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쑨위(孫瑜, 1900-1990) 감독의 중국 무성 영화 두 편: 대로(大路, The Big Road, 1935), 체육 황후(体育皇后, Sports Queen, 1934)

 

대로(大路, The Big Road, 1935), 104분
체육 황후(体育皇后, Sports Queen, 1934), 89분




1. 애국 영화 속 전복된 젠더 이미지, 대로(大路, The Big Road, 1935)

  그의 부친 김필순은 의사로 독립운동가였다. 조선에서의 독립운동이 힘들게 되자 김필순은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북동부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져감에 따라 김필순에 대한 일제의 압박도 커져갔다. 결국 김필순은 일제에 의해 독살당한다. 가장을 잃은 가족의 삶은 무척 어려웠다. 힘들게 정규 교육 과정을 마친 그는 영화계로 흘러들게 된다. 준수한 외모의 그에게 운이 따른다. 그가 출연한 무성 영화가 연이어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조선인 김염(金焰)은 그렇게 1930년대 중국 무성 영화계의 스타가 되었다. 쑨위(孫瑜) 감독의 1935년작 영화 '대로(The Big Road)'는 김염의 대표작이다.

  영화는 기근을 피해 길을 떠나는 한 가족을 비춰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린 아이를 두고 어머니가 죽고, 10년 후에는 아이의 아버지도 길에서 죽는다. 세월이 흘러 1930년대, 부모를 잃은 아이 진(김염 분)은 이제 20대 청년이 되었다. 진은 도로 건설 현장에서 만난 동료들과 형제처럼 지낸다. 건설 현장 인근의 식당에는 유쾌하고 발랄한 두 아가씨 딩샹과 자스민(리 리리 분)이 있다. 진과 동료들은 두 아가씨들과 친분을 쌓으며 즐겁게 보낸다. 하지만 좋은 시간도 잠시, 일본군의 침략이 임박함에 따라 도로 건설 현장에서 긴장이 고조된다. 그들이 짓는 도로는 중국군의 진군을 위한 것이다. 일본군과 내통한 지역의 유지 후는 도로 건설을 중단시키려고 한다. 진과 동료들이 그 뜻에 따르지 않자 후는 그들을 자신의 지하 감옥에 가둔다.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과 일본군을 동시에 상대해야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었다. 장제스는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는 일본군 보다도 공산당의 존재를 더 위협적으로 인식했다. 영화 '대로'에서 일본군의 존재는 '적군'이라는 다소 모호한 단어로 제시된다. 그 검열의 배경에는 항일 의식을 고취하려다가 일본을 도발시키게 되면 전선이 확대될 수 있다는 국민당 정부의 우려가 깔려 있다. 일본군을 일본군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 기이한 영화가 당시 관객들의 애국심에 호소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일본군과 내통한 부자 후는 악인으로 묘사되며, 그에 의해 핍박을 받는 진과 동료들은 진정한 애국자이다. 그것은 일본군의 공습에 의해 진과 동료들이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장면으로 명료해진다.

  국민당 정부의 시책에 따르는 프로파간다(propaganda)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대로'에는 감독 쑨위의 전복적 젠더 관점이 드러난다. 서로의 몸을 친밀하게 쓰다듬는 딩샹과 자스민의 관계는 느슨한 동성애적 연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여성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남성들이다. 내성적인 딩샹이 전통적인 여성상에 가깝다면, 자스민은 좀 더 주체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식당을 찾은 노동자 손님들 앞에서 자스민은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전쟁과 재난으로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묘사한다. 남자들은 자스민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외모에 매혹된다. 그럼에도 자스민의 노래는 남성들의 욕망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외부의 적에 대한 저항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다. 자스민의 강인한 면모는 후의 감옥에 갇힌 진과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격동의 시대 상황 속에서 여성들은 로맨스에 매달리는 수동적인 캐릭터로만 존재할 수 없었다. 도로 건설로 중국군의 항일 투쟁에 기여하는 진과 동료들처럼 여성들 또한 그 전선에 다른 방식으로 기여할 필요가 있었다. 쑨위 감독의 여성에 대한 흥미로운 젠더 설정은 '대로(1935)' 이전 해에 만든 영화 '체육 황후(体育皇后, Sports Queen, 1934)'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자스민 역의 리 리리(黎莉莉)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서 여성의 육체는 '스포츠 정신'과 '국가'라는 무형의 개념과 긴밀히 결합된다.



2. 여성의 신체에 투사된 국가, 체육 황후(体育皇后, Sports Queen, 1934)

  "오늘날 중국이 약한 이유는 신체를 단련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시골에서 자란 린 잉(리 리리 분)은 아버지가 있는 상하이로 왔다. 화려한 도시의 외관에 왈가닥 시골 아가씨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하지만 이 도시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있다. 린 잉은 해골처럼 마른 사람들과 지나치게 뚱뚱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상하이에 존재하는 빈부 격차는 야윔과 비만에 대한 묘사로 드러난다. 그 두 가지 모두 올바르지 않은 병적인 상태이다. 조화로운 신체에 대한 린 잉의 열망은 중국의 부국강병과도 직결된다. 우선 자신의 신체부터 단련하기로 마음먹은 린 잉은 체육학교에 진학한다.

  쑨위 감독은 배우 리 리리를 위해 영화 '체육 황후'의 시나리오를 썼다. 이 영화는 말하자면 리 리리를 위한 맞춤 영화인 셈이다. 당시 무성 영화계의 독보적 스타였던 여배우는 이 영화에서 건강한 체육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한다. 리 리리가 연기한 린 잉은 혹독한 훈련을 통해 뛰어난 단거리 선수로 거듭난다. 그런 린 잉의 뒤에는 젊고 잘 생긴 코치 윤이 있다. 윤은 제자에 대한 호감에도 불구하고 매우 금욕주의적인 태도로 린 잉을 대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로맨스가 아니다. 국가라는 이상적 관념과 결합한 린 잉의 신체는 잘 단련되어야 하며, 동시에 거기에는 건전한 스포츠 정신도 깃들어야 한다. 윤은 린 잉이 화장품으로 얼굴을 꾸미는 것조차 반대한다.

