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12년의 기다림, Emily the Criminal(2022)

 

*이 글에는 'Emily the Criminal(2022)'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영화는 한 젊은 여성이 채용 면접을 보고 있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면접관은 여자의 신상 정보에 기재된 음주 운전 전과 기록(DUI, Driving Under the Influence)에 대해 묻는다. 여자는 그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면접관은 명확한 해명을 요구한다. 그러자 여자는 거칠게 화를 내며 자신의 이력서를 챙겨서 나가버린다. 이 여자의 이름은 에밀리. 에밀리는 바로 그 전과 때문에 번번이 취업이 좌절된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에밀리는 7만 달러의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만 한다. 그런데 취직이 되지 않으니, 빚을 갚기는 커녕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걱정이다. 하는 수 없이 에밀리는 케이터링(catering) 업체에서 배달을 하며 거대 도시 LA에서의 삶을 겨우 버티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잠깐 일하고 200달러를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받는다. 그렇게 에밀리의 위험한 아르바이트가 시작된다.

  John Patton Ford 'Emily the Criminal(2022)'은 관객을 에밀리의 삶 속으로 순식간에 밀어넣는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디자이너로 일하고 싶어하는 에밀리에게 현실은 가혹하다. 에밀리는 방세 때문에 2명의 룸메이트와 허름한 아파트를 함께 쓰고 있다. 에밀리가 배달하는 포장 음식은 고층 건물 사무실의 번듯한 직원들의 식사를 위한 것이다. 그들은 에밀리가 음식을 차려놓는 것을 지켜보며 기다린다. 에밀리는 케이터링 업체의 고용 직원이 아니라 명목상으로는 개인 사업자이다. 하지만 그 계약은 회사의 뜻에 따라 언제든 해지될 수 있다. 고용 시장에서의 에밀리의 취약한 위치는 에밀리를 더욱 돈에 목마르게 만든다. 에밀리는 위조된 신용카드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기단의 일원이 된다.

  어떻게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사기꾼의 세계에 발을 디딜 수 있었을까? 점점 더 대담해지는 에밀리의 모습은 전율을 느끼게 만든다. 에밀리에게는 타고난 미술적 재능과 함께 범죄에 최적화된 무언가가 있다. 위기 순간에서의 순발능력, 공격성과 돌파력, 침착함... 에밀리의 대학 시절의 전과는 에밀리의 현재에 대한 작은 단서가 된다. 그 일은 실수가 아니라 에밀리의 본성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용 카드 사기 행각을 이어가는 에밀리는 뒷골목 갱과의 차량 추격전은 물론이고 기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에밀리의 비밀 금고에는 차츰 돈이 쌓여간다. 여기에는 사기단을 이끄는 유세프와의 로맨스도 개입되어 있다.

  에밀리는 카드 사기로 열심히 돈을 모으고는 있지만, 에밀리의 꿈이 사기꾼이 아님은 분명하다. 에밀리는 디자이너 친구 리즈를 통해 업계의 일자리를 소개받으려고 애를 쓴다. 리즈가 초대하는 파티 자리에도 기꺼이 나가본다. 하지만 그런 모임에서 에밀리는 도시의 하층 일자리를 전전하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실감하게 될 뿐이다. 리즈를 통해 제안받은 디자인 회사의 인턴직 면접은 에밀리의 인내심을 시험한다. 에밀리를 면접한 여성 임원은 6개월 무급 인턴으로 일하게 해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에밀리가 LA라는 도시에서 무급으로 6개월을 버티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밀리는 분노의 말을 퍼붓고 사무실을 박차고 나온다. 에밀리가 진정한 범죄자(the criminal)로 살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영화의 마지막, 남미 어느 도시의 거리에서 에밀리는 여유롭게 스케치를 하고 있다. 에밀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자유와 화가로서의 꿈을 이루어낸 것일까? 에밀리는 유세프가 처음으로 자신을 카드 사기의 세계로 유인했던 것처럼, 그 지역 사람들을 모아놓고 유세프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궁핍한 미술가 지망생은 범죄를 체화(體化)하고 결국 사기꾼으로 살아가게 된다. 도시의 하층 노동자로 살아가는 에밀리의 현실과 자유로운 예술가의 삶 사이에는 '돈'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존재한다. 감독 John Patton Ford는 자본주의의 촘촘한 그물망 속에서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 그 생존의 의미를 묻는다. 영리하고 치밀한 이 스릴러 영화는 관객에게 재미와 함께 쓰디쓴 성찰을 가져다 준다. 에밀리 역의 Aubrey Plaza는 뛰어난 현실 밀착형 연기로, 그리고 이 영화의 제작자로서 'Emily the Criminal(2022)'에 놀라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2.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독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영문 wikipedia 항목에는 감독 John Patton Ford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분명 나름대로 괜찮은 연출 역량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와 관련된 기사와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존 패튼 포드는 미국의 영화 학교 명문인 AFI(American Film Institute)를 졸업했다. 그가 졸업 작품으로 만든 작품은 'Patrol(2010)'이라는 18분 가량의 단편 영화였다. 이 단편은 Youtube에 업로드 되어있어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주인공은 쇼핑몰의 보안 요원으로 일하는 이혼남이다. 그는 자신을 경찰로 생각하는 어린 아들을 위해 경찰 연기를 어설프게 해보려다 곤경에 처한다. 이 소박한 단편은 주인공의 내면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연출 역량은 'Emily the Criminal(2022)'에서도 확인된다. 'Patrol'은 2011년 Sundance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곧 잊혀졌다. 그렇게 AFI를 졸업한 존 패튼 포드에게 남은 것은 10만 달러가 넘는 학자금 대출이었다.

