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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산파의 관계 속에 투영된 미얀마의 정치 현실, 산파들(Midwives, 2022)

 

  라카인주(Rakhine State)는 미얀마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주이다. 리카인주에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불교도 아라칸족(Arakanese)이, 그 다음으로는 이슬람교도 로힝야족(Rohingya), 그리고 여러 소수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라카인주의 어느 마을, Hla라는 이름의 산파(産婆)는 신참 조수 Nyo Nyo를 수련시키는 중이다. Nyo Nyo는 로힝야족으로 이슬람교도이다. Hla는 불교도로 자신의 진료소를 갖고 있다. 2016년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으로 라카인주는 준전시() 상태에 처해 있다. 학살을 피해 이미 100만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 국경 지대로 떠났다.

  라카인주에 남아있는 로힝야족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라카인주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 로힝야족은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며, 그로 인해 공교육과 의료 서비스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Hla는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로힝야족을 돕기 위해 Nyo Nyo를 조수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Hla는 동족들로부터 불교도가 로힝야족을 돕는다는 비난과 위협을 받는다. 그 때문에 진료소 운영도 어려워진다. 과연 Nyo Nyo의 산파 실습은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미얀마 출신 다큐멘터리 제작자 Hnin Ei Hlaing는 5년에 걸쳐서 Hla와 Nyo Nyo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불교도인 Hla이 로힝야족 Nyo Nyo에게 보여주는 배려와 연대의식은 분명 놀라운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Hla의 말과 행동에서는 인종차별적 태도가 드러난다. Hla는 Nyo Nyo에게 'kala'라고 거리낌 없이 부른다. kala의 원래 뜻은 '남부 아시아 출신(South Asian descent)'이지만, 현재는 로힝야족을 멸시하는 '검은 얼굴(Black face)'이란 뜻의 말이 되었다. 말하자면 이 단어는 흑인(Black people)에게 깜둥이(N-word, negro)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Nyo Nyo는 Hla가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것을 몹시 싫어하지만, 그런 불편함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진료소일을 돕고 있는 Hla의 남편은 TV에서 정부가 만든 프로파간다 방송을 주로 시청한다. 그 방송은 로힝야족이 미얀마 국민의 순수성을 더럽히고 있으며, 그들은 마땅히 축출해야할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Nyo Nyo는 Hla의 진료소에서 열심히 배운다. 그러나 산파 실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미얀마 정부가 불교도의 이슬람교도 진료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Nyo Nyo는 자신의 진료소를 열려면 교육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대도시 양곤에는 Nyo Nyo의 여동생이 살고 있다.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픈 Nyo Nyo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다. 로힝야족의 라카인주 밖으로의 이동은 금지되어 있다. 그 즈음, Nyo Nyo는 셋째 아기를 임신하고 더욱 힘든 상황에 처한다. Hla는 그런 Nyo Nyo를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Nyo Nyo가 산파일로 돈을 버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며 비난한다.

  Nyo Nyo가 처한 상황은 핍박받는 소수 민족 여성의 현실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라카인주는 로힝야족에게 삶의 터전이 아닌 폐쇄된 게토(ghetto)로 그곳에서 로힝야족들은 서서히 말라죽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로힝야족 남자들은 제대로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다. 농사를 지을 땅도 빼앗겼다. 다큐는 라카인주의 로힝야족이 실업과 마약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린다. Nyo Nyo의 남편도 직업이 없다. Nyo Nyo는 국제 NGO단체에서 지원하는 마이크로 파이낸스(Micro-finance)사업을 맡으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그리고 마침내, 무리하게 빚까지 내어가며 자신의 진료소를 연다. Nyo Nyo의 집 마당에 세워진 진료소 겸 잡화점은 로힝야족 사람들이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곳이 된다.  

  자신의 진료소를 갖게 된 Nyo Nyo의 모습에서는 자신감이 넘친다. 하지만 Nyo Nyo가 처한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Nyo Nyo의 마을 근처에 폭탄이 떨어지고 포연(砲煙)이 안개처럼 마을을 감싼다. 다큐의 마지막 부분에서 두 여자는 함께 웃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찍는다. 그들의 웃음은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수 있을까? 이미 라카인주를 떠난 100만명의 로힝야족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은 요원하다. Nyo Nyo를 비롯해 라카인주에 남은 로힝야족의 미래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희망은 자라난다. Nyo Nyo는 자신의 어린 막내딸이 언젠가 라카인주를 떠나 대도시 양곤에서 멋진 삶을 살아가길 꿈꾼다. 로힝야족 산파 Nyo Nyo가 꾸는 그 꿈의 시작에는 불교도 산파 Hla가 있었다. Hla가 Nyo Nyo와 맺고 있는 인본주의적 연대(solidarity)에는 로힝야족에 대한 오랜 인종차별, 증오와 두려움이 혼재되어 있다. 다큐는 분쟁 지역(conflict zone) 라카인주의 두 산파의 관계를 통해 미얀마의 인종적 갈등과 복잡한 정치 현실을 가늠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두 산파 Nyo Nyo와 H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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