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Todd Field가 그려낸 예술가의 어두운 심연(深淵), Tár(2022)

 

*이 글은 영화 '타르(2022)'의 부분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난 페트라의 아빠야."

  냉정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여자 아이에게 말하는 사람은 금발의 중년 여성이다. 여자의 딸 페트라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딸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자신을 페트라의 아빠라고 소개하는 이 여자의 이름은 '리디아 타르'. 베를린 필 역사상 최초로 선출된 여성 수석 지휘자이다. 영화의 도입부, 뉴요커 페스티벌에서 인터뷰하기로 되어 있는 타르는 길고 화려한 이력으로 소개된다. 커티스 음악원 졸업, 빈 대학교 음악학 박사, 페루 원주민 마을에서 5년을 보내면서 민속 음악 연구, 2013년에 베를린 필 지휘자로 선출, 에이미와 토니 오스카 그래미 수상... 눈부시게 빛나는 타르의 경력은 이 여성이 클래식 음악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짐작케 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이어지는 음악계 관계자들과의 대화는 타르의 세속적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은퇴한 마에스트로는 타르의 든든한 지원자이며, 동료 지휘자는 타르의 음악적 통찰력을 배우려고 비굴함도 마다하지 않는다. 타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부지휘자를 내치고 자신의 사람으로 바꾸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이제까지 남성들이 주류였던 지휘계에서 타르는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했다. 지휘자로서 타르의 경력에는 '여성'이 강조된다. 하지만 이 여자는 딸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스스로를 '아빠'로 소개한다. 

  뉴욕에서 돌아온 타르가 베를린의 집에서 마주하는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아프고 불안해 보이는 동거인 샤론이다. 샤론은 타르와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며 불만을 표현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타르가 열렬히 재회의 기쁨을 표현하는 사람은 딸 페트라. 페트라는 타르와 샤론이 입양한 딸이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타르는 남편과 아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교향악단을 지휘할 때의 타르도 온화한 여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악단을 휘어잡는 타르의 모습은 과감하며 힘이 넘친다. 매일 하는 조깅을 비롯해 복싱으로 신체를 단련한다. 이 여성 지휘자의 삶은 전형적인 남성, 가부장제의 세계로 규정된다.

  타르의 재능은 놀라운 경력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타르에게 권력을 부여했다. 타르는 '아코디언'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설립해서 여성 음악가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멘토 역할도 하고 있다. 자신이 만든 서클에서 타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타르에게 일상은 조화로운 소우주처럼 보인다. 치밀한 비서 프란체스카는 타르의 일정을 완벽하게 관리한다. 동거인 샤론은 베를린 필의 악장으로 타르에게는 악단을 장악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준다. 그런 조력자들의 도움은 타르의 세계를 지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문제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타르의 삶에 균열의 징후가 조금씩 감지된다. 프란체스카는 크리스타가 절박한 도움의 메일을 보내왔다며 어떻게 처리해야 하냐고 묻는다. 타르는 무시하라고 답한다. 그런데 크리스타의 자살 소식이 들려온다. 크리스타는 타르가 이끄는 '아코디언'의 회원으로 지휘 지망생이었다.

  그 즈음 타르는 작업실에서 기이한 환청과 악몽에 시달린다. 초인종 소리와 여자의 비명, 사이렌 소리... 타르의 정신적 불안은 크리스타에 대한 죄책감을 보여준다. 정치적 거래와 착취. 샤론은 타르가 베를린 필에 처음 와서 악장인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면서 그렇게 접근했다고 비난한다. 타르의 비서 프란체스카도 마찬가지. 프란체스카는 자신의 헌신을 부지휘자 자리로 보답받고 싶어한다. 타르는 자신이 가진 권력을 미끼로 포식자처럼 먹잇감을 물색했고, 거리낌없이 욕심을 채웠다. 크리스타의 죽음은 타르가 크리스타와 했던 거래가 잘못되었음을 입증한다. 둘의 관계가 어그러지자 타르는 크리스타의 경력을 망치기 위해 비열한 술수를 썼다.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지 않은가? 타르의 모습은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의 시발점이었던 인물 '하비 와인스틴(Harvey Weinstein)'을 떠올리게 만든다.

  자신의 세계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타르는 매력적인 첼로 연주자 올가에 대한 욕망을 따라간다. 하지만 올가는 타르의 추종자가 될 생각이 없다. 자신의 감정과 욕구에만 충실한 이 젊은 여성은 타르에게 굴욕감만을 안겨줄 뿐이다. 감독 토드 필드는 퀴어 무비(queer moive)에 최근 몇 년 동안 문화 예술계를 휩쓴 미투 운동의 후일담을 덧입힌다. 영화 속에서 타르가 쌓아온 경력과 음악적 성취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타르의 재능은 권력에 대한 들끓는 욕망과 결합했다. 결국 타르는 자신이 획득한 권력으로 타인의 삶을 착취하고 조종하는 데에 쓴다. 타르의 추락은 외적인 압력이 아니라 그 자신의 결함에서 기인한다.

  영화의 마지막, 베를린 필에서 쫓겨난 타르는 동남아시아의 작은 악단을 지휘한다. 그것도 정통 클래식이 아닌 새로운 비디오 게임의 음악을 시연한다. 관객들은 게임 캐릭터 코스프레(cospre) 룩을 하고 있다. 이 무지막지한 몰락에서 타르는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까? 아마도 타르의 재능은 어떤 식으로든 타르를 구할 가능성이 크다. 영화 '타르'가 그 지점에서 던지는 질문은 이러하다. 뛰어난 예술가가 지닌 인간적 결함을 우리는 어디까지 용인해야 하는가? 예술가와 그가 만들어낸 작품을 완벽히 분리해서 보는 것이 가능한가? 토드 필드는 예술가와 창작 과정, 그 결과물 사이에 존재하는 약탈적이고 파괴적인 면을 응시한다. '타르'라는 인물 그 자체로 현현(顯現)한 배우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은 토드 필드가 만들어낸 그 어둠 속에서도 빛난다. 이 여배우의 놀라운 재능은 분명 다음 영화들에서는 '타르'를 잊게 만들 것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자작시: 다래끼

  다래끼 무지근한 통증은 너와 함께 온다 나는 네가 절대로 그립지 않다 너 없이도 잘살고 있다 하지만 너의 부드러운 눈길을 기억한다 아주 약한 안약에서부터 센 안약까지 차례대로 넣어본다 나는 너를 막아야 한다 나은 것 같다가 다시 아프고 가렵다 나는 조금씩 끈기를 잃어가고 있다 너는 물기를 머금은 염화칼슘처럼 끈덕지게 내 눈가를 파고들며 묻는다 이길 수 있니? 곪아서 터지게 내버려둘 자신이 없으므로 열심히 눈을 닦아주며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대로 그렇게 잠들어 줄 수 있다면 그래,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자작시: 하이엔드(high-end)

  하이엔드(high-end) 싸구려는 항상 냄새가 나 짜고 눅진한 부패의 냄새 썩은 감자의 냄새는 오천 원짜리 티셔츠의 촉감과 비슷해 등고선(等高線) 읽는 법을 알아? 만약 모른다면 안내자를 찾는 것이 좋아 안내자의 등에 업혀 이곳에 올 수도 있지 더러운 수작, 아니 괜찮은 편법 차별하고, 배제하고, 경멸을 내쉬어 우리가 서 있는 곳 우리가 가진 것 우리들만의 공론장(公論場) 즐겁고 지루한 유희 불현듯 당신들의 밤은 오고 부러진 선인장의 살점을 씹으며 낙타가 소금 바늘귀를 천천히 바수어내는 하이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