  존 패튼 포드는 그 빚을 갚기 위해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다. Catering 업체 배달 일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니까 그가 직접 쓴 'Emily the Criminal'의 각본은 진짜 그 자신의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다. 영화에 나온 카드 사기 범죄는 그가 살던 LA 동네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FBI가 100명이 넘게 검거한 엄청난 사기 사건이었다. 영화에 대한 열정을 놓치지 않고 살았던 포드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그와 함께 작업했던 동료가 포드가 쓴 시나리오를 배우 Aubrey Plaza에게 건넸다. 시나리오를 본 Aubrey Plaza는 포드에게 영화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출처: www.goldenglobes.com).

  영화 속 에밀리는 경제적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범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하지만 존 패튼 포드는 긴 무명의 세월을 견뎌냈다. 영화 학교를 졸업한지 12년만에 그는 장편 영화 데뷔의 꿈을 이루어냈다. 나는 영화만큼이나 포드의 인생 역정에서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갑자기 나와 예술 학교를 함께 다녔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영화, 연극, 미술, 음악을 공부했던 그 많은 학생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창작 활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며 사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십수 년의 세월을 견디면서 예술 분야에 남아 있다는 것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태평양 건너 미국에 있는 존 패튼 포드가 무명의 비평가인 나를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자신의 첫 장편 영화를 만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아, 홍상수: 물안에서(In Water, 2023)

    오래전, 영화를 공부할 때의 일이다. 강의를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신경을 긁는듯한 소음이 계속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강의실 뒷문으로 나와서,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나섰다. 영상원 본관 3층의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마침내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냈다. 열린 교수 연구실 안쪽에, 희끗희끗한 머리의 한 남자가 이상한 악기를 천천히 두드리고 있었다. 홍상수였다. 그는 매우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악기를 두들기던 그가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약간 당황했는지, 잠시 연주를 멈추었다. 나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동남아시아인지, 아프리카인지 원산지를 알 수 없는 악기 소리는 내가 다시 강의실에 도착할 무렵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해 가을, 홍상수가 영상원 교수직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홍상수의 강의는 영화과 학생들에게 악명이 자자했다. 거의 강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상수가 영상원을 떠날 무렵에는, 자신의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교수직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형편없이 어그러졌다. 나는 홍상수의 그 지치고 지루했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결국 떠날만한 때에 떠났다. 그건 학생들에게도, 그에게도 좋은 결정이었다.     어제, 홍상수의 2023년 작 영화 '물안에서'를 보았다. 러닝타임 61분의 이 영화는 대부분의 화면이 초점이 나간 상태(ouf of focus)로 흐릿하게 나온다. 처음에는 또렷했던 화면이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로 나오니, 관객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등장인물은 세 명. 배우로 활동하던 승모는 자신의 단편 영화를 찍겠다며 섬에 왔다. 승모와 동행한 사람은 촬영을 맡은 친구 상국, 연기를 할 여배우 남희이다. 승모는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모은 돈 300만 원을 들고 왔다. 그런데 정작 그는 시나리오조차 쓰지 않았다. 상국과 남희는 승모가 찍을 영화가 어떤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