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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드라마에 내재된 문화와 정체성의 갈등, The Farewell(别告诉她, 2019)

 

  사랑하는 가족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단 몇 개월, 영화 'The Farewell(2019)'에서 주인공 빌리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 그러하다. 어린 시절에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중국계 미국인 빌리. 할머니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진 빌리는 할머니가 말기 폐암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가족들은 할머니가 받을 충격을 염려하여 병세를 숨기기로 결정한다. 마침 빌리의 사촌 결혼식을 앞두고 대가족은 고향인 중국 창춘에 모인다. 빌리도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중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빌리는 할머니에게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가족들의 결정에 마지못해 동의한다. 과연 할머니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은 끝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Lulu Wang 감독의 영화 'The Farewell(别告诉她, 2019)'은 얼핏 보기에 가족 드라마라는 장르의 틀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빌리의 중국에서의 여정이 진행될수록 이민자의 정체성과 문화적 동질성에 대한 고민이 하나씩 펼쳐지기 시작한다. 창춘 공항에 도착한 빌리는 정신없이 달려드는 호객꾼들에 놀란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는 곳곳마다 건축중인 고층 건물들이 보인다. 어린 시절에 중국을 떠난 빌리에게 변화하는 중국의 모든 것은 낯설기만 하다. 호텔의 프런트 직원은 빌리가 미국에서 왔다는 말에 미국과 중국 두 나라 가운데 어디가 더 좋으냐고 묻는다. 빌리는 두 나라가 서로 다를 뿐이라고만 답한다. 숙모는 미국보다 중국에서 돈을 벌기가 쉽다며 빌리에게 중국으로 돌아오라며 호기롭게 말한다. 정작 숙모는 아들을 미국 유학 보내려고 애를 쓴다.

  빌리에게 중국의 외양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그 실질은 가족주의적 전통에 단단하게 갇혀 있는 기이한 모습으로 비춰진다. 결혼식장 예약을 비롯해 피로연 음식을 정하는 모든 문제는 가모장(家母長)인 할머니의 손에 달려있다. 할머니는 손님들에게 체면이 깎여서는 안된다며 무엇이든 최고급품으로 계약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정작 결혼식의 당사자인 손주와 일본인 손주 며느리의 뜻은 안중에도 없다. 가족들은 할머니를 중심으로 뭉치며, 할머니의 심사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가족의 중심, 그 근원으로서 할머니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물론 이 가족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큰 감정이 '사랑'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한 중국식 가족주의는 할머니의 병세를 알리는 문제를 두고 빌리의 미국식 사고방식과 충돌한다. 빌리는 미국에서라면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가족들에게 성토한다. 하지만 삼촌은 할머니가 지게될 마음의 부담을 가족들이 대신 나누어 갖는 것이라며 빌리를 나무란다. 빌리에게 중국의 가족,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다가온다.

  Lulu Wang은 빌리가 느끼는 심적인 혼란을 창춘의 급변하는 도시 풍광을 통해 보여준다. 가족과 함께 마사지 업소를 다녀온 빌리는 등에 난 커다란 부황 자국에 놀란다. 우연히 보게 된 마작판에는 젊은 여성이 접객원으로 앉아있다. 피곤에 절은 결혼식장의 직원들은 손님들의 눈을 피해 한구석에서 졸고 있다. 또래 젊은 세대 중국인의 모습에서 빌리가 마주한 계층적, 문화적 차이는 그렇게 투영된다. 빌리의 엄마는 가족과의 식사 자리에서 중국의 배금주의를 에둘러 비판하며 미국이란 나라가 가진 관대함과 배려를 언급한다. 미국에서 중산층으로 안착한 빌리의 부모, 작가로서 경력을 쌓아가고 있는 빌리. 중국을 떠난지 25년 동안 이 가족은 중국이라는 나라, 그 문화와 서서히 멀어져 왔다.

  이 영화의 중국어 제목은 '别告诉她', 우리말로 풀어서 말하면 '할머니에게 알리지 말아요'가 되겠다. 결국 빌리도 온가족의 '하얀 거짓말'에 동참한다. 빌리가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어떤 면에서 중국인 이민자 2세대인 빌리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과도 연결되어 있다. 개인보다 가족, 사회의 가치를 중시하는 중국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빌리가 전적으로 동의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혈족인 할머니에 대한 애정과 신뢰에서 나온 결정일 것이다. 그런 빌리에게 할머니가 전해주고자 하는 것도 자신이 살아온 삶의 지혜와 사랑이다. 영화 'The Farewell'은 감독 Lulu Wang의 경험담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졌다. 영화는 미국에서는 의외로 흥행에 크게 성공했으나, 중국 시장에서의 반응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아마도 중국 관객들에게는 중국계 미국인의 젠체하는 문화적 설교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Lulu Wang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 이민자의 정체성에 대한 내적 갈등을 평이하게 풀어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이 영화의 대부분의 대사는 중국어(Mandarin)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The Farewell'은 중국 영화일까, 미국 영화일까? 미국 자본으로 제작되었고, 미국 배급사가 배급을 했으니 미국 영화가 맞다. 이는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Minari, 2020)'가 대부분 한국어 대사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미나리'가 미국에서 개봉될 때, 외국 영화인지 미국 영화인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영화 속 대사의 언어를 두고 미국에서 그런 논쟁이 촉발되는 것은 '영어'라는 자국어 중심주의에 대한 예시로 볼 수도 있다.  

정이삭 감독, 미나리(Minari, 202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minari-20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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