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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극 여배우의 삶 속에 재현된 격동의 시대, 무대 위의 두 자매(舞臺姐妹, Two Stage Sisters, 1964)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Chorus)의 역할은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극의 내용을 설명하고, 때론 춤과 노래로 적극적으로 극에 참여하기도 한다. 중국의 3세대 감독 시에진(谢晋)의 '무대 위의 두 자매(Two Stage Sisters, 1964)'에서 영화에 배경으로 깔리는 합창단의 노래는 바로 그 코러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의 중요한 대목마다 상황을 요약하고 주인공의 정서를 잘 묘사해서 들려준다. 예를 들면 주인공인 두 의자매가 극적으로 대면하는 법정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재판정에 많은 참새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까마귀가 섞여 있구나' 여기에서 까마귀는 의자매를 갈라놓으려는 불의하고 사악한 이들을 뜻한다.

  영화는 1930년대, 시골 마을을 찾은 월극(越剧) 극단의 공연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앳된 외모의 젊은 여자가 관객들 사이로 필사적으로 달아난다. 여자를 뒤쫓는 이들은 밧줄을 들고 있다. 여자는 극단의 소품 상자에 몸을 숨긴다. '춘화'라는 이름의 이 여자는 매매혼으로 팔려온 시집에서 도망을 쳤다. 단장은 반대하지만, 딱한 처지의 그를 연기 사부 싱이 받아들인다. 춘화는 싱의 지도하에 그의 딸인 여홍과 함께 무대에 서게 된다. 가난한 떠돌이 극단이지만, 춘화와 여홍은 의자매로 서로 힘이 되어주며 배우의 길을 걷는다. 사부가 세상을 뜬 후, 교활한 단장 아신은 두 자매를 상하이의 인기 극단에 팔아넘긴다. 대도시 상하이에서 춘화와 여홍은 인기 배우가 되지만, 단장 탕은 막대한 수익을 가로챌 뿐만 아니라 여홍에게 접근한다. 여홍은 안락한 생활을 꿈꾸며 점점 변해가고, 춘화는 그런 여홍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결국 무대 위의 두 자매는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데...

  '무대 위의 두 자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여성들 사이의 연대이다. 봉건제의 굴레 속에서 겨우 빠져나온 춘화는 여홍의 부친인 싱 사부의 도움으로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같이 무대에 서게 된 두 여성은 곧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된다. 의자매는 당시 사회적인 약자로 천대받는 여배우들의 현실과 마주한다. 돈만 밝히는 극단 단장 아신은 여홍에게 지방 세도가에게 성 접대를 하라고 겁박한다. 거부하는 여홍에게 아신은 '배우라면 그런 걸 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는 무대 바깥의 세상이 이 여배우들에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적 착취의 위협과 더불어 출연료의 강탈도 춘화와 여홍을 힘들게 만든다. 아신을 비롯해 상해 극단의 탕 단장은 의자매를 노예처럼 예속시키기 위해 온갖 술수를 쓴다. 그런 가운데 굳건했던 춘화의 여홍의 사이는 흔들리고, 두 사람은 갈라서게 된다.

  돈의 힘에 굴복해 탕의 아내가 된 여홍. 춘화에게 있어 여홍의 자리는 곧 좌파 여기자 장보로 메꿔진다. 장보는 춘화를 사회주의 사상에 눈뜨게 한다. 이미 극단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조리와 부패를 목도한 춘화는 사상적 교사라고 할 수 있는 장보와 새로운 유대를 쌓는다. 그것은 춘화를 그저 뛰어난 월극 배우에서 혁명에 기여하는 예술가로 거듭나게 만든다. 이 여성들의 연대적 공동체는 급기야 춘화가 탕의 극단에서 벗어나 독립 극단을 만드는 것으로 확장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베이징을 기반으로 하는 경극(京剧)과는 달리 절강성에서 유래한 중국 남부 지방의 월극은 주요한 배역을 여성들이 맡는 여성 중심의 극이다. 춘화는 여배우를 착취하는 기존의 극단과 그 세계의 수구적 인물들을 단호히 거부한다. 영화 속에서 아신과 탕은 청산해야할 봉건적 잔재,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처럼 묘사된다.

  영화의 이러한 설정들은 소련 예술 작품의 창작 원칙인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과 일맥상통한다. 장보는 춘화에게 탕과 같은 인물들의 배후에는 결국 미국이라는 악이 존재한다며 일러준다. 시에진 감독은 중국 공산당의 이념을 충실히 구현하면서도 여기에 헐리우드 멜로 드라마의 내러티브를 융합시킨다. 부도덕한 탕과 결혼한 여홍은 탕의 학대를 받으며 피폐해져 간다. 탕에게서 버림받은 극단의 여배우는 모멸감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강인한 사회주의 예술 전사로 변모하는 춘화, 그와 대비되는 비극적 이야기의 축에 그런 여성들이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멜로 드라마의 결합, 거기에 '월극'으로 대표되는 중국 전통극의 공연 형식까지 더해진 이 독특한 영화는 시에진 감독이 이뤄낸 성취이다.

  훗날, 이 영화의 멜로 드라마적 요소는 극렬한 논쟁과 공격의 대상이 된다. 부르주아적 감성을 옹호했다며 문화 혁명 시기에 영화는 매도당했고, 시에진 감독은 반동으로 몰렸다(문혁 시기 시에진 감독의 개인적 경험과 성찰은 그의 대표작 부용진(芙蓉镇, 1986)에서 잘 드러난다). 심지어 영화 속에서 자살하는 것으로 나오는 원로 여배우 또한 문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 비극적 선택을 했다.

  분명히 '무대 위의 두 자매'는 사회주의 노선을 지지하며, 그것은 주인공 춘화의 예술적 변모로도 입증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춘화는 당 소속 선전 극단의 일원으로 지방 순회 공연을 다닌다. 여홍이 은거하고 있는 시골 마을을 찾은 춘화가 공연하는 극은 '백모녀(白毛女)'이다. 민간설화에서 유래한 이 이야기는 공산주의의 이념을 설파하는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신가극 백모녀의 줄거리는 이렇다. 봉건제 치하에서 고통받다 자살한 여자의 원혼이 백발의 귀신이 되고, 결국 혁명군의 도움으로 악질 지주에게 복수를 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문혁 시기에 이 영화가 겪은 소란은 어떤 면에서 '무대 위의 두 자매'가 지닌 느슨하고 유연한 예술적 양식에서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시에진 감독은 맹목적으로 혁명의 이상을 영화 속에 재현해내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현실을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매매혼에서 탈출한 
춘화가 보여주는 봉건제의 악습,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배우가 마주하는 부조리한 현실, 억압적 가부장제에서 고통받는 여홍, 그러한 영화적 설정은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중국 전통극에 대한 애정을 가진 감독이 녹여낸 영화 속 공연 장면들은 '무대 위의 두 자매'를 반짝거리게 만든다. 관객은 1930년대에서 1950년에 이르는 중국 역사의 격동기를 월극 여배우의 인생 이야기 속에서 발견한다.      


*사진 출처: sinethetamagazine.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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