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호명된 국민, 재조명된 호주인의 서사: Breaker Morant(1980), Gallipoli(1981)

 


호주 영화의 눈부신 전성기, 호주 뉴 웨이브(Australian New Wave) 영화들 4부


호명된 국민, 재조명된 호주인 서사:

Breaker Morant(1980), Bruce Beresford
Gallipoli(1981), Peter Weir



  "이 친구야, 우린 피 묻은 제국의 희생양이야!"
  (Harry Morant: George! We're scapegoats to the bloody empire!)


  1881년, 남아프리카에 살던 보어인(Boer, 당시 그곳에서 살던 네덜란드인을 일컫는 말)들은 영국과의 싸움을 통해 자신들의 땅에 대한 우선적 권리를 확인받았다. 그래봤자 그들도 원주민의 땅을 뺏은 침략자에 지나지 않았다. 평화는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그 땅에서 발견된 다이아몬드와 금이 문제였다. 그건 대박이 아니라 피바람을 몰고 올 재앙이었다. 영국은 보어인들에게서 다시 땅을 뺏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1899년에 시작된 2차 보어 전쟁(Second Boer War)은 결국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영국은 남아프리카에 새로운 식민지를 구축했다.

  보어 전쟁은 침략자들끼리 식민지를 두고 피 터지게 싸운 제국주의의 냉혹한 단면이었다. Bruce Beresford의 1980년작 영화 'Breaker Morant'는 바로 그 2차 보어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모랜트는 호주인으로 보어 전쟁에 참전한다. 전쟁이 막바지에 달한 1902년, 세 명의 군인이 군사 법정에 회부된다. 모랜트와 핸콕, 위튼은 보어인 포로와 독일인 선교사를 적법한 절차없이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들을 변호하는 임무를 맡은 토마스 소령은 상부로부터 어떻게든 유죄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언질을 받는다. 영화는 법정 재판 장면과 사건의 발단이 된 전투 장면을 교차 편집해서 보여준다. 전쟁 영화의 외피를 입었으나, '파괴자 모랜트'는 의외로 차분한 군사 재판 장면이 내러티브의 주를 이룬다.

  실존 인물이었던 모랜트(Harry "Breaker" Harbord Morant, 1864-1902)의 초창기 일생은 불분명한 기록과 낭만적 증언들로 덧입혀져 있다. 영국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스무 살 무렵인 1883년 경에 호주로 이주했다. 젊은 날의 모랜트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무엇보다 그는 대단한 말몰이꾼이었다. 뛰어난 승마 실력으로 호주 남부에서 유명세를 얻었다. 모랜트는 시도 썼다. 영화 속에서 모랜트(에드워드 우드워드 분)는 군인이면서 인문학적 소양을 지닌 교양인으로 묘사된다.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그의 과거는 시를 쓰고, 가곡을 부르는 예술가이다. 보어인들의 기습이 수시로 일어나는 전장터에서도 그는 글을 쓴다. 베레스포드는 그러한 모랜트의 예술적 정체성을 광활한 호주 자연과 결부시킨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쩌다가 전쟁 포로를 잔혹하게 죽인 혐의로 군사 법정에 섰는가? '파괴자 모랜트'는 그 이유를 전쟁의 비인간성에 둔다. 모랜트의 예술적 감수성은 전투를 거듭하면서 점점 핏빛으로 물들어 간다. 급기야 상관 헌트 대위가 보어인 게릴라 부대에 의해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자 모랜트는 복수를 다짐한다. 6명의 보어인 포로와 독일인 목사의 죽음은 그 과정에서 일어난다. 모랜트와 그의 두 부하 장교는 분명히 그 사건에 개입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건은 복수심에 불탄 모랜트의 광기에서 기인한 것인가? 영화는 모랜트가 거대한 전쟁 기계의 부속품임을 드러낸다. '규칙 303(Rule 303)'이 그 증거가 된다.

