구절에서 따왔다.

  "May you dream of the Devil and wake in fright.
  (당신이 악몽을 꾸고, 공포 속에서 깨어나길!)"


  오래된 저주의 문구. 원작자 케네스 쿡에게 Broken Hill에서의 삶은 그 저주 같았을까? 호주인들이 쿡의 소설과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호주에서 이 영화는 빠르게 잊혀졌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04년, 미국 피츠버그에서 폐기 직전의 원본 네거티브가 발견되면서 영화는 기사회생했다. 놀라운 귀환이었다.

  영화의 초반부, 존은 야바행 기차 객실에서 신나게 맥주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는 백인 일행을 지나친다. 존이 앉은 자리 건너편에는 조용하게 창밖을 응시하는 원주민이 앉아있다. 그 기차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호주라는 국가를 나타낸다. 기차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백인들, 한쪽 구석으로 밀려난 원주민, 그리고 그들 바깥에는 결코 정복되지 않은 자연이 자리한다. 주인공 존 그랜트의 여정은 호주인의 어두운 내적 심연과 맞닿아 있다. 원작자 케네스 쿡은 문명화된 도시의 외관 속에 교양인으로 살아간다고 믿는 호주인들에게 조소를 보낸다. 영화는 호주인의 정체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호주 자연, 그 원시성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담아내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호주 뉴 웨이브 영화들 리뷰

1부 호주 뉴 웨이브의 신호탄, Walkabout(197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walkabout1971.html

2부 호주인의 정체성과 자연: Sunday Too Far Away(1975), The Last Wave(197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sunday-too-far-away1975-last-wave1977.html

3부 발굴된 호주 여성의 서사, My Brilliant Career(197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australian-new-wave-3.html

4부 호명된 국민, 재조명된 호주인 서사:
Breaker Morant(1980), Bruce Beresford
Gallipoli(1981), Peter Weir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breaker-morant1980-gallipoli1981.html


***다큐 'Hotel Coolgardie(201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hotel-coolgardie2016.html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Shirley Clarke의 실패한 타자성 탐구, Portrait of Jason(1967)

  1. 이상한 나라의 Jason Holliday   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한다. 자신의 이름이 Jason Holliday라고 말한 그는 본명이 Aaron Payne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유명한 재즈 연주자)와도 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가진 직업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가 말한 직업들 중에는 남창(whore)도 있다. 손에 술잔을 든 그는 심부름꾼(houseboy)으로 시작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늘어놓는다. 미국의 독립 영화 제작자 Shirley Clarke는 1966년 12월 3일, 자신이 머물던 첼시 호텔(Hotel Chelsea) 펜트 하우스에서 제이슨 할러데이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다큐를 찍었다. 저녁 9시에 시작된 촬영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Portrait of Jason(1967)'이다.   제이슨은 술에 취해 기분이 아주 좋아보인다. 화면 밖에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셜리 클라크는 제이슨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인형극의 조종하는 사람(puppeteer)처럼 클라크는 제이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 같다. 흑인이며 동성애자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미리 준비해놓은 소품으로 작은 공연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소품 가방에서 꺼낸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는 제이슨은 여성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킬킬거린다. 제이슨이 원하는대로 술과 담배가 계속해서 제공된다. 시간이 갈수록 술에 취한 제이슨의 말소리는 알아듣기 어렵게 뭉그러진다.   러닝 타임 1시간 45분의 이 다큐 'Portrait of Jason(1967)'은 보면 볼수록 기이하다. 관객은 'Jason Holliday'라는 인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도록 초대받지만, 다큐가 끝나고 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제이슨이 가진 뛰어난 공연자(performer)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