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The Banshees of Inisherin(2022)'의 일부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앞으로 자네가 나한테 말을 걸어 오거나 귀찮게 하면, 그때마다 내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네."
아일랜드의 평화로운 작은 섬 이니셰린. Pádraic과 Colm은 오랜 우정을 이어온 친구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콤은
파드릭에게 무시무시한 절교 선언을 한다. 파드릭은 그 모든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그는 도대체 콤이 자신에게 왜 저러는 건지 알
수 없다. 콤은 파드릭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친구이며, 그 우정은 무익하다는 말을 한다. 콤은 음악가로서 앞으로 작곡에
전념하겠다고도 덧붙인다. 매일 두 사람은 동네 맥주집에서 흑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제 파드릭은 혼자서 맥주를
들이켜야만 한다. 콤의 빈자리가 주는 외로움을 파드릭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떻게든 우정을 되찾을 방법이 있을 거야.
파드릭은 콤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애를 쓴다. 결국 콤은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서 파드릭의 집 앞에 내던진다.
Martin McDonagh 감독의 'The Banshees of Inisherin(2022)'는
의문의 도입부로 시작한다. 왜 콤은 파드릭에게 절교를 선언했을까? 무엇보다 절교를 당한 파드릭에게 그것은 가장 큰 의문일
것이다. 이는 곧 작은 섬 이니셰린의 주민들에게도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파드릭이 콤에게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닐까? 영화는
이 갑작스런 절교의 원인을 파고드는 여정을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에 파드릭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 파드릭 자신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파드릭을 '좋은(nice)' 사람이라고 말한다. 파드릭이 지루하다는 콤의 말은 절교의 이유가 되기에
부족하다. 왜냐하면 콤은 그 지루한 친구 파드릭과 오랜 우정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콤에게 파드릭의 평범함과 무지가
갑자기 크게 다가온다. 아마도 콤 자신의 내적인 변화가 뜻밖의 절교 선언을 이끌어내었을 것이다.
콤은 민속음악가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작곡도 한다. 중년의 끄트머리에 선 콤은 자신이 음악가로서 아무것도 이룬 것도 없이 시간을
낭비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남은 생애 동안 예술가의 본분에 좀 더 충실하게 살고 싶다, 고 느낀 그에게 파드릭의 존재는
거추장스럽다. 그저 시시한 잡담만 하다 가버리는 친구 파드릭. 콤이 느끼는 내적인 절망과 우울은 곧 절교 선언으로 이어진다.
파드릭은 콤의 결단에 충격을 받는다. 이 착한 남자는 깨어진 우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외로움이야말로 파드릭에게는 가장 큰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파드릭이 어떤 사람이냐하면, 집에 있을 때에도 당나귀 제니를 집안에 들여놓고 함께 지내는 사람이다. 물론
파드릭에게는 강인한 여동생 시오반도 있다. 시오반은 오빠에게 닥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콤을 만나보기도 한다. 하지만 콤의
결정은 단호하다.
파드릭이 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애쓰는 동안, 이니셰린 섬 밖 아일랜드 본토에서는 내전이 한창이다. 전쟁의 그림자는 간간히
들리는 포탄 소리와 마을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느껴질 뿐이다. 영화의 주된 내러티브는 콤과 파드릭의 부서진 우정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두 친구의 관계가 아일랜드 내전에 대한 우화라는 점은 영화 곳곳에 내재된 폭력과 죽음의 이미지로 충분히 입증된다. 콤의
잘라진 손가락은 예기치 않은 비극을 가져온다. 이 영화의 제목에 나오는 Banshee는 아일랜드의 전설 속 마귀 할멈이다. 긴 머리에, 회색 망토를 두른 키가 큰 늙은 여자로 묘사되는 Banshee는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다.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의 노래를 부르며, 무엇보다 Banshee는 다가올 죽음에 대한 예언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출처 en.wikipedia.org). 영화 속에서 마을의 맥코믹 부인은 바로 그 Banshee로 묘사된다. 맥코믹 부인은 파드릭에게 두 번의 죽음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틴 맥도나가 만들어낸 이니셰린 섬의 작은 마을은 마치 셰익스피어적인 세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등장 인물들은 모두 내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으며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예술가로서
콤이 느끼는 좌절감, 파드릭이 한순간도 견디지 못하는 외로움, 섬을 떠나고 싶어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시오반, 아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마을의 경찰관, 그 아버지의 무차별적인 폭력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동네 바보형 도미닉. 너무나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니셰린의 풍광 속에는 그들의 상처가 겹겹이 포개어져 있다.
파드릭은 자신의 당나귀 제니가 콤의 잘린 손가락을 삼키다 죽은 일에 분노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급기야 파드릭은 콤의
집에 불을 지른다. 영화의 마지막, 서로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긴 두 친구는 해변가에서 만난다. 이제 섬 건너편에서 들리는
포탄과 총소리는 멈추었다. 내전은 끝났지만 그것은 이후 북아일랜드의 기나긴 내분으로 이어질 터였다. 콤의 잘린 손가락,
파드릭의 죽은 당나귀. 상실은 결코 회복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이 파국의 진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결국 이니셰린 섬은
미움과 고통이 요동치는 폐쇄된 공간으로 남는다. 그 비극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오반이 마침내 해냈듯 어떻게든 섬을 떠나는
것이다. 마틴 맥도나는 두 친구의 깨어진 우정을 통해 아일랜드의 핏빛 현대사를 은유적으로 성찰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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