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영화의 눈부신 전성기, 호주 뉴 웨이브(Australian New Wave) 영화들 3부
작가 지망생인 아가씨는 자신의 자전적 경험과 상상력을 좀 보태어서 소설 한 편을 써냈다. 몇 군데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궁리 끝에 이름 있는 작가에게 원고를 보내 보았다. 소설이 괜찮다고 생각하면 책으로 나올 수 있게 도와달라는 부탁과
함께. 행운이 따랐다. 소설은 곧 책으로 나왔다. 모국 호주가 아닌 바다 건너 스코틀랜드의 출판사에서였다. 스무 살의 Miles
Franklin은 비로소 작가가 되었다. 소설의 제목은 'My Brilliant Career'. 소설은 꽤 잘 팔렸고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원작 소설 속의 17살 아가씨 시빌라는 예쁘지도, 그렇게 뛰어난 예술적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시빌라는 소젖을 짜며 집안의 농장일을 돕는다.
시빌라의 어머니는 주정뱅이 남편 뒤치다꺼리하기도 버겁다. 가난한 집안 살림에 입이라도 덜게 딸이 얼른 시집이나 가버렸으면 싶다.
그러던 중에 친정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온다. 시빌라의 부자 할머니가 외손녀딸을 불러들인다. 시빌라를 잘 단장시켜서 부잣집에
결혼시켜 보낼 심산이다. 별 볼 일 없는 남자와 결혼해서 인생이 망가진 딸의 전철을 외손녀가 밟게 할 수는 없다. 과연 선머슴
같은 시빌라는 결혼으로 인생역전을 이룰 수 있을까?
Gillian Armstrong이 영화 'My
Brilliant Career(1979)'를 찍었을 때의 나이는 스물 아홉이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영화 경력을 시작한 이 여성
감독에게 마일즈 프랭클린의 소설은 매우 적합한 텍스트였는지도 모른다. 결혼보다 직업적 성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빌라는 부자에다
잘 생긴 구혼자의 손길을 뿌리친다.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내는 것으로 화려한 경력의 첫 걸음을 내딛는다. 대강의 줄거리만
본다면 'My Brilliant Career'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서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원작 소설을 막상 읽어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의 문체는 자의식 과잉에 유치하고 장황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일즈 프랭클린이 소설을 썼을
때의 나이가 십 대 후반이었다. 아름답지도, 별다른 재능도 없는 시골 촌구석 아가씨에게 대체 무슨 마성의 매력이 있는지, 결혼해
달라는 구혼자가 세 명이나 된다. 그 가운데 한 명인 해리는 잘 생긴데다 엄청난 부자이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 맞아. 그러니 거기에 걸맞는 괜찮은 여자를 찾아봐."
소설 속 시빌라는 그 말과 함께 해리의 구혼을 거절한다. 영화에서 시빌라(주디 데이비스 분)는 해리(샘 닐 분)에게 자신이
스스로의 길을 찾을 때까지 2년을 기다려 달라고 한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2년이 아닌 4년이다. 그 긴 시간을 기다려줄 남자가
있을까? 자신이 대단한 무언가를 해낼 것이라고 믿는 시빌라에게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며 날개를 꺾는 일이다. 결혼이 여자의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의미있는 영역이라고 믿는 할머니는 시빌라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결혼과 직업적 성공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시빌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사실 오늘날의 여성들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이기는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두 가지
삶의 과제를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시빌라의 관점은 1900년대 초 호주 여성이 직면한 어려움을 반영한다.
나는
원작 소설 'My Brilliant Career'를 페미니즘 서사로 읽어내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해서 회의감이 든다. 마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을 호주 남부 여성 버전으로 살짝 비튼 것처럼 보이는 플롯은
단선적이며 성찰적인 사유가 결여되어 있다. 영화에서도 그 점은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관객은 왜 시빌라가 해리의 청혼을
거절하는지에 대해 명백히 납득하지 못한다. 해리는 시빌라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며,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시빌라를 구속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도 않다. 시빌라가 장차 무얼 하고 싶은지도 알 수 없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도 별로 없고, 글쓰기에 대한
가능성도 영화 결말부에 가서야 미약한 단서처럼 주어질 뿐이다.
아마도 시빌라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작가 마일즈 프랭클린의 소설적 자아, 분신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프랭클린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으나 그다지 넉넉치 않은 집안
형편 때문에 포기했다. 'My Brilliant Career'의 성공 이후 작가의 길로 들어선 프랭클린은 영국과 미국에서
글쓰기로 경력을 쌓으며 보냈다. 호주로 돌아온 것은 50이 넘어서였다. 결혼을 하지 않았던 프랭클린에게 '글쓰기'란 여성으로서의
독립적 삶을 가능케 만든 근원이었다.
영화는 고향 농장으로 돌아온 시빌라가 자신의 첫 소설을 완성하고 우편함에
넣는 것으로 끝난다. 자신의 앞에 펼쳐진 광대한 평원을 바라보며 시빌라는 꿈꾸듯 그렇게 서있다. 질리언 암스트롱은 소설과는 다소
다른 결말로 시빌라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한다. 소설의 시빌라는 불확실한 미래와 가난한 현실 속에서 자연인,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인식하는 것으로 끝난다.
"내 무용한 삶은 그들(농부들)이 그러하듯 노고의 이 대지에
파묻히겠지. 나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야. 그저 별 달리 쓸모도 없고, 작은, 시골 촌뜨기에 불과해. 무엇보다 나는 여자의
삶을 살아가야 해!(My ineffective life will be trod out in the same round of
toil—I am only one of yourselves, I am only an unnecessary, little, bush
commoner, I am only a—woman!)"
소설 마지막 단락의 이 문장 하나가 'My
Brilliant Career'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이 작품은 프랭클린 사후,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페미니즘 서사로
다시금 부각되었다. 생전의 프랭클린에게 이 소설은 명성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다 주었다. 그 시대의 독자들은 소설 속 주정뱅이
아버지를 실제 작가의 아버지와 동일시했다(소설과 현실이 달랐음에도). 프랭클린이 성장한 New South Wales 농촌 마을
사람들은 소설 속 시골의 삶이 편협하고 무지막지한 것으로 묘사되었다며 프랭클린을 비난했다. 스무 살 작가에게 소설의 제목대로
화려한 경력이 시작되는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평생에 걸쳐 무거운 멍에이며 그림자였다. Miles Franklin이 이후 쓴
작품들은 모두 첫 소설의 명성에 미치지 못했다.
소설 'My Brilliant Career'는 당시 시대적
요구에 의해 신중하게 채택된 텍스트였다. 질리언 암스트롱은 잊혀진 근대 호주 여성의 이야기를 1970년대 페미니즘 서사와
결합시킨다. 그 시대의 여성들에게 일과 사랑의 양립은 고통과 희생을 수반하는 과제였다. 직업적 경력을 추구하기 위해 백마 탄
왕자를 내버려두고, 홀로 자신의 지평선을 바라보는 영화 속의 시빌라는 분명 1900년대의 여성이 아니다. 시빌라의 시선이 향하는 먼
그곳을 당시의 여성 관객들은 함께 응시했을 것이다. 그렇게 영화 'My Brilliant Career'은 발굴된 호주 여성
서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광대하고 아름다운 호주 자연의 풍광 속에 아로새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작가 Miles Franklin(1879-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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