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샤오윈. 올해 나이 스물 여섯. 별 볼 일 없는 시골 극단에서 노래를 부르며 웃음을 팔고 있지.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는 유부남인데, 딱히 죽고 못사는 사이도 아냐. 그냥 마음 둘 데가 없어서 그런 거지. 학교 선생인 우리 엄마는 나를 마치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셔. 극단에서 공연하고 버는 돈은 달리 쓸 데도 없고, 그냥 엄마를 드리는데 그걸 싫어하시는 것 같아. 그냥 사는 게 지겹고 그래. 그런데 요새 알게 된 마을의 조그만 녀석 샤오융이 자꾸 날 따라 다니네. 극단 사람들은 걔를 내 '꼬마 애인'으로 불러. 가만 보면, 이 심한 개구쟁이 녀석은 밉지가 않아. 가끔 난 얼굴도 모르는 그 아이 생각을 하곤 하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고 들었어. 어쩌면 내 인생이 이렇게 꼬여버린 건 그 아이가 생긴 이후부터였을 거야...
중국의 여성 감독 리위의 2005년 영화 '둑길(紅顔, Dam Street)'은 16살에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생의 행로가 뒤틀어져 버린 젊은 여성의 삶을 담아낸다. 리위는 2012년작 '로스트 인 베이징(苹果, Lost in Beijing)'으로 급변하는 중국의 현실과 젊은이들의 모습을 대담하게 담아내었다. 이 작품의 일부 성적인 묘사와 몇몇 장면들은 중국 당국의 심기를 건드려서, 리위와 제작사는 한동안 영화 제작을 할 수 없었다. 그 이전 작품인 '둑길'에서는 도시가 아닌 시골, 그곳의 정체된 삶과 전근대적인 가치관 속에서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로스트 인 베이징'이 치열한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주었다면, '둑길'에서는 여성 감독으로서 인물들의 섬세한 내면 묘사와 깊이있는 연출이 돋보인다.
샤오윈은 고등학교 시절, 동급생 왕펑과 사귀다 임신하게 되고 그 사실이 알려진 후 공개적으로 퇴학을 당한다. '헤픈 여자'라는 손가락질과 비난을 오물처럼 뒤집어쓴 채로 지난 십 년을 살아왔다. 천극(川劇, 사천 지방의 전통극)단에서 공연을 하며 살아가지만, 관객들은 공연 도중에 유행가를 부르라며 야유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저 매일매일을 겨우 숨만 쉬는 것처럼 살아가는데, 조그만 녀석 샤오융을 알게 된 이후로 웃을 일이 생긴다. '누나'라고 부르면서 자꾸 쫒아다니는 녀석이 귀엽기도 하고, 녀석의 얼굴을 보면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같다.
영화의 첫 장면은 차가운 시냇물에 누워 있는 샤오윈의 물에 잠긴 얼굴이다. 결국 막달이 되어서 출산을 하게 된 샤오윈. 명예를 중시한 샤오윈의 엄마 쑤 선생은 딸에게는 아이가 죽었다고 하고, 아이는 먼곳의 지인에게 입양시킨다. 샤오윈과 엄마는 그렇게 아이의 존재를 잊고서 살아왔다. 그런데 아이는 그 두 사람 가까운 곳에 있었다. 10년 만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샤오윈과 쑤 선생은 충격을 받는다. 샤오윈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이 영화의 영어 제목 'Dam Street'은 마을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둑방길을 의미한다. 그 길은 샤오융이 사는 집 바로 밑을 지나가는데, 소년은 늘 그 길을 뛰어다닌다. 샤오윈이 남자 친구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도 둑방길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인 둑방길에 원치 않는 삶을 마지못해 살아가는 샤오윈과 어린 소년이 있다. 소년은 샤오윈이 자신을 낳아준 엄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결국 샤오윈은 둑길이 있는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예쁜 누나가 더이상 자신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간다는 것을 알게 된 샤오융은 슬프기만 하다.
"누나, 저를 잊으면 안돼요."
"안잊어. 나중에 나하고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람을 보면, 그게 바로 너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샤오윈은 소년의 손을 자신의 눈, 코, 입, 마지막으로 이마에 대고 두 사람이 비슷한 외모임을 상기시킨다. 이 장면이야말로 관객, 특히 여성 관객에게 감정적으로 깊은 울림을 준다. 샤오윈과 샤오융의 만남과 이별에 이르는 과정은 말 그대로 '핏줄의 당김'이 어떤 것인지 절절하게 보여준다.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으나 결코 품에 둘 수 없었던 핏줄을 떠나야 하는 어미의 심정이 스크린 너머 흘러내린다.
영화의 중국어 제목 '홍안'은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얼굴을 뜻한다. 극중에서 샤오윈이 분하는 천극의 여주인공 '화단(花旦)'은 요염하고 교태를 부리는 역으로 화려한 의상과 분장을 한다. 단아한 양가집 규수 역의 '정단(正旦)'이 검푸른 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것과 대비된다. '행실 바르지 못한 여자'로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고 살아온 샤오윈. '화단'은 그가 연기해야 하는 원치않는 삶의 배역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삶은 한 인간, 여성으로서의 자존감과 희망이 무너져내린 삶이었다. 내연 관계의 유부남 가족들이 공연 중에 난입해서 샤오윈을 마구 때리고 모욕을 주는 장면에서 샤오윈은 바닥에 내팽겨쳐진다. 누운 채, 슬프고 지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샤오윈의 표정은 영화의 첫 장면, 시냇가의 그 고통스러운 장면과도 겹쳐진다.
샤오윈 역의 리우이와 샤오융 역의 황씽라오의 눈부신 연기, 리위 감독의 핍진성 있는 연출, 1990년대 개혁 개방의 시기를 지나는 중국 변방의 풍경, 그 모든 것이 '둑길'에 담겨있다. 이런 영화를 만나는 것은 마치 숨겨진 보석 상자를 발견하는 것과도 같다. 둑길에 흘려 보낸 샤오윈의 슬픔과 고통, 눈물과 희망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이들이라면 놓칠 수 없는 영화이다.
*사진 출처: cn.hanx.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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