  그 규칙은 당시 영국군이 사용했던 탄환의 직경(0.303인치)에서 따왔다. 새롭게 개발된 총탄은 높은 살상력으로 악명이 높았다. 명령에 내포된 뜻은 이렇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보어인들은 적으로 간주되며 무조건 사살할 것. 모랜트는 자신이 상부에서 전달받은 명령 그대로 이행했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영화는 집행관이 되어 포로들을 죽일 수 밖에 없는 모랜트와 그에게 그런 전쟁 범죄를 강제하는 영국군 최고 수뇌부를 대비시킨다.

  독일인 목사의 죽음이 독일과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자, 정치적인 결정에 의해 희생양이 필요했다. 모랜트와 두 명의 호주인 장교에게 부과된 마지막 임무는 그것이었다. 그들이 실제적으로 목사의 죽음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모랜트와 핸콕은 즉결 처형을 받았고, 위튼은 살아남았다. 그는 그 이야기를 '제국의 희생양(Scapegoats Of The Empire)'이란 책으로 남겼다. 그 책을 통해 모랜트는 호주인의 영웅으로 점차 부각되기 시작했다. 영국의 제국주의에 의해 억울하게 스러져 간 모랜트는 호주인들의 국가적 정체성을 일깨우는 아이콘이 된 것이다.

  호주인, 호주인 됨. 영화 '파괴자 모랜트'는 그러한 '호명(呼名, interpellation)'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명백한 그림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예를 또 다른 호주 뉴 웨이브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피터 위어 감독의 '갈리폴리(Gallipoli,1981)'는 1915년의 갈리폴리 전투에서 희생당한 ANZAC(호주-뉴질랜드 군단)을 재조명한다. 호주 청년 아치(마크 리 분)와 프랭크(멜 깁슨 분)의 순수한 우정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 속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영화는 호주 군인들을 무시하는 영국 군인들의 오만함, 영국군 지도부의 끔찍한 무능과 독선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애국심의 발로에서 자원 입대한 아치와 프랭크는 하나의 제국에 대한 기대와 이상이 허황된 것임을 깨닫는다. 본국 영국은 연방국 호주인들을 전쟁의 손쉬운 도구로 여겼을 뿐이었다.

  '파괴자 모랜트'와 '갈리폴리' 같은 영화들은 호주 뉴 웨이브 영화가 지향했던 주된 방향성을 드러낸다. 호주인으로서의 독자적 정체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고양시킬 수 있는 서사를 그려내는 것. 호주 정부의 강력한 영화 육성 정책 덕에 호주 뉴 웨이브는 지역적 색채를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적 결합을 시도해 나갔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호주'라는 공간에 펼쳐진 영화 실험실이었다. 헐리우드는 그 가능성을 눈여겨 보고 호주 출신의 감독들을 끌여들었다. 미국으로 진출한 피터 위어는 '죽은 시인의 사회(1989)'를, 브루스 베레스포드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1989)', 질리안 암스트롱은 '작은 아씨들(1994)'을 찍었다. 호주 배우인 샘 닐과 멜 깁슨도 활동 영역을 넓혔다. 마치 블랙홀처럼 헐리우드는 호주 뉴 웨이브를 자양분으로 빨아들였다. 1970년대에 시작된 물결은 1980년대 후반에 잦아들었다.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며 호주 영화 산업은 다시 새로운 파도를 기다리는 중인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themoviedb.org




***
Harbord Morant(1864-1902)에 대한 사료를 집결해 놓은 사이트
https://www.cs.mcgill.ca/~rwest/wikispeedia/wpcd/wp/b/Breaker_Morant.htm

****
영화 속 묘사와는 달리 모랜트가 영웅이 아님을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전쟁광으로서의 모랜트를 부각시킨 칼럼이다.
www.theage.com.au/national/echoes-of-monster-breaker-morant-in-dark-deeds-of-sas-forces-20201123-p56h35.html


*****호주 뉴 웨이브 영화들 특집

1부 호주 뉴 웨이브의 신호탄, Walkabout(197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walkabout1971.html

2부 호주인의 정체성과 자연: Sunday Too Far Away(1975), The Last Wave(197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sunday-too-far-away1975-last-wave1977.html

3부 발굴된 호주 여성의 서사, My Brilliant Career(197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australian-new-wave-3.html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