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과거로부터 걸려온 전화, 틈입자(闖入者, Red Amnesia, 2014)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구든 자신의 과거로부터 벗어난다는 일은. 왕 샤오슈아이의 2014년작 '틈입자(闖入者, Red Amnesia)는 어느 노부인의 길고 어두운 과거의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베이징의 낡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덩 부인의 일상은 늘 바쁘다. 결혼한 큰 아들 가족을 비롯해 혼자 살고 있는 막내 아들의 먹을거리를 챙기고, 요양원에 있는 노모를 방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버거워 보이는 핸드 카트를 끌고 다니며 악착스럽게 자식의 삶에 관여하는 덩 부인에게 본인의 삶이란 없어 보인다. 집에서 혼자 식사할 때, 죽은 남편을 떠올리며 대화하는 것이 덩 부인의 가장 개인적인 시간이다. 그런 변함없는 일상에 어느 날부터 걸려온 장난 전화가 균열을 일으킨다. 아무 말도 없이 끊어버리는 전화는 계속 이어지고, 창문으로는 돌이 날아온다. 큰 아들의 집 문 앞에는 쓰레기가 투척된다. 도대체 누가, 왜 그런 장난을 하는 것일까?

  '상하이 드림(靑紅, 2005)', '11송이 꽃(我十一, 2011)'에 이어 나온 왕 샤오슈아이의 '틈입자'는 그의 문화대혁명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사실 이 영화를 그 연작의 마지막으로 보기도 어려운 것이 그의 2019년작 '아들(地久天长)'에서도 문혁은 변주된 주제로 이어진다. 문화대혁명이 이 감독에게 그토록 중요한 영화적 주제가 된 이유는 왕 샤오슈아이의 어린 시절에서 찾을 수 있다. 문혁 시기의 '하방(下放)'은 대도시 출신의 지식인과 중산층들에게 지방과 시골로의 집단적 이주를 강제했다. 그의 가족도 상하이에서 귀주 지역으로 이주했고, 그는 13살이 되었을 때에야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그 시절의 궁핍하고 고통스러웠던 가족의 삶은 왕 샤오슈아이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그는 '청홍'에서는 상하이로의 귀환을 꿈꾸는 시골 마을 일가족을, '아들'에서는 문혁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화해하는 오늘날의 구세대를 그린다. 어떤 면에서 '틈입자'는 그 가운데에 자리한 연결 고리와도 같은 작품이다.

  영화는 계속된 장난 전화에 불안과 혼란을 느끼는 덩 부인의 마음을 따라간다. 발신자 추적 전화기나 경찰에 신고하는 것으로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덩 부인은 문득 얼마 전에 들은 짜오의 죽음을 떠올린다. 귀주에서 살았던 문혁 시기, 둘째를 가지고 있었던 덩 부인은 상하이 이주권을 두고 짜오의 가족과 경쟁했다. 그것은 단지 원래 살던 고향으로 간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중국의 '후커우(戶口)' 제도는 출생지에 따라 학교와 직업, 주택 소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대판 신분제도나 다름없다. '청홍'에서 청홍의 일가족이 상하이로 필사적으로 귀환하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덩 부인은 태어날 둘째의 미래를 위해서 이주권을 얻으려 애를 쓴다. 열심한 당원이었던 짜오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방하는 서한을 당국에 써보냈고, 결국 이주권은 덩 부인의 차지가 된다. 덩 부인의 자녀들이 누리고 있는 대도시에서의 안온한 일상은 그런 과거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제 덩 부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전화는 더이상 '장난'이 아닌 것이 된다. 덩 부인은 그것이 죽은 짜오의 혼령이 과거의 과오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기 위해 걸어온 전화라고 생각한다. 그런 덩 부인의 주변에는 젊은 청년이 그즈음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고장난 족욕기를 고치는 길을 동행해준 그 청년에게 덩 부인은 식사를 대접하지만, 청년은 덩 부인의 사진첩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달아나 버린다. 덩 부인은 마침내 과거로의 여행을 결심한다. 귀주에 남아있는 짜오 가족을 찾아가서 용서를 빌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고통스러웠던 과거로의 여행은 2019년작 '아들'에서도 반복된다. 어린 아들의 죽음을 잊고자 다른 도시로 떠났던 부부는 노년이 되어 그곳을 방문한다. 그들은 아들을 죽게 만든 가해자의 가족을 용서하고 화해한다. 그러나 '틈입자'의 덩 부인의 여행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사죄와 화해의 시도는 거부당한다. 왕 샤오슈아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옥상의 열려진 창문을 오랫동안 보여준다. 그것은 한 개인의 과거의 기억과 역사는 열려진 통로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현재와 이어짐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망각하고 부인하려고 해도 과거는 현실 속에 흘러내리며 영향을 끼친다. 왕 샤오슈아이는 문혁이라는 길고 어두운 그림자가 오늘날의 중국인들에게 드리워져 있음을 그렇게 '틈입자'의 덩 부인을 통해 보여준다.

  이 영화는 베니스를 비롯해 해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덩 부인 역을 연기한 류종의 연기가 아주 좋다. '틈입자'가 가진 나름의 묵직하고 성찰적인 메시지가 호소력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왕 샤오슈아이의 문혁 연작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이 가진 의미를 계속된 영화 작업으로 충분히 보여주었다.

  '청홍'과 '아들'에 이어 '틈입자'는 내가 왕 샤오슈아이의 영화를 보고 쓴 세 번째 리뷰이다. 이제 왕 샤오슈아이는 과거의 '문혁'이 아니라 현재의 중국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북경 자전거(Beijing Bicycle, 2001)'를 만들었을 때의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창작자로서 오늘날의 중국인들의 삶과 그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북경 자전거'가 북경의 지저분한 뒷골목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중국 당국의 탄압을 받았던 기억 때문일까? 왕 샤오슈아이는 공인된 역사적 과오인 '문화대혁명'으로 회귀해서 도통 현실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과거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끊고, 열려진 창문으로 오늘날의 중국을 볼 수 있기를, 그리하여 다음 작품에는 그 현실의 풍경이 담겨져 있기를 기대한다.


*사진 출처: en.hkcinema.ru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