  '체육 황후'는 실질적 내전 상태에 처한 국민당 정부가 필요로 하는 여성상을 잘 보여준다. 쑨위는 체육 학교의 아침 일과를 면밀하게 제시한다. 기상한 여학생들은 체조를 시작하며, 일사불란하게 세면장으로 향한다. 린 잉의 빛나는 치아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양치질 장면은 보건위생에 대한 공익 광고처럼 보일 정도이다. 정규 수업 시간에는 이론적인 것을 비롯해 실질적인 훈련이 이어진다. 린 잉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체육인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연이은 우승으로 자만해진 린 잉은 기존의 절제된 생활에서 벗어난다. 또래 운동 선수와의 연애, 음주가무의 유혹에서 린 잉을 구해내는 사람은 윤이다. 심기일전한 린 잉은 전국 체육 대회에 출전해서 우승을 노린다.

  로맨스의 경로에서 이탈한 영화는 주인공 여성의 성공 신화로도 직진하지 않는다. 린 잉의 급우는 승리에 대한 지나친 갈망으로 신체를 혹사하다가 경기 도중 사망한다. 그 죽음을 본 린 잉은 충격을 받는다. 1등이 되는 것이 자신의 목표가 아니라고 느낀 린 잉은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일부러 놓친다. 왜 린 잉이 1등의 왕관을 포기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이 영화가 설파하는 진정한 스포츠 정신은 승리와 타이틀에 대한 집착에 있지 않다.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 절제에 있다. 그리고 이는 전시중인 국가가 국민에게 바라는 덕목이기도 하다.

  쑨위는 '체육 황후'를 통해 이상화된 국가 이미지를 여성의 신체에 투사한다. 분명히 그것은 프로파간다의 영역에 속한다. 그럼에도 영화 속 여성의 몸이 관객의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신에 온전한 생의 활력을 전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아마도 린 잉의 진정한 성취는 체육 황후의 왕관이 아닌, 신체의 훈련을 통해 습득한 통제의 감각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녀는 패자가 아니며 주체적인 여성, 그리고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여정에 들어섰다고도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김염(金焰, 1910-1983)의 경력은 중국 공산당의 집권 이후에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배우이며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던 그의 두 번째 부인 진이(秦怡)와는 달리 김염은 공산당과 거리를 두었다. 그는 잘못된 위수술 후유증으로 중년 이후의 삶이 망가져 버렸다. 거기에다 그의 가족은 문혁의 광풍에 휩쓸리면서 큰 고통을 받았다.


리 리리(黎莉莉, 1915-2005)의 배우 경력은 매우 순조롭게 이어졌다. 리 리리는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공산 정권 수립 이후에는 후학들에게 연기를 지도했다. 리 리리의 아들은 중국 군부의 실력자 예젠잉(叶剑英, 마오쩌둥 사후 임시 국가 부주석의 지위에 오름)의 사위가 되었다. 하지만 문혁의 피바람을 이 여배우도 피해갈 수 없었다.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江青)은 자신이 배우였던 시절에 잘 나가던 리 리리에 대한 미움을 갖고 있었다. 홍위병에 의해 머리를 삭발당하는 굴욕을 겪으면서 문혁 시기를 견딘 리 리리는 나중에 복권되었다.



쑨위(孫瑜, 1900-1990)는 미국에서 영화 제작 교육을 받은 엘리트 영화인이었다. 그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시절에 정권 친화적인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마오쩌둥에 의해 비판받은 '우순의 삶(The Life of Wu Xun,1950)'은 쑨위의 경력에 치명타가 되었다. 가난한 이들을 무상으로 가르친 교육개혁자 우순은 마오쩌둥의 말 한마디에 반동분자로 몰렸다. 그런 인물의 전기 영화를 만든 쑨위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영화계에서 잊혀진 인물로 살았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자작시: 다래끼

  다래끼 무지근한 통증은 너와 함께 온다 나는 네가 절대로 그립지 않다 너 없이도 잘살고 있다 하지만 너의 부드러운 눈길을 기억한다 아주 약한 안약에서부터 센 안약까지 차례대로 넣어본다 나는 너를 막아야 한다 나은 것 같다가 다시 아프고 가렵다 나는 조금씩 끈기를 잃어가고 있다 너는 물기를 머금은 염화칼슘처럼 끈덕지게 내 눈가를 파고들며 묻는다 이길 수 있니? 곪아서 터지게 내버려둘 자신이 없으므로 열심히 눈을 닦아주며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대로 그렇게 잠들어 줄 수 있다면 그래,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자작시: 하이엔드(high-end)

  하이엔드(high-end) 싸구려는 항상 냄새가 나 짜고 눅진한 부패의 냄새 썩은 감자의 냄새는 오천 원짜리 티셔츠의 촉감과 비슷해 등고선(等高線) 읽는 법을 알아? 만약 모른다면 안내자를 찾는 것이 좋아 안내자의 등에 업혀 이곳에 올 수도 있지 더러운 수작, 아니 괜찮은 편법 차별하고, 배제하고, 경멸을 내쉬어 우리가 서 있는 곳 우리가 가진 것 우리들만의 공론장(公論場) 즐겁고 지루한 유희 불현듯 당신들의 밤은 오고 부러진 선인장의 살점을 씹으며 낙타가 소금 바늘귀를 천천히 바수어내는 하이엔드